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의 마지막 날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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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5월 18일은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는 날입니다. 1980년 국가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그날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그 정신을 계속 이어가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이번에는 광주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을 돌아보면서, 그날의 사건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신군부의 등장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다. 약 50일 후인 12월 12일,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군사 독재의 막을 올린다.

새로운 군사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신군부는 김대중, 문익환과 같은 재야 인사를 연행하는 '5·17 조치'를 단행한다. 제7공수여단 등이 광주로 투입된다.


▲12.12사태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 앞 모습 ⓒ국가기록원


참혹했던 열흘 간의 광주, 마지막 날은 어떠했나 


광주항쟁 10일째 되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최후의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새벽 2시 20분 즈음, 현재 서구청이 위치한 농성동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간헐적인 총소리는 점차 광주 시내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다.


광주 시내를 오가는 스피커에서 한 여성이 애절한 목소리로 외친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송원전문대생 박영순이었고, 다른 한명은 목포전문대생 이경희였다.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시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학생시민투쟁위원회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홍보부였던 박영순, 이경희에게 거리방송을 시켰던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 광주항쟁 당시 장갑차가 출동한 모습 ⓒ국가기록원


새벽 3시, 계엄군이 광주 외곽지대에서 시내로 진입하며 초소를 지키던 시민군과 조우한다.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고, 이 정보는 곧 무전을 통해 도청 항쟁본부로 전달된다.


육군본부에서는 이 진압 작전에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법원은 훗날 이 작전에 대해 ”5월 21일 철수한 것은 27일 재진입작전을 전제로 실시한 것이기 때문에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단행된 ‘상무충정작전’은 많은 인명살상을 예상한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12·12, 5·18 사건 항소심판결문).


▲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2ㆍ12 관련자 선고공판에 전두환, 노태우가 참석한 모습  ⓒ공공누리


상무충정작전 


2만여 명(공수부대 제3, 7, 11여단 / 보병 제20사단 / 제31향토사단 등등)으로 구성된 계엄군은 목표한 4개 지점(도청, 광주공원, 광주관광호텔, 전일빌딩)을 확보하기 위해 5개 지점에서 일제히 진입했다. 상무충정작전에 실제 투입된 전투 요원은 장교 276명, 사병 5,800여 명이었다. 이중 특공조 공수부대원은 317명이었다.  이에 반해 ‘살기 위해’ 뭉친 시민군은 고작 157명에 불과했다. 무기도 겨우 카빈소총에 불과했다.


이 특공조는 작전 주체가 아니었던 제20사단으로 위장하기 위해 계엄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군복을 벗고 일반 군인처럼 평범한 녹색 군복으로 위장했다. 차후 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반 군복을 입은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누구나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 차량 위 장발을 하고 있는 시민군의 모습. ⓒ국가기록원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되기 5일 전인 2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특별 지시가 담긴 자필 메모를 전교사사령관에게 전달했다. 이 자필 메모는 “광주 재진입작전 수행에 있어 다소의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광주사태’를 강력히 수습해 줄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외국인 기자가 취재 중임에도 개의치 않고 계엄군이 시민을 끌고 가는 모습. 시민은 의식을 잃은 듯 보인다. ⓒ국가기록원


제7여단이 목표 지점에 가장 먼저 진압했다. 제7여단은 광주공원 시민회관이 시민군 본부로 사용됐던만큼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시민군이 이미 도청 항쟁본부로 거점을 옮겨 시민회관은 시민군 본부로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무혈점령’으로 시민회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광주공원을 지키던 조일기(당시 36세)가 27일 아침 광주공원 정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카빈 소총과 몇 안 되는 실탄으로 시민회관을 지키던 조일기의 마지막 모습은 총상이 아닌 구타로 인해 온 몸에 멍이 들고, 머리가 깨진 모습이었다.


▲  계엄군의 주요 목표 ⓒ 박배민


광주공원에서 900m쯤 떨어져 있는 도청 주변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 도청 앞 전일빌딩과 상무관에서도 총성이 터져나왔다.

도청 안에서 최후 항쟁을 결심한 시민군은 200명 안팎이었다. 이중 80여 명 정도가 군 경험을 바탕으로 총을 사용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 120여 명은 청년과 고교생으로 총을 잡아본 경험조차 없었다. 여기에는 여학생도 10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15명이 현장에서 총탄을 맞아 생을 마감했다.


최후의 항쟁 


▲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 모습. ⓒ이창성 촬영, 5․18기념재단


새벽 4시가 되자 도청 주변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특공조는 도청에 진입하며 “우리는 부마사태도 진압했던 공수부대”라고 외치며 시민을 향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제11공수여단 특공조는 도청 주변 건물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YWCA 안에 있던 시민군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체포했다. 이어지는 5시 20분경. 제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 진입을 완료하며 상무충정작전이 사실상 종료됐다. 도청 내에서 여전히 산발적 저항이 있었으나, 6시 20분경에는 이마저도 모두 제압되고 말았다. 


최후 희생자 중에는 10대 학생도 있었다. 목과 배에 총탄을 맞고 숨진 문재학(당시 16세)은 26일 자신을 찾아 와 집으로 돌가자는 부모님의 설득에도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었는데, 집에 돌아가 편히 잠달 수 있겠어요? 도청에 남아 심부름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겁니다”라며 도청에 남기로 결심했다.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은 시민과 자기 친구의 죽음에 격렬히 분노하며 어머니의 만류에도 26일 도청 시민군에 합류했다. 박성룡은 결국 배와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도청과 YWCA 건물 안에는 총탄을 맞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제압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3공수여단이 도청을, 제11공수여단이 YWCA를 제압하고 있던 중, 제20사단 병력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제20사단 제60연대 제2대대는 27일 새벽 4시 30분경 계림초등학교를 지나며 시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에서 시민군 1명이 사살되고, 15명이 체포되었다.


도청 안 시민군의 시체는 현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사살되지 않은 시민군은 복도에서 전쟁 포로처럼 땅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군의 등에 ‘총기 소지’, ‘극렬’, ‘실탄 소지’ 등의 단어를 쓰고, 조금만 움직여도 군화와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아침 7시가 넘어서면서, 공수부대 특공조는 도청 일대를 제20사단 병력에게 넘기고 현장을 떠났다. 8시 50분이 되자, 완전히 차단되었던 시내 전화가 다시 연결되었다. 이렇게 광주 시민의 최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연행당하는 시민 ⓒ국가기록원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며 


광주항쟁은 민주화의 씨앗으로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며 결실을 맺었다. 광주항쟁은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운 시민이 피로써 얻어낸 진정한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우리 사회에 ‘민중’이라는 개념과 시민 저항의 표상을 형성했다. 


지난 3월 활동을 종료한 5·18진상조사위원회는 광주항쟁 희생자 166명으로 최종 발표했다. 하지만, 그 중 78명의 신원은 여전히 미상이다. 불의에 맞선 이들을 결코 잊지 말자.

▲ 1990년 5.18지원협의담당관에서 광주항쟁 행방불명자 심사를 진행한다는 기안 ⓒ국가기록원


참고 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5·18진상조사위원회 홈페이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5·18진상조사위원회 「2023년 하반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활동보고서」, 2024
  • 마영신, 『아무리 얘기해도』, 2020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2012
  • 김영택, 『5월 18일, 광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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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 및 편집 : 박배민
성찰과성장.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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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쉼 없이 읽었네요. 기사니 영상 보도를 통해서 접했던 내용을 텍스트로 보는 느낌도 들었지만 반대로 텍스트를 따라 가면서 읽다보니 머릿 속에서 영상이 재생되는 듯한 느낌도 받았네요. 군사독재 정권이 군대를 악용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눈 일이 오랜 시간 동안 정당화 되었다는 게 여전히 이해는 잘 되지 않습니다. 다만 더 중요한 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광주를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와 배경이 아닐까 하네요.

5월18일만 생각했고 5월 27일에대한 생각은 저는 전혀 없었었네요. 열흘이라는 시간과, 보여주신 광주 지도를 보며 다시 더 또렷하게 당시를 생각해보게됩니다.

* 이 글은 외부 채널(성찰과성장,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기고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