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광장: 2024년 12월 14일에 생각한 다시 만날 세계
 지난 14일 토요일, 삼 일 간 지내던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들러 짐을 챙긴 후 두 번째 토요일 집회에 갔다. 허리에 약한 통증이 남아있었다. 이틀 전, 고속도로에서 택시에 탑승한 채로 120km로 달려오던 차에 들이받혔다. 2박을 꼬박 입원하고, 허리가 좀 나아질 기미가 보이자 바로 집회에 가기로 한 것이다.    서강대의 ‘집회 참가단’ 오픈채팅방에는 약 6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사람이 많은 여의도역 스타벅스 인근에서 깃발을 올렸다. 또 카톡이 먹통이다. 깃발을 보고 찾아온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과 인파를 따라 여의도 광장 중심부로 조금씩 걸어나갔다.    경찰들은 사고 예방을 위해 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찰의 표정과 몸짓은 분명 ‘막기 위한 것’이 아닌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전 날, 나는 차마 시각장애인 친구에게 같이 여의도로 가자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 같은 전맹은 레어템이니 소중히 대하라는 친구에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함께 오라고 말하고 같이 이동할 자신이 없었다.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은 국회 밖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국회로 돌아와 표결에 참여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      운 좋게 여의도공원 벤치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이랑의 노랫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친구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잠시 화장실을 들르고 담배를 태우러 사람들 사이에 골목처럼 나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기 비탈길까지 꽉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넋을 놓고 일대를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람의 수만큼 다양함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깃발들, 나는 거기서 민주주의의 화려한 무지개를 보았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해학을 찾는 사람들의 깃발과 누군가의 응원봉, 외치고 싶은 말을 적어온 피켓, 사랑하는 강아지의 사진을 붙여놓은 팻말을 보았다. 내 손으로 들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란 빛깔의 정의당 깃발도 많이 보았다.    ‘이들은 왜 여기에 나왔을까.’ 서울시의 ‘서울 생활인구 데이터’에 따르면 최소 50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최소 오십 만 가지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목놓아 둘러보았다.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보이는 곳을.      괜히 끝을 보고싶어 더 멀리 걸어나갔지만, 인파의 경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간이 화장실에 들르고 다시 서강대 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비어있던 사람들 사이의 샛길은 인파로 가득 차 아주 조금씩만 움직일 수 있었다. 30분에 걸쳐 겨우 가방을 두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뉴스 생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만의 입은 적막을 닫고 귀만 열어두었다.     “가(可), 이백 네 표.”    ‘환호성’이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은 표정을 활짝 피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이틀 전 업로드 된 한 진보정당의 영상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 국회의장이 등장한다. 2020년 국회의원 선거 후보 토론회 영상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저 역시 기독교인으로 동성애에 반대하고 ‘그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 ‘땅땅, 땅’하는 소리와 함께 국회에서 의사봉을 두들겼다.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로 시작하는 그 노래.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    다시 만난 세계.    그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울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슬픈 시간이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슬픔이 커져갔다. 헤매임의 끝이 아닌 시작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만날 수 없는 세계의 희미한 빛 만을 볼 수 있음을 너무나도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피켓을 들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윤석열 탄핵 오세운 OUT’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주황색 피켓이었다.      고인이 된 학교 선배의 노래 ‘그대에게’가 흘러나올 때에도 나는 피켓을 일부러, 더 높이 들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더 이 피켓을 읽어주었으면 했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광장에 나온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부러 더 높이 뛰었다. 탈진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내가 손에 든 ‘장애인’이라는 문구 때문에 위축되어있었다.    며칠 전 보았던 현 거대 야당 대표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박경석 선생님 이런 행사하는데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만 받지.”      한참 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스도 택시도 잡을 수 없어서 여의도 공원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갔다. 저 뒤에서 마이크를 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1 야당 대표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저 뒤에서 울려왔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민주도 흔들리고 공화도 뿌리내리지 못한 이곳 대한민국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다채로운 사람들을. 앞을 보지 못하는 국회의원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헌법을 수호하려 했음을. 그리고 나는 들었다. 집회에서 탄핵 구호를 외칠 때마다 끝에 “투쟁-.”이라고 애써 덧붙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언 준비 전 차별적인 발언에 맞서 당당하게 무대 위에서 외치는 여성의 용기를. 냉혹한 무관심을 돌파하는 사람들을.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무엇이 나아졌는지 당최 알지를 못하겠다.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고 미국 대선은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며 여전히 전쟁이 진행중이다. 대학의 총학생회장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퇴진을 외친다고 말하고, 내가 사실상 선본장의 역할을 맡았던 한 대학에서 소위 ‘운동권’으로 분류되어버린 선본은 14.5%를 득표했다. 비상계엄에 대응하여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또다시 내 이름에는 ‘정의당’과 ‘운동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익숙해졌지만 늘 새로운 악플은 계속해서 달렸으며, 학생 ‘일동’이라는 표현에는 서강대를 대표하는 이름을 짓지 말라는 훈계조의 익명 댓글들이 달렸다. 무구한 역사. 7년 전보다 더 차가워진 반응을 피부로 느꼈다. 패배해온 수많은 기억과 그 일부였던 자신의 무능 또한 잊지 않기로 했다.    믿는다고 다 이뤄지진 않지만, 믿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한 줄기 빛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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