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기홍, 2019,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한울"의 논의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사회조사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정형화 되어 있는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을 다루는 한 흐름은,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특히 ‘양적 방법’을 다룰 때 더욱 그러합니다. 양적 방법만을 활용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며 ‘질적 방법론'이라는 별도의 연구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양적 방법과 질적 방법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의 문제나 두 방법론이 경험주의 철학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제제기 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한 축인 ‘과학혁명’의 영향 속에서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철학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고, 이는 과학철학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또한 과학적으로 연구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성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과학이 가능하다는 생각의 주류는 경험주의-실증주의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같은 결과값을 가지게 되는 반복적인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서의 법칙을 발견할 수 없었고(혹은 어려웠고), 인간의 자유의지/자율성의 독자적인 강조에 입각한 경험주의-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것을 거의 무너뜨리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과학은 불가능하다'라는 관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자연객체를 다루는 자연과학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루는 인문학/철학/해석학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을 애써 부여잡으려고 하는 입장은 자연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대안없이 무너진 주류적 관점을 애써 부여잡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조사방법론’의 지속은 이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론에 관한 논의들을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지만, 실증주의를 대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이 글에서 방대한 (사회)과학철학 논의를 깊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회과학 학문들에서 공유되고 있는 실증주의/경험주의,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서 있는 협약주의를 구분하고 두 관점의 난제들의 핵심을 ‘수박겉핥기 정도’로 함께 공유해보고자 작성합니다. 이는 사회를 좀더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안경’이 아닌 ‘여러 안경들'의 가능성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증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실증주의 (사회)과학철학에 의하면 ‘형식논리적 진술’과 ‘검증할 수 있는 경험적 진술’만이 정당한 지식입니다.(논리실증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자료와 관련한 논리적인 보편적 진술을 추구합니다. 실증주의에서 이론적 용어는 관찰가능한 용어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이론적 서술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제됩니다. 실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 반증주의를 거쳐 가설연역적 방법, 포괄법칙적 설명모형에 이르게 되며 과학에 대한 표준적 견해, 법칙적 설명의 정통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실증주의에서의 ‘법칙’은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 여겨지며, 이는 ‘관찰된 규칙성의 서술’입니다. 즉 경험의 귀납적 일반화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관점에서는 경험이 두 가지 특권적 지위를 지니게 됩니다. [1] 경험의 인식론적 특권은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객관적 기초라는 믿음입니다. [2] 경험이 이론적 진위의 심판자라는 믿음 또한 경험의 특권적 지위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조사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공유되고 있는 논의의 대부분은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유일한 혹은 근본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험은 ‘인간에 의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인간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에 있든 없든 과학의 대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인간의 경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경험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이나 사실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으며, 현실에서의 과학적 작업은 항상 경험 너머의 것들을 이론적으로 다뤄 왔습니다. 경험 너머의 것을 발견해왔습니다. 경험만이 기준이 된다는 관점은 그러한 경험 너머의 것을 다룰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간의 자연과학의 성공적인 과학적 작업들과 사실상 배치되는 관점이 됩니다. 경험된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경험적 실재론’은 존재론을 부당하게 인간중심의 인식론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주장은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경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론적 서술을 아무리 경험적 서술로 환원하려 해도, ‘조작적 정의'를 해도 그것을 걷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는 [1]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2] ‘경험의 이론의존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실증주의/경험주의에 대한 해석학/협약주의/철학적 비판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자들의 작업에 대한 과학철학적 분석에 기초한 비판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회조사방법론에서 대체로 전제하는 실증주의적 방법에 기초하여 작업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연역과 귀납뿐만 아니라 역행추론(탐정이 범인을 찾듯이 가능성을 하나씩 소거하여 답을 찾아나감)을 통해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기제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탐구하고, 그것이 실재 하는지를 경험과 관찰, 논리적 검증 등을 통해 해답을 찾아나갑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이 때로는 성공하여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류 사회과학의 방법론은 이러한 점을 포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실증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실증주의적 관점에서의 수많은 연구들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연구만이 유일한 과학적 지식이라는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며, 그러한 연구들은 연구의 끝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파악으로써, 그 기층의 구조적 기제로 들어가기 위한 도입부로 여겨야 한다는 점, 그에 따라 생산된 이론적 추론이 실재적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수많은 도구들중 중요한 일부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협약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협약주의는 ‘과학은 협약에 따라 형성된다’는 관점으로, 대체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로부터 비롯합니다. [1] 과학은 과학자의 창조물/구성물이라는 관점, [2] 과학은 어느정도 주관적이며, 주관성의 원천은 과학자(공동체)라는 관점, [3]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키트와 어리) 명제 등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쿤의 패러다임/정상과학/과학혁명 개념들, 이론의 공약불가능성(과학혁명기의 경합하는 두 패러다임은 비교불가능하다는 의미) 논의등이 협약주의의 전통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파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가 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과학자가 수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과학 이론이 공약불가능하다는 것은 상대주의를 의미합니다. 상대주의는 어떤 이론이든 동등하게 의미있다거나, 어떤 이론이든 아무 의미 없다는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조차 과학의 이론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러한 관점은 과학을 확실하지 않은 지식으로 해체해버립니다. 이는 과학에 대한 도구주의적 견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실재를 실재에 대한 합의로, 진리를 진리에 대한 합의로 대체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철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이 그렇게 보든 말든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을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믿고 작업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그에 입각하여 전에 보지 못한 수많은 기술들이 개발됩니다.
협약주의는 경험의 이론의존성을 지나치게 확대합니다. 지식의 구성은 개념과 믿음에 의존하지만, 그러한 의존이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험의 이론의존성은 경험이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외부에 있는 객체의 성질에 일관성 있게 영향 받지만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정하기 어려운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실험'은 이론에 근거하고 이론에 의해 안내 되지만 실험의 결과는 이론이 아니라 객체(지식의 대상)의 성질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지식을 경험/관찰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이론들에 대해 관찰은 중립적일 수 있습니다. 관찰진술은 과학적 진술의 사실적 기초의 일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관찰은 직접적인 절차에 의해 공공적으로 시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며, 폐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류가능한 것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험이 이론의존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지식의 기준이라는 관점에서 경험도 별 소용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중요한 일부중 하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이 과학이 공약불가능하다는 식의 상대주의로 빠져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이론의 공약불가능성을 말하면서도, 학자들은 누가 더 맞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합니다. 누가 더 맞는지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같은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간의 경쟁은 동일한 객체를 다르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설명력을 각기 가질 수 있으며, 각각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요 현상들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은 이론이 됩니다. 뉴턴의 물리학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체했다고 하지마는 뉴턴의 물리학은 특정 범위 내에서는 여전히 작동하는 설명력이 있는 이론입니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 물리학이 밝힌 것을 포괄하면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하게 된 것인 셈입니다. 패러다임간 비교 및 선택, 이동 및 수용은 가능합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논의처럼 사회성은 과학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과학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과학의 사회성이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의 대상인 객체의 성질은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다르건 간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의 대상인 객체의 성질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것에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실증주의와 협약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실증주의와 협약주의는 대립되는 두 관점으로 인식되지만 함께 공유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협약주의는 ‘경험과 이론의 분리’라는 실증주의의 이분법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고 경험주의에서 이론주의로 전환했을 따름입니다. 즉 실증주의와 협약주의는 (주관적) 이론과 (객관적) 경험의 이분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물론 이는 너무 단순한 정리이며, 각각의 세부적인 논의들에서 그렇지 않은 측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관점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주의와 이론주의의 양 경향은 철학의 분류로 봤을 때 ‘인식론'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과학의 인간의 인식 외부의 대상/객체를 다루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기준을 인간의 인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대상/객체의 성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인식론의 존재론적 전환)
중간에 끊긴 것처럼 이 글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언제 쓸지 모를 다음 글에서는 두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로이 바스카의 과학철학에 대해 짧게 소개해보고자 합니다.(로이 바스카의 논의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고 싶으면 “이기홍, 2017, [로이 바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를 참조해주세요.)
(2021년 11월, 다른 곳에서 썼던 글을 이동/재업)
코멘트
1'과학'과 '과학 기술'의 차이랑도 같이 볼 만한 글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단어로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나 원리 등을 설명하지만, '과학 기술'이 되는 순간 인간의 이해 관계가 개입하게 되죠. 협약주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방법론이 인간의 의지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다시금 환기하게 되네요.
그리고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도 올바른게, 사실 사회과학에서 여러 가지 지표들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한'게 많거든요. 인간의 행복도, 민주주의, 주관적 계층의식 등 여러 분야에서 여러 지표가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실증주의와 협약주의의 이분을 넘어 무엇을 연구하고 탐구하여 어떤 목적을 이룰 것인가를 놓쳐서는 안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