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사는 부녀. 강하라(31) 씨의 하루는 아빠를 기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성종(60) 씨는 아홉 살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 하라 씨는 스물여섯 살이던 2019년부터 아버지 돌봄을 전담했다.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1박 2일 동안 이들의 일상에 동행했다.(관련기사 : <‘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이들은 4년째 상속재산분할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20년 할머니가 숨을 거두자 친척들은 소송을 걸었다. 할머니가 부녀에게 물려준 언덕배기의 집 때문이었다. 믿었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보다 당장 변호사 비용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안 그래도 레슨실 월세도 3개월째 밀리고 있는데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것 같아요.”
집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집이 재산으로 잡혀 있어 장애수당도 받을 수 없다.
“아빠는 하우스푸어예요. 지적장애인은 가난했을 때 가장 혜택을 많이 줘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 연금이라도 나오고 뭐라도 받거든요. 근데 겸업은 안 돼요. ‘딱 100만 원(장애수당)으로 살든가, 일을 해서 100만 원을 벌든가’예요. 밸런스 게임처럼.”
하라 씨의 월 수입이 100만 원이 안 되는 달도 있다. 그런 때는 하라 씨의 노동시간이 더 늘어나기 마련.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마케팅 외주를 받거나, 레슨실이 있는 건물 3층에서 사장님 일을 도와주고 알바비를 받는 식이다.
“잠을 많이 못 자고 밥을 잘 못 먹거든요. 과로하고 그러니까 호르몬 리듬이 완전 깨졌어요. 그러면서 자궁근종이 생겼어요. 그때 알았어요. 잘 먹고 잘 자야 되는 거구나. 그런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가 저한테 굉장히 어려운 과제인 거예요.”
과로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지난 2월 혈복강 수술을 받았다. 난소 근처에 있던 물혹이 터지면서 간까지 피가 차버렸다.
“수술 마치고 제가 비몽사몽할 때, 의사 선생님이 아빠한테 수술 과정을 설명을 했나 봐요. 그런데 아빠는 저한테 그 내용을 전달 못해줬어요. 며칠 뒤에 간호사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수술하면서 왼쪽 난소를 절제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하라 씨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비혼을 생각했던 하라 씨가 처음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계기이기도 하다. 아빠는 아픈 딸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줬다. 하라 씨는 그때부터 성종 씨가 “아빠 역할을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수술 이후 자궁내막증 치료제를 매일 먹는다. 담당 의사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약물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중 하나가 뼈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기타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라 씨에게는 치명적이다. 완경 시기 여성들과 비슷한 골밀도 수치. 그는 올해 골감소증 진단을 받았다. 기타를 두 시간 넘게 잡고 있으면 손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제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이랑 소통을 계속해 둬야 해요. 혹시나 아빠나 제가 무슨 일이 생겨서 움직이지 못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요.”
하라 씨는 이날도 장애인가족지원센터로부터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면접에 앞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전달받았다. 서류를 준비하고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도 하라 씨의 몫이다.
성종 씨는 지난해 한 중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로 9개월간 근무했다. 하루 4시간 근무에 월급은 약 100만 원. 아파트에서 3개월간 경비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장애인 일자리는 같은 곳에서 근무를 연장할 수 없다. 정해진 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형태다.
성종 씨의 꿈은 카페 창업이다. 매일 커피를 직접 내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중년 장애인인 그가 취업할 수 있는 카페는 없었다.
“제가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체 활동에 문제는 없지만, 일상적인 은행이나 관공서, 병원을 혼자 가지 못합니다. 늘 제가 일하는 시간을 빼서 함께 다녀와야 했습니다. 저도 일하고 쉴 수 있도록 활동지원서비스를 원했지만, 심사 내용을 보면 모두 신체장애인에 맞춰져 있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강종 씨가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은 딱 하나. 보호자 1인을 동반한 지하철 무료 탑승이다.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주차를 했다가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지적장애인은 주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나마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과태로의 절반을 감면해줬다.
하라 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혜택(?)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성종 씨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하라 씨 덕분이었다. 2019년 하라 씨가 아빠 성종 씨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한글 공부도 같이 시작했다.
당시 아빠는 ‘안녕하세요’도 읽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라 씨는 학습이 더딘 아빠와 병원으로 향했다. 지적장애 판정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도 되게 힘들었어요. 아빠가 글을 못 읽으니까 제가 언어치료 검사, TCI 검사, 기질검사 문항을 다 읽어 줬거든요. 200문항이 넘는 걸 세 시간 동안 다 읽어줬어요.”
검사 결과는 중증 수준의 지적장애. 등급으로 구분하면 2급이었다. 하라 씨는 아빠가 학습을 하기 위해 천 번이 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종 씨에게는 활동지원 서비스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오셔서 질문을 해요. 근데 질문이 ‘혼자 샤워할 수 있는가’, ‘혼자 밥을 먹는가’, ‘외출해서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질문은 신체 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더라구요. 아니면 지적장애 1급에만 해당되는 거죠.
사실 저희 아빠는 이미 천 번을 반복하고 학습해서 (질문 속 행동들을 혼자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안 된대요. 떨어졌어요, 심사에서.”
활동지원사가 없으니 그 자리를 채우는 건 24시간 하라 씨의 몫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을 가질 수도 없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사치다. 그나마 집과 가까운 곳에서 기타 레슨 수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나 지역 복지센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취업을 위한 면접장이나 병원에 동행하는 서비스 등이다. 다만 이러한 복지 역시 누리는 것도 쉽지 않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립을 위해 한 장애인복지관에 언어치료를 신청했는데, 4년 전쯤에 400번대 대기표를 받았습니다. 2년 전쯤에는 200번대였으며, 최근에 전화해보니 언어치료 선생님이 퇴사를 하셔서 공석이라 언어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동 지적장애에 비해 성인 지적장애는 기회가 더 적습니다. 인지치료나 언어치료를 신청해도 아동이 우선이기에 기회도 없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국가의 ‘돌봄’은 부족했다. 국가의 빈자리는 오롯이 딸 하라 씨의 인생을 ‘갈아넣어’ 채워야 한다.
“지적장애는 원래 티가 잘 안 나요. 특히 아빠는 2급인데도 (사회성이) 많이 개발된 거고. 근데 약간 어수룩하죠.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상황 판단 능력이 빠르지 않은 거예요. 물건을 떨어뜨리면 주워야 되는데, 그걸 인식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성종 씨는 살갑고 정 많은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손수 만든 커피 나누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기자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날 하루 동안 그가 주는 커피를 이미 넉 잔이나 마신 뒤였다. 자기가 내린 커피는 마셔도 잠이 잘 온다며 능숙하게 회유(?)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이거는 마셔도 잠 잘 오는 커피야.”
그의 ‘남다른’ 사회성은 하라 씨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길러진 듯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성종 씨에게 ‘할 수 있어’, ‘괜찮아’ 하는 격려를 보내왔고, 그것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이 됐다.
하라 씨의 인생에도 그런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보호자’가 있었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보호자가 있었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떠오르는 건… 할머니?”
침묵 끝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라 씨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양육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빠 성종 씨는 아홉 살 딸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었다.
하라 씨는 일찍 어른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막내고모의 미용실에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교육 한번 받지 못했다. 이러한 성장기는 그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줬다.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해 원망한 적도 많았어요. 삶이 너무 힘드니까. 왜 나를 낳기만 하고 제대로 키우지도 않았지? 그런 생각. 그러다 보면 내가 훗날 가정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신이 양육자로서, 배우자로서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고민은 하라 씨를 괴롭혔다. 편부 가정이라는 점, 아버지가 지적장애인이라는 점,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는 점 역시 그에게는 ‘결점’처럼 느껴졌다.
다만 유년기의 기억이 언제나 괴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빠 성종 씨의 역할이 컸다.
“아빠를 계속 돌볼 수 있는 건 과거의 기억 덕분인 것 같아요. 아빠는 주 6일, 7일 근무하면서도 쉬는 날마다 저 데리고 공원에 나가서 놀아줬거든요. 그 기억 속에 아빠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어요. 일 때문에 힘들어도 저를 정말 사랑하니까 그랬던 거잖아요.
그런 게 (지금 제가 아빠를) 부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아빠가 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하라 씨는 자정이 돼서야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CTS 기독교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작은방 미닫이문 틈으로는 드라마 소리가 들렸다. 성종 씨는 또 동시에 태블릿PC로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했다. 하라 씨가 이불 속에 누울 때까지, TV 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행 가고 싶더라고요. 사람이 없는 곳으로요.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세상이 조금 더 자극적이에요. 너무 바쁘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저는 그 버드나무가 바람에 이렇게 흔들리면서 사르륵거리는 걸 좋아하는데….”
‘아홉 살’ 아빠를 돌본 지 5년. 하라 씨에게는 미래를 그리는 일은 사치스럽다. 일상을 버텨내는 것만으로 버겁다. 그는 차라리 회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도, 빚도, 잿빛 미래도 없는 곳으로. 하라 씨는 잠에 빠진 뒤에야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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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3장애인 일자리는 연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랍네요..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한 일자리에 오래 일하는 것이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더 낫지 않나 싶은데요. 여러 명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이 있을지도 궁금해 집니다. 와 닿는 기사 감사합니다.
성북구청 에서는 사회복지전담공무원 을 파견해서 도움을 못 주나요?
구청 에도 분명히 등록되어 있을 텐데 그에 대한 내용은 안 보이고, 실제로 도움을 받고있는지 아니면 못 받고있는지 등 도 알려주셨더라면 더 완전한 기사가 됐을 것일 텐데 아쉽네요
성북구청 공무원 님들, 이분들께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십시요
100% 가능할 텐데 이런 기사가 나는 이유가 뭔 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썼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아버지를 돌보는 청년 하라 씨의 힘든 일상과 그 속에서 겪는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지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하라 씨의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사회적 지원의 부족 속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제도적 지원보다는 사람들의 이해와 도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