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그래픽은 어떻게 운동이 되는가
‍ “그래픽은 어떻게 운동이 되는가” 일상의실천 권준호 대표 저는 냉소에 그치지 않는 시도들이 변화를 이끈다고 믿습니다. 누군가는 더디다고 느끼는 사회변화일지라도요.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오늘은 일상의실천을 이끄는 권준호 디자이너를 만났습니다. 그는 도서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을 집필했는데요. 글을 쓰는 에디터이자 사회변화를 꿈꾸는 구성원인 저에게 커다란 영감을 안겨준 책입니다. 사심을 가득 담아 진행한 그와의 인터뷰, 함께 살펴보시죠! 1.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인 ‍‍2.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디자인하기 ‍3. 건강한 디자인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 🌿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인 ‍ | 준호 님의 '일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하루 일과가 궁금해요. 고정된 루틴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가능하면 가장 먼저 출근하려 해요. 보통 10시부터 출근인데, 저는 9시에서 9시 반 사이에 작업실에 가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메일도 정리하고, 할 일 정리하는 시간이 되게 소중하더라고요. 작업하고 7시 즈음 퇴근한 뒤에는 테니스나 배드민턴 등의 운동을 하고 있어요. ‍ | '실천'은 꾸준함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 같아요. 오랜 시간 디자인을 해온 건데, 싫증이 나거나 지루하지는 않으세요? 올해로 11년 차네요. 길다면 길지만 한 분야를 파고드는 데 있어서 아주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30년, 40년 동안 하시는 장인분들도 계시니까요. 제게 작업하다 지루함을 느끼거나 번아웃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주시는데, 저는 다른 작업을 한다고 답변해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래픽 디자인은 범위가 굉장히 넓어요. 책, 포스터, 웹 디자인 모두 각기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죠. 저는 그때마다 스위치나 기어를 바꾼다고 표현해요. 운동으로 치면 수영하다 등산하는 느낌이라, 지루하지는 않아요. ‍ | 경력이 쌓인 만큼 일을 안배하거나, 하고 싶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어서 그런 부분도 있을까요?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아드리아 쇼넷이라는 분이 지도 교수이셨는데요. 유학을 떠나기 전 이분께서 집필한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라는 책을 읽었어요. 핵심은 작업이 재미없다고 느끼면 그 작업은 결국 자기를 갉아 먹고, 그걸 오래 하다 보면 결국 영혼이 망가진다는 거였죠.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주변 사람들은 '일상의실천'이 이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아요. 일상의실천을 시작할 때부터 세 명이 모두 같은 생각이었어요. 월급을 안 가져가면 안 가져갔지,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은 하지 말자, 포트폴리오에 올릴 수 있는 작업만 하자고 결심했어요. ‍ 존경하던 디자이너 한 분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수치심의 서랍’이라는 게 있대요. 돈 때문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했지만, 차마 공개하지 못한 작업물을 넣어둔 공간이 있다고요. 그 서랍을 만들지 않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부터 지금까지, 공개할 수 있는 작업만 해왔던 것 같습니다. ‍ | 협업을 진행하는 기준에도 비슷한 맥락이 있을 것 같은데요. 굉장히 맞닿아 있죠. 일상의실천을 시작할 때부터 적용한 세 가지 기준이 있어요. 첫 번째는 재미예요. 저는 디자이너이자 작업자이고, 무언가를 이미지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잖아요. 표현적인 측면에서 즐겁게, 재밌게 할 수 있는 작업인지가 중요해요. 두 번째는 의미예요. 저희는 초창기부터 의뢰를 기다리지 않고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1인 시위를 하고 계신 분, 광화문 광장에 계시던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찾아뵙고 디자인을 해드리겠다 했죠. 제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제가 만들어내는 작업이 어떤 식으로 의미를 갖고 통용될 것인지 고민해요. ‍ 세 번째는 예산인데요. 초기에 주로 함께 작업했던 비영리나 시민단체는 대체로 예산이 부족했어요. 이런단체의 작업만 계속하면 디자인 업무를 지속하기 힘들죠. 아무튼 아주 작은 금액이라도 무조건 받으려고 했어요. 재능 기부 형식으로 진행하면, 클라이언트는 무료로 받는 작업이니 디자인의 가치나 소중함을 고려하지 못하고, 디자이너도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기 어려우니까요. 세 가지의 기준 중 두 개가 충족되면 할만한 일이라 판단해요. 세 개가 모두 충족되면 좋겠지만 그런 작업은 존재하지 않더라고요. (웃음) ‍ 💨 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디자인하기 ‍ | “진보”라는 단어를 ‘고여있음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표현하셨더라고요. 준호 님이 삶과 업을 대하는 태도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한데요. 이와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와이낫어소시에이츠라는 스튜디오에서 일을 했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저는 스튜디오 창업자들을 학생 때부터 존경했어요. 그들은 영국이 경제 위기를 겪던 1970~80년대 대학을 나왔죠. 마가렛 대처가 수상이던 시절이었고요. 대처가 신자유주의를 적극 도입해 경제 위기를 벗어났다고도 평가하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사회적 불평등도 심화됐어요. 당시 대학생이던 이들은 정부 정책과 마가렛 대처가 불러온 변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그래픽 작업을 했죠. 당시의 펑크 문화와 섞여서 하나의 사회적 이미지가 만들어졌어요. 제가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할 때 그분들은 50대셨어요. 한국에서 50대 디자이너는 회사의 대표나 교수로 재직하는 등 현장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분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이디어 회의를 이어가는데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 보이더라고요. 20대 때처럼 공격적이지는 않더라도, 본인이 가진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녹여서 풀어내고 계셨어요. 그들은 사회적 약자, 커뮤니티 등을 위한 작업 등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가치관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며 작업해왔죠. 글과 인터뷰를 통해 상상만 했던 그들의 모습이, 30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게 감동이었어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다짐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겠네요. 요즘 시선이 닿는 사회 문제가 있으세요? 특정 사회 이슈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시선이 여러 방면으로 옮겨다니는 편이죠. 최근에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분과 작업을 했어요. 본인의 경험을 담아 도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를 집필하셨고, 저희는 책 표지를 디자인했죠. ‍ 작업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건 이분의 태도였어요. 피해자는 본인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이분은 달랐죠. 직접 사건을 공론화하고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언하면서 자신의 사건을 변호했어요. 피해자가 적극 나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죠.‍ 이분은 자신의 책이 마냥 우울하거나 피해자 보고서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법원에 출석할 때도 검고 칙칙한 옷이 아닌 밝고 화려한 옷을 입고 가셨는데, 책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셨대요. 그래서 다채로운 색을 사용해 화려하게 디자인했어요. 그분도 굉장히 좋아하셨고, 최근에는 책이 증쇄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어요. 이런 점들이 저에게 뿌듯함으로 다가오면서 작업의 의미를 깊게 만들어줘요. ‍ |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거나 비영리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 작업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시나요? 사회에 의미 있고 필요한 목소리라고 판단할 때 그 작업을 맡아요.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해요. 클라이언트가 어려운 일을 당하셨다거나, 그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사항을 무조건 수용한다면, 그건 디자인 자체의 가치나 의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 | 어떻게 조율하시는지 궁금해요. 디자인적인 완성도보다 메시지를 드러내달라는 작업이 있다면, 디자이너 입장에선 다른 방식으로 풀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죠. 특히 노조나 노동계 분들과 작업하면 해당 분야에서 통용되는 시각 언어가 있어요. 머리띠나 조끼를 착용하거나 강렬한 색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등이죠.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땐 이분들이 지향하는 방향이나 가치관이 의미 있다 판단하고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갈등이 생겼어요. 반드시 천지개벽체라는 서체를 사용해야 하고, 인물은 ‘투쟁’이라는 머리띠를 쓰고 있어야 한다 등 여러 제약 사항이 많았어요.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떤 지점을 설득할지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했죠. 결국 머리띠를 빼고, 조끼와 평상복 사이의 절충안을 찾는 데까지 성공했어요. 그분들의 방식을 모조리 부정한 채 ‘문화예술계에서 사용하는 시각 언어가 세련됐으니 이렇게 합시다’ 강요할 수는 없어요. 이런 변화는 점진적으로 필요하다고 봐요. 클라이언트 분들은 시각적으로 너무 약해 보이지 않냐면서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요. 결과적으로 아주 잘 됐습니다. 노조 위원장 선출 포스터였는데, 그분이 위원장이 되셨거든요. (웃음) ‍‍ | ‘소통’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느낍니다. 소통의 측면에서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디자이너다 보니 세상을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보는데요. 동물보호 단체는 동물 권리의 시각에서, 환경단체는 환경 보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죠. 그런데 자칫 어느 한 쪽의 시각에만 치우치면 소통이 단절되더라고요. 얼마 전 비영리 단체와 작업을 했어요. 1년 반가량의 기간이었죠. 그렇게 오래 걸릴 작업은 아니었는데 연락이 끊기거나 논쟁이 이뤄지면서 과정이 길어졌어요. 그분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렇게 보일 수 있다'는 식의 피드백을 계속 주셨어요. 저는 좀 더 일반적인 기준을 갖고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고요. 특정 시야를 살짝만 벗어나면 다른 면이 있음을 알리는 게 디자이너의 일인 것 같아요. 같은 작업이어도 설득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에요. 이 분야를 그래픽 디자인이라고도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고도 표현하는 이유죠. 단순 미사여구가 아니라 ‘소통’이 정말 중요한 키워드여서 그런 것 같아요.‍ ‍ 하나의 작업을 두고 단순히 외주를 맡겨 진행하는 작업이 아니라, 작업을 사이에 두고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느껴요. 저는 작업이라면 자연스레 참여자의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좋은 작업이자 건강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 반대로 건강하지 않은 작업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디자이너를 ‘을’로 여기는 경향은 여전히 강한 것 같아요. 왜 이런 관행이 굳어졌을까요?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희는 비딩*(회사가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서 경쟁을 펼치는 일종의 공모전)은 참여하지 않고 있어요. 처음 스튜디오를 연 뒤 멋모르고 참여했다가 심사위원분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길래 반박했더니 떨어졌거든요.‍ 비딩의 초점은 말 잘 들을 것 같은 디자이너, 그중에서도 비용이 가장 낮은 디자이너를 뽑는 것에 맞춰져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세탁기를 바꿨는데, 세탁기는 모델마다 품번이 있고 어떤 플랫폼에서 사냐에 따라 가격이 다르잖아요. 같은 제품을 싼 가격에 사려 하는 건 당연하다 생각해요. 그런데 디자이너의 작업은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어떤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이거든요. 이걸 최저가의 가격으로 선정한다는 것에서부터 잘못됐다고 봐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거죠. 비딩에 선정돼도 함께 일할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 또한 큰 문제 중 하나예요. 기획에 애정이 있는 기획자라면 이 디자이너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나와 어떤 시너지가 날 것인지 여러 차례 리서치를 한 상태에서 디자이너를 선정하겠죠. 이렇듯 선정 과정에서부터 절차적인 문제들이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 |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까요? 와이낫어소시에이츠에서 일할 때, 연세 지긋한 신사분이 오셔서 디자이너와 담소를 나누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의 관장님이셨어요. 박물관 시즌 디자인을 의뢰하셨고 직접 디자이너의 사무실로 찾아오셔서 의견을 나눈 거죠. 어떤 기관이든 중요한 프로젝트라면 작업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디자이너와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을 예로 들면 전시부장이나 관장 등이 결정권을 갖고 있을 텐데, 보통 주니어 큐레이터분이 연락을 주시죠. 큐레이터의 마음에 들었음에도 올라가서 까이고, 수정하고, 까이고 하는 일이 정말 비일비재해요. 회사도 마찬가지고요. 따라서 미팅하거나 협업을 진행할 때는 결정권자, 혹은 결정권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직책의 소유자가 자리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미팅이 전혀 의미가 없으니까요. 🤝 건강한 디자인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 ‍ | 일상의실천을 막 시작했던 때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과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전히 같은 점은 친구로 시작한 저희가 지금도 여전히 친구라는 점이죠. ‍큰 변화를 꼽자면, 제가 개인 작업자에서 디렉터로 역할이 확장된 거예요. 처음 시작한 세 명의 멤버 이외에 함께하는 동료들이 생겼어요. 저는 팀원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이들이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고민하고 있어요. 방향성과 완성도 측면에서는 강한 기준을 갖되 표현 방식, 스타일 등은 작업자의 특색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 | ‘제안하되 강요하지 않는다’는 그라운드 룰이 인상적이었어요.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저희 나름대로 중요한 룰로 굳어졌어요. 팀원 중에는 제가 전혀 할 수 없는, 혹은 관심 없는 표현 방식으로 작업을 만들어가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런 부분을 낯설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으려면 제가 시각적으로 더 열려 있어야겠더라고요.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 “내가 꾸는 꿈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가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흐릿한 이상은 선명한 목표로 거듭날 수 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닿았어요. 준호 님은 이루고 싶은 꿈,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세요? 스튜디오를 시작할 때 품었던 단기적인 목표나 꿈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해요. ‘강남에 있는 40평짜리 아파트를 사고 싶다’와 같은 꿈을 꿨던 게 아니니까요.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작업하고 싶었어요. 꿈을 이뤘다는 표현은 너무 교만한 것 같은데, 제가 당시 생각했던 모습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네요. (웃음)‍ 저희는 디자이너가 단순히 을이나 용역업체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온 파트너로서 인정받았으면 했어요. 그러나 클라이언트 분들은 해당 작업을 누가 디자인했는지 드러내지 않으시더라고요. 이런 부분을 바꾸고 싶어서 많은 요청을 했고, 이제는 역으로 클라이언트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있기도 해요. 저희 인스타그램 계정의 팔로워가 7만 명이 넘다 보니 했던 작업을 태그해서 올려달라는, 재밌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저는 오래 작업하고 싶어요. 나이와 세대를 떠나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디자인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동시대에 작업하는 작업자로서 꾸준히 작업을 해나갈 수 있었으면 해요. ‍‍ 글 | 문지원 ‍ ❗이 콘텐츠는 'Table Talk(테이블 토크)'의 기사를 가공하여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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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마케터의 도파민 터지는 사회변화 캠페인 기획법
‍ 전직 마케터의 도파민 터지는 사회변화 캠페인 기획법 👉🏻 긴 글은 PDF로도 받아볼 수 있어요 ‍ 📣 모두가 '캠페인' 하는 시대 ‍ 캠페인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기업에서 하는 광고 캠페인이나 브랜딩 캠페인도 있고, 비영리 조직이나 공공기관에서 하는 공익 캠페인도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정당에서 하는 정치 캠페인도 있어요. ‍보통 영리 목적의 ‘마케팅 캠페인’과 공익을 위한 ‘사회변화 캠페인’이 많이 다르다고들 생각합니다. 주체나 메시지의 목적만 봐도 다른 점이 정말 많죠. 그런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았어요. 자동차 브랜드의 마케팅 캠페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 캠페인은 시승 신청을 위한 개인정보 수집이 목적일 때가 많았는데요. ‘어떻게 하면 자동차 구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쉽고 간단하게 개인정보를 입력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시승 신청 사이트와 홍보 콘텐츠를 기획했습니다. 몇년 뒤 대선을 앞두고 기후, 청년, 소수자 인권 등에 대한 대선 후보의 공약과 입장을 요약한 ‘대선 캐비닛’ 콘텐츠를 알리는 캠페인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대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쉽고 간단하게 이메일 주소를 입력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구독 페이지와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두 가지 캠페인은 운영 주체와 궁극적인 목적, 대상과 규모까지 모두 달랐지만, 소식을 받아볼 개인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는 점에서는 아주 유사하죠. ‍ ✅ 마케팅 캠페인과 사회변화 캠페인의 공통점 1) 먼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진행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알릴지, 사회문제와 활동을 알릴지 차이일 뿐이죠. 2) 알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비슷해요.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캠페인이 많습니다. 마케팅 캠페인은 주로 ‘구매' 행동을, 사회변화 캠페인은 ‘참여’ 행동을 유도하죠. 3) 행동 변화를 넘어서 ‘팬’을 만들기도 합니다. 브랜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충성 고객이 필요하고, 비영리 조직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지하는 회원들이 필요하니까요. ‍ 이 공통점들은 바로 캠페인을 하는 목적이자 본질이기도 한데요. ‘캠페인’의 어원은 전쟁 용어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사회 이슈와 운동, 그리고 이를 알리기 위한 캠페인과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 이 경쟁 상황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변화시키고, 연결되는 것이 바로 ‘캠페인’인 거죠. ‍‍ 🌊 ‘사회변화’ 캠페인 물결 속에서 ‍검색창에 ‘캠페인’을 입력하면, 초록색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연관검색어로 ‘환경’과 ‘공익’ 등이 보여요. 이제는 기업들도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익 캠페인을 하고, 반대로 비영리 단체들도 브랜딩과 마케팅 전략을 시도합니다. 아예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전면에 내세우는 소셜 섹터의 비중과 영향력도 점차 커지고 있어요. ‍ ESG 경영과 가치소비, ‘브랜드 액티비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 속에서 기업과 단체는 모두 사회변화 캠페인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직도 남아있고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런 캠페인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기획하는 사회변화 캠페인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고, 그들의 인식과 행동에 변화를 만들고,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 🏄 ‘뼈케터’의 캠페인 기획 노하우 저는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에 매료되었어요. 그래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하고, 광고연합동아리에서 활동하고, 광고회사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디어를 만들고 파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리는 기획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왔어요. 어느새 ‘뼈케터’(뼛속까지 마케터)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사회변화 캠페인을 할 때도 마케터의 시선과 태도를 적극적으로 적용했던 거죠. 마케팅의 기본 개념인 STP 전략, SWOT 분석, 4P 기획부터 AIDMA, AISAS 등 소비자 행동 모델과 퍼널 전략까지 활용해 왔습니다. (이중 모르는 개념이 있다면, 검색해 보고 공부하며 적용해 보길 추천 드립니다.) ‍특히 캠페인의 메인 컨셉을 도출하기 위해 아이디어 발상법을 꼭 적용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크리에이티브 개발법이 있는데요. 당연히 정답은 없지만, 여러 이론을 살펴보고 실제로 시도한 결과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했어요. 정보를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숙성의 시간을 거쳐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다음 구체화를 하면서 실행하는 과정이죠.‍ ‍ 기획 과정의 예시로 실제 진행했던 캠페인을 소개하려 합니다. 가장 최근에 청소년기후행동과 함께 기후 헌법소원을 위한 국민참여의견서를 모으는 캠페인을 기획했어요. ‘말풍선 보내기’라는 컨셉을 중심으로 ‘기후대응 이의있음! 우리의 말은 헌법재판소로 간다'는 슬로건을 뽑았습니다. 이 메시지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 1) 수집과 분석 기획에 앞서 다음 세 가지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 📌 캠페인 내용과 관련된 정보 저는 기후단체에서 활동했던 경험도 있고 비건 유튜브를 운영하며 IPCC 기후보고서를 다뤄왔기 때문에, 기후 이슈에 관한 배경지식이 있었어요. 최근 기후 이슈들을 다시 살펴보며 이해도를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기후 헌법소원 소송에 대한 자료를 공부했죠. 국민참여의견서 캠페인을 시작한 배경과 목적부터 보도자료, 변론요지서 등을 꼼꼼하게 파악했어요. 기후 이슈를 다루는 소셜 계정을 탐색하며 콘텐츠 내용과 구성을 수집했습니다. ‍ 📌 캠페인 형식과 관련된 참고 자료 캠페인 기획에 참고할 만한 국내외 캠페인 케이스와 웹사이트를 모아 서로 공유했어요. 주제와 무관하게 다양한 형식의 캠페인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 상황에 맞게 어떤 부분을 참고하고 어떤 부분을 다르게 해야 할지 이야기했죠. ‍ 📌 관련 없어 보이지만 연결할 수 있는 것들 함께한 팀원들과 소통하는 슬랙방 중에 ‘짤방 공유방’이 있었어요. ‘짤방 공유방’에서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밈을 틈틈이 공유했죠. 이후 구체화 및 실행 단계에서 콘텐츠에 활용되었습니다. ‍ 광고회사에서는 마케팅 전략을 짜기 위해 자사, 타사(경쟁사), 시장 상황, 잠재 소비자 등을 분석한 팩트북을 만들곤 합니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조합만 있을 뿐이죠. 자료를 분석하며 어떤 전략이 필요할지 방향을 잡습니다. ‍‍ 2) 발산과 수렴 먼저 어떤 톤앤매너와 컨셉을 가진 캠페인이 필요한지 고민했습니다. 국민참여의견서를 모으는 이유는 단순히 권위 있는 전문가의 의견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함께 듣기 위한 거였어요. ‍구체적으로는 청년과 더불어 어린이, 청소년, 중년, 노년 모두 자신만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거주지나 직업, 정체성의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했어요. 그러려면 이 소송의 맥락을 쉽게 전달하고, 간단하지만 솔직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라, 편안하고 재미있는 톤앤매너가 필요했어요. ‍그렇다고 너무 착하기만 한 이미지나 투쟁적인 이미지도 지양했습니다. 대신 헌법소원까지 했고, 단순히 좋아요나 후원이 아닌 ‘의견서’까지 받기로 한 결정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광기와 진심을 담았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도 ‘와 이건 함께 해야 해!’라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나누었어요. “국민참여의견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 하면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지잖아요. 단어도 익숙하지 않고, 나 말고 더 똑똑한 사람이 써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좀 있거든요. 근데 이 의견서를 글로 쓰는 게 아니라, 말로 하게 하면 어떨까요? 모든 글은 ‘말’에서 시작하니까요.” “글 대신 말이 좋겠어요. 직접 말하는 것보다 더 편한 건 ‘채팅’인 것 같아요. 이 의견서를 재판장님에게 보내는 ‘말풍선’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때요? ‘아니 근데 재판장님, ~ 한데요. ~한 판결을 내려주세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죠.” “사람들이 만든 말풍선들이 헌법재판소로 슝 보내지거나, 그 주위를 둘러싸는 이미지가 생각나요. 지도에서 헌법재판소 위로 메시지 알람이 마구 쌓이고, 의견서를 전달한 후에는 읽음 처리가 되는 거죠!” 회의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했어요. 머릿속에 그림이 딱 그려지지 않나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이 컨셉이 뚝딱 나오지는 않았어요. 여러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산하는 회의를 했죠. 이때 처음부터 완벽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하거나, 현실적인 조건을 생각하면서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 안에서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가감 없이 다 던질 수 있어야 새로운 생각을 연결할 수 있어요. ‍ 3) 구체화 그렇게 발산, 수렴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후대응 이의있음! 우리의 말은 헌법재판소로 간다”라는 메인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캠페인 사이트는 메신저로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나누면 자연스럽게 헌법재판소에 보내는 말풍선 형식의 의견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구성했죠. 덕분에 어린이부터 중년과 노년,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분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었어요. ‍ 채팅과 말풍선이라는 컨셉을 살려 홍보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청소년기후행동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참여를 독려하기도 하고, 공개변론일에 정부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나눈 대화를 채팅으로 재구성해서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참여 유도 메시지에서 기존에 공유했던 밈과 짤들을 적절히 활용했어요. 온라인 캠페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캠페인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더 긴 글을 쓰고 싶은 분들을 위해 글쓰기 키트를 기획하고 함께 글을 쓰는 자리도 마련했어요. 동시에 이 글쓰기 키트를 온라인에 게시해서, 어디서든 글쓰기 모임을 열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울부터 제주까지 그야말로 전국구에 있는 많은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어요. 🌝 ‘즐겁게’ 일해야 하는 이유 ‍마케팅 캠페인과 사회변화 캠페인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다른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영리 기업의 마케팅을 주로 하다가 사회변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겪은 실무적 어려움과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나눠볼게요. 우선, 예산의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기업도 ROI(광고 지출 대비 수익률)를 계산하면서 돈이 되는 마케팅만 하려고 하는데, 사회변화 캠페인의 성과는 금전적인 수익이 아니잖아요. 경제적인 부분과 더불어 인력이나 시간 등 여러 리소스가 부족한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뭔가를 만들거나 행사를 열면 필연적으로 쓰레기가 생기게 되는데, 이게 정말 큰 딜레마입니다. 많은 캠페이너가 캠페인을 물리적으로 경험하게 할 수단을 고민할 때마다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어떻게 하면 쓰레기가 되지 않을 유의미한 굿즈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떤 공간을 만들고 어떻게 행사를 기획해야 폐기물이 덜 나올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게 되죠. 게다가 공익을 위한 캠페인임에도 보수적인 조직이 주체가 되거나 협업의 대상이 되면 처음 목표와 달리 타협을 하거나, 메시지를 둥글게 깎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후대응 이의있음’ 지하철 광고를 할 때도, 캠페인 슬로건을 그대로 쓰지 못했어요. 논쟁적인 의견광고라는 이유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죠.‍ ‍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실무자들이 지친다는 문제도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번아웃을 겪는 활동가와 기획자, 창작자들을 봐왔습니다. 한국의 많은 사회문제는 죽음, 폭력, 차별 등의 문제를 갖고 있는 데다가, 혐오세력의 악플이나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때도 있으니까요. 그럴수록 함께하는 동료와 많이 이야기하면서 지치지 않게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봄과 나눔이 가능한 관계에서 더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열립니다. 회의 시작 전후로 일상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서로 무엇을 바라는지 욕망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나눌 때 많은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 즐겁게 해야 한다고 해서, 모두의 감정이 꼭 밝고 행복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분노로 흥분하거나, 슬픔을 나누며 기획할 때도 있고, 답답한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으로 몰입할 때도 있죠. 중요한 건 그 감정을 없는 것 취급하거나 무시하면서 일하는 게 아니라, 동료와 마음을 나누고 솔직한 연대를 쌓으며 일하는 거죠. 재밌다고 평가받는 캠페인과 콘텐츠 뒤에는 늘 동료와의 공명이 있었습니다. 제 2회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 PM을 맡았을 때, “퀴어 퍼레이드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하라”는 정치인의 발언이 있었어요. 동료와 함께 분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발언을 향한 반발심으로 공명하며, 어떻게 하면 퀴퍼를 더 잘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에서만 하던 온라인 퀴퍼를 바깥으로 꺼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퍼레이드를 여는 공간 말고도 여기저기 마구 보이게 하고 싶은데… 하며 아이디어를 모았어요. ‘우리의 퍼레이드는 막을 수 없고, 어디서든 열릴 수 있다’는 뜻을 담아 “우리는 어디서든 길을 열지”라는 슬로건을 뽑았습니다. 지하철 광고로 마음을 표현하는 팬덤 문화와 영리기업의 온오프라인 통합 캠페인들을 떠올리며, 오프라인 연계 광고 캠페인을 제안했죠. ‍ 그렇게 옥외 광고를 위한 펀딩 사이트를 열었고, 며칠 만에 1차 목표액인 천만 원을 달성했어요. 빠르게 늘어가는 펀딩금액을 보면서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총 2천 만 원의 광고 예산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 우리의 존재를 드러냈어요. 광고회사 업무 경험을 활용해서, 제한된 예산 내에 최대한 많은 공간에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미디어믹스를 구성하고 집행했는데요.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하는 퍼레이드 장면을 여러 공공장소에 내보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이 광고는 아르코미술관 기획전에 전시되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었어요. ‍ 광고 매체뿐 아니라, 퀴어 퍼레이드를 지지하는 커뮤니티의 힘도 적극 활용했습니다. 포스터를 신청한 분 모두에게 포스터를  보냈습니다. 학교 게시판부터 동아리방, 음식점과 카페, 미용실, 친구 집 대문, 국회의원실까지. 퀴어프렌들리한 공간마다 포스터가 붙었어요. 기획자로서 메시지와 매체가 일치할 때 큰 쾌감을 느끼는데요. 어디서든 길을 열겠다는 슬로건과 실제로 다양한 공간에 우리의 존재를 드러냈던 캠페인 방법이 일치해서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 🔥 캠페인 ‘성공의 기준’을 고민해야 할 때 ‍ 그렇다면 제가 했던 캠페인은 과연 ‘성공적인 캠페인’일까요?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성공일까요? 후원금을 많이 모으면 성공일까요? 재미있다고 평가받거나, 소셜 섹터에서 이야기되면 성공인 걸까요? 아니면, 법과 제도를 변화시켜야만 성공일까요? 물론 캠페인 성공의 기준은 캠페인의 목적과 규모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량적으로는 콘텐츠 도달, 캠페인 참여, 웹사이트 방문이나 팔로워 수, 관련 키워드 검색량 등을 측정할 수 있고요. 참여자들의 피드백이나 후기, 이슈와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나 자체적인 회고를 통해 정성적인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회변화 캠페인이 성과 측정에 어려움을 겪어요. ‘사회변화’ 캠페인인 만큼 결국 ‘변화’를 이끌었느냐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를 측정하기 위한 수단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보통 캠페인은 짧은 기간 진행하는 데 반해, 사회는 천천히 변화합니다. 그렇다고 기업에서 하듯이 장기간 조사를 염두에 두면서 리서치 회사에 큰 비용을 주고, 대중의 인식과 행동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경우는 드물죠. 게다가 실제로 유의미한 사회변화가 있더라도, 마케팅 캠페인과 달리 하나의 이슈에 하나의 캠페인만 실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중 어떤 캠페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차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성과 측정의 어려움은 꽤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과를 알기 어려운 캠페인은 계속해서 필요한 리소스를 획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요. 사회변화 캠페인의 숫자는 늘고 있지만, 진짜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캠페인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그린워싱과 같은 ‘허울’ 뿐인 캠페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두는 캠페인을 기획하느라, 진정한 변화를 만들 기회와 가능성은 고려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실무자로서 ‘단 한 명이라도 이 캠페인(콘텐츠)으로 삶이 바뀌었다면, 성공한 거지!’하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지만, 캠페인을 하기 전과 후의 세상이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낄 때도 많아요. 이렇게 성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면 당연히 지치게 됩니다. 일을 쉬거나 그만두는 경우도 생겨요. 그렇게 사회변화 캠페인 실무자의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는 것은 점차 어려워지죠. 사회변화 캠페인이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캠페인들의 성과 측정 방법을 더 고민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조사와 분석에 필요한 자원을 지원할 수도 있고, 시상을 하거나 성공 사례를 나누는 자리와 지면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더 많은 사회변화 캠페인이 가시적인 성과를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많은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 🤝 경계를 넘나드는 ‘연결’을 꿈꾸며 ‍ 마치 사회변화 캠페인의 전문가인 것처럼 글을 썼지만요. 제목에서 밝혔듯 저는 사회변화 캠페이너로 쭉 커리어를 쌓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광고AE, 마케터, 프로젝트 매니저, 제작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일을 해왔습니다. 동시에 비건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영화도 만들고, 글방에 다니면서 소설과 에세이도 썼고요. 독서모임과 회고모임도 하고, 전시와 영화제도 다니고, 그림과 타투와 타로도 배우고, 요즘엔 윤리학과 법 공부도 하고 있어요. 직장인과 활동가 사이, 기획자와 제작자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 정체성의 경계에 서 있다는 감각으로 일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런 복합적인 정체성 덕분에, 저만의 시선을 가지고 사회변화 캠페인을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었어요. 솔직히 저보다 기획 잘하는 사람, 콘텐츠 잘 만드는 사람, 사회변화 캠페인에 대한 전문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많을 겁니다. 그렇지만 광고홍보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서 여러 브랜드 마케팅을 하다가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캠페인과 콘텐츠를 만들고, 비건 지향을 하면서 오픈 퀴어로 살아가는 여성 청년 캠페이너는 많지 않죠. ‍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과 취미, 관심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변화 캠페인 기획에 더 많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사회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리고, 사회운동은 활동가들만 하는 거라는 구분 짓기를 그만두고,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넘어서길 바랍니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위해 사회변화 캠페인을 기획하고 참여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변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경계에서 협업이 필요합니다. 여러 조직과 개인이  만나고 섞이기를 바랍니다. 시인이자 카피라이터인 함민복 시인은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했는데요. 우리 더  기웃거리고 딴짓하면서, 이곳저곳의 경계에서 만나요! 글 | 장은나 ‘비건먼지’ 유튜브와 팟캐스트 운영자이자, 프리랜서 캠페인 기획자.비건 퀴어 페미니스트 정체성으로 글을 쓰고 영화를 제작한다. ❗이 콘텐츠는 'Table Talk(테이블 토크)'의 기사를 가공하여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