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나로서의 연애, 남자로서의 연애

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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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남성성'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단체입니다.

3화 <나로서의 연애, 남자로서의 연애> by 남함페 태환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Pixabay
첫 연애의 기억

첫 연애라 하면 누군가는 낭만과 추억을 떠올릴 거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나에게 첫 연애는 온갖 고통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자기 각성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번 글을 통해 과거의 연애를 돌아보고, 그때의 경험이 어떻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며, 남성성과 성평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지 써보고자 한다.

첫 연애 상대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때의 내 기준으로 대단히 ‘개방적’인 여성이었으며, 학창 시절 동안 여성과의 대화를 몇 번 나눠본 적도 없는 나에게는 그 개방성이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데이트는 주로 그의 결정으로 만들어졌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함께 할지 등등.  거의 모든 데이트 비용은 그가 지불했다. 그가 나보다 더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면 참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연애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 역시 그 안온함에 가랑비에 옷깃 젖듯 순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자, 그는 나에게 남성다운 모습을 요구했다. 내가 자신의 들쭉날쭉하는 감정을 전부 받아줄 만큼의 멋진 남자가 되어주길 바랬다. 멋진 남자를 넘어, 나는 1년 365일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떤 때는 애교를 부려 그의 사랑을 받아야 했고, 어떤 때는 아버지처럼 그를 한없이 보호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는 미쳐 날뛰는 짐승이 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애인은 나에게 “너는 왜 나랑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아? 내가 매력적이지 않아?”라는 질문을 몇 번씩이나 건네곤 했다. 몇 개월간의 연애가 지속되면서 내 정신 건강은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즈음에 나의 첫 연애가 끝이 났다. 


연애의 기대와 현실

끝이 난 연애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첫 연애를 하면서 내가 겪었던 불안감과 두려움을 고백해 보고자 한다. 돌이켜 보건데, 연애하는 내내, 발목을 옥죄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시원히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이 있다.

첫째,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연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상대방의 부탁과 강요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헤어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나를 힘들게 했지만 동시에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이 연애니까. 내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우리의 행복과 평화는 계속 이어지리라 착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는 어느 한쪽의 희생과 노력으로만 지탱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나를 깎아먹으며 바쳤던 희생이 결국엔 임계점을 넘어섰다.  나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커질 때, 낭만 가득했던 연애를 내 손으로 끝냈다.

둘째, 섹스를 못하는 남자가 되는 것. 아! 정말 잘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섹스를 정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비록 1년 365일 섹스를 원할 수는 없더라도, 한번 할 때 만큼은 수개월을 굶주린 사자처럼 감춰뒀던 힘을 발산하고 싶었다. 침대 위에서 멋진 남자가 되어 애인을 만족시켜주어서, 낮져밤이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짓궂게도 나란 사람은 낮져밤져도 안 되는 그 이하였다. 피임을 위해 콘돔을 준비해온 나에게 당시 애인은 “그거 어디다 쓰려고?” 식의 장난 아닌 장난을 치곤 했다. 나는 이런 장난에 얼굴이 붉어졌을 뿐 아무런 농담도 맞받아치지 못했다. '오늘, 불 한번 활활 지펴보려고'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말을 입에도 담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만 더 급해졌다. '보여줘야 하는데...', '만족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애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심지어 욕과 비난이 섞인 외설적인 말을 섹스 도중에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섹스할 때 만족할 수 없었다. 계속 고민이었다. 왜 그럴까? 내 성기가 너무 작나? 전희가 충분하지 않았나? 삽입 자세가 잘못됐나? 혼자서만 끙끙 앓는 시간이 길어졌다.

셋째, 리드하지 못하는 지질한 남자로 남는 것. 앞서 밝혔듯이, 첫 연애 상대는 정말 적극적이었다. 본인이 원하는 데이트를 결정해서 나에게 알려주었고 나는 거기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데이트 비용도 그가 냈었기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는지의 결정권도 주로 그에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위축됐다. 남자라면 결정도 시원시원하게 내리고, 데이트 코스도 짜서 먼저 제안하고, 밥 먹고 식당을 나서기 전에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카운터 직원에게 내밀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결정도, 제안도, 지불도 모두 여자인 애인이 하고 있지 않은가. 자존심이 상했다. 남자로서 구실 못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나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 연애를 하면 할수록 내 자아는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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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의 연애와 '남자'로서의 연애

각종 불안감과 두려움을 잔뜩 껴안은 채, 나의 첫 연애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교 학과에서 하는 작은 책모임에서 페미니즘을 마주쳤다. 당시 책모임은 참여자들이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추천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학과 선후배들과 함께 하다보니 대부분 비슷한 주제의 책을 추천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독특한 책을 추천했다. 그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과거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자연스레 첫 연애가 떠올랐다. 첫 연애에서 가졌던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졌고, 이후에 여러 책을 탐닉하고 사람들과 소통한 끝에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해석 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

첫째,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있다. 그러나 두려움에 가려져 있던 진짜 진실은 내가 평등한 관계를 맺어가는 한 명의 주체였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주체(Subject)와 주체의 만남이다. 특히 연애만큼 가깝고 내밀한 사이는 두 주체의 결합도가 여타 관계들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기 쉽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아닌, 주체와 객체(Object)의 만남.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히 진행된다. 

나는 이 전환의 과정을 첫 연애에서부터 겪었다. 데이트 계획을 짜고 돈을 지불하는 애인은 여전히 주체로 남아 있었지만, 그것에 끌려가는 위치였던 나는 주체에서 객체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연애는 주체와 주체의 역동적인 만남이지 않은가. 나에게 쏟아져 밀려오는 애인의 욕구와 기대는 나의 동의 없이는 오롯이 그만의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나 자신을 객체로 인식하지 않고 주체로 인정했다면 분명히 상호만족하는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내일 무얼 하며 재밌게 놀까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

연애할 때의 나 또한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진짜 ‘나’로서의 주체는 객체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고, 그래서 버티고 버티다 한계를 넘었을 때 주체로서의 내가 연애의 끝을 선언했다.

둘째, 섹스를 주제로 애인과 더 소통했어야 했다. 나는 섹스를 잘할 것을 논하기 전, 기본적으로 섹스 토크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하면 된다. 섹스를 원하는 것과, 너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사실 다르다고 말하면 된다. 이런 것도 섹스 토크이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애인의 욕구와 적극성에 뒷걸음질쳤을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간 내가 '남성'이기를 포기한 사람 처럼, 마치 풀이죽은 사람처럼 보여 애인이 실망하고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섹스가 불만족스러울 때,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화를 나누면 된다. 많은 연애 또는 성 관련 전문가들은 성관계가 끝난 직후 이불 덮고 자지 말고, 애인과 함께 방금 한 섹스에 대해 평가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평가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별것 없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싫었는지 솔직히 말하면 된다.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더 좋겠고, 이런 건 피해달라고 당부하면 된다. 그 간단한 시간을 가지지 못해 나의 첫 연애는 지지부진했다.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찾아보고, 혼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애인도 혼자 남겨졌을 테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을 것이고, 그게 다시 연애의 만족감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또 하나, 섹스와 관련된 소통뿐만 아니라 평상시 소통도 중요하다. 섹스는 연애가 선사하는 명장면 중 하나이지 않은가? 그러나 섹스는 연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섹스하는 시간보다 밥 먹고, 데이트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훨씬 길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나머지의 긴 시간 동안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가 가진 생각을 서로 솔직하게 확인할 때, 관계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선물이 주어진다.

셋째,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남성성이 내 안에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보고 자라온 모습들, 친구와 지인 등 주변 관계로부터 습득하는 경험들, 인터넷과 각종 매체들이 재현하는 남성성의 모습들까지. 연애와 남성성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래서 나 또한 첫 연애에서 그 동안 학습해온 남성성을 실천 또는 실험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배워온 세상과 전혀 다르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돈도 없고, 소심하고, 위축된 남성으로서의 나는 우리 사회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정상 남성’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정상성’을 문제삼기는 커녕 끊임없이 이 기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그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을 받는 굴레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끝끝내 달성할 수 없는 정상 남성이 되기 위해 나답지 않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내면화해야 하는 형벌. 그 끔찍한 형벌은 첫 애인도 아니고,첫 애인의 개방성과 적극성도 아니고, 우리 사회 여성들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나에게 내리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고민들

우리 모두는 다차원적 존재다. 그렇기에 성과 사랑, 일과 노동, 관계 등의 어떤 측면에서 분명히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각종 갈등을 겪고 있으며, 아파하고 신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렇게 다차원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해서 어찌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늘 부족하기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인간끼리 연애를 한다면 자연스레 갈등과 실망이 관계를 채울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또한 말한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관계는 평등한 두 주체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더 나아가 관계와 관계의 연결인 사회와 문화 또한 평등해야 한다고. 그래서 힘의 논리가 아니라 돌봄과 존중이 우리 모두의 ‘인간관계론’이자 ‘사회계약론’이 되어야 한다고. ‘남자답지 못한’ 스스로를 괴롭혔던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도 유해한 남성성을 버리고 무해한 남성성을 찾아나가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이여. 페미니스트의 연애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진짜 ‘나’로서 편안하게 연애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연애다. 그러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실천하자. 평등한 관계를 연습하며 페미니즘을 찾아나가는 삶은 절대 쉽지 않지만, 그 끝에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자기 자신이 있을 것이다.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3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potbK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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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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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애인과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눠도 남성 공동체로 돌아가서는(?) 결국 '정상적인 남성성'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앞이 캄캄합니다. 지금까지의 대화가 관계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자기위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을 읽고 나니 그도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여 놀라는 순간 마음이 힘들 수 있겠다는 걱정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써주신 마지막 문단이 더 와 닿습니다. '페미니스트의 연애도 완벽하지 않다. … 절대 쉽지 않지만, 그 끝에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자기 자신이 있을 것이다.’ !

연애만큼 가깝고 내밀한 사이는 두 주체의 결합도가 여타 관계들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기 쉽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아닌, 주체와 객체(Object)의 만남.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히 진행된다 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더 솔직한 대화. 서로를 주체로 인정한 대화가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든다는 정석적인 문장이 떠오릅니다!
솔직하게 적어주셔서 그런지 잘 읽히고 마음에 닿는 글이었습니다. 연애는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아요!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남자친구에게 공유해주고 싶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