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퇴진하라.
저는 가끔 강의를 나가요. 거기서 사귄 중학생친구에게 요즘 가장 불안한 게 뭔지 물었습니다. '친구랑 멀어질까봐 겁나요' 그런 것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쟁'이라고 답하더군요. 전쟁이 날 것 같다고. 그게 너무 무섭다고. 영상 뉴스보면 손발이 떨릴 때도 있다고. 어른들의 이념대립 이해관계 밥그릇 싸움에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립니다. 비상계엄령으로 총든 군인과 탱크와 헬기가 길거리에 나타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더욱 무서워하겠죠.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한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군인이 먼저 국회를 점령하고, 비상계엄령이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길거리에 총 든 군인들이 서 있겠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더 이상 우리는 내 마음대로 뭘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이렇게 글을 적지도 못하고 친구들 몇 명 이상 만나면 감시 당하고 저도 sns에 글 올린 사람들도 다 잡혀갔겠죠.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예산이고 뭐고 민주적인 장 안에서 설득해내야죠. 비상계엄령이 가져올 사회경제적 대내외적 후폭풍을 감내할 정도로 엄청난 명분이었다는 생각이 저는 도무지 들지 않습니다. 뭐하러 피를 토하며 민주적인 절차와 장을 만든 건가요.   안 그래도 물가 올라서 힘든데 주식, 코인, 원화가치, 수출입, 여행금지국가 등등 경제에 끼칠 영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군인이 배치 되고 탱크가 돌아다니고 헬기가 날아다니는 험악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공포에 떨 국민과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시민과 대치하고 물러나며 땅에 떨어질 군경의 위신, 국민의 안전 안보를 지킨다는 자부심, 신뢰, 이미지 훼손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언제든 올스탑될 수 있는 정치적 리스크를 진 후진국 이미지, 국격의 하락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국민들의 일상과 자산을 뒤흔들 계엄령을 과연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국민들의 안보와 자유를 위협한 게 누구인가요? 국가의 경제, 외교, 국격을 말아먹은 게 누구인가요?   내 동생, 아빠, 아들이었을 군인과 시민이 대치하는 슬프고 아찔한 순간을 다시 만든 것만으로도… 계엄령 선포에 타격받을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경시한 책임만으로도 윤석열은 탄핵되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거창한 명분이 있든,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국민의 손과 발을 묶고 일상을 통제하는 비상계엄령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하구나, 앞으로 계엄령 같은 일은 결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한 책임을 묻기를 바랍니다.   그냥 믿고 흘러가는 대로 두기엔 아직 불안한 민주주의구나, 나도 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구나 싶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윤석열은 퇴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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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없는 <채식주의자>
사진 : <채식주의자> 저자 한강, 출판 창비, 2022.03.28. 발행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아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려하는 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 <채식주의자>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책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가 인간답게 잘 살아있는지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역작이다.  주인공 영혜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맞고, 맞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방관당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며 자라온다. ‘자신에게 관여를 하지도 않고,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체로서 존중받았을 리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기를 못 먹는 것은 차치하고 이상한 꿈 때문에 수개월 잠 못 이루고, 날로 여위어간다면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고생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고 염려되는 마음에,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싸워도 보고, 화도 내보고, 병원도 데려가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법 하다. 하지만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깊이 알거나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방치하다가 본인 삶에 폐를 끼치자 그때서야 친정에 알리는 방식으로 조치를 취한다.  때리던 아빠, 각자 살 길을 찾으며 숨죽이던 가족들, 남편, 그리고 그런 삶을 그냥, 살아낸 영혜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수없이 죽이고, 죽이는 것을 방관해온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죽어있는 삶을 살던 영혜는 아버지가 강아지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먹으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동물(짐승)적인 모습, 본인 내면의 폭력성을 자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부엌의 칼을 내심, 두려워한다.  그 후 남편의 삶속에 붙어있는 부속물처럼, 가정부처럼 여느 날을 보내다 일순간 도마 위의 칼이 밀리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밀려나간다.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고 동물을 죽여서 맛있게 먹는 피 웅덩이에 비친 짐승같은, 괴물같은, 인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영혜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붙든채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상실하고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처절하게, 고기먹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영혜의 삶에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채식주의자로 비추어진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채식주의자’ 라는 제목 자체가 아무도 이해하려들지 않는 삶, 관여해주지 않는 고립된 삶,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영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영혜를 채식주의자라 칭한다. 하지만 영혜는 단 한번도 본인을 채식주의자라 칭한 적이 없다. 그저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단호하게 말했을 뿐이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채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먹기를 지양하는 것일 뿐이다. 꿈속의 날고기를 씹어 먹던 짐승이, 그 얼굴이 자신이었다는 두려움 가운데, 그런 짐승이 되기를 처절하게 거부하는 와중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라는 영혜의 말이 ‘저는 고기를 먹던 꿈속의 그 얼굴, 그 짐승, 그 괴물이 아니에요’ 라는 말처럼 들렸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너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조차 해주지 않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의 제목, <채식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도 인간으로서 대해주지 않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인간이라는 일말의 자각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영혜의 입에, 아버지는 사정없이 고기를 밀어 넣는다. 그 후 자살을 시도하는 영혜의 모습이 마치 ‘나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해버렸다’, ‘나는 이제 그 짐승이 되어버렸다’ 울부짖으며 인간으로서의 나를 죽이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1장 말미에 “...그러면 안돼?” 라며 뜯어먹은 동박새가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식,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놓아버리고, 겉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영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사진: Unsplash의Melanie Wasser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있나 사진 : 늑대무리 속에서 양육되다 구출된 인도소년 디나(Dina Sanichar) 나는 영혜가 꾸는 꿈이 ‘무언가로 존재하려는 욕구의 분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무리 속에서 살아온 인도소년 디나는 평생 늑대의 생활양식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환경이 그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주고 존중해주어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존재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혜는 오랜 기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 영혜가 끝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여도 좋으니, 어떤 존재로서, 유의미하게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꿈꾸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혜가 인간도 무엇도 아닌 존재라는 점에서 성적매력을 느꼈던 형부, 그런 형부로 하여금 온몸에 꽃이 그려지고, 식물로서 교합하고, 식물로 존재하는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서 영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인간이 아닌, 낯익지만 낯선, 꿈속의 얼굴을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영혜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식물로 존재하기를 택하고, 완전한 식물이 되어간다. 영혜의 경우 극단으로 치달은 사례이긴 하지만, 영혜처럼 인간으로서 존중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잘 존재하지 못해 무너져내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하지 않나.  물건 값을 계산해주는 기계 대하듯,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나,  눈인사는 하고 지냈나, 크고 작은 일상 속에서 나는 얼마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보며, 부디 내가 수많은 '영혜'를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잘 살아있나 마음속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비로소 자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견디어 내는 것이다…죽음에로의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세인-자기로부터 벗어날뿐더러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 앞에 직면할 단서를 마련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先驅, Vorlaufen, Anticipation]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이선일) 영혜의 형부와 언니는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하이데거가 말했던 ‘죽음에로의 선구' 를 한다.  형부는 스스로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리려 했던 영혜를 보면서 일순간 무척이나 지치고, 버텨온 삶이 넌더리나고, 본인의 삶을 담아온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진다. 십 여년 간의 작업이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앞으로를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성실을 천성으로 여기며 인내로 꽁꽁 뭉쳐진 삶을 살아온 언니도 하혈을 하는 자기 모습과 자살을 시도하던 영혜의 모습을 겹쳐보며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단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음을, 다만 견뎌왔을 뿐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살 시간이 기한 없이 남아있음을 알고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형부도, 언니도, 영혜를 통해서 죽음을 간접 체험한 뒤 내가 없이 죽어있던 삶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런 삶에 회의를 느껴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살을 시도하려 산에 오른다. 앞으로도 그런 존재로, 그런 식으로, 견디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진 것이다.   자살하러 올라간 산길의 끝에서 언니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지 못한다.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박명 속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로부터 무서우리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을 듣는다. 그것이 부디 생명의 말이었기를, 언니는 앞으로 인간으로서, 나로서, 잘 존재하는 삶을 살기를, 그런 결말이기를 바라면서 책을 덮었다. 사진: Unsplash의todd kent 내 삶에 내가 잘, 살아있나?  ‘그렇다’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어서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게 된 것 같다.  당신은 어떠한가? 인간답게, 당신답게 잘, 살아 있나? 당신다운 삶을 응원하고 당신답지 못했던 순간을 위로하고 싶다.   오늘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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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고 망설이고 번뇌하는 친구들에게 _첫 직장 체험기
2개월에서 6개월 짧은 인턴만 반복하다 마침내 2년 8개월, 가장 길게 다닌 직장을 퇴사한 뒤 2달반 가량이 흘렀다. 어떻게 잘 살고 있나?!  첫 달은 계속 아팠다. 쌓인 피로를 게워 내듯,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둘째 달에 접어들 무렵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직장생활동안 나를 가장 괴롭혔던 일이 조금도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존감 도둑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그런데 칠칠 맞다. 칠칠 맞은 사람이 완벽을 추구하면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기대보다 못하는 자신에게 계속 실망하기 때문이다. ‘왜 이것밖에 못해’, ‘이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오늘도 못했네’, 본인에 대한 좌절이 반복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찍게 된다.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거나,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더욱 심해진다. 잘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고 좀먹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비영리법인(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경제지역네트워크법인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일을 하면 할수록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사진: Unsplash의 Matthew Henry 무엇이, 왜, 힘들었나 사무국장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행정회계사무다. 그런데 나는 행정회계사무업무를 싫어한다…  일단 꼼꼼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미 갖춰진 툴이나 규정에 따라서 이것저것 그냥 맞춰 줘야하는 일을 싫어한다. 뭐든 왜를 묻고 원리를 묻고 이해해서 이런 의미가 있구나 스스로 납득해야 한다. 이런 사람과 행정사무업이 만나면 고구마 백 개 먹는 현장이 그려진다. 사무직원이 단순 제출하는 보고서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제출하는 프로세스를 왜 갖는건지 고민하고, ‘왜 이렇게 하는 걸까’, ‘이렇게 제출하기보다는 이런 프로세스가 좋을 거 같은데’를 넘어서 행정의 비대화 문제까지 건드리며 사회 비판을 하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냥 해! 그런 일은 그냥 쳐내는 거야 바보야!” “그럴 시간 줄여서 다른 걸 해! 회사 입장에서는 네가 그러고 있는게 손해라고!” 나 같아도 답답해서 한마디 해줄 것 같다.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그냥 하는게 안된다. 결과보고서를 쓸 때도, 공시용 엑셀파일을 만들 때도, 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그 일이 의미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이걸 내려놓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기 시작하면서, 하고싶은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 포기하고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계적으로 내려놓는 내가 무서워졌다. 숨쉬듯 당연하게 가져온 시각, ‘왜’를 묻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아도 그냥 처리하는 내가 낯설었다. 일에 따라 다르게 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일을 할 때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사무국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런 일을 할 때가 많았다. 일을 하고 있으면 지인들이 말했다. “너 지금 죽어있는 것 같아.” “눈빛이 죽어 있어.” 일을 할 때도 나로 있고 싶어서 이쪽 일을 택한 건데, 나 지금 여기 왜 있나, 현타가 왔다. 하기 싫어하는데 당연히 잘 할리 없다. 게다가 본인 사업과 지역활동을 병행하시는 분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쪽의 만렙들과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회계사무증빙을 쉽게 쳐내고 분담하고 최소화해서 하고자 하는 활동까지 멋지게 해내시는 분들, 일당백으로 다 해본 만렙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나는 ‘왜 이것밖에, 이렇게밖에 못할까’,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끊임없이 자책하며 말라비틀어져 갔다. 자괴감이 극한을 찍었을 때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나왔다.   내가 못하는게 아니었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서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행정회계사무 업무능력이 또래친구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사수가 없어서 모든 업무를 네이버에 검색하고 공공기관과 은행에 전화문의를 해가며 처리했는데,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에 일반회사에서 사무 업무를 맡고 있는 친구들이 문화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급기야는 내가 행정회계사무증빙을 알려주고 대신 처리해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행정회계사무를, 가르쳐주고 있다니... 가장 놀랐던 점은 업무 속도였다. 나는 항상 내 업무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해왔다. 순식간에 쉽게 쳐내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다. 큰 콤플렉스였고 자존감을 앗아가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일반회사에서 사무업무 하나만 담당하던 사람과, 2년 8개월간 이걸 어떻게 좀 빠르게 쳐내고 다른 활동을 해볼지를 연마해온 사람의 속도차이는 컸다. 나오고 보니 왠걸,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정회계사무업무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걸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자괴감이 들고 힘들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걸까? 잘하고 있었는데, 남들보다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뭣이 중헌디 상대적인 기준에 나를 두면 잘해도, 못해도, 항상 조마조마하다.  잘하고 못하고, 뛰어나고 열등하고, 앞서가고 뒤쳐지고…상대적인 기준으로 스스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며 상처 주고 상처입지말자. 자신만의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돌아보자.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가. 어떤 사람이고 싶나. 나 내가 진짜 원하는 거 하고 있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나. 그 방향으로 가고 있나. 바라는 방향대로 가고 있다면 속도나 숙련도는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가져가면 된다. 누가 뭐라하든 내 페이스대로. 서두르면 넘어진다. 쉼도 필요하다. 계속 생각하고 있고 바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다면 언젠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어 있을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Emma Simpson 내 길이 아니어도 남는다.  청년이 청년답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겁없이 시도하고, 열정적으로 끈덕지게 해보고.  망설여지는 이유가 뭘까? 금방 그만두는 이유가 뭘까? 한국은 다양한 삶의 모습과 속도와 노고가 존중되지 않는다. 성공한 삶의 상과 가치, 시기별 과업이 정해져 있고 그에 맞춰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상이 난무한다. 수군대는 말, 냉소적인 눈초리, 동일한 기준에 따라 어떤 이는 동경과 자랑의 대상이 되고, 어떤 이는 한심한 인사가 되는 장면을 목격하며 저마다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항상 시간이 없다. ‘몇 세까지 이정도는 해야하는데’, ‘시간낭비하는 게 아닐까’ 재고 따지게 된다. 실패로 배울 여유도 없다. 찍먹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빨리 갈아타야 한다. ‘이게 맞을까’, ‘빨리 다른 길을 알아봐야하지 않을까’,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맞지 않는 일을 장기간 꾸역꾸역해본 결과 갖게 된 마음가짐은 설령 내 길이 아니더라도 남는게 있다는 확신이다. 나는 여전히 행정회계사무가 싫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의 어떤 점을 내가 싫어하는지, 왜 나랑 맞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런 성향을 건드리지 않는 다음을 모색하게 되었다. 나는 정부지원사업을 하는 것이 싫다. 정부 돈을 받아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지리하고 자질구레한 행정처리를 수반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서 안하는 것과 몰라서 못하는 것은 다르다. 덕분에 내게는 언제든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자금이 필요해지면 어디에 어떻게 뛰어들어 지원을 받아야겠다는 전략이 생겼다. 사업제안서를 쓰고, 발표자료를 만들어서 발표하고, 사업비를 받아 행사, 교육, 회의를 열고, 정산증빙하고, 창업지원기관도 되었다가 창업팀대표도 되었다가, 비영리법인 연간 행정회계사무도 두어 번 돌려 보고, 이것 저것 다 하느라 힘들었지만 덕분에 어떤 파트든 필요하면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업무와 프로세스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여러 사업과 사업체 전반을 살필 줄 아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내가 남았고, 그런 경험이 남았다. 그리고 사람이 남았다.  일을 그만두고도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평생 크고 작게 도움을 주고 받고 진심으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해줄 사람들이 생겼다. 사람이 만사다. 삶에 있어 가장 귀중한 자산을 얻었다.   진짜 배워야 하는 것 그러니 궁금하다면, 심사숙고했다면 망설이느라 힘 빼지 말고 일단 해보자. 예상했던 것과 다를 것이다.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남을 것이다. 찍먹으로는 부족하다, 조금만 더 해보자. 이게 어떤 일인지 파악해서 나의 어떤 성향과 맞지 않는 건지, 그래서 다음은 어떤 쪽으로 찾아보면 될지 스스로 답을 얻을 때까지는 다녀보자. 어떤 경험이든 경험을 통해서 진짜 배워야할 것은 나다. 내가 어떤 점을 힘들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성향을 지켜갈지를 충분히 느껴, 나를 배우게 될 만큼은 경험해보자. 성공이든, 실패든, 후회든, 미련이든 수많은 과정을 엮어 나를, 내 인생을 자아내자. 사진: Unsplash의 Mathieu Stern 당신의 첫 직장은 어떠했는가? 무엇을 배웠는가? 댓글을 통해 경험과 격려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번뇌와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오늘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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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기술
  AI시대, 인공지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런저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실업에 직면할 것이다, AI가 잘못을 저지르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어느 정도로,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이어지다 급기야는 개발 자체를 중단, 억제하자는 의견까지 제기되고 있다.  기술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섣부른 염려가 아니다. 인류는 스스로 만든 도구에 고통받는 역사를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AI 연구개발 중단하자" VS "계속해야" 유명CEO·석학 찬반논쟁 가열).  사람 잡는 기술   영국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의 발명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인류의 의식주는 물론 시공간의 개념까지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와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생활양식과 생활반경이 질적으로 달라지면서 문명과 문화, 사고방식도 달라져 수만 가지의 혁신이 파생되어갔다.   하지만 바로 그 기술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갔다. 이전의 농경시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하다 요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런던 구세군의 관짝 숙소, 줄에 기대어 잠드는 행오버와 같은 숙박 시설은 당시의 처절한 노동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A Very Victorian Two-Penny Hangover , [오늘 통한 과거리뷰] 산업혁명 영국 노동자 숙소) 사진: HISTORIC UK 웹사이트의 Terry MacEwen   자본의 등장도 엄청난 혁신이었다. 시장, 자본, 금융은 ‘도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산성 발전과 효율성 추구의 발로다. 시장은 필요로 자연 발생한 것이며, 자본과 금융은 자연을 가공해서 도구를 습득하던 인간이 창출해낸 제3의 자원이자 제3의 자연, 제3의 생태계다.   스스로를 증식하는 돈인 자본은 인간의 ‘가능성’을 늘려준다. 실제 가지고 있지 않아도 대출 가능한 자산까지가 내가 가진 ‘가능성’의 범위가 된다. 엄청난 규모의 대자본이 (증식하기에 유리하므로) 한데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막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모든 방면에서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가시적인 발전이 이어졌다. 금융 또한 자본이 남는 사람에게서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 유용하게 쓰여 양쪽 모두에게 실익을 주는 기술이다. 이들이 시장이라는 메커니즘 위에서 활약하면서 혁신적인 상호작용과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본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 앞서 말했듯 자본은 스스로를 증식하기에 유리한 쪽으로 ‘편중’된다. 사람이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경제체제이기에 사람의 논리가 짓밟히고 사람이 소외되는 일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만연해진다. 이렇듯 자본과 자본주의 자체가 가지는 속성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인 타격을 주어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인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전 지구적인, 인류 전체의 시점에서 조망했을 때에는 당장 취하는 효율 이상으로 막대한 인적, 정신적, 물리적 낭비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전가하는 비효율적인 메커니즘인 것이다.   AI,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이 기술을 염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인류의 의식주는 물론 시공간의 개념, 그에 따른 문명과 문화, 사고방식, 시스템, 사회경제 전반을 뒤흔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획기적으로 유용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일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렇듯 기술혁신에 곧잘, 잡아 먹혀왔다.   이미 맛보았는걸   그러나 기술개발을 막거나 억제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롭고 기발하다. 유용하다. 뭔가 더 할 수 있게 된다. 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맛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COVID19처럼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라면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합의에 따른 금지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공지능 개발의 문제는 수많은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일견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무슨 수로, 무슨 논리로 흐르는 물결을 막아낼 것인가. 금지하더라도 공공연히 존재하나 사회적으로 다루지 않는 음지가 늘어날 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사태에 처할 것이다. 세상을 뒤바꾼 기술혁신들은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가능성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꿈꾸게 한다. 자유로이 꿈꾸는 사람들을 막을 방도는 없다. 불가능한 대안을 논하고 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식칼이 하루아침에 사람을 찔러 죽이는 흉기로 돌변했다고 해서 ‘식칼을 발명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식칼을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받아들여질까? 최선의, 지속 가능한 대안인 걸까? 식칼은 어째서 위험해졌는가? ‘본래의 목적대로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 의도한 바대로 쓰였다면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선사해주었을 것이다.   증기기관도, 자본도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명확히 하고 쓰였다면, 그러한 기준 아래 쓰이도록 사회경제 시스템을 마련해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기술의 논리에 사람이 부림을 당하고 사회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논리를 굳건히 하는데 기술이 활용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고매한 기술일수록 사람을 위하지 않는다면 가장 치명적인 흉기가 된다. 사람을 위하지 않는 기술은 결국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기술의 논리로, 기술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부품으로, 사람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기술이 쓰이도록 만드는 역량’이다.  사진: Unsplash의 Conscious Design   규제도 하고 풀어도 주고   인류는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두려워지는 발명품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기계에 잡아먹힌다고 기계를 모두 부수고, 기계가 없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항구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 이미 그 가능성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항구적인 답은 어떤 발명품을 만들어 내든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뚜렷이 부여하는 일에 인류가 최대한 능숙해지는 것이다. AI, 인공지능은 도래할 기술혁신의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발전에 굴복하거나 발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주체로 발돋움해야 한다.   위험한 기술일수록 더욱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 금지하기보다는 써버릇해야 한다. 직접 써보기 전에는 어떤 것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써보고 작동과정을 익히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면 적극적으로 대응해 사람과 사회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역량을 갖추고,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사라질 것과 새로 생길 것에 대비해야 한다.   이때 천편일률적인 접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회에 긍정적인 부분은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보완책을 마련해 도움이 되는 기술로 만들어가야 한다.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기준으로, 규제와 자율 모두를 세심히 갖춰야 한다. 이에 가장 중요한 과업은 무엇이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길인지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나,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고통받나, 그에 맞게 기술과 기술로 말미암을 사회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갈까, 바꾸는 것을 논하는 가운데 지켜야 할 것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인문학과 과학, 사람과 기술, 진리와 혁신이 함께 공부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람과 사회를 위한 기술로 어쩌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환기를 그저 맞이할 것인지, 만들어갈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번에는 기술과 시스템에 예속되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주체로서, 기술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잘 활용하는 기준이 사람의 행복과 그에 기반한 사회의 안위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만큼은, 사람의 논리에 따르는 기술과 사회경제 시스템을 마련해가기를 바란다.  사진: Unsplash의 Andy Kelly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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