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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윤석열 퇴진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한국사회 전반이 무력감에 빠졌다.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의 무력감이 반복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 전반의 무기력 속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는 집회가 있다. 바로 ‘윤석열 퇴진’ 집회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함을 규탄하고자 하는, 그들이 가진 선의를 의심치 않는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퇴진운동은 결과적으로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문제해결 불능의 사회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공수교대 하듯 정권교체만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
우리 사회는 이미 2016년 촛불 이후 대통령 탄핵,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집권을 경험했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참사 반복의 시대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교훈이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 이후 필요한 사회적 반성과 성찰은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왜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졌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 시점 진행되고 있는 윤석열 퇴진 집회는 가장 게으른 방식의 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 이전 윤석열 퇴진 운동
기본적으로 현 윤석열 퇴진운동은 이태원 참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집회에, 참사 이후 추모메세지가 결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원 참사 이전의 윤석열 퇴진운동을 살펴보아야, 현 시점 퇴진운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퇴진 운동은 2022년 8월 6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거의 매주 촛불집회를 진행 중이다. 초기에는 1천 명 규모로 출발했던 집회가 11월 19일에는 40만 명이 모일 정도로(모두 집회측 추산 인원으로 계산) 규모가 커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규모의 확장이 그 운동의 정당성을 증명하진 않는다. 보다 더 주요하게 봐야할 것은 집회의 성격이다.
아직까지도 윤석열 퇴진운동의 핵심 구호 중 하나는 ‘김건희 특검’이다. 심지어 이태원 참사 이후 집회의 한 웹포스터에는 "이태원참사 진실규명 특검하라, 우리가 이재명이다. 검찰표적수사 중단하라"가 메인 문구인 버전도 있다. 김건희 씨의 주가조작 의혹, 이력 허위 기재 논란에서 출발해서 이재명 민주당 당대표의 검찰수사 중단으로 귀결되는 집회구호가 이태원 참사 추모메세지과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집회에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결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목소리를 연결해내는 큰 줄기의 핵심내용이 그 집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의 가장 큰 줄기는 무엇인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인가? 아니면 김건희 특검과 이재명 수사 중단인가?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이라는 단체를 살펴보자. 아래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출범선언문 일부이다.
"2016년 광화문 촛불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적폐정권을 퇴출시켰고 2019년 서초동 촛불은 검찰개혁을 촉구하며 타올랐습니다. (...) 2022년 대선은 정치검찰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촛불항쟁의 과정이었습니다. 촛불혁명 제1차 3단계였습니다. 대선 결과 검찰 파시즘 체제가 도래(...) 3단계로 이어졌던 제1차 촛불혁명은 종료되었으며 이제 제2차 촛불혁명의 막이 올랐습니다.(...) 촛불혁명의 단계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요약하자면, 촛불승리전환행동은 ‘촛불혁명’을 좌초시킨 검찰세력과 싸우는 ‘2차 촛불혁명’이 필요하다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고, 여기에 기반해서 윤석열 퇴진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집회에서 부르고 공연을 했던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노래 가사는 더 노골적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겨우 영점 칠삼프로 이겨놓고마치 점령군이라도 된 것처럼"(...)"조국 온 가족을 도륙해놓고정치검사 측근인사 승진했네"
기본적으로 현 정세를 20대 대선의 연장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대선은 졌지만, 결과를 다시 뒤집을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고, 조국 전 장관 사태를 언급하는 가사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윤석열 정권을 물리치고, 이재명 당 대표와 조국 전 장관을 ‘복권’시키는 것이 정의라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 아무리 민주당과 무관한 집회라고 주장한다고 치더라도, 선명하게 민주당과 이재명 당대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긴 힘들다. 결국 조국 전 장관 사태 이후 발생한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 대립의 연장선에서 태극기 집회와 현 윤석열 퇴진 집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제도권 양당 정치가 거리까지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퇴진운동의 근거 또한 부실하다. ‘김건희 특검’이라는 구호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동일한 선상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대통령과 혼인신고도 하기 전의 주가조작 사건이 대통령 퇴진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려 없는 퇴진운동은 ‘이재명 방탄 집회’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적 조건이기도 하다.
윤석열 퇴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대통령 퇴진 요구 자체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용산참사와 쌍용차 파업이라는 국가폭력 이후 퇴진운동이 전개되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로 출발한 전 사회적 변화의 요구가 퇴진운동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현 윤석열 퇴진 운동은 출발 지점부터 현재까지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자의 요구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가 결합되었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이유는 사회적 반성과 성찰의 과정이 생략된 퇴진 운동이기 때문이다.
최고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일부 진보적 운동 단체에서는 체제전환을 이유로, 윤석열 퇴진을 외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윤석열 퇴진’이라는 구호가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체제전환 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대통령 퇴진 구호는 체제전환의 요구를 가리고 있다. 윤석열 퇴진 구호는 불평등-기후위기-차별의 문제들이 아니라(혹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재명-윤석열 두 개인 간의 정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선, 지긋지긋한 양당정치의 구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자본주의가 극복되는 것도 아니며,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사회의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정권교체는 ‘도로 민주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도로 민주당’이 정말 ‘혁명’이고 ‘해방’인가?
운동은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제시하고, 대중들을 설득하며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왜 그 노력을 ‘김건희 특검’을 외치는 세력과 함께 해야 하는가? 검찰과 싸우기 위해 모인 세력이 아니라, 현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고 아픈 사람들 곁에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사회운동 세력이 함께해야 할 곳은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옆이다.
추모행동으로 출발하자는 의미
사회적 추모는 단순히 슬퍼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추모를 통해 행동하자는 의미이고, 이 행동에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 결과적으로 윤석열 퇴진운동을 전개하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윤석열 퇴진(민주당 재집권)을 위해 ‘추모’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본말전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아직은 짐작할 수 없지만, 함께 슬퍼하고 감정을 공유해나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참사의 시대는,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회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지금의 청년세대는, IMF부터 세월호 그리고 10.29 이태원참사까지 각자도생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는 것을 살아온 삶 전부를 통해 학습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그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은 첫째는 반성과 성찰이고, 둘째는 고립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메시지는 단순히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잘못을 확인하고 대안을 찾아나갈 수 있는 사회라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또한 언제든 자신이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내재된 사회구성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의 존재의미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윤석열 정부는 이를 포기하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정치적 행동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출발해 국가에 대한 불신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새로운 사회 모델을 탐색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제는 안전하다, 이제는 사회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연결해내는 사회를 제시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퇴진운동을 넘어서야 하는 가장 큰 핵심적 이유다. 게으른 퇴진운동을 넘어 국가담론에 대해 말하자. 누가 대통령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느냐이다.
*12월 17일에 있었던 있었던 민교협 토론회 <이태원 참사의 성격과 한국 정치>에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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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란?: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란? :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참사 직후 우리 사회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단순히 참사의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더욱이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한 혐오, 국가행정의 무책임한 태도와 꼬리 자르기 행태까지 현 정부의 대응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면면들은 세월호 당시와 꼭 닮아있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동일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년세대가 참사를 반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8년 전 시민들이 던졌던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면서 또다시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결국 대통령 개인 말고는 우리사회가 변한 것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참사에 대응하는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모습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초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김건희 특검’과 ‘윤석열 퇴진’을 구호로 매주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라는 구호가 하나 더 추가된 것에 불과한 정치적 행위가 추모로 둔갑해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들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김건희 특검’ 피켓은, 한국정치의 파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의 사회적 경험이 과연 유효하고 의미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감각과 대중들의 감각이 확연히 다르다는 지점을 짚어야 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퇴진 촛불 정세와는 다른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재난과 참사 이후, 사회는 ‘반성과 성찰’을 기반으로 변해야 한다. 불평등이 재난으로 심화되지 않아야 하고, 참사를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코로나 재난 속에 비대면-원격사회로 전환을 대안으로 내놓고, 이태원 참사 직후에는 정권교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대안들이다.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 권리는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추모와 애도에서 정치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모와 애도가 정권에 대한 분노로만 귀결된다면, 안전 사회-대안 사회는 누가 만들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는 어떻게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추모의 대화’를 사회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기성국가-기성정치-기성사회를 거부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산발적으로나마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퇴진이 추모’라는 구호는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의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퇴진운동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참사를 마주하지 말자. 어떤 결론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추모하고 대화하고 연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나가야 한다.
어제(11월22일) 청년정의당과 장혜영 의원실에서 주최한 <참사의 시대을 살아내는 청년세대>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이 글은 제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토론회 영상 링크 : youtu.be/1rQcSdEA52g
토론회 개요 및 자료집 링크(첨부파일) : http://www.justice21.org/153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