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이어지는 기후변화가 있다’는 문항에 대한 긍정 95%, 인간 활동 때문에 기후변화가 발생했다고 믿는 비율 86%, 기후위기 대응이 미흡하다는 응답 73.5% 등의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인식만큼 시민적 대안 도출을 해내지 못해서일까요? 전문가들의 문제일까요? 시민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문제일까요?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정의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회운동을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기후정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 등장합니다.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라는 말인데, 이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라는 차원에서 지난 일들을 살펴봄으로써,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대응의 방향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복원해야 할 민주주의 기후정의운동에서의 민주주의의 의미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복원'입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영향 속에서 ‘경제성장’이 사회의 지상명령이 되는 것은 기후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생산은 생존을 넘어 욕망과 축적을 위해 지속불가능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가진 나라, 가진 자의 부를 늘릴 뿐이기 때문에 양극화와 불평등, 탄소배출에 따른 기후위기가 심화됩니다. 부유한 나라, 부유한 계급의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은 점점더 강해지고, 민주주의는 훼손되고 형식화됩니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에 의한 정치·사회의 식민화에서 비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로 피해를 얻게 될 다수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복원, 혹은 실현하는 것이 기후정의의 목표가 됩니다.   시민행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두 번째는 ‘시민행동’입니다. 기후위기를 인식한 시민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및 비영리조직 등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다양한 시민행동이 또 다른 민주주의의 의미입니다. 2021년 9월 24일 5만여명이 참가한 ‘9.24 기후정의행진’이 최근의 시민직접행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00여개 단체와 2,400여명의 추진 위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조직위원회에 의하면 “기후정의행동은 정부와 기업의 녹색성장과 탄소중립 정책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돈벌이 시장을 창출하는 것에 불과한 상황에 맞서, 기후정의를 기치로 기후위기를 초래한 현 체제에 맞서고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싸움”으로 정의됩니다.(9.24 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기후정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말은 시민행동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의미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다양한 ‘캠페인’과 ‘공론장’입니다. 기후정의을 위한 수많은 캠페인들과 상호 토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국가 탄소중립기본계획'의 최소한의 기준을 책임있는 대상들에게 요구하는 ‘지역에너지넷’의 촉구 캠페인이 진행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물가와 기후위기의 대안으로서의 '1만원 교통패스' 도입을 추진하는 ‘1만원 교통패스연대’의 서명 캠페인, ‘청소년기후행동’의 기후소송 제기 등 다양한 캠페인이 이루어집니다. 시민과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도서관의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우주개발의 환경에의 영향, 탈원전의 필요, 대중교통 확충의 필요, 탄소중립농업의 다양한 방법과 가능성,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교통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자전거 이용 활성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찬반, 일회용컵보증금제의 필요 등 다양한 기후위기 관련 이슈에 대해 서로 토의하며 정답 혹은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갑니다.  2022년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영상 갈무리) 거버넌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네 번째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입니다. 2019년 시민사회의 기후위기 비상선언, 2020년 국회와 지자체의 비상선언을 거쳐, 정부가 탄소중립 목표와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이 제정되고, <2050 탄소중립 녹색성장 위원회(탄중위)가 꾸려졌습니다. 2023년 3월 25일에는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습니다. (장윤석, 2023) 이는 사회적 논의를 통해 부족하나마 탄소중립이라는 법과 목표를 정립한 것입니다.  탄소중립기본법에 따르면 탄중위는 “청년, 노동자, 시민사회 등 각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되도록 구성해야” 합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 제도인 것입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의 탄중위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탄중위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부와 자본의 논의 틀이라는 비판, 사회적 합의와 숙의가 정부 책임의 외주화로 기능한다는 비판, 탄중위의 기준과 목표치에 대한 비판 등이 존재하며, 시민사회의 탄중위 불참 후 기후정의행동으로 가시화 되었습니다.(구준모, 2021)(오연재, 2021)  다른 한편으로는 숙의와 결합된 더 나은 사회적 대화, 즉 정부와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하는 거버넌스와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됩니다. 한 예로 영국의 기후시민의회는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들의 모임으로 숙의 공론장을 거쳐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 보고서가 의회 정책 권고안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후정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습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법으로 다양한 계층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분과의 설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반영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입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민주적 테이블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후정의의 진전이 어렵다는 전제가 작동합니다. 민간위원, 협의체, 시민회의, 공론장 등 다양한 층위를 포함하는 거버넌스 구성의 시도는 그 자체로 바림직한 것입니다. 다만 충분한 시간을 거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권오현, 202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탄중위는 정권과 시민의 지지에 따라 제한적인 목표라도 설정하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추진하고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힘이 되거나, 형식화 된 정부 정책의 정당화 기제가 되거나 하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민참여 제도가 됩니다. 탄중위를 둘러싼 대립하는 시각들은 나름의 이유와 독자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이라는 비전과 탄중위의 기준 및 목표가 제한적이라는 주장,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고 제도화 하는 거버넌스의 필요에 대한 주장은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때로 공허한 구호로 그치고, 후자는 때로 시민 없는 제도의 형식화로 귀결됩니다. 기후위기에 실질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기후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시민적 압력, 그리고 그와 결합된 정치적 제도화를 이뤄야 합니다. ‘기후정의행동’과 ‘탄소중립 거버넌스’의 간극을 좁히는 집단적 실천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체제의 전환이 어려운 양당정치체제 내에서라면, 특히 더 거버넌스 제도 안팎에서의 시민 활동을 활성화 해야 합니다. 2021년 9월 11~12일 개최된 ‘2050 탄소중립위원회 탄소중립시민회의 시민대토론회'(탄중위 유튜브 갈무리)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다섯 번째는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기후 위기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치권이 제대로 대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선거에서 정당이 받은 표와 의석수에서의 차이가 큰 불비례성, 공고한 양당체제, 그로 인해 시민들이 대의가 되지 않는 점이 문제입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하더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되고 작동된다면,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로 이동 할 수 있다면, 기후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응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공정한 의석배분, 다양한 목소리의 반영, 정책의 질 향상, 지역구도 완화를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환경정책에서 더 엄격”하고,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대체로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비례대표제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은 9.5%, 승자 독식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45.5%라는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민주주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가?  이처럼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여러 얼굴들을 가지고 있고, 서로 대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는 생산력을 중시하고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개발 자본주의로 인해 심화됩니다. 시민의 집합적 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토대입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정치 제도화를 강제하기 위한 시민의 집단적인 압력 없이는 체제의 구조적 힘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집단적인 역량을 강화합니다. 특히 2016년 촛불시위와 같이 시민의 거대한 직접행동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독점 권력을 극복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복원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힘은 정치 제도 차원의 민주주의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일 때 체제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양당체제에서는 정치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의 할 동기가 적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잘 대의하는 제도정치적 조건을 마련할 때 기후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민행동과 제도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두 차원입니다. 분리되어 있다면 시민행동은 휘발되고 제도정치는 형식화되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를 매개하고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시민참여의 제도화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다양한 주체를 대의하는 거버넌스 제도의 구성, 집단적인 시민들의 숙의 공론화를 구현하는 공론화 제도의 구성은, 시민행동이 제도화되고, 제도정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실질적인 힘입니다. 물론 거버넌스와 공론장 제도 또한 시민행동이 없을 때 형식화 될 수 있고, 제도정치적 조건이 부재할 때 시민행동의 하나로 환원되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한 차원으로 환원하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여러 차원을 일직선상에 놓고 생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연계된 힘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할 때 기후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특정한 국면에 민주주의의 어떤 차원이 강조되어야 할 지는 시민의 숙의, 그리고 시민의 집합적 힘에 달려 있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제도정치 조건 하에서 다양한 시민 활동을 통해 역량강화된 시민들과 전문가 및 이해당사자들이 공론장에서 숙의하여 공론화 하고 거버넌스를 통해 목소리를 낼 때, 기후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기후정의를 위한 제도화, 더 나아가 체제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글 : 람시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 캠페인즈팀 리더 / ramsci@parti.coop 이 글은 오마이뉴스, 빠띠 홈페이지,  빠띠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