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마법, CWB를 아시나요?
영국 북부 맨체스터에서 차로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인구 16만의 도시, 프레스턴을 아시나요? 산업혁명과 함께 번성했지만, 영국 제조업이 쇠퇴한 1970년대 이후 기업들이 프레스턴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높은 실업률, 영국 내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아동빈곤율 등 쇠락한 도시의 문제점들을 안게 되었죠. 도시 내 양극화도 심해져 부촌과 빈촌 거주자 간 기대수명이 15년 이상 차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국내 지자체장 중 프레스턴의 사례를 안 들어본 분이 없다네요.😁 영국의 소도시가 요즘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유,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프레스턴 모델’로 불리는 지역재생 프로그램의 성공 때문입니다. 프레스턴은 2011년부터 인구감소, 고령화, 도시 집중 및 지역 간 불평등, 지방소멸 위기 등에 대응하기 위해 ‘부유한 지역공동체 만들기’(Community Wealth Building, 이하 CWB)’*전략을 실행했습니다.  *부유한 지역공동체 만들기(Community Wealth Building, CWB) 지역사회 부(富)를 증대시키고 이를 다시 지역경제로 순환시키는 로컬 경제전략이에요. 원어를 직역한 ‘공동체자산구축’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략은 ▲공정한 노동 ▲지역 금융 ▲토지와 자산의 공정한 이용 ▲진보적 조달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기업의 5가지 핵심 가치를 중심으로 합니다. CWB는 공공기관, 대학, 병원 등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앵커’기관들의 조달을 통해 지역 소상공인의 참여를 확대합니다. 또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의 설립을 지원해 지역 주도의 경제 활동을 촉진합니다. 이 모델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가는 주택·부동산 정책도 포함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민주적이고 지속가능한 지역경제 선순환을 목표로 합니다. CWB는 2010년대부터 미국 클리블랜드와 영국 프레스턴 등에서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역경제 활성화 모델입니다.  CWB는 기존 자본을 활용해 지역의 부(富, wealth)를 증대시키고, 이를 다시 지역경제로 순환시켜 민주적으로 축적하는 전략입니다. 이는 지역순환경제의 한 방법론으로, 2004년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협의하는 민주주의’에서 개념을 정립했어요. CWB는 △지방정부 및 지역 대학, 병원 등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는 앵커 기관의 조달(물품 및 서비스 구매) 시장에 주민 참여를 증대하는 시민 중심 조달,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등 주민 주도 사업체 설립을 촉진하는 창업 정책, △약자를 보호하고 주민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주택·부동산 정책 등을 아우른 민주적 지역경제 선순환 모델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희망제작소에서 2024년 9월30일부터 나흘간 ‘2024 지속가능한 로컬경제전략 국제포럼’을 열어 프레스턴시 등의 CWB 적용 사례를 탐구하고 그 가능성을 살펴봤어요. 이 포럼에는 매슈 브라운 영국 프레스턴시 시의회 의장과 닐 매킨로이 미국 협력하는 민주주의 글로벌 리더가 참석했어요. 특히 매슈 브라운은 시의원 시절부터 프레스턴 모델을 이끌어 온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레스턴은 1990년대부터 글로벌 개발사들과 복합 쇼핑센터 등을 포함한 대규모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어요.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투자자들은 떠나버렸죠. 설상가상으로 보수당이 집권한 중앙정부가 돈줄을 바짝 죄며 긴축재정을 선언하면서 프레스턴 시의회 보조금 중 약 2천만 파운드(약 349억원)가 삭감되었습니다. 기업들도, 재개발 계획도, 보조금도 사라지자 도시에는 실망감과 좌절감만이 남았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개죠? 보통은 도시가 황폐해지고 슬럼화되어가는 결말이지만, 프레스턴은 CWB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4년 만에 프레스턴의 지역 조달 지출이 5%에서 18.2%로, 랭커셔 지역의 조달 지출이 39%에서 79.2%로 증가했습니다. 지역 공급망이 강화되어 일자리가 늘어나고 취업률이 상승했으며, 실업률과 아동빈곤율은 감소했어요. 숫자로 보이는 성과 외에 주민들의 정신건강과 행복감이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이러한 사례를 공유하고 한국과 영국의 지역경제, 공동체, 중앙정부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대담이 마련되었습니다. 시민사회 운동가 출신이자 구청장으로 지역 행정 실무를 경험했던 박정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바쁜 일정에서도 흔쾌히 대담자로 참여했어요. 대담은 2024년 10월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희망제작소에서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대담의 주요 내용을 옮겨볼게요! “당연히 외부 투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대규모 자본 투자가 주거 문제나 임금 수준, 노동자와 아동 처우 등에서 지역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죠. 대체로 투자자들은 지역의 부를 추출해 가는 경향이 있어요. 프레스턴의 CWB 전략은 대규모 투자에만 의존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경제의 균형을 새롭게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더 회복력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적절한 보호 장치가 있다면, 외부 투자가 들어왔을 때도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오랫동안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시의원으로 일하면서, 외부 대규모 자본을 유치해 지역 발전을 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망함’(희망이나 가망이 없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네요. 그래서 구청장 선거 때도 그런 내용은 공약에 넣지 않았습니다. 자본 유치는 어렵고, 설사 성공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발생합니다. 자본은 공짜로 들어오지 않아요. 결국 주민의 삶의 질, 편의성, 지역순환경제, 전반적인 발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브라운 의장께 궁금한 점이 있어요, 프레스턴도 대규모 쇼핑센터 건설이 중단된 경험이 있고, 그 대안으로 CWB 전략을 구축했죠. 그런데 시 행정이나 정치권에서 지역순환경제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었나요? CWB는 기존의 대자본 투자 유치와는 다르고, 단기간에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성과가 나타나는 정책을 추진한 동력이 궁금합니다.” “프레스턴은 1990년대 말부터 쇼핑센터 건설을 추진했지만, 금융위기 여파로 결국 2011년에 중단되었습니다. 실패하고 나니 보였던 것 같습니다. 지역의 명운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의 위험성을요. 그래서 지역 개발 전략을 다양화하자는 취지에서 CWB 전략을 추진하게 되었죠.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실패한 경험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델이 뿌리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효과는 분명합니다. 지역에 일자리가 늘어나고, 부가 창출되고, 불평등이 완화되는 등 지역의 회복력이 강화되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역에 잠재적 수요를 확인했고, 이제는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프레스턴의 CWB 전략은 생활임금 도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공공부문에서 먼저 최저임금보다 약 20% 높은 생활임금을 지급하기 시작했고, 대학이나 병원 등 지역의 ‘앵커’ 기관들에도 생활임금 지급을 권장했습니다. 프레스턴시는 랭커셔의 행정 수도(주도)로, 시청과 주 청사가 함께 있죠. 이 두 기관이 생활임금과 진보적 조달 정책의 선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대형 병원과 대학들도 이에 동참했고요. 조달 참여 기관들에 생활임금 기준 충족을 요구함으로써 이를 지역 전반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고, 민간 부문에도 장려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조달이었습니다. 대기업 중심의 조달 및 유통 모델이 지역 가치 창출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진보적 조달 정책’을 펼치며 지역 기반 조달을 위해 조달 문턱을 낮추고, 지역 기업의 참여를 독려했죠.” “프레스턴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호응했네요. 수용성도 높았고요. 대덕구도 그랬습니다. 대덕구는 지역화폐인 ‘대덕 e(이)로움’을 발행해 지역 내 경제 순환을 촉진하고자 했어요. 대덕구는 대전의 5개 구 중 사업장 가입자 평균 월 소득이 가장 높아요. 그런데 대덕구민 평균 월 소득은 3위(2018년 기준)에 머물렀어요. 이는 대덕구 소재 사업장 근로자들이 대덕구에서 돈을 벌어 다른 지역에서 소비하는, 소비 유출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대덕구는 자영업 비율이 높아요. 주민들에게 우리 지역에 돈을 써야 소상공인들이 살고, 우리가 산다고 직접 설명하고 다녔어요. 지역화폐 성공은 주민 참여에 달려 있죠. 그래서 명칭부터 공모전 통해 정했고, 소규모 모임도 많이 조직했어요. ‘통장 협의회’나 ‘주민 홍보단’ 등 소규모 모임을 통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고요. CWB와 같은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에 지역 화폐가 디딤돌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정치인의 영향력은 공식적인 지위보다는 그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영국 노동당은 지방 분권을 활성화하고자 하며, 지역에서 교육이나 주거 등과 관련해 자체 정책을 더 많이 추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형식적 분권이 아닌 실질적으로 지역의 힘을 강화하는 분권입니다. 저는 지자체들이 CWB와 같은 방법을 같이 실천할 때 지역의 자립과 힘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에서도 프레스턴의 CWB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이 한국의 여러 사례, 특히 지역화폐 도입이나 지역주민 중심의 에너지 프로젝트, 영암군처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창고를 복합문화센터로 탈바꿈시킨 사례 등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개별적 시도들이 지역 경제 전반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정책으로 발전해야 하겠죠.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와 지방의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사회 구조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지역의 내발적 발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어요. 지역 발전의 핵심 기반은 공동체 자치력이며,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회에서는 주민자치기본법, 공동체지원기본법,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을 논의하고 있죠. 또한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플랫폼이 필요해요. 제가 대덕구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중간지원조직 개념의 주민자치회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행정 언어와 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 일종의 ‘통역’이 필요하죠. 플랫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요. 플랫폼을 통해 주민과 행정이 만나고 소통하면, 양측의 협력이 훨씬 원활해집니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주민 자치력을 강화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 의미를 지역에 전파할 수도 있고요. 플랫폼은 주민들이 모일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도구예요.” 아쉬운 사례가 있어요. 박정현 의원이 대덕구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도입한 지역화폐 정책은 좋은 성과를 냈었어요. 이에 고무된 대전시는 이 정책을 광역시 전체로 확대 적용했었지요. 그런데 중앙정부가 광역 단위에서만 지역화폐를 발행하도록 결정을 내린 거예요. 대덕구를 비롯한 기초지자체는 독자적인 지역화폐를 발행을 할 수 없고, 대전시와 같은 광역 단위 지역화폐만 사용 가능해진 것이죠.  지역화폐나 CWB 전략 모두 격차를 해소하고 부의 역외 유출을 막자는 것이 핵심이잖아요? 사실 대전 안에서도 원도심과 신도심 간 격차가 꽤 크대요. 신도심 인구가 원도심보다 12% 정도 많고, 점포 수도 약 6% 더 많아 소비 활동이 신도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요. 대덕구는 원도심에 가까워, 구 차원의 지역화폐 발행을 통해 지역 내 자영업자들에게 경제가 순환되도록 했는데, 중앙정부의 결정으로 대전시 전체에 통용되는 지역화폐만 남게 된 거예요. 원도심 소상공인에게 지역의 부가 순환되는 지역 화폐의 이점이 사라져 버린 거죠. 정책의 원래 취지와 어긋나는 결정을 중앙정부가 잘 모르고 내려버린 것이죠.😣 새삼 지역 맞춤형 정책의 중요성과 중앙-지방 간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대담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함께 방한한 닐 맥킨로이 미국 싱크탱크 ‘협력하는 민주주의’의 CWB 글로벌 리더는 세계 곳곳의 CWB 사례를 연구하며 지역별 맞춤 전략을 고민하고 있어요. 맥킨로이는 CWB는 모두 똑같은 모습이 아니며 지역의 상황과 특색을 반영한 경제전략 모델로서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2024 지속가능한 로컬경제전략 국제포럼’에서 그는 “CWB를 구성하는 5개 기둥을 한꺼번에 도입하기보다는 지역에서 즉시 적용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어요. 지역의 현황을 면밀히 분석한 후 지역순환경제라는 큰 틀 안에서 적합한 전략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이번 대담은 알고 보면 오랜 인연 끝에 열린 행사입니다. 박정현 의원이 시의원과 구청장 시절 지역경제와 공동체에 관한 여러 사례를 연구하던 중 프레스턴 사례가 눈에 띈 거예요. 지난해 봄, 그는 지방정부 단체장들의 모임에서 프레스턴 모델을 주제로 한 토론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런데 정작 토론회 당일 박 의원은 코로나19 양성반응으로 참석하지 못했고요. 여하튼, 그 토론회를 계기로 희망제작소는 지난해 가을, 지자체장들과 함께 프레스턴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포럼은 대한민국을 가로지르며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되었어요. 전남 영암군과 서울 국회의사당, 경기도의회 등에서 CWB 관련 포럼이 열렸고, 대전과 서울 성수동 등 사회연대경제 현장 방문 및 간담회가 있었거든요. 매슈 브라운 의장은 일정 중간에 병원에서 링거까지(...😥)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한국의 사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지역재생에 대한 아이디어와 생각들을 나눴답니다. 프레스턴 사례를 처음 접했을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조달 계약 시 공정한 고용조건을 갖췄는지 확인하는 부분이었어요. 보통 구매나 조달에서는 비용을 중요하게 보니 최저가 입찰이 많잖아요. 그런데 프레스턴은 조달 계약 시 직원과 고객이 연령과 성별, 인종과 종교 등으로 차별받지 않는지, 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있는지, 비용 절감만을 위해 무리한 인력 배치를 하지는 않는지 등을 살펴보더라고요. 조달을 통해 사회적 효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죠. 계약 시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만 살짝 바꿔도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정책 입안자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르침이지 않을까요? ※ 이 콘텐츠는 뉴스레터 스피커스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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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군들을 위한 시: 지역에 살으리랏다!
우리 사회에 스며든 인구감소 문제는 정말 심각하죠. 때로는 ‘0.72’라는 출산율이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정말 홀로서기조차 불가능한, 소멸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도시보다 인구와 인프라가 적은 지역에서는 이 바람이 더욱 매섭습니다. 저출생 문제에 대도시 쏠림 현상까지 중첩되었기 때문이죠.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4일 열린 제15회 아시아미래포럼 분과세션 1 ‘기로에 선 지역, 위기를 기회로’에서는 인구감소 시대에서 한일 양국 지역 사례와 정책을 다뤘습니다. 관계인구, 지역순환경제, 시민참여 에너지 정책 등 양질의 일자리와 탄소중립 실현,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동체가 탄탄한 삶터로서의 지역을 만들기 위한 도전과 사례들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관계인구’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기조발제를 맡은 다나카 데루미 일본 시마네현립대 교수이자 <관계인구의 사회학> 저자는 “인구가 줄어들어도 지역은 재생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2016년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관계인구’는 ‘특정 지역에 지속해서 관심을 두고 관여하는 외부인’을 뜻합니다. 관광과 정주 사이에 있는 사람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나카 교수는 지역 주민들이 ‘정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알고 보니 우리에게도 익숙한 감정이었어요. ‘자녀들이 도시로 나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요. 그런데 다나카 교수는 이것이 문제라고 말해요. 정서적 고립이면서 지역의 진정한 문제라고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라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남의 일처럼 여겼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다나카 교수는 외부인, 즉 외부에 있는 인재에 주목합니다. 외부인은 지역에 5가지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데요, ①지역을 재발견하고 ②주민들의 자부심을 함양하고, ③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④지역 변화를 촉진하고, ⑤지역에 얽매임이 없기에 보다 자유롭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시마네 현 오난초 아스나 지구의 사례를 한번 볼까요? 이 600명 정도 규모의 작은 마을에는 지상에서 높이 20m에 있는 ‘천공의 역’이라 불리던 우즈이(宇都井)역이 있었습니다. 2018년 JR산코센이 영업 종료로 이 특별한 역이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은 ‘이나카 일루미네이션’ 축제를 시작했습니다. ‘이나카’는 일본어로 시골이라는 뜻으로,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일루미네이션을 함께 즐기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손수 진행하는 작은 행사였지만, 연간 2천여명의 관광객이 찾는 축제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고령의 주민들은 행사 진행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결국 행사를 폐지하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때 주민들은 ‘관계인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관광객들은 축제를 구경하고 돌아가는 것에 그치지만, 관계인구는 축제의 준비부터 진행, 뒷정리까지 함께하기로 한 거예요! 지난해에는 시마네 현립대학 학생들을 포함한 60여명의 관계인구가 축제 전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뒷정리가 너무 힘들어 행사의 꽃(!)인 뒤풀이도 없었는데, 지난해에는 관계인구들과 즐거운 뒤풀이까지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제 관계인구를 위해서라도 축제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요.😀  다나카 교수는 관계인구가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바로 ‘지역 재생 주체의 형성’이죠. 외지에서 온 관계인구와 함께하며 지역 주민들이 정서적 고립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의 주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관계인구의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주민들의 주체성이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지역 쇠퇴의 악순환이 지역 재생의 선순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민과 관계인구의 창의적인 발상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① 신안군: 햇빛과 바람, 그리고 연금 우리나라 지자체 중에 섬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 알고 계세요? 바로 전라남도 신안군입니다. 인구 3만8천여명 규모의 신안군은 대한민국 전체 약 3천여개 섬 중 천여개 섬을 가지고 있대요. 또한 전국 최고 수준의 일조량을 자랑하는 지역이기도 하고요. 섬과 햇빛, 바람이라는 지형적 조건을 활용해 신안군은 태양광과 지주식 해상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뭔가가 더 있습니다.😎 신안군은 2018년 10월 전국 최초로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습니다. 이 조례의 핵심은 태양광 발전을 통한 개발이익을 지역 주민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햇빛과 바람은 자연이 준 것이니까요.😀 구체적으로는 발전회사가 수익의 30%를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면, 사업 인허가와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수익을 주민들과 나누는 제도가 바로 ‘햇빛연금’이에요. 2021년 첫 지급액 17억원을 시작으로 3년 만에 지급 총액이 100억원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햇빛연금은 지역화폐로 지급되기에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네요. 나아가 신안군은 이 조례를 바탕으로 ‘햇빛아동연금’ 제도를 신설하고, 농협과 협력하여 관련 전용 상품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구 고령화와 지방소멸 위기 고위험군에 포함된 신안군 인구가 햇빛연금 수혜 지역을 중심으로 소폭 증가했습니다. 2014년 이후 7년 만에 처음으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해, 2023년 9월까지 248명이 순증가했다고 합니다.  ② 영암군: 로컬상생과 수평적 경제로의 전환 인구 5만여명의 전라남도 영암군은 여느 지역처럼 지역소멸 문제로 고민하는 곳입니다. 영암군에는 ‘대불국가산단’이 있습니다. 1997년부터 가동한 대불산단은 현재 2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재직하며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곳입니다. 하지만 재직자 절반 이상이 인근 남양과 목포시에 거주하고 있어요. 영암에서 돈을 벌어 다른 지역에서 돈을 쓰는 셈이죠. 농업 분야의 양극화도 심각합니다. 영암군 5만여명 중 1만2천여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전체 농가 중 7%에 불과한 대규모 농가(5만 헥타르 이상)가 영암군 전체 농지 면적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 때문에 영암군은 지역의 부(富)를 증식하고,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지역소멸이 단순한 인구감소를 넘어 지역사회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무너지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영암군은 ‘로컬 상생과 수평경제로의 전환’을 기조로 하는 지역순환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협약을 맺고 계속 교류하고 있는 영국 프레스턴의 ‘부유한 지역공동체 만들기(Community Wealth Building: CWB, 공동체자산구축)’ 모델을 참고하여 ‘영암형 지역순환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영암군은 사회적 가치가 있는 물품의 판매와 구매를 통한 일자리 창출, 사회적 가치 기반의 경제조직 설립 등을 추진하고 있어요. 또 지자체 자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예산이잖아요? 예산을 지역경제 순환의 핵심 동력으로 활용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예컨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에 우선권을 부여하거나, 영암 지역에 있는 자재와 인력을 활용하는 업체인 경우 다음번 계약 시 해당 사항을 반영하는 등의 방식이죠. 나아가 공공조달시스템이나 ESG 관련해서 주변 시군과 광역 공공조달권도 함께 추진해 볼 예정이라고 해요.  ③ 부여군: 지역화폐로 순환경제 박차 인구 약 6만여명의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의 수도로 널리 알려진 역사도시라 꽤 친숙하실 텐데요. 부여 역시 다른 농촌 지자체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 이로 인한 소비 침체, 그리고 인근의 대전, 세종, 천안으로의 역외 유출과 같은 문제들이요. 특히 농업과 자영업 종사자 비중이 높은 부여군의 특성상, 인구도 돈도 바깥으로 나가니 남아있는 주민도 떠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구조 속에 있는 것이죠.😥  이러한 유출을 막고 지역 안에서 부(富)를 불리기 위해 부여군은 지역화폐 ‘굿뜨레페이’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여군의 인구가 6만명인데 굿뜨레페이 가입자는 7만5천명을 넘어섰어요. 이는 인근 지역 주민들도 부여의 지역화폐를 활발히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지역화폐가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골목상권, 소상공인 등 자영업자 쪽으로 돈이 흘러가야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부여 굿뜨레페이는 부여군 내 가맹점 비율이 94%에 달하고, 사용액도 2020년에 47억에서 2023년에 56억원으로 골목상권에서 사용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행정의 많은 노력이 숨어있습니다. 소상공인 매장 이용 시 최대 10%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신용카드와 겸용을 제한하는 한편, 독자적인 블록체인 시스템을 따로 개발·관리해 굿뜨레페이 가맹점 수수료는 0원이라고 합니다. 박정현 부여군수는 “지역화폐 없이 살아가기 불편한 지역으로 확 바꿨다”고 표현할 만큼 굿뜨레페이에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앞서 살펴본 사례들은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린 혁신적인 접근을 보여줍니다. 관계인구를 통한 일본의 지역 축제 활성화, 신안군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신재생에너지 사업과 이익 공유 모델, 영암군의 부유한 지역 공동체를 위한 수평적 경제로의 전환, 부여군의 지역화폐 활성화 등 각 지역의 노력이 의미 있는 결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규모 산업단지나 대기업 유치와 같은 기존 문법이 아닌,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잘 파악하고 활용한 맞춤형 정책이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더나은사회연구센터장은 지역 문제의 핵심을 “경제·사회적 불평등으로 시민들의 삶이 침해받고, 이러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이고 복합적으로 목격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지역의 삶의 질 저하는 인구 유출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지역 쇠퇴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느리지만, 천천히 지역의 자산과 가치를 늘리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한겨레는 지역 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다양한 지역 전환 사례를 발굴, 확산하기 위해 ‘지역 조사 및 평가’(가칭)를 기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국 226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환경, 보건복지, 경제와 사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정량·정성적 조사를 진행하려 해요. 단순히 줄세우기식 순위 발표가 아니라 지역의 인구 규모와 인프라 등을 감안하고, 지역 특색에 맞춰 노력하고 성과를 보이는 곳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조사 항목에는 삶의 전환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과 고용 안정은 물론 사회연대경제 활성화까지 포괄한 경제, 삶의 튼튼한 안전선인 복지, 각자의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사회 등 폭넓게 살펴볼 예정이라네요. 아마 2025년 상반기에 결과를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역의 공간적, 기능적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그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지역 정책의 핵심 과제입니다. 이날 토론에서 서재교 우리사회적경제연구소 소장은 주민들의 생활권, 정책 범위, 공공조달의 역할이라는 3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했어요. 지역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할 텐데요. 특히 앵커 기관과 사회적경제, 지역순환경제 간의 상호작용과 경제적 승수효과를 면밀히 보고 지역과 중앙정부가 서로 협력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이 콘텐츠는 뉴스레터 스피커스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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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단단한, 비영리의 재발견
예전에는 영리 조직을 만들 것인지 비영리조직을 만들 것인지 선택이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고 이익을 내려는 사업을 시작한다면 영리기업을 만듭니다. 시급한 사회적·환경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영리단체를 만들고요. 비영리단체라고 하면 외부의 후원을 통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동물보호 활동을 하는 등 일반적인 기업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었죠. 하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많은 비영리조직이 영리기업과 경쟁할만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영리기업도 재무적 수익과 함께 사회적 수익을 고민하거든요. 비영리조직은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존의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들은 혁신적인 접근법으로 돌파구를 만들어냅니다. 변화를 만들어내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지만 강한 조직들입니다. 지난 12월 3일, 서울 성수동에서 그 조직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살펴볼까요?😊 의생활 속 제로웨이스트 실천 문화를 제안하는 ‘다시입다연구소’, 아동·청소년에게 나다움을 찾는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유스보이스’, 장애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무의’, 폐지 수거 어르신에게 안전한 일거리를 제공하며 사회변화를 꿈꾸는 ‘러블리페이퍼’.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세상의 다양한 문제들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조직들입니다. 이들을 영리와 비영리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이들에게 붙은 이름이 바로 ‘비영리 스타트업’입니다. 비영리조직과 스타트업의 합성어로 최근의 사회적 변화와 요구를 반영해 등장한 개념이죠. 스타트업이 빠른 성장과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한다면, 비영리 스타트업은 사회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비영리스타트업은 기업가정신과 혁신, 기술과 경영을 기반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초기 단계의 작은 조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비영리 부문도 시대에 대응하는 변화와 성장이 요구됐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비영리 부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실험이 나타났어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체계가 충분치 않기에 일부에서 이를 돕고 있습니다. ‘루트임팩트’, ‘브라이언임팩트’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난 3년여간 두 곳에선 임팩트 생태계 조성을 위해 인재 채용을 돕는 프로그램(임팩트커리어NPO)과 공간 입주비용은 물론 이들 조직의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헤이그라운드 비영리 멤버십)을 함께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후원과 지원을 통해 성장한 비영리조직의 경험과 배움을 공유하기 위해 ‘2024 루트임팩트x브라이언임팩트 비영리 콘퍼런스’가 열렸습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루트임팩트 성장지원팀 정승구 팀장은 “참가자 모집 며칠 만에 300여명이 신청해 모든 세션이 마감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나보다 딱 한발 앞선 조직과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덧붙였어요. 그래서 스피커스도 값진 경험으로부터 인사이트를 얻고자 콘퍼런스에 참여했습니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구독자분들께 전달하려 합니다. ① 빠른 성장보다 의미 있는 지속성을 스타트업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죠. ‘빠른 성장’, ‘대규모 투자’, ‘공격적인 확장’...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10년을 걸어온 조직이 있습니다. 29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크지 않은 조직이지만, 매월 10만명의 시민이 찾는 플랫폼을 만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이하 빠띠)’가 그곳입니다. 권오현 빠띠 이사장은 “지금이 아니면 기술이 시민들을 더 고립시킬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작했죠”라고 말합니다. 2015년 시작한 빠띠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시민들이 서로 협력하며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는 기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확산하는 것이 목표였죠. 하지만 비영리 스타트업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반 스타트업처럼 투자를 받아 빠르게 성장하는 대신, 그들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시민들의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작은 실험을 하고, 그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갔죠. 지엠오(GMO) 완전표시제를 위한 시민입법 프로젝트부터 사회적 의제를 놓고 전문가, 활동가, 정치인, 일반 시민이 모여 토론과 투표로 해결 방안을 찾는 참여형 의사결정 플랫폼까지.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본질은 잃지 않았습니다. 투자를 받지 않았기에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대신 성장은 더뎠지만, 빠띠는 이런 방식에서 오히려 강점을 발견했습니다. 구성원 모두 진정한 동료로 함께 성장할 수 있었고, 사회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죠. 10년이 지난 지금, 빠띠는 ‘실험을 마치고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작지만 단단한 이 조직이 앞으로 어떤 혁신을 만들어갈지, 그들의 항해가 다른 비영리조직에 어떤 영감을 줄지 기대됩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일을 현실화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 기운이 나는 일이더라고요.” 권 이사장의 이 말처럼, 작은 조직의 꾸준한 도전이 만드는 변화의 힘을 주목해봅니다.😊 ② 당사자가 만드는 변화 2014년 설립한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이하 에이유디)’은 ‘농난청인 의사소통과 사회참여 불평등 해소’를 목적으로 한 조직입니다. 에이유디의 박원진 상임이사는 발표를 시작하며 용어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농인(Deaf),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난청인(Hard of Hearing)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 대신 각 개인의 특성과 필요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용어입니다. ‘장애’가 아닌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그래서 ‘농난청인’이라는 용어 사용에는 이들의 권리와 접근성을 높여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에이유디가 제공하는 대표적인 서비스는 문자통역입니다. 문자통역사가 발제자의 발언을 실시간으로 타이핑하면, 참석자들은 스마트폰, 노트북, 빔스크린 등 다양한 기기를 통해 자막을 확인할 수 있죠. 박원진 상임이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회고하며,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했던 시기인 동시에 국가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게 한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대학가가 전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농난청인 학생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제공받던 노트북 대필이나 문자통역사의 타이핑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게 됐거든요. 수업을 듣기 어려우니 휴학을 선택한 농난청인 학생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에이유디는 발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에이유디가 가진 원격 문자통역 서비스 ‘쉐어타이핑’ 라이선스를 23개 대학교에 무상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덕분에 학생들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코로나 이후에도 이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고 싶다는 요청이 이어졌습니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잠재고객을 확보한 셈이 된 거죠. 이제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실시간 통역을 받을 수 있는 이 서비스는 필수 지원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사자가 직접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고 제공하는 시대입니다.” 박원진 상임이사의 이 말에는 중요한 관점의 전환이 담겨 있어요. 농난청인을 단순한 복지 수혜자가 아닌, 스스로의 필요를 해결하는 혁신의 주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된 것이 2023년 시작한 ‘에이유디 펠로우십’입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농난청인 리더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지난해 2명을 시작으로 올해도 2명의 펠로우를 선발했습니다. 최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음성인식 자막 서비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원진 상임이사는 여전히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고령자나 복합적인 요구를 가진 분들을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③ 콜렉티브 임팩트로 더 큰 임팩트 만들기 “3천만원을 갖고 재난 현장에 들어가면 일주일이면 다 써요.” 24년간 26개국의 재난 현장을 누빈 ‘사단법인 더프라미스’의 김동훈 상임이사가 말합니다. 그는 작은 규모 비정부조직(NGO)의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협력의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한국에서는 콜렉티브 임팩트(Collective Impact)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최대 효과를 위한 최소 협력’이라는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각 단체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방법을 찾은 겁니다. 예를 들어, 현장에서는 각자의 유니폼을 번갈아 입으며 활동합니다. 후원 기업들의 홍보가 골고루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를 존중합니다. 현장에서는 일에만 집중해 성과를 냅니다. 재난 현장에서 서로 다른 조직이 함께 일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모두 감안하고, 사업 진행 중에는 오직 사업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나중에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일이 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성과를 내다 보니 참여 단체의 만족도가 높고, 그래서 지금까지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쌓은 협력의 결과는 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려동물 동반 대피소가 설치됐고, 대구에서는 자원봉사센터를 중심으로 재난 상황에 대응하는 전체적인 체계가 갖춰졌습니다. 김동훈 상임이사는 “사회혁신의 최종 목표는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1섹터(정부), 2섹터(민간영리), 3섹터(시민사회)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각 섹터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해야 하는데, 이때 새로운 실험에 나선 3섹터가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줘야만 1섹터와 2섹터에서 자원을 투입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물론 이러한 협력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겠죠. 김동훈 상임이사는 협력을 위한 세 가지 실용적 조언을 제시합니다. 첫째, 평소에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서도 서로 믿고 협력할 수 있죠. 둘째, ‘실수를 허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도전적인 시도에는 실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셋째, 명분이 아닌 실제 효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효과가 있을 때 협력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장에서 우리만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해외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우리 현실에 맞는 협력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행사가 열린 헤이그라운드는 서울 성수동에 있습니다. 헤이그라운드에는 사회적기업, 소셜벤처, 비영리스타트업 등 임팩트를 창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 100여개가 넘는 조직들이 모여 있어요. 해결하려는 사회적 문제나 분야는 각기 다르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같습니다. 지난 2년간 루트임팩트와 브라이언임팩트는 헤이그라운드를 중심으로 비영리조직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실험을 해왔습니다. 단순히 사업비를 지원하는 것이 아닌, ‘공간’과 ‘사람’이라는 두 가지 핵심 자원을 지원하며 조직의 근본적인 역량 강화를 도모한 것입니다. “7개의 공간을 떠돌다가 드디어 안정을 찾았어요.” 젊은 정치인의 도전과 성장을 돕는 일을 하는 ‘뉴웨이즈’ 박혜민 대표는 헤이그라운드에 자리 잡은 후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2명으로 시작한 팀이 5명으로 성장했고, 월 정기후원액이 2배 증가했으며, 비영리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전환하는 등의 성과를 이뤘어요. 무엇보다 비영리조직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협력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며,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였습니다. ‘사단법인 공감인’ 장보임 사무국장은 “버티는 시기였지만, 내부가 점점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구성원들의 자신감이 성장한 기간이었죠”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공감하고 공감받는 마음이 연결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미션으로 한 공감인은 지난 10년간 솔루션의 고도화에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솔루션도 조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지원을 받는 기간 동안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며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팩트커리어를 통해 만난 새로운 동료들은 이제 조직의 핵심 멤버가 되어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요.  한국모금가협회 황신애 상임이사는 더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황신애 상임이사는 “헤이그라운드 안에선 따뜻한데, 한 걸음만 나가도 차갑습니다. 함께 모여 있을 땐 ‘우리’인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혼자’가 됩니다”라고 말해요. 이는 작은 규모의 비영리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선 개별 조직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는 이어 “좋은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그만큼의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보면, 실패한 게 아니라 단지 축적의 시간이 부족했을 수 있죠”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비영리 생태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 더 긴 호흡으로 기다려줄 수 있는 지원 체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개별 조직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비영리조직을 둘러싼 환경의 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구독자분들께서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지 묻기 어려운 요즘입니다. 분노와 불안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일까요. 일상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사회변화를 위한 비영리조직들의 꾸준한 도전과 변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겨울을 견디고 나면 다가올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니까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됩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지난 6일 기자회견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시 읽어봅니다. “많은 질문을 하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때로는 ‘희망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얼마 전부터, 몇 달 전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는데,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스피커스와 함께 희망의 씨앗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 ※ 이 콘텐츠는 뉴스레터 스피커스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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