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꼭 해야 하는 걸까요?
2024 파리 올림픽이 흥행중입니다. 한국이 늘 강세를 양궁 종목에서는 다시 한 번 금메달을 수확했고, 유도, 탁구, 사격 같은 종목에서도 메달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히려 “올림픽을 꼭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 모두 4년마다 열리고, 매번 개최지가 변경됩니다.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IOC 위원회에서 결정되고요. 그 말은 즉 4년마다, 혹은 그 이상의 기간마다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한 국가는 올림픽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 라고들 말합니다. 그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현장이고, 올림픽을 여는 나라는 세계에 ‘잘 보여야’ 합니다. 그 ‘잘 보이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아마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것입니다. 세계에 보여주는 그 정리된 모습이란, 잘 정리되고 깔끔한 경기장과 그 주변의 모습, 멀끔한 도시의 경관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올림픽을 하려면 적은 공간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종목의 경기장을 준비해야 하고, 그 넓이는 무척이나 클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기장과 선수들이 머물 공간, 그리고 기타 부대 공간을 만드는 데 있어, 엄청난 필지가 필요할 것이고, 엄청난 예산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탄소가 배출될 것입니다. 파리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 사용을 줄이고 채식 위주의 식사를 제공한다고 해서 논란 아닌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탄소는 그 부분이 아니라 올림픽 자체를 준비하기 위한 부분에서 애초부터 많은 양이 배출되었을 것입니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 사용을 줄이고 채식을 준비한다고 해서 탄소배출 저감의 효과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으로 기존에 배출된 탄소를 상쇄하기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선 많은 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땅에는 본래 사람이 살고 있었고,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흙이 있었고, 거기에 따른 동물들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 동식물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러한 부분들은 보도되지 않았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과 다른 생명들은, 아마 자신의 집과 삶의 공간들을 잃지 않았을까요? 그 생명들의 댓가는 그러면 누가, 어떻게 지불할까요? 아니, 지불하긴 할까요?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식물과 동물들에게 무언가 보상 혹은 배상이 이루어지긴 할까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텐데, 저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비단 파리 올림픽뿐만 아니라, 이전의 올림픽들에서 그러한 보상 혹은 배상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근거를 말입니다. 특히 파리는 쉽게 ‘집시’라고 불리는 보헤미아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빈민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죠. 그 빈민들은, 보헤미아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올림픽을 파리 전역에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파리나 프랑스, 넓게는 유럽 내의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의 존재는 올림픽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이름없는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제가 찾아보진 못했지만, 올림픽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에 대한 무언가 댓가가 주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동식물들은요? 거기 살던 동식물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수도 있습니다. 나무는 뽑히거나 베어지고, 동물들은 살처분을 당하면서요. 파리올림픽을 벗어나,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이야기를 잠깐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리왕산을 아시나요? 가리왕산은 올림픽이 열린 평창과 정선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평창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스키 슬로프 공사 때문에 가리왕산에 있는 수백년 된 원시림이 모조리 베어진 적이 있습니다. 정부와 강원도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2014년 1월 가리왕산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서 해제했고, 중봉에 활강 스키 경기장을 지었습니다. 협의대로라면 올림픽이 끝난 후 산을 복구해야 했지만 강원도는 곤돌라 존치를 요구했고, 2021년 6월부터 생태 복원 계획을 수립하는 기간동안 곤돌라 운행을 허가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전두환과 노태우 정부는 ‘미관’을 위해 판잣집 같은 빈민 주거시설을 모두 ‘청소’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빈민들은 정부에 의해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강제로 주거지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나마도 서울에서 계속된 도시개발 사업으로 인해 빈민들의 주거지는 계속해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다른 올림픽이라고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의 보헤미안이나 도쿄의 홈리스들, 그리고 그 외의 이름붙여지지 않은(un-named) 존재들은 안녕할까요? 사라졌다면,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또 숲을 이루고 그 안에서 생태계를 이루고 살던 식물들과 동물들은 또 안녕할까요? 올림픽, 거대한 정치적 행위 올림픽은 사실 “우리는 올림픽을 할 수 있을만큼의 국력이 된다”는 메시지가 담긴, 무척이나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세계인의 축전이라는 말 뒤에, 정치적 아젠다와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는 미국의 육상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한쪽 손을 높이 드는, 이른바 ‘블랙 파워 살루트(Black Power Salute)’를 했다가 다음날 메달을 박탈당했고, 육상선수 자격도 정지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상대에서 야유를 받은 건 물론이고요.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1년 미뤄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던 2020년에는, 벨라루스에서 세계 육상 챔피언 출신 마리나 아르마소바가 대선 불복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선수촌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또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진종오 의원은 현역 사격선수이던 2020 도쿄올림픽에서 이란의 자바드 포루기 선수를 두고 “테러리스트가 1등을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알제리의 복싱선수 이마네 칼리프를 두고 ‘염색체 논쟁’이 오갔습니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XY염색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를 ‘여성’으로 인정할 수 있냐는 논쟁이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인터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담은 발언들이 오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도쿄 올림픽 때는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를 두고 엄청난 여성혐오 발언이 오갔고, 심지어는 “안산 선수의 금메달 박탈 청원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안산 선수가 숏커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고, ‘웅앵웅’이나 ‘오조오억’ 같은 ‘남혐’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그 근거였습니다. 이번 올림픽에 안산 선수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심지어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양궁의 임시현 선수에게는 “턱에 난 상처를 시술할 것이냐?” 라는 여성혐오적 발언이 있었던 인터뷰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팔레스타인에도 운동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침공과 ‘인종 청소’로 인해,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집을 잃고 망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당연히 올림픽을 목표로 하는 운동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선수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때문일 것입니다.  올림픽을 아무리 ‘세계인의 축제’ 라고 한들, 정치적 아젠다가 오가고, 인종적, 국가적, 성차별적 논리가 오가는데, 이것을 과연 ‘세계인의 축제’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종, 국적, 성별, 정치적 성향, 외모, 평소 행실이 지배적 아젠다를 거스르지 않는 ’정상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진 이들의 축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올림픽이라는 행사를 위해 사라진 이들, 그 과정에서 공격받은 이들, 슬픈 이들이 이 모두 안녕했으면 좋겠습니다.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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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참사들로 보는 국가와 정부의 역할과 재난에 대한 접근법 이야기 대한민국, ‘참사 공화국’ 작금의 대한민국은 사실 ‘참사 공화국’ 이라고 해야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참사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이고, 국가와 정부는 그럴 때마다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요즘 들어 크고작은 사고와 사건이 줄지어 일어나고, ‘참사’라고 불러야 하는 규모의 재난들 또한 적지않게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참사가 일어났다. 문민정부 시절 일어난 서해 페리호 참사, 박근혜 정부 당시 일어난 세월호 참사, 문재인 정부 시절 일어난 광주 참사, 그리고 작금의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10.29 이태원 참사와 바로 직전에 일어난 화성 참사까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참사’로 얼룩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인리히 법칙’ 이라는 법칙이 있다. ‘1:29:300의 법칙’ 이라고도 불리는데, 1개의 참사가 일어나기 이전에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 이전에 300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역으로 이야기하면 300개의 작은 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큰 참사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이 하인리히 법칙은 2014년 4월 16일,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크고 작은 해운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1993년 일어난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다시 수많은 해운사고들을 방조한, 그리고 규제를 완화한 결과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형 해운사고는 대개 20년을 주기로 일어난다는, ‘대형 해운사고 20년 주기의 법칙’까지 더해져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의 부재를 규탄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는 20년 조금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참사의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서해 페리호 참사의 반복이라는 언급들도 등장했다. 참사에 무심한 국가와 정부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또 수많은 참사들이 일어났다. 2021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철거중인 건물이 쓰러져 버스를 덮친 광주 참사, 2022년 159명이 목숨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 그리고 지난 6월 24일 화성의 배터리 제조 공장 아리셀에서 일어난 화재가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참사까지,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참사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갔다. 특히 2020년대 들어 참사라고 할 수 있는 사건만 3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번 화성 참사는 재난 발생 이틀 전인 22일에도 해당 공장에서 리튬 배터리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으나, 사측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입단속을 시켰다는 정황이 나왔다. 그 말은 한국 사회와 국가, 정부가 크고 작은 사고와 사건들에 대해 무심하고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각기 참사들은 한국 사회의 치부를 찔렀다. 먼저 세월호 참사가 정부 주도의 해운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사고 상황에서 국가의 부재를 폭로했다면, 광주 참사는 철거와 재개발에서 일어나는 불법과 부실공사 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치안의 부재, 공권력의 사유화 등을 알렸고,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는 재난이 예상됨에도 무시한 것, 사고 상황에서 매뉴얼의 부재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지에 대해 폭로했다. 이러한 참사가 전하는 메시지들을 모아보면,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의 부재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규제 완화 등으로 종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번 종합해보면 국가의 부재라고 할 수 있는 ‘부작위성(unterlassung)’, 그리고 재난의 책임을 국가나 정부가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out-sourcing)’ 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부작위성은 재난이 일어날 수 있거나, 재난이 일어난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을 방조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국가는 이미 사고 위험성이 있는 상황에서 불량 선박인 세월호의 출항을 허가했고,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재난의 컨트롤 타워인 박근혜 정부는 7시간 동안 부재했고,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말로 책임을 해경에게 전가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서 공권력은 그 날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태원 대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 대부분이 배치되어 있었고, 윤석열 정부와 경찰은 책임을 애써 피해갔다.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책임자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박근혜 정부와 이태원 참사 당시의 윤석열 정부가 보인 모습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로 말이다. 재난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는 두 참사 모두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뒷수습을 하는 모양새만 보였다. 박근혜 정부는 해경에게, 윤석열 정부는 재난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사실상 그 아젠다에서 도망을 쳤다. 사령탑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 공권력은 우왕좌왕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바빴고, 그 책임은 재난, 즉 참사로 이어졌다. 둘 다, 아니 사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참사들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재난들이었다. 국가와 정부가 했어야 할 일 - 진상 규명 규제를 강화하고, 불법을 눈감아주지 않고, 적절하게 치안을 배치하고, 국가가 적극적이었다면, 그리고 재난 예방에 대한 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 다른 참사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이러한 참사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후에 사후약방문이나마 이루어진 재난은 기껏해야 광주 참사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광주 참사도 사후약방문이라도 하라는 사회적 목소리 때문에 겨우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사후약방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정조사는 유명무실했고 겨우 제정된 특별법은 시행령으로 누더기가 되었다.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심지어 아직도 특조위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참사의 진상 규명을 두고, 참사와 그 사회적 여파를 축소하려는 이들은 주로 ‘사고-보상 프레임’을 사용한다. 사고-보상 프레임은 “사고가 일어났고, 피해자들은 보상을 바란다” 라고 재난을 축소해버린다. 이 프레임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와 “어떻게 일어났는가?” 라는 말을 봉쇄시켜 버린다. 국가와 정부의 실패를 개인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는 “죽은 자식을 팔아먹는다” 나 “이미 보상을 받아놓고 더 달라고 한다”며 참사의 피해자들과 유가족을 폄하했고, 논쟁의 여지를 봉쇄해 버렸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놀러 갔다 죽었는데 국가와 정부 탓을 한다”(이 말은 세월호 참사부터 유구하게 쓰인 말이다) 는 말로 재난을 일축하려고 했다. 참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고-보상 프레임’을 넘어 ‘사건-규명 프레임’으로 재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고, 재난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으로 사건 현장을 만든 것을 넘어 사회의 문제점들이 모여서 터진 ‘총체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박명림은 “사태의 궁극적인 진실을 남김없이 ‘알 권리’, 즉 진실권은 정의와 인간 존엄을 위한 기본 권리이며, 치료를 받을 권리 또한 사태의 진실을 정의롭게 판정할 수 있는 진실권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참사로 이름붙여진 사건들에서 제대로 ‘알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고, 사회 구성원들은 공통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공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정치(war politics)’를 사용했다.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가 제안한 전쟁정치 개념은, 국가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국민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마치 적을 다루듯이 하는 것을 일컫는데, 크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서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유가족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 치안 공권력을 통해 마치 ‘토벌’하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배상 대신 그들을 경찰로 포위하고 물대포와 최루액을 퍼부었고, 윤석열 정부도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을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citoyen)’ 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의 분향소에는 늘 허리춤에 최루액을 꼽은 경찰들이 서성였고, 늘 유가족들과 분향소에 오는 사람들을 예의주시하곤 했다. 마치 ‘언제 범죄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처럼 대한 것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심판 특히 이태원 참사라는 전적이 있는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로 인해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를 것이다. 아니 올라야만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 정책, 산업안전 및 보건 정책, 이주민 정책, 규제 정책 등을 질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타를 통해 성역 없는 비판을 받아야만 하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진상 규명을 통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트라우마를 해결할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는 윤석열 정부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숙제이고, 빠르게 돌아가는 참사의 시계를 멈출, 적어도 느리게 돌려놓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사고-보상 프레임’과 ‘전쟁정치’로 참사의 피해자들과 사회 구성원들을 무책임하게 대한다면, 또 ‘조금 있으면 조용해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 참사를 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또다시 언제 어디서 일어날 지 모르는 참사에 노출될 것이고, 국민들은 국가와 정부를 더욱 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희생된 참사 앞에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게 나선다면, 그리고 또다시 편가르기를 한다면 그것은 국가와 정부 차원에서 저지르는 ‘내란음모’ 라고 밖에 볼 수 없고, 구성원들이 ‘저항권’을 언제든지 발동해도 이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은 한국 사회의 평판을 저하시키고, 그러한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용납하기 쉽지 않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정부의 실정 때문에 구성원들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그 자체로 ‘내란’ 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정권 심판이 될 것이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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