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당신과 약속하는 기억 투쟁: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과 피해자 권리 실현을 향해
#1 2015년 4월 세월호참사 1주기를 앞두고 매주가 투쟁이었다. 국가는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는 것마저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았다. 가족들은 경복궁 앞에서 노숙에 들어갔고, 하늘에서는 매몰차게 비가 쏟아졌다. 화장실조차 제공되지 않아 가족들은 박스에서 일을 처리하는 수모까지 감내했다. 특별법에 따라 독립된 조사 기구를 설치하라는 요구조차 불온시하며 물리력을 동원해 추모마저 봉쇄한 정권에 분노했다.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추모대회 도중에 가족들이 투쟁하고 있는 경복궁으로 달려갔다. 최루액 섞인 물대포가 사람들을 향해 조준되었다. 그런데도 가족들을 만나겠다며 새벽 내내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학우여, 분노의 행진에 나서자!”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2 2023년 10월 29일 8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서 10.29이태원참사(이하, 이태원참사) 1주기 추모대회가 열렸다. 8년 전 대통령은 추모를 뒤로한 채 해외로 떠났다면, 2023년 대통령은 가족들의 추모대회 참석 요청을 ‘정치집회’로 매도하며 홀로 종교행사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이태원 사고 현장이든, 서울광장이든, 성북구 교회든 희생자를 추도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지만, 참사 1주기를 앞두고도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진상·책임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은 점에서 이는 이율배반적 언사였다. 수많은 이들의 꿈과 미래가 한순간에 파괴되었지만, 이를 책임지는 국가는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보다 유흥을 즐겼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을 탓하는 비열한 처사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운동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기억’입니다. 이는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 망자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참사를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망각의 시간을 주도하려는 국가권력에 맞선 저항입니다. 또한, 기억은 시민들에게 애도와 연대를 요청하는 메시지로 등장합니다. 기억은 사라진 존재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고, 기억을 실천하는 존재를 주체로 세움으로써 과거와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과 책임을 끌어냅니다. 우리는 기억이 망자와 나, 그리고 이 절망을 함께한 이들을 연결해주고, 고통 속에서도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가는 강력한 ‘실천’이라 믿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를 앞두고, 저는 지난 1년간 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워 쟁취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과정을 기억함으로써, 당신과 앞으로의 이태원참사 기억 투쟁과 재난참사 운동의 방향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1.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운동의 시작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는 참사 직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감각을 학습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 이태원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에서 청문회를 비롯한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경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에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1월 17일, 국조특위는 구조 실패와 예방 및 대비의 미비 등 국가 책임 일부만을 확인한 채 활동을 종결했습니다. 그에 앞서 1월 13일, 경찰 특수본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6명을 구속기소 했지만,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고위급 인사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수사조차 진행하지 않은 채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윗선에 대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 정부 기관의 비협조와 위증, 짧은 조사 기간, 그리고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유가족과 시민이 배제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곧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독립적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또한, 피해자와 논의도 없이 일방적 결정으로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바라던 추모분향소와 추모대회에 대한 불허와 철거 시도, 참사 직후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지원 부재 등 애도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행태 역시 부각되면서 ‘피해자권리 보장’을 법제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참사 100일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3월 2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청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청원동의를 얻기 위해 전국 순회에 나섰고, 청원 시작 열흘 만에 5만 명(100%)의 동의를 달성했습니다. 4월 20일, 국회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하게 됩니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 183명이 참여해, 21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이 되었습니다.   -참사 70일 즈음, 이태원 헤밀턴 호텔 골목길 2. 기억하겠다는 약속,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하라!” 한 달이 지나도 국회의 시간은 멈춰있었습니다. 특별법 제정은커녕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도 법안이 상정되지 못했습니다. 6월 7일, 유가족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에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에게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도보 행진에 나섰습니다. 한여름 장대비를 맞으며 투쟁한 가족들의 바람은 임시국회가 종료되는 6월 30일 전에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입법될 수 있도록 국회의 노력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특별법을 ‘정쟁 법안’이라며 계속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고가 사건인지 참사인지를 논하는 것부터, 참사 발생의 원인과 이후 수습의 미비함을 밝히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논의가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여당은 ‘정치적’이라 떼를 쓰며 법안을 반대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강조한 ‘피해자 지원’에는 정작 피해자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정치적 권리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입법 논의가 가로막힌 가운데 6월 20일, 유가족 두 분은 곡기를 끊고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단식농성에 참여한 최선미 씨는 참사 1년을 돌아보며 “이 나라에서 유가족이 되면 겪어야 하는 거의 모든 일 겪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외면당하고, 진상의 실마리조차 차단된 상황에서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슬픔을 회복하기보다 진상을 은폐하려는 국가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습니다. 서명운동, 도보행진, 거리농성, 단식 등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지난 재난참사 유가족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의 요구가 억압되고, 또 다른 비극을 통해 참사의 원인을 밝혀야 했던 재난참사를 떠올려 보면, 참사는 단순한 인명 피해뿐 아니라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망각과 모욕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현재적’입니다.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6월 30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다짐으로 머물렀던 진상규명이 드디어 법·제도적 차원에서 국가의 역할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가족들은 안건 심의 촉구, 행정안전위원회 법안 통과 촉구, 특별법 본회의 통과를 재차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특별법 제정 투쟁과 동시에, 참사 책임자 엄벌, 추모할 권리를 박탈한 공권력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참사 희생자와 시민을 향한 정치인의 혐오 발언 규탄, 한국 사회의 재난참사 인식 변화를 위한 활동도 펼쳤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태원참사의 진상이 밝혀지길 바라며 2023년 10월 29일 1주기를 맞이했습니다.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특별법 제정'의 요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참사 발생 400일이 되는 12월 2일에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2022년 12월 16일 살을 찢는 추위 속에서 가족들은 황망한 죽음의 이유를 밝혀달라며 49재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투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규명을 지연하고 방기하는 국가의 행태에 책임을 묻기 위해 오체투지를 전개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온몸을 붙여 꽁꽁 언 땅의 냉기를 받아들였던 가족들의 투지는 해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여야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본회의 통과가 세 차례나 미뤄졌고, 가족들은 여러 차례 양보와 법안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특별검사 임명 요청을 삭제하고, 조사에 불응할 경우 제재는 과태료로 완화했습니다. 조사위원회 활동 연장 기간 단축, 유가족 몫의 조사위원 추천권도 삭제했습니다. 이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했을 때 아쉬운 결과였습니다. 세월호특별법은 총 17인의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중 희생자가족대표회의에서 3인을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양보를 택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이 여야의 분열이 아닌 협의와 타협의 결과로 이뤄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총선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가 된다며 법 시행일까지 총선 이후인 4월 10일로 박아두자는 여당의 요청마저 수용했습니다. 2024년 1월 9일 참사 438일 만에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집단 퇴장했고 야당만의 단독 통과라며 비난했습니다(여당 소속 권은희 의원만 특별법 찬성). 여당은 바로 국회 로텐더 홀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이태원참사 더 조사할 게 없다”,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가졌다”, “참사를 정략적으로 악용한다”라며 특별법을 폄훼하였고, 18일 대통령에게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며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분향소에 걸려있던 영정을 내리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까지 행진에 나섰습니다. ‘위헌’이니, ‘정쟁’이니 날카로운 언어를 내리꽂으며 분열의 책임을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비정한 정치에 눈물을 머금고 삭발까지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1월 30일, 끝내 정부는 피해지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특별법을 거부했습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에 나선 가족들, 한겨레신문, 2023.12.20.     3. 진상규명의 첫걸음을 떼다: 이태원참사특별법과 쟁점 4.15총선에서 준엄한 경고를 받은 정부·여당은 야당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다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참사의 진상규명이 피해자와 유가족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유가족보다 야당과의 논의를 우선했다는 점은 여전히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을 진상규명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정부·여당이 삭제를 요청한 것, 즉 쟁점이 되었던 사항은 조사위원회의 ‘압수수색 영장청구 의뢰권’과 ‘불송치·수사중지 사건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입니다. 여기서 영장청구의뢰권의 경우 ‘영장청구권’과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이를 독소조항이니, 위헌적이니 훼방을 놓았습니다. 위의 권한은 과거 조사위원회에도 존재했고, 실제 정부 기관이 자료제출과 진상조사에 성실히 협조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데 무게를 두며, 정부·여당의 삭제 요청을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였습니다. 5월 2일, 이태원참사특별법이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찬성 256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습니다. 5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의결되었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뒤틀린 국가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투쟁과, 참사의 고통을 나눈 시민들이 함께 진상규명의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4. 법조문에 내려앉은 ‘피해자 권리’와 다시 시작되는 기억 투쟁   -2024년 5월 2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참사특별법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정식 명칭은 ‘10·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입니다. 10년 전 제정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비교하면 제목에서부터 ‘피해자 권리보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안 곳곳에 ‘권리’와 관련된 조항도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참사의 법안 중 무엇이 더 좋은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10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이태원참사에서 피해자권리 실현의 과제로 결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고 한 달 뒤인 2014년 12월 10일, 진실 은폐와 국가폭력에 맞섰던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권리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의 존엄을 해하는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것’을 다시 결의하며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4.16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선언문에는 연대할 권리, 참여할 권리, 안전할 권리, 진실을 알 권리, 애도할 권리, 행동할 권리, 저항할 권리,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 등 열세 개의 조항을 통해 세월호참사 이전과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짐들을 적어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란 계속되는 각종 재난과 참사에 연대하는 일임을 밝히며, 피해자의 권리를 박탈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투쟁만큼 권리주체로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약속했습니다. (피해자의 권리) 피해자는 부당한 해를 입었고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정부와 책임 있는 대표자로부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피해자는 사건 해결의 전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8항 특히 4.16인권선언의 8항인 ‘피해자의 권리’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제3조(피해자의 권리)와 연관됩니다. 이는 세월호특별법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조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권리는 총 8개의 호로 ①진상조사 과정 등 참여할 권리, ②혐오로부터 보호받으며 조력을 받을 권리, ③개인정보·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④애도의 권리, ⑤피해지원을 받을 권리, ⑥추모사업·공동체회복 등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⑦배상 및 보상받을 권리, ⑧그 밖에 피해자의 권리로 규정되어 있고, 이 조항들은 4.16인권선언과 깊이 공명합니다. 제6조(특별조사위원회 설치)에서 ‘10·29이태원참사 이후 희생자와 피해자의 권리침해 등 피해 실태 및 구제방안에 대한 조사에 관한 사항(강조: 필자)’을 특조위의 업무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이란 참사의 발생 원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와 희생자가 어떤 권리침해를 겪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또한, 세월호특별법은 피해자를 ‘명예훼손’의 대상이나(제5조, 4항), 단순히 지원받는 존재로 여긴 반면, 이태원참사특별법의 경우 제3장 ‘피해 구제 및 지원 등’ 제55조(피해자 등의 참여 보장) 조항인 ‘국가가 피해자 및 피해지역에 대한 지원계획을 수립·시행할 때에 피해자 등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하여야 한다’를 명문화함으로써 피해자의 참여보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제1조(목적)에서 ‘공동체 회복’을 통한 안전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 제4장 공동체 회복 지원 등에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국가의 노력과 추모사업 등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즉, 참사의 진상규명을 통해 도래할 안전사회란 재난을 예방하는 것만큼 사회적 성찰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담긴 ‘피해자의 권리 보장’은, 그동안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쌓아온 약속의 흔적이자, 다짐의 결실입니다. 참사의 비통함 속에서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투쟁했던 우리는 ‘피해자권리 실현’이라는 의제를 법 조항으로까지 가져왔습니다. 다만, 이것이 법 조항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또 다른 기억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9월 13일,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따라 조사위원회 9인이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위원장,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특별법 제정과 특조위의 활동으로 참사의 진상규명이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상규명의 과제를 특조위에 맡겨놓기보다는, 아직 듣지 못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 더하여 그들의 말 속에서 우리가 빼앗겼던 권리는 무엇이고, 연대를 통해 되찾아야 할 권리는 무엇인지 발견하는 사회적 실천이 요구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권리는 법조문에 새겨진 문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와 행동으로 실현됩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 그리고 재난참사 진상규명 운동에 함께했던 우리들의 목소리를 모아, 이 시대의 필요한 권리를 끊임없이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 목소리와 우리의 연대, 기억 투쟁 속에는 분명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약속과 다짐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10.29이태원참시2주기시민추모대회,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서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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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당신이 안겨준 세월로 한 걸음 더 내디뎌 보려고요 -4·16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이하여
당신, 잘 지내나요? 10년이라는 묵직한 세월에 순간 먹먹함이 밀려오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안부를 먼저 묻고 싶었습니다. 봄과 함께 꽃망울 맺힐 때면 심장이 아려오고,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애간장을 시꺼멓게 태웠을 당신이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문제해결은커녕 여전히 매정한 국가에서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10년에 다다랐네요. 어찌할 바 몰라 눈물만 훔치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 싸웠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2014년 4월 16일, ‘구조 0’ 우리는 검은 바다에 쓰러져 있는, 그리고 끝내 침몰하는 세월호를 실시간으로 목격했습니다. ‘전원구조’라는 짧았던 안도는 오보로 뒤바뀌고, 늘어만 가는 희생자를 보며 절망이 켜켜이 쌓였어요. 그래도 구조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대통령은 모든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하여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고, 언론은 에어포켓 가능성을 설파했으니까요. 그때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들의 말뿐이었어요. 소위 골든타임이었던 당일 오전 9시 34분, 승객 476명을 구조하기 위해 현장에 출동한 배는 ‘해경123정’ 단 한 척이었습니다. 선내에 진입하여 탈출하라고 지시만 내렸어도, 유리창만 내려쳤어도 수십 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테지만, 해경은 탈출한 선장과 선원을 싣고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오전 9시 39분에서 10시 25분까지 국가안보실(청와대)은 해경 상황실과 총 5회의 통화를 나눕니다. 국가안보실은 구조를 위한 지시·지원이 아닌 VIP 보고를 위한 영상을 촬영해달라 독촉했습니다. 그 사이 세월호는 선수만 남긴 채 바다 아래로 모습을 감췄습니다.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을 펼치겠다던 국가의 말은 어선을 빌려 사고 현장에 직접 다녀온 가족들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족들이 지켜본 현장에서는 어떠한 구조 작업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에어포켓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낱같은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 말고는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배가 급격히 기울여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신고한 사람은 단원고 학생이었습니다(오전 8:52). 단원고 학생들이 찍은 영상에는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며 두려움을 이기고자 했던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반복적으로 들립니다. 그때 단원고 학생 한 명이 말합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데’. 생존 학생 유가영님은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선내에서 자신을 끌어준 친구의 손을 잡고 간신히 갑판 위로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침몰 이후 수습과정에서 구명조끼에 달린 끈으로 서로를 묶었던 학생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얼어붙을 것만 같이 차가운 4월의 바다에서, 그들이 파국에 남겨진 우리에게 전한 것은 ‘희생’이 아닌 ‘연결의 온기’였음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3,650일 당신의 걸음 속수무책 무력감에서 환멸과 분노로 바뀌던 당신을 봅니다. ‘제발 구조해달라’는 간절함이 ‘내 새끼 살려내라’라는 절규가 되어 터져 나왔습니다. 진도체육관에서 벗어나 청와대로 가겠다며 당신이 떼었던 그 걸음이 10년을 지나 오늘에 이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2014년 4월 16일, 거대한 기만을 목격한 순간, 우리의 걸음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거리에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350만 국민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했지만, 국가는 꿈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당신이 곡기를 끊었을 때, 그 옆에서는 당신을 조롱하기 위한 ‘폭식’이 전개되었어요. 표현의 자유라는 갑옷을 두르고 경멸과 적대로 당신의 목소리를 굴절시키고자 했던 이들을 보며, 난파된 것은 세월호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책임 규명과 함께 배·보상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당신은 ‘OO팔이’라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잔인한 모욕을 들어야 했습니다. 국화꽃 한 송이 올려두는 일이 차벽에 가로막혔고, 애도와 책임을 요구하는 걸음에 물대포가 조준되었던, 가방에 노란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불심검문도 진행되었던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세월이었어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가 있는데도, ‘세월호를 바닷속에 묻어버리자’, ‘그만 슬퍼하라’ 등의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졌어요. 끝도 없이 추락하는 양심을 바라보며, 서러움만 삼켰던 나날이었습니다. 참사의 진실을 찾겠다며 나선 여정인데, 나아갈수록 진실과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구조에 실패한 국가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데 유능했어요. 특별법을 통해 조사를 시작해야 했던 특별조사위원회는 대통령의 시행령으로 발족하기도 전에 손발이 묶였습니다. 국정원, 기무사, 정보기관은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진도체육관에 상주하며 당신을 미행했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했어요. 우리의 걸음을 주저앉히기 위해 당신을 국론분열·불순·종북 집단으로 매도했어요. 국가는 2014년 4월 16일 구조를 실패한 것과 함께 참사 이후 진실과 책임마저 훼손하고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세월호참사의 진짜 범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었어요. 어느 날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이 기억나요. ‘이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어도 나의 아이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다시는 나와 같은 아픔을 우리 사회가 겪지 않았으면 한다. 세월호 유가족이 마지막 유가족이 되고 싶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고도 당신이 건져 올린 말은 ‘우리’였어요. 세상이 절망적일수록 서로를 더욱 연결하고자 했던 당신의 노력은 결국 수백만의 촛불을 밝혀 불의를 심판하는 데에 이르렀고, 깊은 바닷속에 묻혀있던 세월호를 끌어 올렸어요. 당신과 함께 다시 걸을 세월을 약속하며 사회적 아픔에 연대하는 자리에서, 주름이 한 줄 두 줄 늘어난 당신을 바라봐요. 멈추기는커녕, 당신은 한국 사회에 ‘생명 존중’, ‘안전 사회’, ‘피해자 권리’ 등의 새로운 언어를 조직하며, 숱한 사회적 죽음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10·29이태원참사가 발생하자 당신은 사고를 예방하고 사고 발생 후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던 국가에 책임을 촉구했어요. 무엇보다도 세계인의 축제인 핼러윈을 즐기고자 했던 시민들에게 참사의 책임을 돌리는 행위를 경고했어요. 모두가 비통한 마음으로 참사를 마주하고 있을 때, 앞장서서 사회적 애도와 성찰의 방향을 잡는 당신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는 ‘지난 10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범벅된 봄이에요. 비열한 정치와 형편없는 국가에서 위태로운 삶이 계속되고 있어요.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설령 저들에게 처벌이 내려졌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10년 전 그날에 멈춰 서버린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들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당신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오늘까지 걸어왔고, 내일로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버텨줘서, 아니 걸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진실로 향하는 길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어요. 기억이 옅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뒤로해도 괜찮아요. 당신과 나의 새로운 약속과 다짐들로 우리는 하루하루 기억의 겹을 쌓아갈 거에요. 잊지 않고 있어요. 다시 노란리본을 가방에 달고, 우리 4월 13일 오후 5시 30분 서울시청 광장에서 만나요.   <세월호참사 10주기 일정>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 4.16기억문화제 일시: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장소: 서울시청 앞   <참고자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4·16세월호참사종합보고서 본권Ⅱ󰡕, 2022. 미류, <우리는 국가를 바꾸는 길 위에 서 있다-사참위 보고서와 분석자료집 읽기를 제안하며>, 《4.16연대》, 2023. 유가영,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 다른, 2024.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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