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2024년 하반기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를 연구할 특별연구그룹을 모집합니다.
2024년 하반기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를 연구할 특별연구그룹을 모집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The owl of Minerva spreads its wings only with the coming of the dusk 안녕하세요. 연구탐사대 운영진인 나이오트입니다. 저희는 현재 사회문제 해결을 향한 예비연구자들의 진심을 지식으로 발전시키도록 돕는 12주 연구몰입훈련프로그램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 난제를 함께 연구하면서 구조적 원인과 대안을 모색하는 사회문제 연구 커뮤니티이자 연구훈련 커뮤니티인 '연구탐사대'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원정 부트캠프 9월 모집에 앞서 저희의 마음을 여러 분들에게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글을 적어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연구탐사대의 가장 첫 시작은 사실 2020년 4월에 시작된 ‘프로젝트 함트XAMT’라는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2019년 11월, ‘청년 연구자 플랫폼 제안’이라는 이름으로 나이오트의 파운더가 사회문제해결을 위한 연구 플랫폼 기획안을 완성한 이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에 2020년 3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었습니다. 단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형태의 잔혹한 범죄 앞에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분개하면서 동시에 느낀 감정은 ‘무력감’이었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 지, 그 원인은 무엇이고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이 무력감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기획한 것이 연구 플랫폼이었고, 여성혐오로 표현되었던 관련범죄가 디지털 성범죄의 형태로 변이된 이 상황에서 만일 연구 플랫폼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지금껏 플랫폼을 기획한 수년의 시간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팀을 꾸렸고, ‘문제정의활동에 기반한 문제해결해커톤’을 기획해보자는 마음으로 프로젝트 함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연구 밖에 해본 적이 없는 대표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실행하면서 마주하는 시행착오 앞에서 저희는 너무 취약했고, 몇개월이 채 되지 않아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의 정신만은 남아 이후 창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나이오트와 연구탐사대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조주빈이 잡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잠잠해진 후에도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실체와 구조, 원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요. 언제든 문제는 재발될 수 있었고 또 변이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구조와 원인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했고, 그런 연구자들을 모으고 또 연구하기 위해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부지런히 개발했고 밤낮없이 활동해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지난 서울대 딥페이크 유포 사건에 이어 이번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사건이 터졌을 때 정말 많이 좌절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에 대한 연구와 기록,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곳에 주장해왔던 저희였지만 막상 정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사건으로 변이되는 동안 저희가 연구의 측면에서 해온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전히 문제는 미궁 속에 갇혀 있고, 문제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가고 피해규모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왜 알면서도 그런 연구자들을 모으지 못했는지,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지 못했는지 많이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문제해결형 연구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지만 정작 재발 변이된 문제 앞에서 저희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시에 지난 8월 28일,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빌라왕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함께 분개했고 또 무엇을 도와야 할 지 고민했지만 주저해왔었습니다. 물론 다행히도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이 또한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피해자들에 대한 응급대책일 뿐, 여전히 부동산 문제와 전세제도에 대한 문제는 시한폭탄과 같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특별법이 통과되었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이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난 8월 29일에 아시아 최초로 일부 승소한 기후소송은 어떨까요. 헌법재판소는 2031년 이후의 장기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2030년까지의 중장기 목표에 대해서는 기각 판결을 내린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2030년까지, 더 나아가 앞으로 사회 전반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사회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부 차원의 대응과 지원, 또 제재를 해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와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정리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기후재난을 한해한해 견뎌내면서라도 우리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만 그것을 정부에만 맡기거나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에 우리는 너무도 무력합니다. 그저 주저앉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어서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9월에 모집하는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 기후재정, 디지털성범죄, 전세사기를 주제로 연구할 이슈연구그룹을 모집합니다. 저희 연구원정 부트캠프는 12주동안 자신이 진심인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연구계획서를 만드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이슈연구그룹에서는 함께 문제해결을 위한 각 부분들을 연구하면서 연구계획서를 세우고, 이를 종합한 연구 플랜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에 필요한 지원과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계속해서 세부 이슈들에 대응할 수 있는 연구자그룹을 길러내고자 합니다.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짓을 시작한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이슈가 사그라들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해서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에 Minerv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제도적, 공동체적 원인을 정리하고 대안을 연구하고 모색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이 그룹에 함께 해주세요. 저희가 수 년동안 검증해 온 연구훈련 프로세스를 통해 여러분의 진심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연구원정 부트캠프가 사회문제 솔루션을 만드는 최적의 대안이어서가 아닙니다. 저희도 고작 4년차 스타트업에 불과하고 연구원정 부트캠프 또한 연구계획서 작성까지만 개발되어 있는 설익은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 프로그램이 보다 검증된 이후에, 보다 안정화된 이후에 연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통해 해야 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 문제가 심각한데, 한가하게 연구나 하고 있을 것이냐. 그것도 기연구자들이 아니라 예비연구자들을 언제 훈련시킨다는 것이냐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것은, 먼저는 사회문제의 구조적 요인과 원인을 연구해서 기록하고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회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제대로 뾰족하게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분명 가장 적실한 해결책을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동시에 저희는 당장의 연구 전문성 이상으로 문제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진심’이 가장 적실한 연구를 만들어내는 코어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에 대해 오래 연구해오신 연구자분들이 함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나가시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진행하면서 문제의 당사자 혹은 문제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던 분들이 직접 정하시는 연구주제의 적실성과 깊이는 기연구자분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너무 필요한 영역임을 절실히 깨달아왔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에게 연구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연구할 수 있는 인프라와 공동체를 만들어드리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저희는 확신합니다. 마치 지구 멸망의 날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난 2021년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 문제가 어디까지 변이되고 피해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었는지를 마주할 때에, 저희는 이 싸움이 결코 한두 사건의 해결로 끝나거나 한두 법안의 통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지합니다. 디지털 성범죄를 필두로 디지털 플랫폼의 규제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법적 지위의 논쟁, 여기에 젠더 이슈와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대응까지 연결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전세사기 사건 또한 우리나라의 부동산 산업과 대출규제, 주거권 논쟁이 뒤섞인 가운데 그 속에 응축되어 온 욕망과 질서의 각축전을 드러낸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글로벌 이슈인 동시에 산업 전반의 전환과 정부의 방향성 자체를 근본부터 재논의해야 하는 기후재정 이슈 또한 마찬가지이죠. 이 문제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변이될 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장의 사건에 대한 연구 이상으로 연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연구공동체의 조성과 연구자 양성이 함께 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이번 부트캠프를 시작으로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연구하는 연구자와 연구공동체가 키워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동시에 멘토 역할을 해주실 기연구자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연구하고 또 연구에 도움을 주실 연구자분들도 저희에게 연락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연구에도 재원이 필요합니다.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주실 분들이 있으시다면 연락주시면 관련해서 기획들을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이렇게 심각한 이슈에 대해 유행 타듯이 가볍게 대응하는가’라는 불편한 마음이 드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먼저 사과드립니다. 그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심각성을 비추어볼 때에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염치불구하고 모집을 진행합니다. 동시에 저희는 연구그룹과 공동체 유지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연구훈련과 연구 코디네이션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영리기업입니다. 공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지속가능성이 필요하다 판단하기에 저희는 비용을 받습니다. 다만 지속가능성 이상의 영리를 취하기보다 가장 효과적인 연구공동체의 조성과 연구수행에 제1순위를 두고 재정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연구탐사대의 미션이자 약속이니깐요. 보다 자세한 모집내용은 2024년 연구원정 부트캠프 하반기 대원 모집 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이외의 문의나 제언, 협업문의 등은 연구탐사대 DM이나 카카오톡채널을 통해 전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운동 단체의 일을 열심히 돕던 한 학부생이 내 연구실에서 석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하고자 하는지 물었다. “세상을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학생에게 그런 목적이라면 대학원 공부를 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공부는 공부인 것이라고. 논문을 쓰다 보면,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상식에 가까운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읽고 정리하고 데이터 분석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도 우리가 가 닿는 자리에는 종종 불확실성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그래서 종종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조차도 온전히 해내는 게 쉽지 않다고 답했다. 학생은 되물었다.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거 하나였다고. 그리고 공부가 가진 힘을 믿는다고, 공부가 당장의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속 시원한 말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인류가 유사한 문제를 두고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쌓아 온 지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이 있다고. 그 통찰의 힘이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씀 중, Diversitas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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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술장의 자율성과 재생산을 위한 소고
한국의 인문학계는 오랫동안 '위기'라는 말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것을 단순한 '위기'가 아닌 '재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재앙의 근원은 '학술장의 부재'에 있으며, 이는 단순히 학생들이나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 부족 때문이 아니라 연구자들과 학술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술장이 직면한 문제는 그 뿌리가 깊고 복잡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술장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주장들과 달리 나는  인문학이나 이론적 연구들이 한국 사회의 의제나 일상인들의 삶과 유리되었다던가, 학자들이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글을 쓰지 못하여 위기에 빠져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서점 매대에는 인문학을 다룬 대중적인 교양서들이 차고 넘치고, 유투브에는 인문학 셀러브리티들과 그 워너비들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중이다. 지금은 7-80년대처럼 함석헌이나 도올의 강의를 듣기 위해 종로를 찾아가 강당을 채우는 시대가 아니다. 인문학이 교양대중을 찾아가고 있다. 학자들은 ‘자리를 못 잡아서’ 생계의 길을 찾기 위해 교양과 학술상업출판의 영역으로 달려간다. 또 다른 학자들은 ‘자리를 잡은 김에’ 인문학 대중의 셀러브리티가 되어 개인적 평판을 높이려 시도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 위기의 한 모습이다. 학술장 바깥의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 스스로가 인문학을 ‘삶을 위한’ 것으로 여기면서, 인문학은 정말로 ‘삶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학부 교양 수업에서 열심히 가르쳐서 문해력을 길러주고, 비판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인문학’이 된 것이다. 인문학은 삶 전반에 관한 것이고, 인문 이론의 탐구는 누구든 책을 읽을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비싼 장비와 실험재료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도 아닌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하면 된다는 주장이나온다(김우재, “코로나 시대의 인문학”, 한겨레신문 2020년 6월 30일).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일일이 반응할 시간이 없다. 교양, 교육, 학술상업출판 영역의 반대편에선 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KCI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쓰고, 좀 더 노력하여 주로 영어로 SCI나 A&HCI 같은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학술지에 논문을 쓴다. KCI 한편에 100점, A&HCI 한편에 100점에서 600점(학교마다 다르다). 1년에 200점에서 1000점 정도까지, 연구자라면 응당 개인 실적 점수를 채워야 한다. 이 개인점수가 연구재단의 연구비를 신청하거나, 교수 임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혹은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은 현실감각 없는 사람이 된다. 창조적 역량과 체력이 어마어마하거나, 하나의 아이디어로도 여러 편의 논문을 잘 쪼개서 쓰는 훈련이 된 사람들은 1년에 여러 편의 논문을 뚝딱뚝딱 쓰지만 필자와 같은 보통의 인문학자들은 1년에 두 편의 논문을 쓰면 이미 기진맥진이다. 그런데 이 글들은 누가 어떻게 읽을까?  인문사회분야의 제 영역에도 자연과학의 경우처럼 학술지 논문이 주된 교류 수단이고, 그래서 인용지수를 통해 학문적 퀄리티를논할 수 있는 분야가 있기는 하겠지만, 앞서 말한 이론장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논문들은 그다지 읽히지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상술하자면 여기서 ‘읽는다’는 건 논문을 읽는 행위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논문 출판’의 가장 주된 목적과 관련된 읽기 행위, 즉 동료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재료로 읽고 인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인문학술 이론장의 연구자들의 논문은 그런 의미에서라면 별로 ‘읽히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연구자들의 이론 연구를 읽지 않아도 내 개인점수를 채우기 위한 또 다른 이론 논문을 얼마든지 쓸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별처럼 빛나는 철학 대가들의 저작들이 있고, 영미 학술장엔 내 논문의 논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중견, 석학들의 논문이나 단행본이 많다. 내 영혼이 그들과 직접 교통하는데, 굳이 옆을 돌아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 이론의 대가나 석학이 없기 때문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는 서구 이론의 해설자들만 있지 한국적 상황에서 길러낸 창조적 이론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반응이나, ‘서구에서 인정받는 책을 쓴 (한국 학술장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 이론가가 얼마나 되나’ 같은 반응들이 대표적이다. 확실히 아주 작은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그런 이론가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연구자 개개인의 실력을 문제 삼는 의미에서 대가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에 동의하기도 힘들다. 한국의 이론 대가나 석학은 말하자면 지금 모두 ‘슈뢰딩거의 석학’이다. 많은 이들이 박스 속에서 ‘석학임’과 ‘석학 아님’의 중첩상태에 놓여 있다. 확인을 하려면 뚜껑을 열고 관측적 개입을 해야 하는데, 지금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서로의 저작을 읽고, 인용하고, 토론 주제로 올리고,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이나 책을 쓰지 않으니 슈뢰딩거의 석학들은 지금 계속 박스 안에서 존재하며 비존재한다.  즉 한국 인문학술 이론장엔 좁은 의미의 ‘학술장’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학술장이 대학 입시, 교육과정, 교원 평가 시스템 등에 종속되어 자율성을 상실했다. 인문학의 가치와 의미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개인주의적 성과창출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구자들 간의 학술적 교류와 협업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인문학계에서 독창적인 이론가나 학파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학문의 발전은 연구자들 간의 활발한 토론과 비평, 그리고 이를 통한 상호 발전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재의 한국 인문학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연구자들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이다. 정년트랙 전임교수 자리는 극히 제한적이며,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단기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장기적인 연구 의제를 추구하기보다는 무한경쟁 속에서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하게 만든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는 깊이 있는 연구나 혁신적인 시도, 동료 연구자와의 토론과 논쟁을 통한 학술장 전체의 발전보다는 당장의 논문실적을 쌓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학술지 논문 중심의 평가 제도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연구자들의 업적을 주로 학술지 논문의 수로 평가하고 있어, 깊이 있는 연구를 담은 단행본이나 공저 논문집 등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연구의 질적 저하와 파편화를 초래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하나의 큰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기보다는, 같은 내용을 여러 개의 논문으로 쪼개어 발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셋째, 위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학술전문 단행본에 대한 체계적인 경시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학술전문 단행본은 한 연구자의 깊이 있는 사상과 이론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한국의 인문학 연구가 국제 학계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현행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사업을 확대한 '국가박사제'의 도입이다. 이는 일정 수의 박사급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고용(재임용)과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연구자들이 장기적인 연구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연구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둘째, 학술전문 단행본과 공저 논문집에 대한 평가 개선이다. 이들 저작에 대해 학술지 논문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연구자들이 더욱 깊이 있고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는 연구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 간의 협업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셋째, 대학출판부의 역할 강화 및 학술전문출판 영역의 확대이다. 대학출판부를 통해 질 높은 학술전문서를 출판하고, 이를 대학 평가에 반영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술전문출판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는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보다 넓은 독자층에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학술 출판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넷째, 서평논문에 대한 평가 개선이다. 서평논문은 학술장 내에서의 토론과 비평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현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인정과 평가 개선이 필요하다. 서평논문의 활성화는 연구자들 간의 상호 비평과 토론을 촉진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인문학이 곧 학술정치이자 학술비즈니스라고 주장한다. 이는 외부의 정치나 비즈니스 논리가 학술장에 침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학술장 자체가 고유의 정치와 비즈니스 논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연구자들은 개인 연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은 학술장을 만드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연구 성과를 높이는 것을 넘어, 학문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특히 어느 정도 명망과 고용안정을 쟁취한 중견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동료 연구자들, 특히 신진 연구자들의 작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비평하며, 상호 인정과 존중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는 학문의 세대 간 전수와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힘을 모아 제도 개선과 예산 확보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연구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 전체의 발전과 그 사회적 가치의 인정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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