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사건화, 끝나지 않는 노동자 죽음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또 한 명이 죽었다. 6일 오전, 금속노조 사업장인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기자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뉴스가 나오기 전이었다. “또 하청인가요?” 사건에 대한 팩트를 확인하고 취재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필자이기에 노동조합 내부적으로 사안을 확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외부업체인데 하청이라 봐야죠. 10미터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대응 중인 금속노조 충남지부 간부의 설명을 들었다. “또 하청” 기자의 예상은 늘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곧 뉴스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외주업체 직원 추락사” “현대제철, 깊은 애도 표해” 따위의 제목이 빠르게도 통일됐다. 현대제철 측은 “향후 이런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 및 안전 점검을 최우선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말을 언론에 남겼다. 중대재해 사망 기사에서 한결같이 마지막 문장을 채운 말이었다. 말은 무색하게 통용됐다. 언론은 빠른 단신 처리로 적당한 조회수, 트래픽을 챙겨갈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으로 치부되고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 노동조합이 사고의 근본 원인을 찾고 책임을 묻는 항의에 나설 경우 그때는 언론 입장에서 ‘기사의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감히 광고주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한국에선 매일 두 명이 퇴근하지 못한다. 오늘 두 명, 내일도 두 명 더, 그렇게 지난해 사고 사망으로 88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사고 포함 산재 사망자는 2022년 2,062명에 달한다. 한국의 사망만인율은 0.43퍼밀리아로 OECD 국가 중 34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러있다. 모두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 한국이란 사회를 치켜세우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노동자가 죽는 사회에 대해선 침묵한다. 침묵의 배경에는 ‘서사의 사건화’가 있다. 사라진 한 사람의 세계를 기억하는 것은 서사에 집중하는 일이다. 공동체가 하나의 서사에 집착할 때 그 서사는 집단의 문제로 부상하고 구조에 접근하는 지름길을 개척한다. 그렇지 않고 서사가 사건으로 그칠 때 공동체는 뉴스 소비자의 입장에서 반응을 내는 것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사건화가 방관자를 양산하는 셈이다. 계속되는 서사의 사건화로 우리 모두 ‘다른 이의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그 결과 ‘책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지’는 더욱 커져만 간다.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쏘아올린 공 지난해 산재 사망자가 2천 명을 넘지만, 우리가 아는 죽음은 극히 일부다. 대다수 사건화되고 이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극히 일부 사례가 세간에 알려지고 사망한 노동자, 그 유족에 대한 서사가 대중에게 전달된다. 대중 전달 과정의 첫발은 유족, 동료의 투쟁이다.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이었다고, 죽음의 책임은 기업에 있다고 주장하고 싸움에 나설 때 이슈는 출발한다. 5년 전 이맘때 길고 길었던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투쟁이 그렇게 시작됐다. 유족이 처음 취재진 앞에 등장했을 때 필자는 현장에 있었다. 유족도, 노조 관계자도, 취재진도 모두 울음바다였다. 모두의 머릿속은 참담한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자회견 진행은 불안정한 호흡에 따라 천천히 진행됐다. 적막 속에 넘어가는 사고 현장과 원인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에는 구조가 담겼다. 작동했어야 할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고, 2인 1조 매뉴얼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원청은 하청에 책임을 떠넘기고 노동자들의 현장 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음의 외주화’라는 구조는 그렇게 이슈를 폭발시켰다. 원인이 없는 죽음은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그 선택을 내리게 된 배경은 존재한다.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은 구조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의 구조적 특징으로는 하청, 외주화, 비정규직, 50인 미만 사업장이란 특징이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고사망자 중 하청 노동자 비율은 70%에 달한다. 또 사고사망자 중 50인 미만 사업장의 비율은 80%에 육박한다. 노동이 대기업, 정규직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화되고 환경이 불안정할수록 죽음의 문턱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주변으로 밀려날수록 임금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위험한 환경까지 감수해야 하는 사회의 구조는 양극화를 강화했다. 그렇게 자본과 정부는 죽음의 외주화를 통해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는 것을 포함해 현장 안전 등 각종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법망을 교묘히 피해 원청의 책임을 희석했다. 하지만 진실은 감출 수 없는 법. 유족과 동료 노동자들의 싸움은 고인의 죽음의 원인과 구조를 드러냈다. 구조가 드러나자 곧 책임이 떠올랐다. 고 김용균을 비롯한 노동자의 죽음에는 원청의 책임이 컸다. 사회와 사법부 등 당국이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고 안전 문제를 개선해야 비로소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원청 책임’ 네 글자를 들고 유족과 동료 노동자들이 국회로, 청와대로, 광장으로 나섰다.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시민들은 SNS에서 ‘그 쇳물 쓰지 마라’ 노래 부르기 챌린지로 화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 김용균 노동자가 쏘아올린 공은 3년이 지나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발돋움했다. ‘서사 말하기’가 사그라들자 거꾸로 간 시간 중대재해처벌법의 핵심은 ‘원청 책임’이다. 원청에 일터에서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 의무를 부여하고, 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시 원청 사용자,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하는 것이다. 원청이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법 처벌의 전제는 사용자의 ‘안전 의무’에 있는데 정치권과 언론은 ‘처벌’에만 집중했다. 마치 죄 없는 기업가들이 ‘툭’ 하면 구속되고, 그 까닭으로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말했다. 안전과 책임은 다시 경제와 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로 전락했다. 기업가들은 ‘잠재적 피해자’, 약자의 위치로 옮겨갔고 이내 생명과 안전의 시간은 거꾸로 갔다. ‘e편한세상’ 건설사로 유명한 DL이앤씨에선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월 이후 지금까지 8명의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숨졌다. 지난 8월 목숨을 잃은 고 강보경 씨의 모친은 DL이앤씨 본사가 있는 서대문역 사거리 도심 한복판에서 상복을 입고 아들의 영정을 들었다. 필자도 사거리에서 원청이 사과하고 책임지라는 피켓을 들었다. 대기업이 밀집한 주요 도심에서 수많은 인파가 점심시간에 쏟아져 나왔다. 강남대로 한복판 못지않은 유동 인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시민은 흘깃 보고서는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무관심 속 강보경 씨의 이야기는 외롭게만 울려 퍼졌다. 만약 더 많은 이가 강보경의 서사에 집중하고, 또 많은 이가 유족의 곁에 함께 서 있었다면 생명과 안전의 시간은 더디게라도 흘러가지 않았을까. 지난 3일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은 또 유예됐다. 대법원은 7일 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에 대해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에 무죄를 선고했다. ‘죽음에 대해 책임 묻기’는 다시 멀어져 간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떠나간 이들의 서사를 다시 좇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죽은 이는 말이 없다. 그들의 말을 꺼내는 자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그래서 죽지 말았어야 할 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우리다. 그 이야기가 빠지고 덩그러니 영정만 남는다면 책임에 대한 사회의 무지는 걷히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일터에서의 죽음은 반복될 것이다. 차츰 나의 주변 영역으로 파고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죽음을 감각하기 위해 모든 이의 서사를 쉬지 않고 말할 때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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