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정치 진단 및 평가와 과제
1. 기후정치의 의미와 중요성   현재의 정치는 국제 기후체제 수준에서나 일국적 정치 차원에서나 기후위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을뿐 아니라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단지 정치인 개인들의 자질 부족이나 정치 제도의 부분적 결함 때문이 아니다. 화석 자본주의가 빚어낸 대의 제도와 우리의 인식을 고정시키는 성장주의는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실현 가능하지 않은 국지적이고 표피적인 기후 처방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후위기 대응 불능의 기후정치를 지속하게 하는 이유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기후위기를 다룰 수 있는 다른 정치, 나아가서 정치의 개념과 작동 방식 자체를 전환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기후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다루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물리적 및 경제사회적 현상이자 의제로서 기후위기를 다루는 (제도/비제도) 정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후정치는 기후위기를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많이 수용하고 정치 의제와 예산 등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삼는 정치로 이해된다. 둘째, 기후위기가 기존 정치의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현상과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기후위기가 광범하고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요인과 결부된 것이라는 인식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기후정치는 근대적 대의제 민주주의와 삼권 분립, 사회 계약 같은 핵심적 정치 원리 원칙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기후위기를 해결하거나 적응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셋째, 기후위기 속에서 정치 자체의 의미와 방식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보다 넓은 정의다. 이는 근대성이 부과한 인식론인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분법을 허물고 비인간 주체까지 포함하는 다중적 행위자를 포괄하는 행위 준칙과 세계관을 요청하는 접근이다. 물론 이 세 개의 정의가 배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본 연구에서는 기후정치를 하나의 정의로 국한하는 대신에 이러한 정의의 변동과 상호 교차 속에서 기후위기와 정치 모두에 대한 인식을 자극하고 확장하고자 한다. 따라서 기후정치 논의의 전개와 심화, 그리고 현실 정치에서의 사례와 실험들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정의의 적절성을 확인하고 기후정치의 내포와 외연을 그려보이려 한다.   2. 기후정치 논의의 전개와 심화   지금 정형화된 대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논쟁과 투쟁의 자연스러운 합의 결과가 아니라 화석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 형성된 것이라면 기후위기의 정치도 에너지의 물리학과 정치학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기성 자본주의 체제는 기후변화와 대응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이데올로기적 부인”을 초래한다. 게다가 문제는 기후위기는 근대적 민주주의가 접해 보고 대응해보지 못했던 독특하고 장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심층적응"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과학 이론이 갖는 기후위기 전달법의 한계를 강조한다. 심지어 기후위기를 이해하고 걱정하는 이들조차 다양한 이유와 맥락에서 ‘탄소 비전 터널’ 또는 ‘기후지체 담론’에 갇힌다. 때문에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제제를 전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후 리바이어던"의 논의는 이를 네 개의 이념형으로 조심스레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것은 '선한 기후 베헤모스를 기다리는 일'일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기성 정치의 관성을 타개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제안들이 체계적이지는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는 탈성장 담론은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변혁론에서 새로운 기후정치와 전략의 자원으로 삼는다. 라이트의 틈새적, 공생적, 단절적 변혁의 구별을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하는 운동의 양태들에 대입함으로써 각각의 전략과 변혁 양태가 ‘대안의 모자이크’로서 탈성장의 전략적 캔버스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3. 기후정치의 현실과 다른 정치의 모색   기후위기는 기성 제도 정치도 변화시키고 있다. 미국의 선라이즈 운동과 그린뉴딜 발의, 그리고 독일의 탈석탄위원회의 사례는 의회 정치와 제도 정치의 조건과 자원이 기후위기를 진지한 의제로 만들고 사회 전체에 유의미한 시그널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효과적인 사회운동의 압력이 존재하거나 제도 정치의 대변성과 책임성이 보장될 때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후위기 해결은 이러한 집단적 인식과 감각은 매우 넓고 다양한 문제에 적용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전문적 정치인과 관료들의 이너 서클의 정치의 개혁을 넘어서는, 추첨식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진행 중인 기후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실험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2020년경 기후 시민의회가 실험되었는데, 모두 일정한 성과와 한계를 보였다. 또한 기후정치는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넘어서는 프로젝트를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자유주의 시장이 정치를 복속시키는 구조를 넘어서서 사회주의적 계획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 또는 참여 민주주의의 재소환을 요구하는 주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지구의 절반 사회주의" 제안은 많은 생산적인 토론을 낳을 수 있다. 한편, 기후정치는 정치의 주체와 의제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국내외 기후소송 사례는 기후위기를 다루는 현재의 국가 계획과 법제도가 세대별 대변성과 책임성을 담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나아가서, 법학계 일각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자연법’과 철학적 조류로서 논의를 넓혀가고 있는 ‘신유물론’ 또는 ‘포스트휴먼’ 이론은 부르주아적 소유권 중심의 근대 법체계와 정치 제도가 갖는 한계로까지 비판을 확장하고 있다.   4. 한국의 기후정치   최근 한국의 선거정치를 살펴 보면 제도 정치 내의 기후정치가 경로의존성을 탈피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기후 대중운동의 성장과 기후 유권자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과 언론이 보이는 적극적인 반응은 유의미한 변화다. 시민단체들의 기후정치 프로젝트인 ‘기후정치바람’의 발표에 따르면 기후 의제에 대해 알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후 의제를 중심으로 투표 선택을 고려하는 이른바 ‘기후 유권자’가 33%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후정치, 최소한 기후 유권자 정치에 대한 기대를 높이지만 그러나 이런 의사와 현실 선거 정치의 선택지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22대 총선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두 거대정당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며 혐오와 공포 속의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정치 속에서 기후위기와 같은 우리의 긴 미래를 규정할 중요한 문제들은 다시금 뒤로 밀려났다. 2019년 세계적 기후행동의 물결을 거치고 국내외적 압박이 본격화되면서 문재인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을 선포하고 한국형 그린뉴딜, 탄소중립 시나리오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기후침묵의 뒤를 이은 것은 일종의 허구적 기후정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제도와 관행 자체가 기후악당이고 기후지체의 주범이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5년 단임 대통령중심제와 그것이 낳는 단기적 시야의 승자(양당) 독식 정치는 기후위기 대응에서 최악의 것이다. 의원내각제와 빌례대표제가 기후위기 해결을 보장해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과 같이 주기적으로 리부팅되고 정작 중요한 의제와 쟁점들은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정치체제로는 기후위기 대응은 불가능하다. 또한 한국 기후 정책의 난맥상과 독특한 전개 양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 주도의 수출주의와 저렴한 인프라라는 구조와 제도로 실물화되는 성장주의다. 한국의 기후정치가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독특한 성장주의와 결합된 정치 및 경제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함께 극복해야 한다.   5. 정치와 관계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자원을 배분하고 차선을 선택하는 방식의 정치의 변화 요구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는 제도 정치와 사회운동 및 시민의 삶을 관통하는 정치의 상을 제시해야 한다. 기후 베헤모스를 순치하고 기후 X를 활성화할 구체적인 도구와 방안들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정치의 주체의 확장(미래세대, 지역, 비인간 자연)과 의제의 적극적 확장(지구행성적 한계를 고려하는 도넛경제학의 정책 규범화) 역시 필요하다. 또한 기후정치는 현재의 정치 및 운동 지형과 전망에 근거해서 개입 지점을 확보하고 다양한 시도를 전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종합적 바탕이 되는 얼개로서 “기후위기, 탈성장, 존재 다양성, 내각제 개헌(정당책임제)”을 키워드를 제안한다. 우리에게 기후정치를 실현할 정당이 요구된다면 바로 이러한 기치를 내 건 정당일 것이다. 기후 시민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또는 도덕적 주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기후위기의 절박함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가증한 미래에 대한 상상이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는 개별 정책 요구의 단순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기후정의를 구현하고 기후 운동을 통해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주는 스토리텔링 또는 내러티브가 더욱 필요하다. 앞으로 몇 년은 현행 대통령제 폐지와 정당책임제를 포함하는 기후위기 대응 정치 제도의 재구성, 환경과 공존 및 연대의 가치를 분명히 하는 ‘녹색국가’ 지향을 담는 생태개헌 제안으로 우리 스스로 의제의 스케일을 키우고 대중적 토론을 촉발해야 할 때다. 향후 기후정치와 기후운동의 공통 과제로, 첫째, 제도 정치와 운동 정치 양극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중앙/지역 정치를 급진화하고 풍부화하기 위한 구상을 만들고 공유하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당장의 지렛대가 될 의제와 정책을 확보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여기에는 생태개헌안뿐 아니라, 한국판 좌파 그린뉴딜의 컨텐츠, 탄소세와 탄소배당 같은 핵심적 감축과 재정 확보 수단, 노동시간 단축 같은 사회적 메시지가 큰 정책과 운동 의제가 포함된다. 셋째, 녹색정동(생태적 포퓰리즘)을 위한 논의와 실험이 시작되어야 한다.  발표 전문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코멘트 달고 도서 ‘나는 얼마짜리 입니까’ 이벤트 응모하기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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