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의 상황이 굉장히 ‘문화연구적 모먼트’라고 생각한다. 근래 번역된 <위기 관리>가 딱 그러할텐데, 권위주의적 치안 메커니즘을 강화하면서 사회의 공통감각을 재구성하는 보수주의적 기획을 성사시킬 절호의 기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정동들의 무수한 다발들 사이에 작용하는 여러 결의 흐름들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어 갈 것인지, 말하자면 어지러운 기상 상태에서 바람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예민하게 주시하는 풍향계가 되는 것이 문화연구의 역할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7월부터 잼버리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국가 실패’의 사건들 속에서 ‘칼부림’은 어떤 계기가 될지를 유심히 보게 된다.
바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정권 차원에서의 정치적 기획만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찐따난동쇼’라는 명명이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데, 이 역시 고민되는 대목이다. 사실 굉장히 이기적인 명명이라고 생각한다. 범죄를 예외적인 사건으로 치부하고 범죄자 개개인의 성향에 그 원인을 둔다는 점에서, 작금의 사건들을 사회적 문제로 인정하지 않은 채 무정형의 특정한 사람들(‘찐따’)에게 낙인을 가하는 명명 방식이다. 이는 무엇보다 피해자들에 대한 예의를 결여하고 있으며, 가해자를 분석함으로써 사회를 개선할 여지도 차단한다. 만약 이 명명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사태에 대한 정확한 명명이라서가 아니라,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들의 면면을 상상하는 대중들의 욕망이나 관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매우 ‘방어적’인 의도가 담긴 명명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말하자면 과거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그것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함으로써 그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어온 폭력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반대로 ‘찐따난동쇼’는 예외적인 사건이고 별 것 아닌 이들이 피운 난동이므로, 별 것 아닌 일로 받아들이고 일상을 유지하자는 의지를 담은 명명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들에는 ‘포스트잇’ 애도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평화로운 일상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선언을 통해 사회의 변화로 나아가는 대신, 평화로운 일상을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문제를 망각하고 덮어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 이는 사실 그만큼 이미 ‘일상’을 온존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이 공유되고 있다는 걸로 읽힌다. 비단 칼부림 사건들만이 아니라 최근 들어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서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 것일 게다.
더 큰 문제는 정치다.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혹은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피해자들, 그리고 시민들에게 고통과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토록 사회가 무너지는 상황에 대해 자신이 큰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시민들은 개인적인 해법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자구책만이 범람하는 것이다. 이는 작금의 위기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킬 뿐이다.
칼부림들은 명백한 ’공동체‘의 문제다. 공동체라는 감각의 결여, 한국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상의 부재는 정치로 하여금 작금의 사건들을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동체의 해법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가능성 자체를 소거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사과나 책임의 표명 대신 고작해야 ’사형제‘ 운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현재의 사건들을 ‘공동체 전체의 비극’으로 규정하고 집단적 애도를 표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감각을 복원해내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방식이다. 폭력적인 발달장애 아동을 분리해서 특수학교(또는 학급)으로 보내자거나, 생기부를 통해 학교폭력이나 교사를 향한 폭력이 대학입시에 불리하게 작용하게끔 만들자는 제도적 제안들은 사형제 운운과 같은 궤에 있다. 문제의 원인을 짚지 않는 편의주의적 임시방편책이자 한국사회가 지금껏 익숙하게 반복해온 대처방식을 더 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실은 문제의 원인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뒤르케임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자살처럼 칼부림도 아노미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온갖 살인예고들에서도 규범의 부재나 냉소가 강하게 읽힌다.) 개개인의 동기가 전적으로 사회의 아노미 상태로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범죄들의 ‘효과’는 지금 명백한 아노미를 가져오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소생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정치의 ‘상징정치적’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하게도 정치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타인과의 유대를 경험하고 그 가운에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작은 계기들’ 자체가 거의 멸종상태다.
포스트잇이 밀려난 자리에 스프레이와 삼단봉이 들어서고 있다. 그런 가운데 경찰은 치안의 논리를 일상 더 깊숙한 곳까지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잼버리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정권이 앞으로 어떤 담론을 구성해 갈 것인지 주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 매우 중요한 순간을 통과하는 중이라는 개인적인 예감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코멘트
6https://youtu.be/KNPeZgAUF_M
일본의 상황을 참조해야겠네요.
특히 이 부분에 주목하게 되네요. 개인의 이상행동으로 여기게 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의 증상일텐데 말이지요.
여전히 가해자 중심 보도와 관점이 많음에 안타까움을 느껴요. N번방 가해자들의 개인적인 서사(가족관계, 학교생활 등)가 사사건건 보도가 되는 것을 보며, 현 사회는 범죄 현상을 다룰 때 깊은 담론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당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전국언론노조에서 지침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최근 이상동기 범죄 보도를 읽다보면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특히 가해자를 '악마', '찐따', '괴물' 등으로 표현하며 '무정형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낙인을 가하는 명명 방식'을 택하고 있고요. 이들이 어떤 사회 구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