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일요일 오후 3시, 경기도 동두천시 지행역으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가지 않는 지하철을 다섯 대 보냈다. 기다림은 35분간 이어졌다. 드디어 소요산행 열차가 도착했다. 한 손에 두꺼운 패딩 외투를 들고 올라탔다. 해 떨어진 산자락에는 한기가 휘감는다고 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 출발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지행역에 하차하자 전화가 걸려왔다. 안김정애(65)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대표였다.
“김 기자님, 역에 내리셨어요? 저 녹색 옷 입고 있는데, 보이십니까?”
내리쬐는 햇빛이 녹색 옷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보다 강렬한 디자인의 선글라스가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그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손에는 전단지 수십 장을 들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발을 쉽게 떼지 못하는 땅. 이곳에 ‘옛 성병관리소’가 있다. 이는 1973년 박정희 정부 때 설립된 ‘낙검자(검사 탈락자) 수용소’다.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다가 성병에 감염된 여성들을 격리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무너뜨리고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동두천시장과, 국가폭력의 역사를 사과도 없이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시민단체. 시민들은 소요산 주차장에 천막과 텐트를 치고 농성장을 차렸다.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만들고 밤낮으로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안김정애 대표는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돌렸다. 성병관리소의 철거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동의하면 서명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 중학생은 전단지를 몇 장 더 달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것이다. 안김 대표는 품에 있던 전단지를 선뜻 더 챙겨줬다.
시민들이 항상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시간쯤 전단지 배포를 했지만, 대부분 전단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전단지를 받아가는 경우에도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안김정애 대표는 거절당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손사래 치는 시민에게 ‘한번 읽어보시면 좋은데’라고 덧붙이거나, 전단지 받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능숙함 덕분인지 이내 그의 손에는 전단지가 몇 장 안 남았다.
안김정애 대표는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2014년 10월 ‘미군 위안부’ 피해자 122명과 함께 국가손해배상소송에 나섰다. 정부가 ‘외화벌이’ 수단으로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를 조장했다며, 국가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것이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하면서 집창촌 등에서의 성매매는 불법이 됐지만, 기지촌 반경 2㎞ 이내는 예외였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1969년 주한미군을 축소하겠다고 선언하자, 한국 정부는 ‘정화’ 사업에 돌입했다. 그 대상은 기지촌 여성들이었다.
정부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명단을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하고, 정기적인 성병검진과 관리를 시행했다. 만약 검진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단속 기간에 최근 일자의 성병검진 확인 도장이 없거나, 성병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았을 때, 미군이 성병에 걸려 그 대상으로 지목한 경우 모두 ‘성병 관리소’로 끌려갔다.
관리소에 수용된 이들은 모두 ‘페니실린 606호’ 주사를 맞았다. 당시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리던 항생제다. 문제는 쇼크와 마비, 유산 등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미군 ‘위안부’가 된 이들은 10대에 유입되어 수십 년간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0대에는 외국인 구경도 못했던 시절, 티비도 없고 문화도 없던 시절에 (…) 웬 아저씨들이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시절에는 판잣집이었는데 쪽방 같은 미닫이문에 허름한 침대, 허름한 테이블 탁자와 재떨이가 있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2015.10.15. <미군 위안부의 숨겨진 진실> 토론집 일부)
대법원은 2022년 9월 미군 위안부에 관해 “정부 주도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김정애 대표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대통령실, 법무부 등 정부 기관에 공문을 보냈다.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고. 그러나 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농성장은 지행역에서 차로 약 1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안김 대표는 농성장으로 이동하기 전, 동두천에 거주하는 지인을 만나 서명을 받았다. 공익감사청구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기자를 공대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에도 서명을 먼저 받았다. ‘선 서명, 후 통성명’ 방식이었다. 인사는 서명을 받은 후에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은 농성장에 도착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농성장에 도착한 건 오후 6시가 조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그는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보고 와야 한다고.
그는 농성장 옆 가게 쪽으로 향했다. ‘실버밴드’가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드렸다. 그 옆으로는 트로트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등산객들이 보였다. 다행히 우리가 향한 곳은 그 가게가 아니었다. 그 가게를 훌쩍 지나서 발견한 작은 ‘개구멍’ 앞이었다.
그는 무릎까지 오는 수풀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나마 지난 여름에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조금씩 트로트 반주가 들리지 않을 때쯤이었다.
눈앞이 탁 트이더니 양 옆으로 하얀 건물이 드러났다. 페인트 칠이 다 벗겨진 낡은 감시 초소와 성병관리소였다.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스산한 건물이었다.
깨진 유리창과 창살 사이로 미군 ‘위안부’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미군들은 이곳을 ‘몽키하우스’라고 불렀다. 쇠창살에 매달려 구조를 요청하는 여성들이 꼭 동물원 원숭이 같다는 이유다.
성병관리소 건물 외곽에 둘러진 철조망이 더욱 분위기를 음산하게 했다. 1996년 폐쇄된 이후 사학재단 소유로 30년 가까이 방치된 건물은 ‘흉가 체험 명소’가 됐다.
시민단체와 동두천시가 갈등을 빚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 동두천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입하면서부터다. 시는 소요산 관광지 사업을 확대하겠다며 건물을 철거하고 호텔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주말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게 또 생겨 있네.”
접근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2020년 오랜 시간 방치된 성병관리소 내부를 청소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일탈 장소이자 흉가 체험 명소가 된 성병관리소를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고 당시 시의회와 시장에게도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시장이 바뀌고 시가 부지를 매입하더니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옆에 위치한 주차장에는 그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깨진 보도블럭과 잘려나간 나무들이 있었다. 새벽 5시 30분이었다. 포클레인은 그날 언덕을 넘어 그 아래에 있는 성병관리소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천막농성을 하던 사람들이 포클레인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기계가 멈춰섰다.
이후로 농성장은 더 바삐 돌아갔다. 텐트를 세 군데 설치하고 각각 지킴이들이 지킨다. 기자는 지난 3일 소요산 대형버스주차장 거점을 지켰다.
안김 대표는 이날로 ‘여섯 번째’ 지킴이를 한다. 서울에서 2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 이곳으로 온다. 매주 한 번은 지킴이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농성장을 ‘집’ 삼아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거점 맞은편에는 ‘옛 성병관리소 철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걸어놓은 현수막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병관리소’가 오히려 동두천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건물이 철거되고 관광지역으로 거듭나면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오후 7시부터는 문화제가 진행됐다. 이날은 재즈트리오와 민요 공연이 준비돼 있었다. 이들은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갈등) 소식을 듣고 대화를 통해 같이 발전해나갈 방향을 모색했으면 좋겠는데, (대화가) 차단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이 연주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사는 모두 자발적으로 진행됐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공대위의 자부심이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잠깐 발길을 멈추고 공연을 보다가 떠나갔다.
해가 지면 어둠이 깔리지만 대신 응원하는 시민들이 곁을 지키러 온다. 월요일을 앞둔 이날도 일곱 명의 시민이 천막을 지키다가 떠났다. 초등학생부터 학교 교감선생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대신 이들이 찾아온 계기는 딱 하나다. 뉴스를 보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국민청원 동의가 5만 명 넘은 적 있어요. 그것도 다 저희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해주셨더라고요.”
국회 국민동의 청원 안건은 청원서 공개 이후 30일 이내 5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심의를 받는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반대’ 국민청원은 지난 9월부터 한 달간 5만 2585명이 동의하면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회부됐다.
“폭력의 역사를 왜 지워요. 아직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과 후유증을 안고 사는 피해자분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안김정애 대표는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기보다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을 지우는 순간, 또 다시 반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공대위 회원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성병관리소를 시도지정(등록)유산으로 보존하고, 역사문화평화공원으로 활용해 후대가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전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하루가 일찍 마무리됐다. 임성용 시인은 ‘5성급’ 텐트로 기자를 안내했다. 농성장에서 보낸 69일의 노하우가 담긴 가장 안락한 공간이었다.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도 불안이 밀려왔다. 밤새 포클레인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머릿속으로 대안을 세우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뛰쳐 나간다. 그러면 나는 취재를 해야 될까, 아니면 공대위와 함께 그 앞을 막아서야 할까.
그리고 또 하나. 취객이 와서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다고도 했다. 길거리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하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 변수를 생각하고 대안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에 들지 못한 건 머릿속이 시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텐트가 있는 곳은 주차장. 얇은 텐트 너머로 자동차가 주차장 옆 도로를 달리거나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면 눈앞이 번쩍인다는 거다. 잠에 들까 싶으면, 오가는 차 때문에 한밤에도 눈앞이 대낮처럼 밝아질 때가 있었다.
하필이면 이날 비가 쏟아졌다. 자정 무렵부터 약 두 시간 가량 쏟아진 빗소리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농성장 지킴이들은 다행히 지난 추석에 폭우를 겪으면서 한 차례 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공대위 회원들은 텐트 아래 두꺼운 돗자리를 깔아 등이 젖는 것을 대비했다. 그 덕분에 비교적 푹신한 바닥에서 빗물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텐트 위에 쳐진 비닐이었다. 비를 확실히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소음을 만들어냈다. 안에서 듣기에는 폭우가 내리는 줄 알고 나와보니, 겨우 가랑비가 토닥거리고 있었다. 황당하기는 했어도 육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금방이라도 비닐을 찢을 것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텐트 밖 사람의 말소리가 들릴 때나 차들이 쌩쌩 내달릴 때면 곧잘 잠에서 깨면서도, 자꾸 눈이 감겼다.
날이 밝아오자 푸석한 얼굴을 한 공대위 회원들이 천막 아래 모여들었다. 가져온 패딩 외투를 이때 꺼내 입었다. 산길 위에 텐트를 친 임성용 시인과, 반대편 주차장을 지킨 김대용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공동대표도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각각의 거점에서 밤을 보낸다. 그 길이 뚫리면 바로 건물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용 대표는 동두천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퇴근하면 농성장을 지킨다. 거의 매일같이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먼저 일터로 향했다.
농성장에는 아침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교사다. 학교로 출근하기 전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 소요산을 찾는다. 오늘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텀블러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온다.
그는 바로 전날 문화제에서도 얼굴을 보고, 가장 늦게까지 농성장을 지키다가 떠났다. 그에게 농성장은 도와주고 싶은 곳, 챙겨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저희 농성이 꽤 오래 갈 수도 있어요. 그래도 겨울에 눈 내리면 썰매 끌고 나와야죠. 주차장이 약간 언덕이라서 썰매 타기 좋거든요.”
지난 4일로 농성은 69일째 이어졌다. 농성장을 떠나면서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도, 비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이들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길 위에 사람이 산다.
“장소가 없어지면 기억이 없어집니다. 기억이 없어지면 치유의 길은 없어집니다. (…) 독일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냥 없애버리고 거기다 호텔 지었으면 독일 국민들이 더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여론이 보존하자, 다른 방식(문화공원조성 등)으로 보존하자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올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될 것이다, 라고 바라는 마음들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2024. 10. 10. 기억 위로 미사 최재영 신부 메시지)
※ 공대위는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흥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옛 성병관리소 부지를 시가 매입하는 과정에서 부정은 없었는지 조사해 달라는 취지다.
공익감사 청구는 성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방법은 다소 번거롭다. 감사원은 여전히 ‘오프라인 자필 서명’을 요구한다. 공익감사청구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래 링크에 첨부된 파일을 출력한 후 성명, 휴대전화번호, 생년월일, 직업, 주소 등 빈칸을 채워 셜록 주소로 보내면 된다.
▶️ 공익 감사 청구 참여하기
‘진실탐사그룹 셜록’ 주소: (04513) 서울 중구 서소문로 116 유원빌딩 1316호 진실탐사그룹 셜록 앞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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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1이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요.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아픔을 무시하고 지나치지 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배워야 해요. 과거를 잊는 건 미래를 위한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