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01년 출범했습니다. 구성 과정에서 사법부의 산하기관이 아닌, 헌법기관에 준하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진 독립기구로 설립하기 위한 논의 과정이 길게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인권위 설립의 기초가 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인권위는 국가기관으로서 지금껏 호주제 관련이나 군 인권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설립 후 2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국내 여러 이슈와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최근, 트랜스젠더 환자의 입원실 이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라는 인권위의 권고를 보건복지부가 수용하지 않으면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죠.
트랜스젠더 환자의 입원실 이용에 관한 가이드라인 제정 권고 | 국가인권위원회
시작은 이렇습니다. 트랜스젠더인 환자가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자는 아직 법정 성별을 정정하기 전이었습니다. 병원은 환자의 법정 성별에 따라 입원실을 배정하고자 했고, 이에 환자는 입원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법정 성별 정정은 전입신고처럼 간단한 민원 업무로 처리되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행정 절차를 준비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언제 어떤 일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할지 모르는 현대사회에서 이같은 일이 이번만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죠. 환자는 이 사건을 인권침해로 여겨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하였고, 인권위는 조사 후 보건복지부에게 관련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며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복지부는)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이를 일률적으로 권고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인권위는 복지부의 소명에 대해 “복지부 안내 사항이 주관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병원마다 다르게 적용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트랜스젠더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 불이익을 당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
복지부, “트랜스젠더 입원 가이드라인 마련” 인권위 권고 불수용 - 경향신문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은 보건복지부는 어떻게 될까요?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권위의 의견은 ‘권고’일 뿐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더라도 법적 처벌을 받거나 기관의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권고를 수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는 합니다만, 권고-> 수용 거부 이후 인권위 차원에서 선택할 방안이 다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인권위의 권고는 때로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모순적인 개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권위의 한계 지점으로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권위 권고는 '쇠귀에 경읽기'?...장관·도지사도 '불수용' / YTN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는 본인과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합니다. 인권위가 인권침해로 사건을 판단하고 시정 권고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큰 지지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인권위의 권고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의견이 되고 만다면 실제로 같은 피해의 재발을 막을 방법이 요원하게 되면서 피해자에게는 무력감만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법률상 인권위는 ‘인권 전담 국가기관’으로서 독자적인 권리를 보장받지만, 역대 주요 활동 내용을 보더라도 인권위의 역할은 주로 의견 표명과 시정 권고에 그칩니다.
인권위 스스로 권리 신장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인권침해 문제에 대응하고 의견을 내야 하는 기관임에도 지속해서 ‘이름값’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죠. 최근 문제가 되는 교권 이슈에 관해 인권위에서 진정 신청을 받지 않은 사례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교사 인권침해 접수 안 받는 인권위…“현실·형평성 반영해야” / KBS 2023.09.14.
줄줄이 문제를 일으키는 언행을 하는 위원도 있어서 골치입니다. 여당 추천으로 상임위원이 된 이충상 상임위원은 이태원 참사 유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참사의 원인이 피해자들에게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습니다. 이 위원은 판사 출신으로, 현역 시절부터 있던 논란으로 임명 당시 몇몇 단체에서 지명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상임위 회의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히 소수자 관련 혐오 발언을 하며 인권위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있지만, 인권위에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습니다.👀
[자막뉴스] 국가 인권위원이 '기저귀' 운운..어떻게 임명됐나 봤더니.. (MBC뉴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죠. 한국 인권위는 밖에서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제 인권 기구 포럼 아시아의 의장인 제랄드 조셉은 지난 11월 23일 열린 ‘파리 원칙’ 30주년 국제 컨퍼런스에서 한국 인권위의 상황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
"한국 인권위 상황은 '대형 참사'"‥국제인권기구 의장의 쓴소리 (2023.11.29/뉴스데스크/MBC)
제랄드 조셉은 한국 인권위의 위원 선출 방식을 문제로 꼽았습니다. 인권위가 독립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독립된 과정으로 위원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위원 구성을 위한 선출 위원회가 먼저 구성되며 입후보자를 공개모집, 1년의 검증 과정을 거쳐 상임위원을 선발한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와 대통령, 대법원장이 각각 추천한 인사로 위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독립성과 다양성’을 위해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고 인권위는 설명합니다. 하지만 국회와 대통령,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탄생한 위원회가 이 주체들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인권은 모든 이가 가진 것으로, 모두의 인권 향상을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논의에 앞장서야 할 인권위가 정치에 휘둘리거나 업무에 주저함이 있다면 (인권위의 목적인) 모두의 인권 향상은 점점 멀어질지 모릅니다. 트랜스젠더 환자의 병원 입원 가이드라인 제정 권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부재한 동안 수많은 환자가 인권 침해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 없는 인권위원회의 권고와 수많은 불수용 사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인권위 ‘아프면 쉴 권리 보장’ 권고에 고용노동부 ‘사실상 불수용’
검찰·공수처, ‘영장 없는 통신자료 조회 최소화’ 인권위 권고 불수용 - 경향신문
법무부, '수용자 인권 증진' 인권위 권고 상당수 불수용
국방부, ‘대체복무 기간 단축’ 인권위 권고 ‘불수용’ - 경향신문
정부, “공무원·교원 정치적 자유 제한 법률 개정” 인권위 권고 ‘불수용’
‘성소수자 인권광고 거부’ 서울교통공사, 인권위 권고 불수용 - 여성신문
⁉️ 인권위에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댓글로 의견을 이야기해 주세요!
코멘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