토론
‘흉가체험 명소’ 앞 5성급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지난 3일 일요일 오후 3시, 경기도 동두천시 지행역으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가지 않는 지하철을 다섯 대 보냈다. 기다림은 35분간 이어졌다. 드디어 소요산행 열차가 도착했다. 한 손에 두꺼운 패딩 외투를 들고 올라탔다. 해 떨어진 산자락에는 한기가 휘감는다고 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 출발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지행역에 하차하자 전화가 걸려왔다. 안김정애(65)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대표였다. “김 기자님, 역에 내리셨어요? 저 녹색 옷 입고 있는데, 보이십니까?” 내리쬐는 햇빛이 녹색 옷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보다 강렬한 디자인의 선글라스가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그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손에는 전단지 수십 장을 들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발을 쉽게 떼지 못하는 땅. 이곳에 ‘옛 성병관리소’가 있다. 이는 1973년 박정희 정부 때 설립된 ‘낙검자(검사 탈락자) 수용소’다.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다가 성병에 감염된 여성들을 격리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무너뜨리고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동두천시장과, 국가폭력의 역사를 사과도 없이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시민단체. 시민들은 소요산 주차장에 천막과 텐트를 치고 농성장을 차렸다.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만들고 밤낮으로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안김정애 대표는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돌렸다. 성병관리소의 철거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동의하면 서명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 중학생은 전단지를 몇 장 더 달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것이다. 안김 대표는 품에 있던 전단지를 선뜻 더 챙겨줬다. 시민들이 항상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시간쯤 전단지 배포를 했지만, 대부분 전단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전단지를 받아가는 경우에도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안김정애 대표는 거절당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손사래 치는 시민에게 ‘한번 읽어보시면 좋은데’라고 덧붙이거나, 전단지 받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능숙함 덕분인지 이내 그의 손에는 전단지가 몇 장 안 남았다. 안김정애 대표는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2014년 10월 ‘미군 위안부’ 피해자 122명과 함께 국가손해배상소송에 나섰다. 정부가 ‘외화벌이’ 수단으로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를 조장했다며, 국가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것이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하면서 집창촌 등에서의 성매매는 불법이 됐지만, 기지촌 반경 2㎞ 이내는 예외였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1969년 주한미군을 축소하겠다고 선언하자, 한국 정부는 ‘정화’ 사업에 돌입했다.  그 대상은 기지촌 여성들이었다. 정부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명단을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하고, 정기적인 성병검진과 관리를 시행했다. 만약 검진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단속 기간에 최근 일자의 성병검진 확인 도장이 없거나, 성병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았을 때, 미군이 성병에 걸려 그 대상으로 지목한 경우 모두 ‘성병 관리소’로 끌려갔다. 관리소에 수용된 이들은 모두 ‘페니실린 606호’ 주사를 맞았다. 당시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리던 항생제다. 문제는 쇼크와 마비, 유산 등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미군 ‘위안부’가 된 이들은 10대에 유입되어 수십 년간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0대에는 외국인 구경도 못했던 시절, 티비도 없고 문화도 없던 시절에 (…) 웬 아저씨들이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시절에는 판잣집이었는데 쪽방 같은 미닫이문에 허름한 침대, 허름한 테이블 탁자와 재떨이가 있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2015.10.15. <미군 위안부의 숨겨진 진실> 토론집 일부) 대법원은 2022년 9월 미군 위안부에 관해 “정부 주도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김정애 대표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대통령실, 법무부 등 정부 기관에 공문을 보냈다.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고. 그러나 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농성장은 지행역에서 차로 약 1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안김 대표는 농성장으로 이동하기 전, 동두천에 거주하는 지인을 만나 서명을 받았다. 공익감사청구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기자를 공대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에도 서명을 먼저 받았다. ‘선 서명, 후 통성명’ 방식이었다. 인사는 서명을 받은 후에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은 농성장에 도착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농성장에 도착한 건 오후 6시가 조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그는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보고 와야 한다고. 그는 농성장 옆 가게 쪽으로 향했다. ‘실버밴드’가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드렸다. 그 옆으로는 트로트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등산객들이 보였다. 다행히 우리가 향한 곳은 그 가게가 아니었다. 그 가게를 훌쩍 지나서 발견한 작은 ‘개구멍’ 앞이었다. 그는 무릎까지 오는 수풀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나마 지난 여름에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조금씩 트로트 반주가 들리지 않을 때쯤이었다. 눈앞이 탁 트이더니 양 옆으로 하얀 건물이 드러났다. 페인트 칠이 다 벗겨진 낡은 감시 초소와 성병관리소였다.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스산한 건물이었다. 깨진 유리창과 창살 사이로 미군 ‘위안부’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미군들은 이곳을 ‘몽키하우스’라고 불렀다. 쇠창살에 매달려 구조를 요청하는 여성들이 꼭 동물원 원숭이 같다는 이유다. 성병관리소 건물 외곽에 둘러진 철조망이 더욱 분위기를 음산하게 했다. 1996년 폐쇄된 이후 사학재단 소유로 30년 가까이 방치된 건물은 ‘흉가 체험 명소’가 됐다. 시민단체와 동두천시가 갈등을 빚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 동두천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입하면서부터다. 시는 소요산 관광지 사업을 확대하겠다며 건물을 철거하고 호텔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주말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게 또 생겨 있네.” 접근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2020년 오랜 시간 방치된 성병관리소 내부를 청소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일탈 장소이자 흉가 체험 명소가 된 성병관리소를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고 당시 시의회와 시장에게도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시장이 바뀌고 시가 부지를 매입하더니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옆에 위치한 주차장에는 그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깨진 보도블럭과 잘려나간 나무들이 있었다. 새벽 5시 30분이었다. 포클레인은 그날 언덕을 넘어 그 아래에 있는 성병관리소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천막농성을 하던 사람들이 포클레인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기계가 멈춰섰다. 이후로 농성장은 더 바삐 돌아갔다. 텐트를 세 군데 설치하고 각각 지킴이들이 지킨다. 기자는 지난 3일 소요산 대형버스주차장 거점을 지켰다. 안김 대표는 이날로 ‘여섯 번째’ 지킴이를 한다. 서울에서 2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 이곳으로 온다. 매주 한 번은 지킴이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농성장을 ‘집’ 삼아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거점 맞은편에는 ‘옛 성병관리소 철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걸어놓은 현수막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병관리소’가 오히려 동두천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건물이 철거되고 관광지역으로 거듭나면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오후 7시부터는 문화제가 진행됐다. 이날은 재즈트리오와 민요 공연이 준비돼 있었다. 이들은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갈등) 소식을 듣고 대화를 통해 같이 발전해나갈 방향을 모색했으면 좋겠는데, (대화가) 차단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이 연주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사는 모두 자발적으로 진행됐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공대위의 자부심이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잠깐 발길을 멈추고 공연을 보다가 떠나갔다. 해가 지면 어둠이 깔리지만 대신 응원하는 시민들이 곁을 지키러 온다. 월요일을 앞둔 이날도 일곱 명의 시민이 천막을 지키다가 떠났다. 초등학생부터 학교 교감선생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대신 이들이 찾아온 계기는 딱 하나다. 뉴스를 보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국민청원 동의가 5만 명 넘은 적 있어요. 그것도 다 저희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해주셨더라고요.” 국회 국민동의 청원 안건은 청원서 공개 이후 30일 이내 5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심의를 받는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반대’ 국민청원은 지난 9월부터 한 달간 5만 2585명이 동의하면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회부됐다. “폭력의 역사를 왜 지워요. 아직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과 후유증을 안고 사는 피해자분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안김정애 대표는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기보다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을 지우는 순간, 또 다시 반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공대위 회원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성병관리소를 시도지정(등록)유산으로 보존하고, 역사문화평화공원으로 활용해 후대가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전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하루가 일찍 마무리됐다. 임성용 시인은 ‘5성급’ 텐트로 기자를 안내했다. 농성장에서 보낸 69일의 노하우가 담긴 가장 안락한 공간이었다.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도 불안이 밀려왔다. 밤새 포클레인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머릿속으로 대안을 세우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뛰쳐 나간다. 그러면 나는 취재를 해야 될까, 아니면 공대위와 함께 그 앞을 막아서야 할까. 그리고 또 하나. 취객이 와서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다고도 했다. 길거리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하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 변수를 생각하고 대안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에 들지 못한 건 머릿속이 시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텐트가 있는 곳은 주차장. 얇은 텐트 너머로 자동차가 주차장 옆 도로를 달리거나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면 눈앞이 번쩍인다는 거다. 잠에 들까 싶으면, 오가는 차 때문에 한밤에도 눈앞이 대낮처럼 밝아질 때가 있었다. 하필이면 이날 비가 쏟아졌다. 자정 무렵부터 약 두 시간 가량 쏟아진 빗소리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농성장 지킴이들은 다행히 지난 추석에 폭우를 겪으면서 한 차례 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공대위 회원들은 텐트 아래 두꺼운 돗자리를 깔아 등이 젖는 것을 대비했다. 그 덕분에 비교적 푹신한 바닥에서 빗물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텐트 위에 쳐진 비닐이었다. 비를 확실히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소음을 만들어냈다. 안에서 듣기에는 폭우가 내리는 줄 알고 나와보니, 겨우 가랑비가 토닥거리고 있었다. 황당하기는 했어도 육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금방이라도 비닐을 찢을 것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텐트 밖 사람의 말소리가 들릴 때나 차들이 쌩쌩 내달릴 때면 곧잘 잠에서 깨면서도, 자꾸 눈이 감겼다. 날이 밝아오자 푸석한 얼굴을 한 공대위 회원들이 천막 아래 모여들었다. 가져온 패딩 외투를 이때 꺼내 입었다. 산길 위에 텐트를 친 임성용 시인과, 반대편 주차장을 지킨 김대용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공동대표도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각각의 거점에서 밤을 보낸다. 그 길이 뚫리면 바로 건물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용 대표는 동두천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퇴근하면 농성장을 지킨다. 거의 매일같이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먼저 일터로 향했다. 농성장에는 아침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교사다. 학교로 출근하기 전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 소요산을 찾는다. 오늘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텀블러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온다. 그는 바로 전날 문화제에서도 얼굴을 보고, 가장 늦게까지 농성장을 지키다가 떠났다. 그에게 농성장은 도와주고 싶은 곳, 챙겨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저희 농성이 꽤 오래 갈 수도 있어요. 그래도 겨울에 눈 내리면 썰매 끌고 나와야죠. 주차장이 약간 언덕이라서 썰매 타기 좋거든요.” 지난 4일로 농성은 69일째 이어졌다. 농성장을 떠나면서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도, 비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이들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길 위에 사람이 산다. “장소가 없어지면 기억이 없어집니다. 기억이 없어지면 치유의 길은 없어집니다. (…) 독일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냥 없애버리고 거기다 호텔 지었으면 독일 국민들이 더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여론이 보존하자, 다른 방식(문화공원조성 등)으로 보존하자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올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될 것이다, 라고 바라는 마음들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2024. 10. 10. 기억 위로 미사 최재영 신부 메시지) ※ 공대위는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흥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옛 성병관리소 부지를 시가 매입하는 과정에서 부정은 없었는지 조사해 달라는 취지다. 공익감사 청구는 성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방법은 다소 번거롭다. 감사원은 여전히 ‘오프라인 자필 서명’을 요구한다. 공익감사청구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래 링크에 첨부된 파일을 출력한 후 성명, 휴대전화번호, 생년월일, 직업, 주소 등 빈칸을 채워 셜록 주소로 보내면 된다. ▶️ 공익 감사 청구 참여하기 ‘진실탐사그룹 셜록’ 주소: (04513) 서울 중구 서소문로 116 유원빌딩 1316호 진실탐사그룹 셜록 앞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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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국가폭력의 경험을 안고 자란 아이
어른들은 몰라요 서울의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감사하게도 매일 1시간씩 활동 소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혹은 교육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들과 실무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나눴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약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나누었다. 어느 날 과장님의 질문. 서희 너의 민감성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공책에 나열했다.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폭력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술을 마시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다. 엄마 나 밭을 걷는 것처럼 느껴져. 지뢰가 마구 퍼져있는, 근데 지뢰의 위치는 몰라. 어디서 어떤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밭을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차량이 갑자기 날 박지는 않을까. 뒤에 오는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좇아오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건넨 주스나 사탕에 약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까. 일상의 불안함은 때론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사회에서, 참사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참사의 맥락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사람들의 목숨이나 인권은 상관하지 않는 것. 내가 국가의 쓰임이 있지 않다면 혹은 그만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관리한다. 이 불안함은 과연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나의 조부모 세대, 전후 가난 나의 할아버지, 홍*희, 48년생. 나의 할머니, 전*숙, 49년생.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3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종종 전쟁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군모를 쓰고 있더랬다. 머리가 너무 작아 군모가 자꾸 벗겨져 나가는데 그 순간 총알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군모 덕에 살았고 그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3살이면 내가 자주 보는 아기 유튜버의 나이. 완벽한 문장 구사가 어려워 여러 단어를 나열하며 말하는 그 나이. 3살, 만 2살,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였던 할머니가 결혼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가난과 함께 살아갔다. 할머니가 시집간 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옆집에서 수저를 빌려왔다. 그렇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돈이 되는 모든 일들을 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나보다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게 그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동네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나의 부모 세대, 가난 + 독재 정권 + IMF 나의 아빠, 홍*용, 69년생. 나의 엄마, 김*환, 71년생. 민주항쟁 당시 나의 아빠는 19살, IMF 당시 29살이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그 날, 11살이었던 나의 아빠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빠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당시엔 업적들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고, 다른 것들을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 시대엔 전부 다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2살 차이 나던 아빠의 이모 -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 는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옷에는 수류탄 냄새가 항상 배어있었지만, 당신의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 혹은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독재 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사회를 꿈꾸었다. 대학에도 경찰이 있던 그 시대에. 한편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빠 세대까지 이어졌다. 3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의 아빠는, 고등학교 중퇴 후 이른 나이에 친척 집에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나의 아빠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고 나의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 해 IMF가 터졌다.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의 넘쳤던 나의 외가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아빠는 부도가 난 회사에서 가정집에서 쓰기도 힘든 대형 프린터기를 집에 가져왔다. 그 뒤로 나의 아빠는 쭉 자영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민주화, IMF, 이 시대의 세대적 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더 나은 한국 사회를 꿈꾸며. 나라를 살리자는 목표로 금을 모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갔다. 나의 세대, 없음 나, 홍서희, 99년생. MZ세대이자 Z세대의 첫 발을 딛는다. 우리 세대의 세대적 과제는 딱히 없다. 온 세대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목적을 내세울 만한 요인도 동력도 없다. ‘행복하기’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세대적” 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행복은 다를 테고 행복하기 위한 방식도 다를 테니. 이전 세대보다 풍요로웠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친숙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이 아침에 일 하러 가면, 아기(나와 동생)은 혼자 남아 TV를 열심히 봤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책보다 TV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잡지식이 상당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살기 진짜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살기 좋아졌다고 불리는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세대적 과제가 없다면, 나의 세대는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줬던 큰 사건들을 돌아봤다. 내가 경험한 참사 내 나이 16살,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니는 학교에서 내가 나고 자란 ‘정선’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종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정선에 현장체험학습 갈만한 곳을 물어보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니!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예정된 일정의 한 달 전,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떴을 때만 해도, 갈 수 있겠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불과 몇 시간 후 유가족들에 의해 사실이 전달됐다. 나와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언니 오빠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안국역 근처에 살던 나는 예비 고3이었지만 하야 시위에도 매주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 나이 18살, 강남역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살면서 수많은 여성 피해자 사건들을 봐 왔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우리 집에서는 밤에 골목길로 절대 다닐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도 금지됐다.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는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범죄자들에게 쉽게 표적이 된다는 뉴스 보도로 인해, 나는 밤에도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굳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나와 몇몇 여성을 보며 자위행위를 했고, 불행히도 나는 그것을 마주했다. 두 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극히 꺼렸으며 남자 아르바이트생 혼자 근무하는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묻지마 살인’으로 바라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내 나이 24살,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은 마치 폭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누구 하나 품에 껴안는 사람이 없었다. 당일 이태원 근처에서 놀았던 나는, 자괴감과 부채감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뭐가 좋다고 그 시간에 놀았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서서 사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혐오 표현을 들으면서 고통을 감내했을 거로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여전히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파악 중일 때, ‘국가애도기간’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참사가 아닌 사고로 바라보며 ‘보상’의 맥락으로 축소했다. 그들에게 참사의 고통은 그저 개인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며 보장해 줘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드는 돈을 계산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더 효율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 - 보상 - 을 찾고자 했다. 사과는 늦어졌고 진상규명은 진척이 없었다. 국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부채감도 자괴감도 불안감도 고통도 전부 개인의 몫이었다. 내 나이 25살,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남동생은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군 내에서의 사망 사건들이 종종 보도되고 있었고 불안함이 커진 건 그해 7월이었다.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수근 일병이 목숨을 잃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임 넘기기는 계속되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결과였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내 동생 또한 호우 피해 지역에 투입되었다. 나의 동생이 다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복무가 끝나길 바라기만 했다. 군에서의 사건들은 매번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매우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기후위기가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국내산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그에 대해 얘기를 하며,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가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고민이 크게 와닿지 않으신 듯했다. 어차피 네가 죽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진정 괜찮을까? 온열질환으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아파트 주차장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데 그런 곳에서 하루 9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에 화가 났다. 위헌 결정이 나자 그제야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났다. 언제 탄소중립이 이뤄질 수 있을지 답답했다. 백날 텀블러 들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가의 부재? 아니, 국가폭력 내가 겪은 참사들이, 국가가 국가의 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나? 국가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만 볼 수 있나? 사실 이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국민을 ‘방관한’ 폭력이다. 사람들의 목숨은 ‘비용’으로 환산하고, 구조하고 예방하는 것에서 ‘효율성’을 찾는 국가의 폭력행위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호라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폭력을 행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사고’라는 말로 숨겼다. 응당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을 앞선 말로써 축소했다. 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너의 죽음은 오롯이 너의 몫.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나의 세대는 전-국가적인 목표가 없다. 국가가 나서서 이끌만한 요인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보장 능력이 없는, 보호의 능력도 없는, 책임도 지지 않는, 회피하는, 역할과 소임을 축소하는, 심지어는 교묘한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나의 세대는 이 국가 앞에 불안함만이 남는다. 나의 환경에 대한 모든 신뢰가 붕괴되어 언제든 내게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불안함을 주는 저 강력한 권력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극복하거나 비판하거나 변화하고자 하는 행동이 내 삶에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파할 여유도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더욱더 ‘나’의 현실에만 몰두할 뿐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생존을 위해 제테크를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하고 다름을 강조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삶의 태도를 택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가는 달라질까? 국민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불안함이 커질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요즘 길거릴 걷는 것도 무서워. 우리는 함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럴 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내 감정이 틀리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과 함께 극복할 수 있음에 기쁨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나는 더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토로한다. 너무나도 자연히 행해지는 국가폭력을 직시하겠다고, 그리고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일상의 불안함을 느끼는 나의 세대들에게 연대의 손을 건네며 주저앉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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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시위, 대학생이 이뤄낸 총리 사임
방글라데시 '국가유공자 자녀 공무원 할당제' 반대 시위 타임라인 지난 7월 21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 500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인들이 모였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과, 가정을 책임지며 가장으로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총리 셰이크 하시나의 퇴진을 요구하며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인 시위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6월, 방글라데시 각 지역의 대학생들을 주도로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 반대 시위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곧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됩니다. 이번 시위로 인해 300여 명이 방글라데시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2024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방글라데시 내 통신이 차단되어 시위의 상황을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보과학연구소의 존 하이드만은 “인구가 1억 7,000만 명인 나라에서 인터넷을 차단하는 것은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조치”라 일컫습니다. 국가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특혜는 한국에도 있습니다. 국가유공자에 공직의 일부분을 할당하는 것은 ‘존중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싸운 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대학생들이 의문을 던졌던 부분은 ‘특혜의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의문으로 15년간의 하시나 총리의 집권 하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억압에 국민들이 분노가 드러났습니다. 그 속에 대외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경제 파탄을 몸소 겪던 청년들이 불꽃을 지폈습니다. 방글라데시 ‘국가가유공자 가족,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의 변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1971년 당시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두고 파키스탄군과 인도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결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2년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가 도입됩니다. 이 제도의 논란이 되는 지점은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국가유공자 가족에게 할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 여성에게는 10%, 저개발 지역에는 10%, 원주민 등의 소수 민족에는 5%, 장애인에는 1%가 할당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안정적인 공무원 일자리가 주목받듯이,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방글라데시에서도 공무원 일자리는 매우 치열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절반 이상, 정확히는 56%가 이미 할당된 채 진행되는 이 제도에, 많은 학생과 시민 단체는 공정성을 이유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합니다. 결국 2018년, 전국의 공립대학 학생들이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터졌고 이에 이 제도는 폐지됩니다. 하지만 다시 2024년 6월 5일, 방글라데시 다카 고등법원은 “합헌적이지 않고 불법적이며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할당제 폐지가 무효라 판결합니다. 다시 이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타난 것이죠. 결국 사법부의 결정으로 정부는 ‘국가가유공자 가족을 대상으로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할당한다’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할당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분노한 이유, 40%에 다다르는 실업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이 되던 시기도 한참 지나, 이제는 30대들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2023년 기준 5.7%입니다. 반면 방글라데시 청년 실업률은 17.5%에 달하며 현재 1,800만 명의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OECD 평균인 10.6%에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방글라데시 대학 졸업생들의 실업률은 17년 기준 47%에 달했으며, 최근 자료에 의하면 40%에 육박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기부터 줄곧 약 20년 동안 청년층 공무원 선호도는 1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방글라데시 공무원직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입니다. 민간 부문의 일자리 기회가 확대되고 있긴 하나, 상대적으로 보수도 높고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자리의 56%를 특정 계층에 할당한다는 것이, 불공정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매년 약 40만 명의 졸업생이 공직 3천 개를 놓고 경쟁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많은 대학생은,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요. 친정부 단체 회원들의 자녀를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해외로 취업하는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23년 해외송금 유입은 219.1억 불로 전년 대비 2.96% 증가했다고 합니다. 또 해외 송출 인력은 21년 61.7만 명, 22년 113.5만 명, 23년 130.7만명 으로 해마다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4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구는 약 13,500명이라고 합니다.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불거진 정부 불신 코로나 이전,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 였습니다. 2009년 하시나 총리의 재임 이후 방글라데시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6%대를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로 꼽혔던 방글라데시는, 2019년을 기점으로 파키스탄과 인도를 앞질러 2022년 2,688달러를 기록하게 됩니다. 2009년 기준 1인당 GDP는 698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다다른 수치입니다. 의류 산업 등 노동집약적 산업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추진한 하시나 총리는 방글라데시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018년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6위에 오르기도 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방글라데시 경제는 코로나19와 세계 경제 침체로 2022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주방글라데시대사관에 따르면 2023년 방글라데시 인플레이션은 10%에 육박하였으며, 소비자 물가가 실질 소득보다 높아 저소득층의 구매력이 대폭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높은 인플레이션) (IMF)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짧은 경제 호황 이후 흔들린 경제에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경제 성장을 이끈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 억압의 상징으로. 셰이크 하시나는 한때 방글라데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방글라데시의 ‘건국 아버지’라고 불리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입니다. 그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건국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1971년 독립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쿠데타가 여러 차례 발생했고, 1990년대까지 후세인 무함마드 에샤드 장군이 군부 독재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셰이크 하시나는 현 집권당인 아와미연맹을 이끌며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벌였고, 이때 민주화 상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96년 첫 선거에서 승리하며 40대 여성 총리에 올랐고 이후 약 21년간을 집권하며,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선출직 여성 지도자가 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보다도 오래 권력을 잡은 셈입니다. 방글라데시 민주화의 상징이자 최고의 여성으로 추대받던 셰이크 하시나, 그를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습니다. 인권 단체들은 하시나 총리가 2009년 재집권한 이후 최소 600건의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수백 명이 의문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8년 치러진 방글라데시 총선에 15명 이상 사망한 사건도 있었는데요. 야권과 인권 단체들은 총선 유세기간동안 정부가 1만 5천 명의 활동가들을 구금하는 등의 행위로 하시나 총리의 부당 행위에 관해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야권 후보 17명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1월 7일에 진행되었던 방글라데시 총선에서는 아와미연맹이 전체 의석의 78%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거는 주요 야당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과 일부 군소 정당들이 보이콧하며 총선에 불참했는데요. 주된 이유는 ‘부정선거’였습니다. BNP의 몇몇 주요 지도자와 지지자들 약 25,000명이 체포된 상태였으며 전년도 야당 집회에서의 유혈사태도 그 이유가 되었죠. 결국 투표율은 직전 총선의 절반인 40% 수준을 보였습니다. 이런 비판 속에서 하시나 총리는 말합니다. “15년 이상 나는 이 나라를 건설해왔다. (중략) 내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 어쩌면 국민들은 하시나의 진정이 깃든 사과와 그에 대한 올바른 대책을 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를 외면한 건 하시나 전 총리였습니다. 우리, 세계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 얼마 전, 저는 서울에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외국인노동자 대상 자기 계발 프로그램의 보조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의 대상자 대부분이 방글라데시 청년들이었는데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해외로 나와 각기 다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제게 물음을 던집니다. “선생님, 대학교 졸업하면 대기업 들어갈 거예요?” 사회통합시스템에서 한국 자본주의 하의 산업구조를 배웠나 봅니다. “하하, 요즘은 대학생들이 취업하기가가 어려워서요. 잘 모르겠네요.” 이에 갑자기 여러 청년이 모입니다. 하나같이 방글라데시 청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알람 씨가 열을 내어 말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진짜 취업 안 돼요. 대학생들, 청년들 너무 힘들어요.” 방글라데시, 한국에서도 멀리 떨어진 나라입니다. 쉽게 가볼 수 없는 그 나라의 청년들을 한국에서 마주합니다. 문득 영화 <국제시장>이 떠오릅니다. 한국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방글라데시와 비슷하게 한국도 봉제산업이 가장 큰 시장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독일로 파견 나가 열심히 일했던 지금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계셨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청년 문제는 단순히 ‘그’ 나라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한국의 과거가 드리워집니다. 하시나 총리의 억압적인 정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지탄받아 왔습니다. 적지 않은 세계 인권 단체들이 비판을 해왔지요. 하지만 결국, 죽어서는 안 되는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에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지요. 이미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UN, 세계 인권 단체, 미국과 영국 등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무력행사를 비판하며 평화적 시위의 권리를 지켜달라고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위는 지속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했던 순간이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참사 이후, 우리는 국제적인 관심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를 줄일 수 있다는 선례를 보았습니다. 타자화하지 않는 나 자신, 그리고 사회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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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빈 세 번째 기일… ‘대한민국’의 자리는 여기 없다 [대한민국 ‘생존비’ 청구소송 5화]
추위에 떠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떨리는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은. “구조 요청! 혼자 있어, 혼자. 엄청 추워요. 주마(등강기)가 필요해, 주마. 주마 두 개 정도 필요해.” (2021. 7. 19. 김홍빈 대장 마지막 구조요청) 한 방송국은 김홍빈 대장의 등반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김홍빈 원정대의 도전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김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봉우리를 세계 최초로 모두 등정한 장애 산악인이다. 하지만 김 대장은 하산길에 찾아온 불행을 막지 못했다. 2021년 7월 19일, 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마지막인 브로드피크(8047m) 등반을 성공한 후 하산 중 실종됐다. 김 대장과 함께했던 원정대원들은 그를 쉽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원정대는 함께 식사할 때 사용하던 알루미늄 접시로 김 대장을 위한 추모판을 만들었다. 김 대장과 한솥밥을 나눠 먹던 그 접시다. 추모판에 “김홍빈 Broad Peak에 영원히 잠들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김 대장을 브로드피크에 남겨두고 떠나지만, 그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원정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K2 추모탑(k2 Memorial)에 추모판을 설치했다. 밥도 지어 올렸다. 한 대원은 절을 올리며, 절규에 가까운 통곡을 했다. 지난 13일 진행된 ‘고(故) 김홍빈 대장 3주기 추념식’에서 이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추념식에서 상영된 영상 ‘故 김홍빈 대장의 삶’에선, 김 대장의 마지막 등반 모습과 함께 떠났던 대원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영상 속 김홍빈 원정대의 울음소리가 추념식이 열린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3년 전인 2021년 7월 18일. 김 대장이 ‘최초’의 기록을 만든 그날. 기자 역시 TV에서 김홍빈 원정대의 소식을 접했다. 원정대는 브로드피크 등반을 통해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돼주고 싶다”고 약속했다. 김 대장이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했을 때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로 신문과 방송에서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분위기는 뒤집혔다. 뉴스는 그의 실종 사실로 도배됐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김 대장의 무사귀환을 기원했지만, 그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 대장은 결국 히말라야에서 잠들었다. 기자가 기억하는 김 대장 소식도 거기서 끝이었다. 김 대장의 실종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쯤에서 잊고 지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원정대에게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도 동상을 입어보고, 주변에는 (등산하다 동상으로) 손가락 잘린 후배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홍빈이 손은 보기가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 아직도 홍빈이 카톡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이 앞에 (카톡 프로필) 표지로 돼 있습니다. 그걸 지금도 한번씩 들여다봅니다.” (산악인 최○○, 2024. 7. 13. 김홍빈 3주기 추념식) 김홍빈 대장의 마지막 원정으로부터 2년 뒤인 지난해 7월. 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故 김홍빈 대장 구조비 소송.. 정부, 승소하고도 항소” 내용은 이랬다. 원고 대한민국이 실종된 김 대장을 수색하고 원정대를 구조하는 데 든 헬기비용을 내놓으라며 김홍빈 원정대를 상대로 구조비용 청구 소송을 걸었다. 대한민국이 청구한 구조비용만 약 6800만 원. 김홍빈 대장을 살리지도 못한 실패한 구조작전 비용을, 생사의 고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정대원들에게 고스란히 지운 상황. 1심 법원은 광주광역시산악연맹과 원정대원들에게 비용 일부(약 3600만 원)를 나눠서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원고 대한민국은 구조비용 전액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지난해 7월 항소했다. 기자의 머리를 스치는 의문은 한 가지였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고 보호하는 건 당연한 책임인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가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구조비 청구 소송을 다룬 많은 기사들 사이에, 한 가지 없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원정대원들의 목소리.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들어야만 했다. 김홍빈 원정대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켜본 목격자들이자, 원고 대한민국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당사자들이니까. 이들만이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 길로 원정대원들부터 찾아 나섰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된 사건을 취재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광주광역시산악연맹도, 유가족도 기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지쳐 보였다. 한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이 채 가시기 전에 시작된 구조비 소송. 정부 측을 비판하는 국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여유는 사라지고 경계만 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 대장의 이름 뒤에 ‘구조비용’이란 단어가 따라붙는 상황 자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라 짐작한다.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됐지만, 그래서 더욱 기사를 써야만 했다. 유가족과 산악연맹, 그리고 피고 당사자들까지 모두 말을 아끼고 몸을 사리게 만든 건 모두 ‘소송’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 소송을 제기한 대한민국 때문이니까. 또 다른 사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김홍빈 원정대의 소송을 선례로 남겨선 안 된다는 목표가 생겼다. 오랜 취재와 설득 끝에, 지난 6월 첫 보도를 시작했다.(관련기사 : ‘산악영웅’ 잃은 원정대에 윤석열 정부는 소송을 걸었다) 항소심 결심재판을 앞두곤, “원고 대한민국의 소송비용 청구를 기각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도 직접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셜록 보도 이후, 일명 ‘김홍빈 대장법’도 발의됐다. 지난달 10일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광주 광산구을)은 국민이 국위선양을 하다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 국가의 비용 부담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영사조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산을 보면 김홍빈 대장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이 됐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 김 대장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구상권과 관련된 소송이 조금 문제가 있는 상태입니다. (일명 ‘김홍빈 대장법’을) 민형배 의원님이 대표로 발의하시고 저는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려서, 제도적인 부분에서 재발을 방지하는 일을 국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정준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2024. 7. 13. 김홍빈 3주기 추념식) 지난 토요일(13일)에 광주에서 열린 김홍빈 대장 3주기 추념식도 다녀왔다. 이날 추념식에서, 김 대장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던 김홍빈 원정대 대원 세 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정인복(가명), 유현철(가명), 정민식(가명)이다. 2021년 사고 당시엔 코로나19 격리 방침에 따라 김 대장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던 그들이다. “(실종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김홍빈 대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까지도 말입니다.” (산악인 정인복 2024. 3. 19. 인터뷰) 원정대원들은 추념식 날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든 참석자들이 다 떠난 뒤에도 이들은 체육관에 머물렀다. 김홍빈 대장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례식에도 오지 못했다는 한이 남아서일까. 그들은 마치 스스로를 상주(喪主)로 여기는 듯했다. 김 대장의 얼굴이 실린 현수막도, 그의 업적이 기록된 책자도 이들이 직접 나서 손수 정리했다. 김 대장의 마지막 순간을 추모판에 기록했던 것처럼, 추념식의 마지막 뒷정리도 모두 이들 손에 의해 이뤄졌다. 김홍빈 대장에게 훈장을 주고, ‘스포츠 영웅’으로 헌액하고, 현충원에 위패를 봉안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을까. 어째서 지금은 김홍빈 대장을 잃은 원정대원들에게 구조비용을 물어내라는 대한민국만 남아 있는 걸까. 추념식 현장, 김홍빈 대장의 얼굴 앞에 걸린 태극기가 괜시리 원망스럽다. 김홍빈 대장도 잃고 구조비용 수천만 원도 짊어진 원정대원들.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동료를 잃은 슬픔조차 회복하지 못한 이들에게…. 오늘(19일)은 김홍빈 대장의 세 번째 기일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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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해결 없이 자국민에게 소송… 지혜롭지 못해” [대한민국 생존비 청구소송 4화]
“파키스탄 정부가 ‘구조헬기 띄운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한국 정부는 (김홍빈 원정대에) 구상권 청구를 하고… 매우 지혜롭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2024. 7. 1. 문현철 교수 인터뷰) 대한민국이 자국민에게 구조비용을 청구한 이 ‘지혜롭지 못한 소송’은 언제쯤 끝날까. 원고 대한민국이 ‘김홍빈 원정대’를 상대로 구조비용 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김홍빈 원정대는 현재 항소심 결과만 기다리고 있다. 고(故) 김홍빈 대장은 ‘열 손가락 없는 산악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봉우리를 세계 최초로 모두 등정한 장애 산악인이다. 2021년 7월 19일, 김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중 마지막인 브로드피크(8047m) 등반을 성공한 후 하산하던 중 실종됐다. 그리고 약 10개월 뒤. 원고 대한민국은 김홍빈 원정대에 소송을 걸었다. 실종된 김 대장을 수색하고 원정대를 구조하는 데 든 헬기 비용을 내놓으라는 것. 김홍빈 대장을 살리지도 못한 실패한 구조작전 비용은, 생사의 고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정대원들에게 고스란히 지워졌다.(관련기사 : ‘산악영웅’ 잃은 원정대에 윤석열 정부는 소송을 걸었다) 전문가는 이 소송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난 1일, 문현철 호남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재외국민보호 분야의 전문가다. 한국재난관리학회(KAD) 부회장인 문 교수는, 외교부 재외국민보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019년 12월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체계의 개선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해당 논문에선 아직 시행 전이던 영사조력법의 주요 쟁점들과 하위 행정입법(시행령, 시행규칙)의 구체화 필요성에 대해 짚었다. 먼저, 문 교수는 김홍빈 원정대에 제기된 구조비용 청구 소송에서 아쉬운 지점부터 짚었다. “한국 정부가 파키스탄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구조비용 문제를 잘 해결)해냈다면, 조금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을 겁니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 외교부가 무관심했든지 아니면 (김 대장에 대한) 구조 활동이 정부와 명확한 협의 없이 성급하게 진행됐든지, 크게 두 가지 가능성으로 보입니다. 하여튼 (구조비용 청구 소송이 제기된 현 상황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게 비법률적인 판단입니다.” 대한민국의 청구 금액은 약 6800만 원. 광주광역시산악연맹과 원정대원 3명, 촬영감독 2명 총 6명(광주광역시산악연맹 포함)은 2022년 5월 원고 대한민국이 보낸 소장을 받아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1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소관청은 외교부, 법률상 대표자는 당시 법무부 장관 한동훈이다. 1심 법원은 광주광역시산악연맹과 원정대원들에게 비용 일부(약 3600만 원)를 나눠서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원고 대한민국은 구조비용 전액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지난해 7월 항소했다. 원고 대한민국이 소송을 제기한 법적 근거는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조력법'(영사조력법). 법의 취지를 살려 ‘재외국민보호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김홍빈 원정대’는 “재외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영사조력법에 의해 오히려 소송을 당했다. 쟁점은 영사조력법 제19조. 이 조항에 따르면, 재외국민은 영사조력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의 보호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의문이 따라붙는다. 애초 영사조력법 제19조가 ‘국가가 국민 개인에게 비용을 청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 재외국민보호는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의무다. 아무리 법적 근거가 있다 해도, 김홍빈 원정대를 상대로 소송을 선택한 한국 정부의 판단을 ‘최선’이라 볼 수 있을까. 문 교수는 “인도주의적 외교력을 통해 해결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인도주의적 휴머니티(인간애)로 상호 협조하자’고 파키스탄 정부에 먼저 제안을 하는 거죠. 휴머니티는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 가치예요. 휴머니티에 공감대가 있는 파키스탄 정부가 (김홍빈 원정대 구조 활동을) 도와주면, 향후 한국에 와 있는 파키스탄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한국 정부가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훌륭한 모습은 외교력으로 해결해내는 것이죠. 휴머니티를 서로 공감하는 두 나라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 교수는 정부의 외교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모범 사례 하나를 꼽았다. 지난해 북아프리카 수단에서 일어난 군벌 간 무력충돌 사태에서 이뤄진 ‘한일 간 공조’ 사례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4월 수단 현지 교민들을 철수시키는 ‘프라미스 작전’ 때 수단에 체류 중이던 일부 일본인들의 탈출을 도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수단 거주 일본인 대피 과정에서 한국의 협력이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국의 외교적 도움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0월에는 이스라엘에 군용 대형 수송기를 보내 우리 국민 163명과 일본인 51명을 긴급 대피시켰다. 당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으로 현지에 체류 중인 교민들이 고립됐었다. 김홍빈 원정대 사례에선 왜 이런 외교력이 발휘되지 못했을까? 문 교수는 우선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외교부의 예산이나 인력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외교부 1년 예산은 중앙행정기관의 청 단위보다 적은 약 2조 30000만 원가량입니다. 산림청 예산보다 조금 많습니다. 이중 재외국민보호 사업 예산은 100억 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금액으로 전 세계 190개 재외공관을 운영하고, 3000만 명의 재외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교부가 휴머니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 만한 여력이 없는 겁니다.“ 문 교수는 위에서 언급한 논문에서도, 재외국민보호가 더 치밀해지기 위한 첫 번째 대안으로 “외교부의 예산 증액, 재외공관의 증설, 외교관 영사의 증원”을 꼽았다. “영사조력의 범위를 주재국의 행정청의 처분 등에 대한 영사조력 등에 대하여도 필요하며, 구체화 세분화 하는 과정에서 외교부의 실무적 고충과 국민적 공감대를 동시에 고려하는 등 더욱 구체화 하는 세부적인 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논문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체계의 개선에 관한 연구>, 문현철, 2019) 하지만 김홍빈 원정대를 상대로 제기된 구조비용 청구 소송은 이미 벌어진 일. 지금 상황에서 또 다른 해결책은 없을까? 문 교수는 “우리 정부도 (일반 국민을 상대로 제기한) 구상권 청구를 취하하는 조정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종수 숭실대학교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는 구조비용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정절차’를 강조했다. 정 교수는 “민사 분쟁은 판결보다도 조정을 잘 해주는 게 법원의 역할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원은 유럽에 비해 조정을 잘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 교수는 “김홍빈 원정대 구조비 청구 소송의 경우도 (원고와 피고) 서로 조정을 해서 해결하는 게 국격에도 좋을 듯하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항소 제12-1부(재판장 성지호)는 지난 9일 피고 김홍빈 원정대 측이 원고 대한민국에 구조비용의 60%를 지급하는 것으로 조정하는 화해권고결정을 했다. 원고 대한민국이 청구한 구조비용은 6800만 원. 60%는 약 4080만 원으로, 1심에서 인정된 금액(약 3600만 원)보다 약 480만 원 많다. 재판부는 이날 재판에서 원고 대한민국 측 법률대리인을 향해 이렇게 강조했다. “원고 대리인은 원고 대한민국을 잘 설득하세요.” 재판부는 지난달 11일 진행된 항소심 두 번째 변론기일 때도 화해권고를 제안했지만, 무산된 바 있다. 조정성립은 원고 대한민국과 피고 김홍빈 원정대의 합의에 따라 향후 결정될 예정이다. 김홍빈 원정대를 향한 정부의 소송은 계속해서 논란을 낳고 있다. 김홍빈 대장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주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를 모신 것도 대한민국 정부였다.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영웅'(2021년 대한체육회 선정)으로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구조비용을 받겠다고 국가가 소송까지 제기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일명 ‘김홍빈 대장법’도 발의됐다. 지난달 10일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광주 광산구을)은 국민이 국위선양을 하다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 국가의 비용부담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영사조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김 대장의 유해는 아직 히말라야에 묻혀 있다. 7월 19일. 일주일 뒤면 김홍빈 대장의 세 번째 기일이 돌아온다. 오는 13일엔 김홍빈 대장 3주기 추념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김홍빈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의 영정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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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참사들로 보는 국가와 정부의 역할과 재난에 대한 접근법 이야기 대한민국, ‘참사 공화국’ 작금의 대한민국은 사실 ‘참사 공화국’ 이라고 해야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참사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이고, 국가와 정부는 그럴 때마다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요즘 들어 크고작은 사고와 사건이 줄지어 일어나고, ‘참사’라고 불러야 하는 규모의 재난들 또한 적지않게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참사가 일어났다. 문민정부 시절 일어난 서해 페리호 참사, 박근혜 정부 당시 일어난 세월호 참사, 문재인 정부 시절 일어난 광주 참사, 그리고 작금의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10.29 이태원 참사와 바로 직전에 일어난 화성 참사까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참사’로 얼룩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인리히 법칙’ 이라는 법칙이 있다. ‘1:29:300의 법칙’ 이라고도 불리는데, 1개의 참사가 일어나기 이전에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 이전에 300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역으로 이야기하면 300개의 작은 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큰 참사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이 하인리히 법칙은 2014년 4월 16일,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크고 작은 해운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1993년 일어난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다시 수많은 해운사고들을 방조한, 그리고 규제를 완화한 결과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형 해운사고는 대개 20년을 주기로 일어난다는, ‘대형 해운사고 20년 주기의 법칙’까지 더해져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의 부재를 규탄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는 20년 조금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참사의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서해 페리호 참사의 반복이라는 언급들도 등장했다. 참사에 무심한 국가와 정부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또 수많은 참사들이 일어났다. 2021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철거중인 건물이 쓰러져 버스를 덮친 광주 참사, 2022년 159명이 목숨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 그리고 지난 6월 24일 화성의 배터리 제조 공장 아리셀에서 일어난 화재가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참사까지,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참사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갔다. 특히 2020년대 들어 참사라고 할 수 있는 사건만 3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번 화성 참사는 재난 발생 이틀 전인 22일에도 해당 공장에서 리튬 배터리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으나, 사측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입단속을 시켰다는 정황이 나왔다. 그 말은 한국 사회와 국가, 정부가 크고 작은 사고와 사건들에 대해 무심하고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각기 참사들은 한국 사회의 치부를 찔렀다. 먼저 세월호 참사가 정부 주도의 해운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사고 상황에서 국가의 부재를 폭로했다면, 광주 참사는 철거와 재개발에서 일어나는 불법과 부실공사 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치안의 부재, 공권력의 사유화 등을 알렸고,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는 재난이 예상됨에도 무시한 것, 사고 상황에서 매뉴얼의 부재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지에 대해 폭로했다. 이러한 참사가 전하는 메시지들을 모아보면,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의 부재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규제 완화 등으로 종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번 종합해보면 국가의 부재라고 할 수 있는 ‘부작위성(unterlassung)’, 그리고 재난의 책임을 국가나 정부가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out-sourcing)’ 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부작위성은 재난이 일어날 수 있거나, 재난이 일어난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을 방조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국가는 이미 사고 위험성이 있는 상황에서 불량 선박인 세월호의 출항을 허가했고,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재난의 컨트롤 타워인 박근혜 정부는 7시간 동안 부재했고,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말로 책임을 해경에게 전가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서 공권력은 그 날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태원 대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 대부분이 배치되어 있었고, 윤석열 정부와 경찰은 책임을 애써 피해갔다.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책임자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박근혜 정부와 이태원 참사 당시의 윤석열 정부가 보인 모습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로 말이다. 재난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는 두 참사 모두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뒷수습을 하는 모양새만 보였다. 박근혜 정부는 해경에게, 윤석열 정부는 재난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사실상 그 아젠다에서 도망을 쳤다. 사령탑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 공권력은 우왕좌왕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바빴고, 그 책임은 재난, 즉 참사로 이어졌다. 둘 다, 아니 사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참사들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재난들이었다. 국가와 정부가 했어야 할 일 - 진상 규명 규제를 강화하고, 불법을 눈감아주지 않고, 적절하게 치안을 배치하고, 국가가 적극적이었다면, 그리고 재난 예방에 대한 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 다른 참사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이러한 참사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후에 사후약방문이나마 이루어진 재난은 기껏해야 광주 참사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광주 참사도 사후약방문이라도 하라는 사회적 목소리 때문에 겨우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사후약방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정조사는 유명무실했고 겨우 제정된 특별법은 시행령으로 누더기가 되었다.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심지어 아직도 특조위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참사의 진상 규명을 두고, 참사와 그 사회적 여파를 축소하려는 이들은 주로 ‘사고-보상 프레임’을 사용한다. 사고-보상 프레임은 “사고가 일어났고, 피해자들은 보상을 바란다” 라고 재난을 축소해버린다. 이 프레임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와 “어떻게 일어났는가?” 라는 말을 봉쇄시켜 버린다. 국가와 정부의 실패를 개인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는 “죽은 자식을 팔아먹는다” 나 “이미 보상을 받아놓고 더 달라고 한다”며 참사의 피해자들과 유가족을 폄하했고, 논쟁의 여지를 봉쇄해 버렸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놀러 갔다 죽었는데 국가와 정부 탓을 한다”(이 말은 세월호 참사부터 유구하게 쓰인 말이다) 는 말로 재난을 일축하려고 했다. 참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고-보상 프레임’을 넘어 ‘사건-규명 프레임’으로 재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고, 재난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으로 사건 현장을 만든 것을 넘어 사회의 문제점들이 모여서 터진 ‘총체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박명림은 “사태의 궁극적인 진실을 남김없이 ‘알 권리’, 즉 진실권은 정의와 인간 존엄을 위한 기본 권리이며, 치료를 받을 권리 또한 사태의 진실을 정의롭게 판정할 수 있는 진실권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참사로 이름붙여진 사건들에서 제대로 ‘알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고, 사회 구성원들은 공통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공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정치(war politics)’를 사용했다.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가 제안한 전쟁정치 개념은, 국가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국민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마치 적을 다루듯이 하는 것을 일컫는데, 크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서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유가족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 치안 공권력을 통해 마치 ‘토벌’하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배상 대신 그들을 경찰로 포위하고 물대포와 최루액을 퍼부었고, 윤석열 정부도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을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citoyen)’ 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의 분향소에는 늘 허리춤에 최루액을 꼽은 경찰들이 서성였고, 늘 유가족들과 분향소에 오는 사람들을 예의주시하곤 했다. 마치 ‘언제 범죄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처럼 대한 것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심판 특히 이태원 참사라는 전적이 있는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로 인해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를 것이다. 아니 올라야만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 정책, 산업안전 및 보건 정책, 이주민 정책, 규제 정책 등을 질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타를 통해 성역 없는 비판을 받아야만 하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진상 규명을 통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트라우마를 해결할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는 윤석열 정부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숙제이고, 빠르게 돌아가는 참사의 시계를 멈출, 적어도 느리게 돌려놓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사고-보상 프레임’과 ‘전쟁정치’로 참사의 피해자들과 사회 구성원들을 무책임하게 대한다면, 또 ‘조금 있으면 조용해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 참사를 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또다시 언제 어디서 일어날 지 모르는 참사에 노출될 것이고, 국민들은 국가와 정부를 더욱 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희생된 참사 앞에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게 나선다면, 그리고 또다시 편가르기를 한다면 그것은 국가와 정부 차원에서 저지르는 ‘내란음모’ 라고 밖에 볼 수 없고, 구성원들이 ‘저항권’을 언제든지 발동해도 이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은 한국 사회의 평판을 저하시키고, 그러한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용납하기 쉽지 않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정부의 실정 때문에 구성원들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그 자체로 ‘내란’ 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정권 심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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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의 마지막 날
5월 18일은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는 날입니다. 1980년 국가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그날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그 정신을 계속 이어가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이번에는 광주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을 돌아보면서, 그날의 사건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신군부의 등장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다. 약 50일 후인 12월 12일,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군사 독재의 막을 올린다. 새로운 군사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신군부는 김대중, 문익환과 같은 재야 인사를 연행하는 '5·17 조치'를 단행한다. 제7공수여단 등이 광주로 투입된다. ▲12.12사태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 앞 모습 ⓒ국가기록원 참혹했던 열흘 간의 광주, 마지막 날은 어떠했나  광주항쟁 10일째 되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최후의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새벽 2시 20분 즈음, 현재 서구청이 위치한 농성동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간헐적인 총소리는 점차 광주 시내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다. 광주 시내를 오가는 스피커에서 한 여성이 애절한 목소리로 외친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송원전문대생 박영순이었고, 다른 한명은 목포전문대생 이경희였다.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시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학생시민투쟁위원회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홍보부였던 박영순, 이경희에게 거리방송을 시켰던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 광주항쟁 당시 장갑차가 출동한 모습 ⓒ국가기록원 새벽 3시, 계엄군이 광주 외곽지대에서 시내로 진입하며 초소를 지키던 시민군과 조우한다.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고, 이 정보는 곧 무전을 통해 도청 항쟁본부로 전달된다. 육군본부에서는 이 진압 작전에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법원은 훗날 이 작전에 대해 ”5월 21일 철수한 것은 27일 재진입작전을 전제로 실시한 것이기 때문에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단행된 ‘상무충정작전’은 많은 인명살상을 예상한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12·12, 5·18 사건 항소심판결문). ▲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2ㆍ12 관련자 선고공판에 전두환, 노태우가 참석한 모습  ⓒ공공누리 상무충정작전  2만여 명(공수부대 제3, 7, 11여단 / 보병 제20사단 / 제31향토사단 등등)으로 구성된 계엄군은 목표한 4개 지점(도청, 광주공원, 광주관광호텔, 전일빌딩)을 확보하기 위해 5개 지점에서 일제히 진입했다. 상무충정작전에 실제 투입된 전투 요원은 장교 276명, 사병 5,800여 명이었다. 이중 특공조 공수부대원은 317명이었다.  이에 반해 ‘살기 위해’ 뭉친 시민군은 고작 157명에 불과했다. 무기도 겨우 카빈소총에 불과했다. 이 특공조는 작전 주체가 아니었던 제20사단으로 위장하기 위해 계엄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군복을 벗고 일반 군인처럼 평범한 녹색 군복으로 위장했다. 차후 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반 군복을 입은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누구나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 차량 위 장발을 하고 있는 시민군의 모습. ⓒ국가기록원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되기 5일 전인 2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특별 지시가 담긴 자필 메모를 전교사사령관에게 전달했다. 이 자필 메모는 “광주 재진입작전 수행에 있어 다소의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광주사태’를 강력히 수습해 줄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외국인 기자가 취재 중임에도 개의치 않고 계엄군이 시민을 끌고 가는 모습. 시민은 의식을 잃은 듯 보인다. ⓒ국가기록원 제7여단이 목표 지점에 가장 먼저 진압했다. 제7여단은 광주공원 시민회관이 시민군 본부로 사용됐던만큼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시민군이 이미 도청 항쟁본부로 거점을 옮겨 시민회관은 시민군 본부로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무혈점령’으로 시민회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광주공원을 지키던 조일기(당시 36세)가 27일 아침 광주공원 정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카빈 소총과 몇 안 되는 실탄으로 시민회관을 지키던 조일기의 마지막 모습은 총상이 아닌 구타로 인해 온 몸에 멍이 들고, 머리가 깨진 모습이었다. ▲  계엄군의 주요 목표 ⓒ 박배민 광주공원에서 900m쯤 떨어져 있는 도청 주변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 도청 앞 전일빌딩과 상무관에서도 총성이 터져나왔다. 도청 안에서 최후 항쟁을 결심한 시민군은 200명 안팎이었다. 이중 80여 명 정도가 군 경험을 바탕으로 총을 사용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 120여 명은 청년과 고교생으로 총을 잡아본 경험조차 없었다. 여기에는 여학생도 10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15명이 현장에서 총탄을 맞아 생을 마감했다. 최후의 항쟁  ▲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 모습. ⓒ이창성 촬영, 5․18기념재단 새벽 4시가 되자 도청 주변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특공조는 도청에 진입하며 “우리는 부마사태도 진압했던 공수부대”라고 외치며 시민을 향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제11공수여단 특공조는 도청 주변 건물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YWCA 안에 있던 시민군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체포했다. 이어지는 5시 20분경. 제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 진입을 완료하며 상무충정작전이 사실상 종료됐다. 도청 내에서 여전히 산발적 저항이 있었으나, 6시 20분경에는 이마저도 모두 제압되고 말았다.  최후 희생자 중에는 10대 학생도 있었다. 목과 배에 총탄을 맞고 숨진 문재학(당시 16세)은 26일 자신을 찾아 와 집으로 돌가자는 부모님의 설득에도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었는데, 집에 돌아가 편히 잠달 수 있겠어요? 도청에 남아 심부름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겁니다”라며 도청에 남기로 결심했다.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은 시민과 자기 친구의 죽음에 격렬히 분노하며 어머니의 만류에도 26일 도청 시민군에 합류했다. 박성룡은 결국 배와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도청과 YWCA 건물 안에는 총탄을 맞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제압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3공수여단이 도청을, 제11공수여단이 YWCA를 제압하고 있던 중, 제20사단 병력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제20사단 제60연대 제2대대는 27일 새벽 4시 30분경 계림초등학교를 지나며 시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에서 시민군 1명이 사살되고, 15명이 체포되었다. 도청 안 시민군의 시체는 현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사살되지 않은 시민군은 복도에서 전쟁 포로처럼 땅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군의 등에 ‘총기 소지’, ‘극렬’, ‘실탄 소지’ 등의 단어를 쓰고, 조금만 움직여도 군화와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아침 7시가 넘어서면서, 공수부대 특공조는 도청 일대를 제20사단 병력에게 넘기고 현장을 떠났다. 8시 50분이 되자, 완전히 차단되었던 시내 전화가 다시 연결되었다. 이렇게 광주 시민의 최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연행당하는 시민 ⓒ국가기록원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며  광주항쟁은 민주화의 씨앗으로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며 결실을 맺었다. 광주항쟁은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운 시민이 피로써 얻어낸 진정한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우리 사회에 ‘민중’이라는 개념과 시민 저항의 표상을 형성했다.  지난 3월 활동을 종료한 5·18진상조사위원회는 광주항쟁 희생자 166명으로 최종 발표했다. 하지만, 그 중 78명의 신원은 여전히 미상이다. 불의에 맞선 이들을 결코 잊지 말자. ▲ 1990년 5.18지원협의담당관에서 광주항쟁 행방불명자 심사를 진행한다는 기안 ⓒ국가기록원 참고 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5·18진상조사위원회 홈페이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5·18진상조사위원회 「2023년 하반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활동보고서」, 2024 마영신, 『아무리 얘기해도』, 2020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2012 김영택, 『5월 18일, 광주』, 2010 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학습 놀이터'성찰과성장'글 작성 및 편집 : 박배민성찰과성장.com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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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에서 <화려한 휴가>까지, 5·18 44주년 우린 민주화를 달성했는가
얼마 전 개봉한 <서울의 봄>은 1979년 전두환과 하나회의 12·12 군사 쿠데타를 다뤘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자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자의 안간힘. 전두환의 쿠데타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광주 시민들은 이듬해인 1980년 5월 18일 ‘화려한 휴가’란 작전명에 의해 난사되고 말았다. 이를 영화화한 것이 <화려한 휴가>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절실하게 외친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광주와 전남에서 발생한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운동이다. 국가에 의한 대국민 학살 속에서 죽어간 민중들이 역사에 물줄기를 내며 간신히 명예를 찾고 한국의 민주화를 대표하는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 실제로 홍콩 등 동남아시아 독재 국가에서는 민주화의 꿈을 실현한 한국을 모델로 보고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와 <1987>을 본다. 40여 년이 훌쩍 지나 다시 5·18이 다가오는 이때, 우리는 정말로 민주화를 달성했는가.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나의 이정표로 삼고 뚜벅뚜벅 가고 있는가.  최근 ‘그날의 광주’라는 게임이 논란이 되었다. 이 게임은 역사가 얼마나 쉽게 더럽혀지고 농락되는지 보여준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본 5·18. 국가 권력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게임화했다. 전두환 쿠데타와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화 운동을 왜곡, 조롱하는 내용이 버젓이 2024년의 한가운데를 활보한다.  이 게임의 문제를 알아차린 자는 초등학생이고, 이 게임을 개발한 자는 10대라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기도 하다. 디지털을 통해 아이들이 만나는 세상은 앞으로의 세상을 좌우할 것이다. 그렇다면 5·18은 우리 미래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정말이지 5·18이 과거였으면 한다. 그런데 아직도 과거로만 보낼 수가 없다. 5·18은 변신을 거듭하며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5·18을 기억해야 하고 잊혀서는 안 된다. 그날의 광주에서 벌어졌던 만행이 과연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아이들이 하고 있는 롤플레이 게임 속에서, 또 누군가의 권력 횡포와 농단 속에서, 민중들을 우매하게 보는 어떤 정치가의 머릿속에서 기생수처럼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5·18 민주화의 바람을 짓밟았던 국가 폭력. 그것은 여전히 국가가 국민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모는 소위 ‘사고’와 ‘참사’들 속에 있는 건 아닐까.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이어야 하고,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완결되지 않은 숙제고, 영원히 채점되지 않은 문항들이다.  5·18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들은 기억하고 있느냐고. 한 나라가 부당한 자의 힘에 굴복할 수도 있고, 부당한 자의 힘에 수많은 희생양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호의로 가득 찬 누군가가 선물해 준 게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밝히려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피로 목숨 걸고 얻어낸 걸. 민주주의 정신과 5·18 정신을 말로만 동조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사건과 연쇄된 결말들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새기는 건 너무나 어렵다. 하물며 일상생활 속에 스며드는 비민주적, 반민주적 사건들은 일어났음을 깨닫기 무섭게 다른 비민주적, 반민주적 사건들에 의해 무감각해져 버린다. 5·18은 매년 돌아오지만, 매년 같은 마음으로 맞기 어렵다. 잊어버린 채 생활하다, 문득문득 먼 누군가의 기일을 반추해 보듯이 5·18이구나, 할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기억해 보자. 마음속에 새겨 보자.  언젠가 피부에 깊숙이 베이는 비민주적, 반민주적 행위들을 쉽게 감지하고 끝까지 그 원인과 결과, 책임, 진실을 캐내는 것, 그리고 마침내 저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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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틀어막지 말고, 길을 뚫으십시오!
[성명서] 입을 틀어막지 말고, 길을 뚫으십시오!R&D 예산 정책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투명하고 민주적인 소통을 요구합니다. 2024년 2월 16일, 대전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한 졸업생이 “생색내지 말고 R&D 예산을 복원하십시오!”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힌 채 식장 밖으로 내쳐졌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라는 내용이 담긴 윤석열 대통령의 축사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2024년 정부 R&D 예산은 2023년 대비 4.6조 삭감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인건비 삭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과학 강국으로의 퀀텀 점프를 위해 R&D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신진 연구자의 성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과학기술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를 포함하여 카이스트 구성원 모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십시오. 언론과 시민 앞에서 R&D 예산 삭감의 이유와 해결 방안에 대해 직접 해명하십시오. 윤석열 대통령은 축사에서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의 손을 굳게 잡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정책 소통의 실패를 인정하고 "언제든 다시" 책임 있는 길로 돌아오기를 촉구합니다. 과학기술인들이 건넨 이 손을 "굳게 잡"을지 내칠지는 대통령의 몫입니다.2024년 02월 20일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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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삭감에 맞서는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듣다
지난 25일 토요일, 서울 시청역 근처에서 개최된 ESC와 FOSEP(공공을 위한 과학기술인 포럼)이 공동 주최한 ‘국가 R&D 삭감, 붕괴하는 연구현장’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지방의 한 대학에서 석박통합과정 4학기를 마무리하는 저년차 연구자로, 정부의 R&D 삭감 발표 이후 ESC 학생위원회에서 배포한 성명서를 보고 ESC에 가입하게 되었고 평소 정책에 관심이 많아 정책위원회에도 가입한 ESC 신입 회원이기도 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과학기술계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나누고자 기획된 자리였습니다. 아직 연구책임자(PI)로 직접 연구를 이끌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평소에 R&D 삭감에 대해서 체감한 것은 지금까지는 크게 없었습니다. 학생 연구자로 그나마 걱정된 것이 인건비 문제였는데 내년에 신입생이 새로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님께서 아직 아무 말씀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역시 대부분 대체복무 중이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임상에 바로 뛰어들어 돈을 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전공에 계시는 연구자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도 심포지엄에 신청하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ESC 소속으로 처음 참여하는 행사이다 보니 아무도 아는 얼굴이 없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맹미선 정책위원장님께서 행사 전에 위선희 젠더다양성위원장님을 비롯한 몇몇 ESC 회원분들과의 식사에 초대해주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학생 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던 연사분이 불참하게 되어 다른 분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생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특히 기초과학 전공의 대학원생들은 연구에 대한 꿈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것을 느끼며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행사장에 걸어갔던 것 같습니다. 심포지엄의 1부에서는 실제 정부출연연구원에서 일하고 계시는 이홍식 FOSEP 연구국장님의 ‘윤석열 정부 R&D 혁신방안의 개요와 쟁점’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여러 기사를 통해 어떤 점이 개편되는지 접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와닿지 못했고 주변에서 이야기해주는 분들도 없었는데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주셔서 잘 이해가 됐습니다. 기존 제도에서 바뀌는 점들에 앞서 연구개발이 진행되는 방식, 연구비의 구성과 사용 규칙 등 나중에 제가 직접 과제 계획서를 쓴다면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진행되었던 연구 중심대학 육성사업 (World Class University, WCU)의 사례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총 8천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여하여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해외 우수인력들을 초청하는 취지 자체는 좋았지만, 몇 차례의 특강만 한다거나 80%의 참가자가 사업기간 종료 직후 귀국한 사례로 보아 이번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제 협력 연구 강화 역시 비슷한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또한, 해외 우수 연구기관과 협력 시 특허를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 주요 선진국이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시대에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초연구연합회 천승현 부회장님의 기초연구사업 중심으로 2024 정부 R&D 예산안 분석하는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지도교수님의 기본연구 1년차 과제를 수행하고 있기에 체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내년 예산에 현재 수행하고 있는 생애기본연구의 신규과제 예산이 없으므로 저희 실험실이 1년만 더 늦었더라면 과연 저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실험은 할 수 있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중에 제가 연구책임자가 된다면 생애기본연구가 없는 상태에서 1억원 이상의 과제를 처음부터 따와야 하는데 부회장님이 말씀하신대로 신진연구자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없애는 것이 아닐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원생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이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미래의 연구자들은 더욱더 학계에서 이탈할 것으로 보입니다.이후 2부에서는 1부에서 발표하신 분들뿐 아니라 공공연구노조 이상근 ETRI 지부장님, ESC 젠더다양성위원회 위선희 위원장님, 그리고 ESC 학생위원회 김정우님까지 학계, 출연연, 산업계, 학생 등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토론회가 이어졌습니다. 사전에 받았던 질문들에 대해 각자 생각했던 것들을 말씀하셨는데, 모두 현재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해 우려할 뿐 아니라 일종의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신진연구자와 중견 연구자의 갈라치기, 카르텔을 없애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카르텔을 양성하는 모순,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존재에 대한 의문, 미래 연구자 수급의 불안정성 등에 대부분 참가자가 공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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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2공항 건설 계획을 다시 움직이겠다고요?
몇 해 전 우연히 제주 제2공항 건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서 긴 호흡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행운처럼 알게 된 배경과 쟁점. 다양한 맥락, 그리고 결과를 중심으로 짧은 글로 정보전달을 해볼까합니다. 글을 쓰기에 많은 부분이 망설여졌습니다. 가장 처음 이슈 카테고리에 대한 선택부터 힘들었네요. 환경보전, 참여, 거버넌스, 공론화 등... 여러가지에 해당하는 복합 내용인데 저의 선택은 '국가폭력'입니다. 제주 제2공항은 장시간의 제주공항의 포화, 인프라 확충의 요구가 빗어낸 배경이자 결과라고 합니다. 공항인프라 확충방안에 대해 비상도민회의 등 반대 의견을 가진 도민과 단체는 “사업추진과정의 절차적 타당성 결여, 주민 생존권,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제주 제2공항 건설에 대해 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민 의견수렴을 위한 도민 공론화를 통해 ‘제2공항 사업추진 여부’를 결정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반면에, 제주도청 및 국토교통부, 제주 제2공항과 관련해 찬성의견을 가진 도민과 단체는 “제주 공항인프라 확충방안으로서의 제주 제2공항 건설이 필요하고 국책사업으로서의 조속한 추진”, 제2공항 건설 관련 공론화는 그간 충분한 도민사회 의견수렴을 거쳤기에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제주 제2공항 사전타당성 조사결과를 두고 제기된 각종 의혹과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비상도민회의 등 반대 단체의 요구를 수렴했습니다. 국가 공공정책의 사전타당성 결과를 다시 검증한다는데에는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전타당성조사 검토위원회 운영기간 동안 조사결과와 관련된 쟁점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고 운영 결과 역시 미흡하게 종료되었습니다.  20년 봄 쟁점해소를 위한 연속토론회가 도내에서 4차례 열렸습니다. 다시 한번 제주는 제2공항을 두고 분열했습니다. 이때 공항인프라 필요성과 기존공항의 활용가능성, 입지선정의 적절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해소되지 못한 쟁점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다루었지요. 찬반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사실관계를 둘러싼 쟁점을 확인, 해소하고 제주 지역사회에 종합적인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했습니다.차마 그안에 불거진 adpi 검증, 입지평가와 선정 결과, 숨굴 등 환경 보전과 생태계를 열거해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후 제주도의회를 중심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간략하게 전달하자면 제2공항 건설 반대 의견이 51.1%로, 찬성(43.8%)보다 오차범위를 보다 많았습니다. 별도로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반대’가 47%, ‘찬성’이 44.1%를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후보지 성산읍의 결과는 건설 찬성 응답이 두 조사 모두 약 두배정도 높았습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찬성 64.9%, 반대31.4%, 2개 여론조사기관에서는 찬성 65.6%, 반대 33%)  환경부의 두 차례에 걸친 “제주 제2공항의 전략환경영향평가서에 대한 재보완” 통보에 대해 국토교통부의 보완서 제출하였습니다. 검토 결과 환경부는 최종 ‘동의’ 여부 결정 과정에서 평가서를 반려함으로서 일단락이 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난 2021년 7월 20일 보완내용 미흡으로 반려)http://www.me.go.kr/home/web/b... 23년 3월 6일 환경부 환경영향평가과에서는 반려 사유에 대한 보완이 평가서에 적정하게 반영되는 등 입지타당성이 인정됨에 따라 조건부 협의를 통보했습니다. 행정계획 확정 및 이후의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지지역 주민과 제주도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제기되는 다양한 쟁점을 해당 계획과 사업 승인 등에 검토·반영하도록 했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21년 이후 1년 반 만에 첨예한 쟁점이 되던 제주의 환경은 무엇이 변경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반려'가 '조건부협의'로 바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국내 정치 환경이 바꼈다는 것도 알겠고요. 그밖에는 건설 여부를 둘러싼 문제가 해결되거나 대안이 제시되지도 않았는데 제2공항 건설계획은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2018년 영리병원(녹지병원) 설립과 관련해 공론조사의 판단을 근거로 하겠다는 정책결정을 뒤집었던 도지사는 장관이 되어서 다시 제주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위에 대한 정리는 해보겠는데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내용에 대한 결과는 정리할 수가 없겠습니다. 설렁 옳은 방향이라고 해도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야 할 용기가 필요하겠고요. 정책의 실패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제주공항의 안전, 환경, 장래, 수용력을 볼 때 무리가 있다는 공직자. 제주의 미래를 위해 안전하고 쾌적한 대중교통을 만들겠다던 국토교통부 관계자의 토론회 마지막 말을 다시 상기해봅니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은 제2공항을 건설하고 탄소중립을 고려한 친환경 공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강정마을의 비극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요. 단지 저는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국가의 폭력성을 요즘 모습으로 다시 한번 보게 되어 매우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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