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는 기업, 더이상 숨겨선 안됩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2년 산업재해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를 당한 재해자의 수는 모두 13만 348명에 달합니다. 한국의 취업자 수가 대략 2800만 명이니, 일하는 사람 200명 중 한 명은 산업재해를 경험한 셈입니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는 874명, 산재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1349명입니다. 모두 2223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해당 통계가 산재를 신청하고, 승인된 경우에 한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숫자로 집계되지 않은 죽음 역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산업재해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 산업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위험 기업'인지 물어본다면, 막상 쉽게 떠오르는 이름이 많지는 않습니다. 산재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SPC, 대형 참사가 연달아 발생한 현대산업개발, 역시 잇따른 인명사고가 일어난 DL이앤씨 정도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년 2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 기업'은 두세 곳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느 기업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떤 산재 사고가 발생했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죽거나 다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산업재해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공개 되더라도 찾아보기도 힘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산재 발생 사업장, 공개는 하지만 한계가 많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매년 한 차례 '산업재해 발생건수 등'을 공표합니다. 이는 '연간 2명 이상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한 사업장', '사망 만인율이 규모별같은 업종의 평균 사망만인율 이상인 사업장', '화재, 폭발, 위험물질 누출 등 중대산업사고가 발생한 사업장', '산업재해 발생 사실을 은폐한 사업장', '산업재해 발생 보고를 자주 누락한 사업장' 등을 공개하는 제도입니다. 어느 사업장에서 산업재해가 일어났는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을 통해 “사업주의 명예·신용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통한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의무이행을 간접적으로 강제”하겠다는 취지인데요. 문제는 이러한 공표 제도가 그 취지에 걸맞지 않게 매우 소극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공개된 '2022년 산업재해 발생건수 등 공표'(2022년 12월 28일 공개) 자료를 살펴보면 '연간 2명 이상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한 사업장'은 17개(원청), 사망자는 47명입니다. '사망 만인율이 규모별같은 업종의 평균 사망만인율 이상인 사업장'은 모두 210개(원청), 사망자는 286명입니다. 이를 합치면 227개 사업장, 333명의 사망재해자가 공표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년 2000명이 넘는 산재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개 대상에서 빠지는 곳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개하는 정보 역시 부실합니다. 업종, 규모, 원하청 사업장명, 사업장소재지, 사망자 수 등을 공개하는데, 몇월 몇일에 일어난 어떤 사고였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고, 사업주가 어떤 안전보건 의무를 어겼는지 등의 정보는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공개 대상에서 빠지는 사각지대도 넓으니, 연구 목적이나 통계 자료로 활용하기도 어렵습니다. 공개 시점 역시 문제입니다. 2022년 12월 28일에 공개한 자료인데, 2020년~2021년에 일어난 사고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심지어 2017년에 일어난 사고의 내용이 뒤늦게 실려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고가 일어난지 한참 후에야 '뒷북 공개'가 이뤄지는 이유는 재판을 통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처벌이 확정된 후에야 공개 절차를 밟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고 한국서부발전 하청업체 노동자 김용균씨는 2018년 12월 11일에 사망사고를 당했습니다. 한국서부발전이 산업재해 발생 사업장으로 공표된 날짜는 3년이 넘게 지난 2021년 12월 29일입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공표 날짜 역시 질질 끌리고, 결국 사고가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이 되서야 슬며시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한 구석에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실 공개', '늦장 공개'는 공표 제도의 본래 취지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산재 예방을 위한 정보 전달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최근 여러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구조적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산재 사망 사고는 제대로 보도되지 못하고, 단신 기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기업은 취재를 거부하고, 고용노동부 역시 '수사 중인 사안'이라는 이유로 입을 닫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쓰고 싶어도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니 취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기업에서 어떤 사고가 벌어졌는지 언론사도 기사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시민들이 '위험 기업'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적극적인 정보공개가 노동자를 지킨다 해외의 사례는 어떨까요?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살펴볼 수 있는 ‘사망 및 재난조사 요약’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벌어진 산업안전 사고들의 사고 발생일, 사업장 명칭, 사고 장소, 사고의 원인과 상세 내용, 부상 정도 등의 정보는 물론이고, 사업체가 무슨 법을 위반했고 그로 인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등의 내용을 키워드 검색을 통해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망사고나 이에 준하는 심각한 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체를 조사한 후 조사 결과를 알리는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런 보도자료에는 사업체에 대한 기본정보와 함께 사고의 경위, 법 위반 사항, 범칙금, 유사 사고 예방을 위한 교훈 등을 담아, 언론사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영국 보건안전청(HSE) 역시 보건안전법을 위반해 유죄가 결정된 사건들에 대해 사업체의 정보, 법 위반 사항, 구형 내용, 사고 기록 등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중대재해가 일어나면 사고의 내용과 원인, 조사 결과, 예방을 위한 필요 조치 등을 정리한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도 미국과 마찬가지입니다. (관련 기사) OSHA나 HSE가 이렇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중대재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공개하고, 사고 내용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이유는 기업에서 어떤 산업재해가 일어나고 있는지 더 많이 알릴수록 사고를 더 예방하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미국의 노동경제학자 매튜 존슨은 [수치심을 통한 규제 Regulation by Shaming]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어느 기업이 산업안전법을 위반했는지 밝히는 언론보도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개선하는 효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어떤 사업장이 산업안전법을 위반했는지 알리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반경 5km 이내에 위치한 같은 업종 사업장의 법 위반 사항이 73% 감소하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이웃한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노동자들부터 안전을 위해 개선을 요구하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 산업안전보건청을 이끌었던 데이비스 마이클스 전 청장은 “문제를 알리는 보도자료 하나가 210번의 근로감독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는 말을 통해 정보공개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법임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중대재해 일어난 '위험 기업' 공개하라 정보공개센터는 지난해 12월 '일하다 죽지않을 직장찾기'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2017년 1월부터 2021년 5월까지 5년 동안 발생한 산업재해 사망사고 데이터를 공유하고, 어느 기업에서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나 몇 명이나 사망자가 발생했는지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입니다. 중대재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기업들의 순위도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대우건설, DL대림산업(DL이앤씨), GS건설 등이 5년간 중대재해가 많이 발생한 위험 기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올해에는 이 웹사이트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2022년 한 해 동안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해달라고 정보공개 청구를 했는데요,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이름이 '수사 및 재판에 관한 정보'이며 '공개될 경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이름은 산업안전보건법이나 중대재해처벌법의 의무 위반 여부를 따지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결국 정보공개센터는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에 나섰습니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이름은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공개되어야 할 정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중대재해 기업의 이름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공개 판결을 요구하는 탄원 캠페인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소송이 '위험 기업'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정보공개가 산재 예방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법정에서 인정 받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고용노동부가 더이상 기업과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재를 줄이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제도 개선에 나설 수 있길 바랍니다.
노동권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