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무수한 애도 중 하나를 선택하기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애도의 마음이 집결하는 것을 느낀다. 매일 성대에 호흡이 부딪히며 피가 맺힐 정도로 소리치는 이들이 존재하는 데도 나에게는 10월이 되어서야, 혹은 4월이 되어서야 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유가족, 생존자, 연대하는 이들, 시민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눌러 담는다. 기억을 다시 한번 갱신하고 기억에 기억을 더하며 다짐한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 태어나 살아갔으며 자신이 그날 죽음을 맞이할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죽음에는 국가 / 사회 / 안전 체계의 실패가 있고,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끝나지 않은 투쟁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리를 나가거나, 일하면서, 친구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 속에는 애도가 등장하지 않고, 참사에 깊게 혹은 오래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다. 참사의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왜 울부짖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가? 많은 이들이 애도를 보내고 공명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변화를 만드는 시작인데 말이다. 나는 어떤 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문은 애도로 향하는 문이다. 한 시민에게 죽음에 대한 슬픔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애도를 보내야 할까. 내가 그럴 자격이 될까와 같은 고민을 하며. 그들의 망설임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필요하다. 이들을 하나둘 초대하며, 그들이 언제든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망각에 저항하며 함께 애도해야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애도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관련된 책을 참고했다.  1. 죽은 이를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기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문학동네)  이 소설 작품에는 시즈토라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한다. 전국을 떠돌며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어떤 사람인지, 죽음이 어떤 가치를 따지고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가 죽은 자리에 찾아가고, 나름의 손동작으로 기도하며 제례를 행한다. 다만 제례를 행하기 전에 주변에 이와 같은 사실을 묻는다. “00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00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았든 그에게 사랑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시즈토는 계속 그 애도를 실행한다. ‘명복’과 ‘애도’를 구분하는 그의 말에 힌트가 있다. 명복을 비는 것은 가족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것이지만, 애도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고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때 하는 추상적인 행위라고 말이다. 즉 애도는 죽음과 관계없는 자가 그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애도가 인간과 사회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핵심적인 주제라는 걸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며 가족과 사회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어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 죽음들에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나에게 되돌려보자. 나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는가. 어떤 죽음은 애도하고, 어떤 죽음은 애도하지 않는가. 진정 기억해야 할 죽음이 나의 죽음뿐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유한하고 허망한 일인지 같은 질문들이다. 시즈토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할까. 그가 죽음에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으려는 것, 죽은 사람에 대해 기억하려는 것, 그리고 애도가 죽은 사람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만약 그에 동의한다면 참사 생존자들을 개별적 존재로 기억하는 행동이 애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유가족의 사회적 운동에 관한 관심 (「궤도 이탈」, 마쓰모토 하지무, 글항아리)  2005년 4월 25일 일본의 지하철 노선인 후쿠치야마선 운행 중 열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07명, 부상자 수는 562명이었다. 책은 이 사건에서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인물을 조명한 논픽션이다. 그는 십여 년간 후쿠치야마 선을 운행하는 거대 철도회사 JR 서일본을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섰다. 끈질긴 노력으로 회사의 경직된 조직문화, 안전시스템 문제, 사건을 망각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을 끌어내고 조직의 변화와 안전시스템 개선을 차근차근 이뤄갔다. 그가 사건 초기 했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사고를 교훈 삼아 JR은 자기네가 일으킨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유가족,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모든 유가족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거대한 슬픔을 견디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다만 어떤 유가족은 슬픔과 비탄에만 잠기는 것이 아니라 진상 규명, 사회 시스템과 안전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들이 약하고 비참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사노를 통해 그 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고를 직시하고 설명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애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말하고 몸을 움직여 표현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협상과 설득을 통해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널리 호소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대했다. 다른 참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과 시민과 정부로부터 도움을 구했다. 절박하게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관심과 지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외부에 있는 나 혹은 우리, 시민의 힘이 필요했다.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4.16 세월호참사, 10.29 이태원참사 등 많은 유가족이 연대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치고 행동하여 그 연대의 힘을 유가족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밖으로 뻗어 나가게 한다. 그 힘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애도의 한 방법일 것이다.   3. 사건을 봉인하지 않고 기억을 나눠 갖기 (<기억 서사>, 오카 마리, 교유서가)  참사의 희생자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 그것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것은 참사를 겪은 유가족이나 생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겪은 일을 완벽히 재현, 표상하려고 할수록 그것은 불완전한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나눠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건을 이해하거나 체험하기는 더 어렵고 고통을 대신 느낄 수도 없는 사건의 외부에 있는 자들과도 말이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 그들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아랍문학과 페미니즘 이론 연구자인 오카 마리는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위안부, 각국의 재난을 다룬 서사들을 점검한다. 어떤 기억을 나눠 가지기 위해 쉽게 동원되는 것이 서사이다. 서사는 이야기이며 사건에 관한 일종의 요약된 이야기이다. 서사는 그것을 완결짓기 위해 필연적으로 인물과 공간을 빌려오고 그것에 관한 결론, 이해 가능한 설명을 수반한다. 그러나 오카 마리는 그러한 서사와 종결이 기억의 봉인이라 단언한다. “서사는 끝나고 독자는 이해하고 감동한다. 거기에는 읽는 사람을 불안에 빠뜨리거나 위협하는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불안정한 거처를 찾고 자신이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릴 것이다. 그 기억은 봉인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 동굴을 영원히 막아버린 봉인.” 사건의 잉여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듯 ‘사건은 그 폭력의 기억이 바래져 언어화될 수 있고 기억 속에 깃들여진 것만 경험으로서 공유’된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도 이 참사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들은 언어화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고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 잉여에 사건의 본질이 담겨있을 수 있다. 참사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미 이해가 끝난 사건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참사에 대한 수많은 서사가 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스스로 내린 참사에 대한 결론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서사로도 참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이해가 아니라 기억의 일부분을 나눠 갖겠다는 마음이 애도일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장에 나가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2주기의 추모 현장, 생존자의 이야기, 유가족의 이야기, 시민들의 애도가 나누어지는 어떤 장소. 그곳에는 언어화되지 않는 슬픔과 분노, 희망과 용기, 저항과 위로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기억을 나눠 받으며 또 다른 기억을 생성해 나갈 것이다. 나 또한 이 방법들이 모두 옳다고만 믿는 것은 아니며 모두에게 각자의 애도 방식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중요한 건 그 무수한 애도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문을 열어 젖히고 애도의 세계로 발을 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능한 어떤 애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더불어 읽으면 좋을 책들  (북펀드 진행 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4 북펀드 바로가기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23 http://aladin.kr/p/iQqEe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김초롱, 아몬드, 2023 http://aladin.kr/p/i4B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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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0에서 1로, 망설임에서 연대로
2022년 어느 날의 카페, 내가 앉은 자리에서 멀찍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이태원 참사 후 몇 주가 지난 때였다. 그들의 대화가 의도치 않게 들렸다. '세월호처럼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말. 나는 2015년경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했고 세월호를 취재하던 피디님과 일하게 되면서 세월호와 관련된 띄엄띄엄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장들에 계속해서 찾아갔다. 단원고에서 목포에서 광화문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세월호 인양선 바로 앞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인양선에 타지 못한 유가족들과 인근을 맴돌기도 했다. 배를 집어삼킨 바다는 새카맣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을 떳떳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유가족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들을 위로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위로의 방법이 어설플 거라 걱정했다. 작은 실수라도 할까봐 잔뜩 몸을 사렸다. 영상에 필요한 질문만 하고, 카메라를 켜지 않을 때면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관찰했다. 가끔 유가족들이 주는 음식과 관심에는 가능한 큰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손님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카메라는 항상 그들과 멀었다. 목포에서 세월호 인양이 진행될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나의 마지막 세월호 관련 촬영이었다. 목포신항, 철조망이 처져있는 구역에서 파란색 컨테이너를 두 개 놓고 유가족들이 모여 인양선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날씨가 쌀쌀했고 바닷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유가족 아버지 한 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 이쪽으로 와. 그렇게 하지 말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따뜻한 곳으로 다가와 가까이 앉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들어 조금 더 다가갔으나 끝내 섞여 앉지는 못했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몸으로는 무엇도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 세월호와 점점 멀어졌고, 2017년 말에는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세월호 현장에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다시 2022년 카페에서 나는 생각했다. 저들은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참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질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을 뿐 애도를 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세월호가 인양되어 지상에 놓여지고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세월호의 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파란색 컨테이너 두 개를 발견했다. 위치가 반대쪽으로 옮겨졌을 뿐 과거에 보았던 그때의 컨테이너였다. 철조망에는 여전히 노란색 리본들이 매달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세월호 선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들끓었다. 저렇게 큰 배였구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붉은 영역과 불법 중축된 객실, 큰 프로펠러, 세월이라고 쓰여있는 낡은 글씨. 많은 게 지난 것 같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세월호에 비하면 이태원 참사는 나에게서 거리가 더 멀었다. 이태원을 평소에 잘 찾지 않았고, 할로윈이라는 문화도 낯설었다. 참사 당시 나는 집에 있었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 익명의 상대방들이 채팅으로 말했다. 지금 이태원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눈으로 담아두고 계속 게임을 했다. 게임을 끝내고 나서야 웹에 접속해 뉴스를 봤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러나 2014년부터 이어진 마음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그간 떠돌던 마음들은 조금씩 연결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이나마 애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애도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 모든 위로의 시도는 실패할 거라는 것. 내 위로는 정확한 위로와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하리라. 중요한 건 정확함 그 자체가 아니라 정확함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를 인정하며 좁혀나가려는 시도, 그렇게 가닿으려는 노력,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기였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한 애도를 다시 시도한다. 재난을 기억하자는 말이 어느덧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10주기를 지났고 이태원 참사도 2주기를 앞두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죽음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새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또 다른 되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인간의 뇌는 가혹하리만치 지루한 것을 금방 잊는다. 정말 중요하고, 아름답고, 새로웠던 것들도 잊혀진다. 지고지순한 연인관계도 지루해지면 끝이 난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루해지고 잊혀지는 것들에 맞서며 무언가를 기억하고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수차례, 수백번 혹은 수천년동안 반복되었던 것일지라도 그렇게 다시 이야기하고, 쓰고, 말하고, 중얼거리고, 건네는 동안 지루한 것이 새로운 것이 된다. 다시 기억이 된다. 304낭독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 작가 분이 오랜만에 유가족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 저희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 저희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세요. 내가 해야할 일은 단지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로. 0에서 1로. 침묵에서 발화로. 무에서 유로. 정확한 위로에 다가가기.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나아가기. 그럼 다짐을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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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커먼즈는 어떻게 좌절되는가?
커먼즈는 어떻게 좌절되는가? 커먼즈의 정의 – 자원을 장기간 돌보기 위한 사회 체계로서, 공유된 가치들과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한다.– 자기조직된 체계로서, 이 체계에 의해서 공동체들이 자원을 (고갈될 수 있는 자원과 고갈되지 않는 자원 공히)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거나 최소로 의존하며 관리한다.– 우리가 함께 물려받거나 창출한 부를 가리키는데, 이 부를 우리는 감소되지 않은 채로 혹은 더 증가된 채로 우리의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집단적 부에는 자연의 선물들, 사회 기반시설들, 문화 생산물들, 전통들, 지식이 포함된다.– 경제(그리고 삶!)의 부문으로서, 대체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한다. 이 방식은 종종 시장/국가에 의해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커먼즈의 총목록이란 없다. 어떤 공동체가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균등한 접근 및 사용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특별히 초점을 두어 관리하고 싶다고 결정할 때마다 커먼즈가 생기기 때문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다. 자원 + 윤곽이 뚜렷한 공동체 + 필요한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그 공동체가 고안해내는 프로토콜들, 가치들, 규범들이다. 대기, 대양, 유전자 지식, 생물다양성과 같은 많은 자원이 커먼즈로서 관리될 절실한 필요가 있다. 출처 : 커먼즈란 무엇인가, 커먼즈 번역 네트워크 http://commonstrans.net/?p=24 먼저 나의 연구는 문학 / 다큐멘터리 분야 창작을 위한 것임을 밝힌다. 일반적인 학계 연구에 포함되지 않을 내용이 다수 있지만나라는 개인에게 중요한 논의들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민족지학 분석을 통해 분석한 나라는 유령 존재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나는 1993년까지 서울 금호동에 살았다. 당시 금호동은 재개발 열풍으로 자신의 삶과 공동체가 파괴된 철거민들의 투쟁이 한창이었다. 우리 가족은 철거민이었는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10여곳의 집을 돌아다녔고, 나 또한 6년간 세 곳의 집에 살았으나 마지막 집은 무너지지 않았고, 부모님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용역이 직접 집을 부수지 않았어도 내가 태어난 곳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의 성장과정은 부모님의 빈곤과 거기서 느껴지는 수치심으로 억눌려 있었다.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가족을 해석하지 못했고, 공부를 통해 부산을 벗어나는 것을 희망으로 삼았다. 가족과 상관없는 단독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직업에 대한 책을 보며 그들이 세상을 유랑하는 자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집과 가족을 떠나 어딘가에 발을 딛지 않고 유령처럼 떠돌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 스무살에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공동체를 꿈꿨다. 아직 유령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낭만적인 공동체로 생각했던 것들은 ‘내가 나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를 의미했다. 배제되지 않음을 찾아다녔고, 우연히 그런 곳을 만났을 때의 편안함과 기쁨이 컸다. 그러나 모든 현실의 공동체가 그렇듯 그것들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무너지고 변화하였다. 공동체는 공간 위에서 세워졌고, 공간은 늘 영원하지 않다. 이러한 경험에서 느꼈던 것은 첫번째, 자본주의의 논리는 반드시 공간과 공동체의 배제를 만들고 소멸을 이끈다는 것, 두번째, 낭시가 말했듯 공동체를 위한 인위적인 노력도 독재와 공동체의 파괴로 흐른다는 것, 세번째,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공동체인 것과 현실의 공동체를 만드는 문제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 등이 있겠다. 즉,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혹은 만들고 싶은 내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일인데 그럼에도 나는 그걸 늘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원하고 있다. 이 모순이 내 안에 굴러다닌다. 내가 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민족지학적 반성을 통해서였고, 그러한 생각과 내가 처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창작자/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연구는 이것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파악했다. 내가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연구와 학습 과정이 어떻게 창작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다. 공간과 공동체, 커먼즈 지난 3년간 주거관련 사회적 기업에 다니며 공적 재원을 통한 주거개발, 기획 업무를 하였다. 주거복지가 필요한 계층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고 공유공간을 설계했다. 별개로 공유부엌이나 서점을 직접 운영했으며, 스쾃과 커먼즈 활동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집 앞 산책로에서 빈 땅을 발견했고 (청량리동 950) 불온하고 무용한 이 땅이 왜 나의 마음에 들어왔을까 고민했다. 그건 빈 땅이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않은 -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도 아니면 공동체적으로도 - 곳이었으며 그 덕분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을 지배하는 어떠한 종류의 관습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아 아무것도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존 버거의 말에 의하면 그 땅은 ‘부재의 땅’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도래하는 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과거 자료에서 제기동의 재개발 이주민을 이 공간에 일종의 수납하려던 시도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땅을 관찰하며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는 이 빈 땅을 시민의 공유지/커먼즈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학습을 통해 커먼즈가 단순히 자원이 아니라 공동의 것을 만드는 활동과 과정인 커머닝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내게 그나마 숨통을 틔게 해준 것 같다. 자원으로 접근했을 때 어떤 땅은 소유권이 명확하고 소유자의 자본 혹은 공적인 목표를 충족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적합하다. 그러나 어떤 땅이 커머닝의 과정, 공유화의 과정을 거친다면 시민의 의견이 반영되고 공적인 목표에도 시민의 필요가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시도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경의선, 배다리, 송현동 땅, 빈집 등 커먼즈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나는 이러한 커먼즈/커머닝이 현재 우리에게 쉽지 않은 문제일 때 그 이유가 무엇일지, 장애물이 무엇일지를 연구과정을 통해 알아보고 싶었다. 질문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나에게 남은 질문들을 되새겨보자. 그동안 시도되었던 수많은 공동체들, 그들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소멸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스쾃과 커먼즈는 임시적인 공동체를 생성했지만 소멸이 예정된 그것들이 결국 남긴 건 무엇일까. 커먼즈 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난제들은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자원이 필요하고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의사결정 과정, 정보의 부족, 자본주의적 압력 등 여러 과정을 고민해보자. 특히 나에게는 해외와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가 과도하고 커먼즈에 필요한 시민적 합의를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나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이를 위해 필요한 학습지도를 만들어보았다. 연구를 위한 유력한 학문 계열로 인문지리학 / 공간 철학 / 도시사회학 / 도시정책학 등을 탐구해보려고 한다.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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