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낮은 빌딩들 사이 가파른 1차선 좁은 길을 버스가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강하라(31) 씨가 살고 있다. 아홉 살 지능의 아버지 강성종(60) 씨와 단둘이.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했다. 갈색 벽돌이 겹겹이 쌓인 양옥 주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철문 옆에서 나뭇가지를 치고 있던 강성종 씨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반쯤 감긴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하라 씨는 줄곧 아빠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성종 씨가 케이크를 포크로 찍는 순간 하라 씨가 입을 열었다. “아빠, 기자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하라 씨는 아빠에게 ‘매너’와 ‘주도성’을 가르치고 있다. 성종 씨는 기자가 사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은 꼭 표현을 하라고 해요.” 지난 10일은 아빠 성종 씨의 생일이었다. 하라 씨에겐 1년에 한 번 때 맞춰 축하하는 것도 버겁다. 적게는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일을 하면, 밤 10시가 훌쩍 지난다. 지적장애인 아버지를 부양하고,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딸 연습’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빠를 돌보기 시작한 지 4년째였던 지난해. 하라 씨는 휴식이 절실했다. 일과 간병의 굴레는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만난 심리상담사가 은인이었다. 그는 하라 씨가 보호자의 역할만 하고 있다며, ‘딸 역할 해보기’를 권했다. 아빠를 통제하고 책임만 지는 게 아니라, 어리광도 부리고 부탁도 해보라는 거였다. 하라 씨가 아버지 돌봄을 전담한 건 2019년부터다. 그전까지는 성종 씨의 노모, 즉 하라 씨의 할머니가 아들과 손녀를 돌봤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양을 위해 시골로 가셨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집에는 단출한 두 식구만 남았다. 처음엔 각자 생활비를 벌었다. 성종 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하라 씨는 기타 레슨과 각종 아르바이트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여유는 있었다. 아빠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한글 공부도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지적장애인 성종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30여 년간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긴 세월 ‘막노동’에 몸이 버티지 못했다. 어깨와 무릎의 연골이 찢어졌다. 허리 디스크도 두 군데가 돌출됐다. 그때부터 지적장애인 아빠를 돌보는 건 온전히 하라 씨 몫이 됐다. “기자님, 여기부터가 진짜 영케어러의 일상이에요.” 영케어러(Young-carer).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키는 말. 하라 씨는 ‘진짜 일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성종 씨를 마주 봤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연체된 보험료였다. 성종 씨가 5개월간 미납한 보험료는 82만 3770원. 하라 씨는 절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돈 이야기에 성종 씨이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지금까지 치료받는다고 병원비 많이 썼잖아. 그동안 낸 돈 일부 환급도 받고, 앞으로 나갈 치료비도 생각하면 (보험) 부활 시켜야 돼.” “돈 없어. 놔둬.” “보험 없앨 거야? 그럼 아빠 아프거나 다치면 수술도 못 받아. 100만 원 낼 거, 300만 원 내야 될 수도 있어. 자전거 타다 넘어지면 수술 못 받는다고. 아빠 나이 더 많아져서 보험 들려고 하면 보험료도 더 비싸져. 지금 빨리 반반 내자.” 부녀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라 씨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성종 씨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내냐는 식이었다. 하라 씨는 대안을 제시했다. 두 달치 미납금만 먼저 해결하자는 것. 성종 씨가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타협 뒤에는 해결할 숙제가 생겼다.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계좌이체를 하는 것이다. 하라 씨는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직접 계좌이체 화면에 접속할 때까지 기다린다. 성종 씨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에서 방황했다. 서른 번 넘게 해 본 일이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오늘은 제 일정이 여유로워서 괜찮아요. 만약 제가 퇴근하고 밤 9시, 10시 돼서 들어왔는데 이런 일들을 밤에 또 해요, 그러면 일이 끝나지가 않는 거죠.” 성종 씨가 계좌이체를 하는 데 걸린 시간 30분. 아빠가 핸드폰을 쥐고 분투하는 동안, 하라 씨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성종 씨가 포기하려는 타이밍에 약간의 힌트를 주고 응원을 하는 요령도 생겼다. 출근하기도 전에 하라 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은 아빠를 헬스장에 바래다주고 레슨실로 가는 일정이 남아 있었다. 성종 씨는 오전에 10분 운동하고 왔다며 헬스장 가기를 거부했다. 하라 씨는 능숙하게 아빠를 회유(?)했다. 성종 씨가 운동하는 모습을 취재하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성종 씨는 그제야 나갈 채비를 했다. 한 손에는 그가 직접 내린 커피를 챙겼다. 헬스장에 있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줄 선물이다. 부녀의 걷는 모습은 참 재미있다. 토끼와 거북이 같달까. 하라 씨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앞서 걸으면, 성종 씨는 뒤에서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하라 씨는 이동 중에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이동 시간은 장애인가족지원센터, 기타 레슨생, 레슨실 사장님과 연락하는 시간이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숨을 쉬며 성종 씨를 재촉하기도 한다. 역시나 한 쪽 귀에는 전화기를 대고서. 성종 씨는 딸의 한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등학교 동창들과 있었던 일화를 기자에게 들려줬다. 그는 지난 2월 서울 숭인동에 있는 진형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평생교육시설로, 학급 평균 연령이 67세에 달한다. 동년배들이 대학에 진학한 이야기, 87세 초고령 학생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된 일은 그의 자랑거리다. “아빠, 나 기자님이랑 레슨실 가 있을 테니까 운동 마치고 7시까지 레슨실로 와. 너무 일찍 오지 말고. 알았지?” 성종 씨는 운동에 흥미가 없는지 헬스장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5분 동안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는 트레드밀, 다음에는 상체, 다음에는 하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헬스장에는 장애인 재활을 돕는 트레이너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등록했다. 그것도 하라 씨의 역할이 컸다.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자기계발비’ 지원을 받았다. 언덕배기 집에 살면서 고도비만에 관절까지 좋지 않은 아빠를 위한 일이었다. PT 20회를 끊고 남은 돈은 언어치료, 인지치료, 재활치료비로 쓰인다. 남은 돈은 이제 겨우 10만 원 남짓이다. 하라 씨가 헬스장으로, 여러 치료센터로 아빠를 보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아빠는 동묘 앞 벼룩시장을 즐겨 찾았다. 성종 씨는 고장 난 데스크톱, 노트북, 모니터, CD 등을 ‘바가지를 쓰고’ 비싼 값에 사온다. 그리고 작은 방에 숨겨둔다. 아빠의 ‘보물’을 찾아내 고장난 것을 골라 버리는 일은 하라 씨의 몫이다. 심지어 아빠가 밖에 나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라 씨는 그를 “어딘가에 꽂히면 완전히 몰두한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실종신고를 몇 번 하기도 했다. 지능이 7~9세 수준인 아빠가 밖에서 사고라도 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한다. 다행히 성종 씨는 지인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미혼모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평범한 가정이 너무 부러운 시기도 있었고…. 그냥 그런 평범한 것들이 좀 부러웠던 거 같아요. 지금은 부러워하진 않아요. 소용이 없으니까.” 하라 씨는 헬스장에 아빠를 데려다 놓고 레슨실로 향했다. 지하철로 네 역 떨어진 곳에 있는 3층짜리 건물. 그곳에 하라 씨의 레슨실이 있다. 이날은 두 타임만 소화하면 퇴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저녁 6시를 조금 넘기자, 갑자기 레슨실 안으로 성종 씨가 들어왔다. 하라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강생에게 복습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레슨실 옆 빈 공간에서 성종 씨는 한글 공부를 했다. 3층에 있는 학원 아르바이트생에게 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하라 씨의 일상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라 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기타 레슨을 이어갔다. “저녁식사는 보통 3층에 계신 학원 사장님이랑 같이 해결해요. 제 사정을 생각해주시는 고마운 분이죠.” 하라 씨는 식비를 쓰지 않는다. 웬만하면 3층 학원 사장님이 끼니를 때울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같이 먹는 식이다. 혹은 운영하는 블로그에 협찬을 해준 식당에서 해결한다. “사람들은 제가 ‘돈미새(돈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아요. 근데 상관없었어요. 저는 먹고살려고 하는 거니까.” 레슨이 끝났다. 레슨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밑반찬 세 개뿐인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성종 씨는 자연스레 식사를 시작했다. 하라 씨는 이날도 쉽게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하라 씨는 또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기타 레슨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기타 레슨은 수능시험 직후, 학교 방학 기간, 새해, 졸업 시즌 등이 성수기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수입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성종 씨 돌봄 비용에 레슨실 월세와 관리비, 병원비, 공과금 등을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하라 씨를 ‘돈미새’로 만든 결정타는 다름 아닌 친척들이 날렸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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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방향에 대한 소고
‘니트’는 “Not currently engaged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로, 의무 교육을 끝낸 뒤에도 진학도 취직도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 청년은 2020년 기준 3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니트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 성장이 둔화되거나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 차원의 양극화 또한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강의 기적 속에서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된 부국이라는 자화자찬 이면의 니트가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배 혹은 재분배’, 평등한 관계 형성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에 더해 부동산의 소유에 의한 부의 양극화 또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분석을 하든 구조적인 문제의 급진적 변형은 ‘노사정 대타협’과 같은 큰 정치적 지형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의 차원을 넘어선다.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의 연결, 그리고 시민의 지지와 압력의 결합 등 복합적인 정치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1)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모순되지 않는 관점에서 문제들을 완화하는 소극적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2) 국가 전체 차원의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의 맹아를 보여 줄 수 적극적인/실험적인 정책들을 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이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상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정책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정책 대상에 도움이 되지만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서울시의 사례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적 경제 영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책들, 청년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경제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된 뉴딜 일자리 사업을 실행하는 등,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한 맹아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정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면이 있다. 꼭 이 사례가 아니더라도 후자와 같은 식의 정책들에 힘을 쏟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들을 모아 총체적인 정치적 비전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주로 양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하며, 후자는 질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한다.   성장-대량소비와 관련되는 자본-노동의 모델들이 만약에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혁명이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면(4차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야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의 공동체 사회, 욕망이 아닌 필요에 입각한 생산 및 소비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경제의 발전이라는 비전에 입각하여, 공공영역에서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련의 청년 집단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실험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성장-대량소비라는 기준으로서의 ‘질 좋은 일자리’의 창출보다는, 사회의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노동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관점에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보하기 쉽지 않은 더 많은 부가 일자리를 만들까? 부는 이미 많다. 부가 선순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끝없는 경제성장은 환경을 파괴하고 그것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자본주의 외부로 나아가 대안공동체를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부의 정책에 입각하여 사회적 경제 영역의 발전시키는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 혹은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립성’이라는 기준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면 청년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좋은 집과 많은 소비’가 아니라 ‘함께 모여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행복’의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노동시장에서의 경쟁 완화, 청년 니트의 감소와 연관될 수 있다. 그리고 쉽지 않겠지만 그러한 가치들이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 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더욱 자립성이 높아지고 경쟁이 완화되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공성과 대안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성은 특히 ‘지역’이라는 범주와 친화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더욱 지방정부 차원에서 실험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 같다.  청년 니트는 대체로 학교와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청년으로 정의된다. 청년 니트는 헬조선에서 마상을 입고 적극적인 사회적 삶을 뒤로하고 고립에 처한 존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들은 대체로 적극성, 주도성을 지닌 대상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쉽기 때문에 청년 니트의 ‘발굴’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게 되는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강제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발굴’은 쉽지 않다. 안정된 집, 결혼 및 육아,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 많이 버는 직장이라는 ‘정상 루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많은 청년들을 강제로 니트로 만들어 버린다. ‘비정상’은 곧 소외이고 불행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청년들의 정상 루트로의 진입이라는 생각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정책 실험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롭게 믿고 기댈만한 것이라면, 청년 니트들이 다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중요한 제도가 될 것이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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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 당사자 운동을 넘어 대안적 사회 전환의 정치로
‘청년정치’에서 ‘청년’이 강조되는 것이 청년의 ‘당사자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는 기존의 공론의 영역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자발적인 주체성의 발현으로 등장한다. 이는 전문가 엘리트에 의한 대의가 충분치 않다는 조건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예로 청년당사자운동에서 청년유니온은 제도정치, 그리고 노동자를 대의하는 민주노총에서조차 청년불안정노동을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피자집 30분 배달제 폐지, 커피전문점 주휴수당 지급, 편의점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등 청년노동과 관련된 이슈들을 제기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다거나 당사자가 객관적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식의 과잉된 당사자중심주의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당사자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다. 당사자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사회구조적 위치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날것으로든 심화된 인식으로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거나 비판적인 지식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권력의 강고함,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사자에 대한 특성, 사회구조적 위치성 등에 대해서 비당사자들이 이야기를 할 수 없거나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성이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이고 동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청년팔이) 반면 당사자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정된 인식을 객관적 진리라고 말한다면 당사자라고 호명된 개인들의 내부에서의 차이와 다른 경험들과 의견들에 대한 무시와 배제 속에서 특정 개인, 특정 집단의 과잉대표와 권위주의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의 인식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당사자들의 문제의식(특수성)이 더 나은 사회로의 전환의 중요한 일부임(보편성)을 설득하여 비당사자들의 지지,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열린 당사자성을 전제로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당사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공동의 인식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는 '당사자 정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청년정치는 청년을 이용하는 정치는 아니며, 청년을 위한 정치이다. 청년을 위한 정치이긴 하지만 청년만을 위한 정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청년에 의한 정치를 포함해야만 한다. 청년에 의한 정치는 단순히 연령 차원이나 단순히 양적인 차원의 의미여서도 곤란한다. 청년정치는 청년에 의한 정치이되 청년들의 임파워먼트를 위한 정치여야 한다. 청년정치는 청년 자신들의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되,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보편적인 문제의 일부로 위치시켜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청년만이 아닌 모두를 위해 더 나은 한국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여야 한다.
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 노조’ 같은 저항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나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없어. 우리에게 사회의 X같음을 고발할 방법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바로 그 직후의 자살이어야만 해.” 소설 <표백>에서 혁명, 변혁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이념 없이 원자화되어서, 실패는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표백세대’로 명명된 청년들 중 한 명이 했음직한 말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일단 현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 청년들이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출발하려 한다.   몇 년째 2,30대 젊은 층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2011년 기준으로 20대 사망자 중 40% 이상이 자살로 죽었고, 이는 2위 운수사고(15%), 3위 암(10%)를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20대의 7.5%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경남에서의 조사에서는 10명 중 3명이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진리’처럼 되버렸지만 OECD 국가들 중 1위이다. “일정한 집단군의 자살행렬”이 “사회가 처한 재생산의 위기와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김명희, 2012)이라면, 청년이 흔히 공동체(그렇게 부를만한 뭔가가 있다면!)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청년의 자살은 사회의 위기의 핵심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의 죽음은 사회의 위기이고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통계청 2010년 분석에 따르면 자살 충동 및 이유는 1위 경제적 어려움 30%, 2위 외로움과 고독, 3위 직장문제, 4위 가정불화이다. 청년의 자살 관련 기사들에서 제시하는 자살의 원인들을 단순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위기(로 인한 어려움), 높은 등록금과 그로 인한 학자금 대출, 생활고, 아르바이트, 취업 스트레스, 우울증.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원인들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경제위기는 가장 사회의 기초에 근접한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조건이라면, 등록금,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 실업은 경제위기와 높은 연관이 있는 한국사회의 청년들의 특수한 제도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고는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고 표현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나타나거나 강화되는 개인들의 심리의 차원에서의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구조적 조건들 하에서는 안정된 일자리로의 취업이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성공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낙담과 좌절, 죄책감, 불안을 높이며 결국 우울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계점으로의 도달로서의 절망의 표현이 자살인 셈이다. “더 이상 희망도 꿈도 없어. 용서해. 차라리 살아있는 고통보다 죽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여러 명이서 함께 동반자살한 청년들 중 한 명이 유서에 남긴 말이다.   흔히 이루어지는 사회구조 분석을 간략하게 서술해보겠다. 급격한 경제적 변동이 중요한 요인이며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증가는 현 시대의 경제 위기로 인한 결과이면서 자살률을 높이는 조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1997년 IMF사태 이후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청년층의 자살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즉 추상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경제구조가 자살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청년세대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강화로 인해 더욱 공고화된다. 직업, 보수 등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무한경쟁/적자생존 논리가 전면화 됨으로 인해 현 시대의 청년은 경쟁에서의 승리와 자아실현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청년백수나 비정규직은 패배자, 즉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된다. 경제위기의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벗어날 수 있 대안은 부재한다. 그것은 한낱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안의 부재에 대한 ‘인식’은 자살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뒤르켐식으로 재구성하면 산업사회의 시장의 무정부성, 즉 시장실패로 인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부재하는 아노미적 상황으로 보고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늘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 자살은 “집합적 활동의 결합에 따른 의미 상실”로써 통합이 불충분하여 인간이 존재 근거를 찾지 못하는 것이며,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의 열망에 대한 규제의 결함”으로써 사회 통제의 부재에서 발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통찰이 뒤르켐이 근대 초기 자유방임주의의 모순을 포착한 것이라 본다면 현대의 신자유주의 또한 일정정도 공통점을 지닌다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자화된 개인들의 연대-없음은 아노미 상황이라는 식의 단순한 등식은 뭔가 께름칙하다.   청년이라는 관점에서 청년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더 파헤쳐 보자. 한국사회 청년들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핵심이 사회적 성공으로서의 번듯한 직장으로의 ‘취업’이라는 점에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 청년들이 어떻게 서열화 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이 성인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능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교육 시스템에서 또래 청(소)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혹은 패배하여 대학을 기준으로 그 틀 안에서 서열화 된다. sky-인서울대학교-지방국립대-지잡대-전문대-고졸 따위의 기준들. 대학에 가서 스펙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시스템에서 또래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 혹은 패배하여 직장을 기준으로 서열화 된다. 백수-취업준비생-알바-비정규직-정규직-대기업 정규직 따위의 기준들. 이러한 기준들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청년들의 현실적 서열화를 표현해주고 있다. 서열화의 최하층에 위치하게 되면 대부분 삶의 재생산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의 서열 기준의 최상층에 위치하더라도 만족하기 어렵다. 인간은 끝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청년이라는 집단 전체가 배제된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처해진 조건으로 인해 상당수의 청년들이 청년이란 이유로 배제된 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고, 이는 연대의 부재, 혹은 연대의 파열을 의미한다. 세분화된 서열화는 이러한 파편화의 경향을 강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자.   *청년 1: 2011년 12월 12일 공무원 시험에 여러번 떨어진 취업준비생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 *청년 2: 2011년 12월 11일 항공사 승무원 입사 실패 후 옷 매장 차렸으나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자살 *청년 3: 2013년 초 120만원 월급 받는 직장을 구함으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격을 잃어 알콜 중독증 어머니 치료비와 고등학생 동생 학비를 지원 받지 못하게 되고 고령의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가족이 살던 국민임대아파트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자살을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all or nothing’ 식의 복지제도의 한계 *청년 4: 2013년 편의점주 1월 15일 자살. 1997년 IMF 때 부도 맞은 아버지가 1억의 빚을 남기고 떠남. 아르바이트. 삼성중공업 비정규직 1년,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계약직 2년, 정리해고 때 퇴사. 취업 안 됨. 아파트 담보로 편의점 점주 됨. 집 담보로 3000만원 빌려 시작. 본사 납입금, 일매출 송금제, 계약 해지 통보 등의 압박 속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자살  *청년 5: 2010년 1월 대기업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근로계약서에는 8시간 3교대, 주 5일 근무로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12~14시간 근무, 2교대였고 설비 이상시 20페이지 리포트 써내라는 지시도 있었다. 피부염이 생겼고 우울증이 진단을 받았다. 2011년 1월 결국 기숙사에서 자살. 며칠전 여직원 자살. 자살이 더 있었으나 쉬쉬했다는 증언 있음. *청년 6: 2013년 3월 19일 자살. 37세 울산시 중구 9급 사회복지직 공무원은 빠르면 밤 11시, 늦으면 새벽 2시에 퇴근했고 주말에도 나와 일했다. 최근 2주간은 아내와 자녀와 같이 지내지 못하고 본가에서 출퇴근. 1월 31일 용인에서도 29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2월 26일 성남에서 32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두 명의 자살을 약하고 못나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고 유서에 씀. 청년 1과 2는 취업에 실패했다. 청년 3은 취업했으나 그것으로 인해 제도가 그의 삶의 재생산을 불가능하도록 조건지었다. 청년 4는 불안정한 취업에서 밀려나 재진입에 실패하고 편의점 점주가 되나 불공정한 룰에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5와 6은 각각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으로 취업했으나 살인적인 노동 강도 속에서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1~6의 배치는 대체로 앞서의 서열화에 조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서열의 층위에서 청년들의 자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기준에서 서열화에 양적/질적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은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고 청년들을 자살로 이끄는 원인으로서의 ‘공통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청년들의 자살은 어떻게 유형화 할 수 있는가?   뒤르켐은 자살의 성질이 아닌 원인을 통해 자살을 분류하였다. 이들을 자살로 몬 것은 뒤르켐에 따르면 강제적이고 외재적인 어떤 사회적 사실일 것이다. 이들을 자살로 몬 사회구조적 원인은 ‘강제된 분업’이다. 강제된 분업이란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들 사이의 계약관계는 강압적 권력의 강요나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김명희, 2012). 뒤르켐은 강제된 분업에 의한 자살을 ‘숙명론적 자살’이라 한다. 뒤르켐은 이를 “지나친 규제로 인한 자살이며, 강압적인 규율에 의해서 미래가 무자비하게 제한되고, 욕망이 난폭하게 제압되는 사람들에 의한 자살”로 정의하고 “육체적 및 정신적 압제로 인한 모든 자살”이 이에 속한다고 언급했다. 김명희는 뒤르켐이 아노미적 분업에 의한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만을 근대사회의 지배적 자살로 여긴 것을 비판하며 과도한 규제가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내재하고 사회의 아노미와 함께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숙명론적 자살은 착취적 구조와 제도적 규범의 억압에 대해 종속된 정신적 상태, 즉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의 박탈과 관련이 있다. 또한 숙명론적 자살은 전쟁이나 고문 등 불가항력적 규율로의 속박 상태와 물리적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경제적 강제’로 구분할 수 있다. 김명희는 이러한 관점에서 군대에서의 자살, 쌍용차 노동자의 자살, 매향리와 강정마을 주민의 자살, 가족동반자살 등, 한국사회에서의 일련의 자살들을 정치를 전쟁하듯 운영하는 ‘전쟁정치’에 대한 대응이나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숙명론적 자살인 것으로 분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관점에서 청년들의 자살은 ‘경제적 강제’로 인한 숙명론적 자살,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의한 숙명론적 자살로 위치지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학벌과 직업적 서열화들의 고착화와 그 틀로의 진입 자체의 어려움의 고착화가 강제된 분업이고 경제적 강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청년들에게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다. 진입 자체의 어려움과 내부의 피할 수 없는 서열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배제되는 자들과 서열화 되어 착취당하는 자들의 차이일 따름이다. 이중의 치킨 게임인 셈이다. 또한 이는 청년들의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경제사회구조와 청년들과 관련된 특정 제도들 즉 과도한 등록금, 비정규직, 실업의 구조화 등에 있다는 앞서의 설명과도 일관된다. 흔히 지적되는 우울증은 그것의 개인적 표현일 뿐이며, 그것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살의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 위기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청년들을 둘러싸고 ‘강제된 분업’, 잘못된 규제와 규율을 바꾸어 적절한 도덕적 통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뒤르켐이 상정했던 초기 산업사회/자본주의의 도덕적 통제의 부재가 많은 변화를 거쳐 오면서 현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통제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적절한’ 도덕적 통제의 규제 대신 거짓 자유의 고착화로 인한 비자유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고착화 내지는 전면화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청년들에게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은 내면화되어 전면화 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강제된 분업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하고, 심지어 그것을 핵심적인 동학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경제적 자유를 내세우며 국가의 최소화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의존은 많이 알려져 있는 바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위해 많은 것을 노동 유연화, 민영화 등등의 이름으로 특정한 분업 형태를 강제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시민의 죽음, 사회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다시 청년에게로 돌아 가보자.   한국사회의 청년에게 ‘취업’은 삶 (재)생산에 핵심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청년이 ‘배제’되었다거나, ‘자리 없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일단 취업과 관련된다. 누군가의 언급처럼 노인을 ‘자리 없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면, 노인은 자리를 이미 차지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실감’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청년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삶 그 자체’의 차원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자리는 부족하고 있는 자리들도 앉으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부실한 것들이 많다. 많은 청년들의 삶은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것의 극단적인 표현이 ‘자살’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 청년 6의 유언 중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인간이기에, 뜨거운 피와 따뜻한 삶이 도는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최소한의 존중과 대우를 원하는 것이다. 공공조직의 제일 말단에서 온갖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부속품으로서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건 머리 일곱 개 달린 괴물과의 사투보다 더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