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반대한다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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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나로는 모든 청소년들이 인권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직접 행동하는 '단체'입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반대한다

-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와 학생인권운동이 성취해야 할 과제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2010년대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자치를 주도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전국 6개 광역지자체, 즉 경기도,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 충청남도, 제주특별자치도(추가로 인천광역시는 2021년 9월 1일 학교구성원 인권증진 조례를 시행했다)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었었다. 현재 그 중 4군데에서 축소ㆍ폐지 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역시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문제라는 게 학생인권조례 반대자들이 꼽는 주된 폐지 이유다(참고: https://www.hani.co.kr/arti/so...).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숱한 운동이 내거는 사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시의회 앞 '학생인권조례 폐지' 집회 중인 '청소년네트워크'. [박정우 기자]

@ 서울시의회 앞 '학생인권조례 폐지' 집회 중인 '청소년네트워크'(출처: https://www.ilyoseoul.co.kr/ne...)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반대한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 주장자들의 선동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의 의의와 한계를 함께 짚으며 그를 통해 폐지 운동이 일어나는 까닭도 살펴보고자 한다.

청소년 인권 운동 단체인 아수나로가 학생인권조례의 의의를 주장하는 것은 쉽게 예상이 갈 일이다. 하지만 한계라니? 의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인권조례가 해주지 못하는 것도 함께 봐야 한다. 예를 들어 학생인권조례가 참정권을 보장하는가? 학생인권조례는 집회의 자유는 주장하지만 투표권 연령은 인하하지 못한다. 이것은 애초에 ‘학교 내’에서의 자유권을 신장하는 데에 국한된 학생인권조례의 한계다.

 

학생인권조례의 한계

 

집회의 자유조차 “다만, 학교 내의 집회에 대해서는 학습권과 안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학교규정으로 시간, 장소,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제17조 제3항),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경우 이를 지도·감독할 수 있다. 다만, 부당하고 자의적인 간섭이나 제한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앞의 조례, 제17조 제4항)라고 하면서 애매한 제한들을 두고 있다.

또한 학생인권조례는 사회권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교육비, 생활비 등과 학생인권조례는 무관하다. 독일의 초ㆍ중등학생은 무상교육과 별도로 한 달에 약 59만 원의 생활비를 받는다(참고: https://edpolicy.kedi.re.kr/fr...). 이렇게 보면 학생인권조례의 의의와 한계는, 조례의 내용에 대한 규명을 통해 명확해진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학교 내 자유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에 해당하는 아동ㆍ청소년(물론 아동ㆍ청소년 중에는 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인권을 비청소년(소위 ‘성인’)만큼 보장받지 못하는데 학교 내에서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학교 내에서만이라도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학교에 따라 두발 규제는 조금 완화되었다지만 여전히 교복 착용이 교칙으로 정해져 있는 학교들이 많다. 왜 그럴까? 다음은 서울학생인권조례의 한 대목이다.

 

제12조(개성을 실현할 권리)

①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갖는다.

②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 두발 등 용모에 대해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2항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라 할 수 있다. 조례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자고자 박주민 의원이 2021년 11월 3일 대표 발의한 초ㆍ중등교육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에도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학교의 장은 학칙을 제정 또는 개정하려고 하는 때에는 사전에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야 하며, 학칙이 제정 또는 개정된 때에는 이를 지도·감독기관에게 신고하도록 함(안 제8조).

 

그런데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교장ㆍ교사들이 교칙을 제정하려고 하는데 반대할 수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휴대폰을 수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수업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소지도 있지만, 예를 들어 영화관에서 휴대폰이 방해가 될 수 있다 하여 수거하지는 않는다. 영화관에서 혹시 휴대폰을 수거해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상식을 벗어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비상식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적용된다. 여전히.

애초에 사회의 모든 곳에서 학생들 및 아동ㆍ청소년을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데, 학교 내에서 자유권을 보장하는 조례를 제정한다고 하여 그대로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물론, 학생인권조례를 통과해서 명확히 좋아진 게 딱 하나 있다. 체벌이다. 아이들을 때리지는 말아라. 신체적 자유, 그 중에서도 극히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부분에 국한된 소극적 자유권이다. 누가 봐도 당연한 이 명제만큼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통해서 개선된 부분이다. 물론 이것조차도 지금 흔들리고 있지만 말이다.

 

‘왜’ 통제가 필요한가?

 

혹자는 체벌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통제되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회 곳곳에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억압받는 학생들이 불만에 쌓이고 통제받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왜 ‘체벌이 필요한 상황’으로 학생들이 몰아넣어졌는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교는 우리 사회의 재생산과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이외에도 주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장시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노느라 한 눈 팔면 안 된다. 좋은 대학 들어가야 한다. 노는 건 대학가서 해라. 이런 말들을 반대로 하면, 그러지 못한 학생들은 천대받아도 된다는 뜻이다. 대학을 못 들어갔으면 놀지 못해도 당연하다. 고졸이면 임금이 낮아도 된다. 등등.

결국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미리부터 장시간 학습시간을 통해 장시간 노동시간에 익숙해지도록 단련된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순응하는 직장인으로 기른다. 학생 때는 술, 담배, 연애, 도박, PC방ㆍ찜질방, 노동 등도 금지하며 인내시킨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는 사람들로 만든다. 물론 참지 못하고 ‘일탈’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겐 부당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시킨다.

일부 학생들은 갑갑해하며 ‘일탈’을 하고 노동을 하면서 돈벌이도 한다. 그러면서 우월감을 맛볼 수 있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이런 일탈들 중에는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한다는 이유도 있다. 그리고 이후 삶이 더 나아지지 않아도 자신의 선택이라며 체념하게 된다.

물론 금지된 것들 중에는 비청소년이 해도 좋지 않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부당한 것들도 적잖다. 예를 들어 노동이 그렇다. 학습과 병행하는 노동이 전인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 산업연수생이며 그 제도의 표면적 취지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연수생은 또한 싼 값에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을 멀리하는 게 학생들에게 좋은 걸까?

그렇지 않다. 아동ㆍ청소년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거나 값싼 임금으로 고강도의 착취를 당하는 게 문제인 거지 학생과 노동을 분리하는 게 대안이 아니다. 애초에 산업연수생들을 싼 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분리 때문이다.

학생들을 노동과 분리하는 것은 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 돈을 못 버는 학생들은 비청소년들에게 의존하게 되거나, 의사결정권을 갖기 더 어렵다. 다른 예를 들어 이 상황을 설명해보자. 여성들이 임금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여성을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면, 여성의 권리가 신장될까? 임금 차별이라는 상황이 나아질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학생을 ‘보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학생인권은 전면적인 해방을 통해서 가능하다. 학생인권조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통로로, 우리 사회가 당장 가능했던 수준에서 수행된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인권조례는 우리 사회의 담론에서 전면적인 도마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폐지 운동이 활발하지만, 제정하고자 하는 지역들도 만만치 않게 있다. 충청북도·경상남도·세종특별자치시·울산광역시·부산광역시·전라남도·강원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주민발의된 바 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2월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학생 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며 청소년 인권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을 출범하기로 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2월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학생 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며 청소년 인권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을 출범하기로 했다(출처: https://www.hani.co.kr/arti/so...).



따라서 4개 지역에서 폐지안 발의 및 폐지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적인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크게 후퇴한 것이라고 비관할 것만은 아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던 일이기도 하며, 역사를 살펴보면 인권이 신장되는 가운데서 진통이 없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학생인권을 선전하고 토론하는 담론의 장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인권조례 옹호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통한 성취뿐만 아니라, 더 큰 성취를 위한 적극적인 대응 또한 필요하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학생인권을 학생인권조례가 보장하는 것보다 더 넓히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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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유를 들어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이야기 하는데.. 상관성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인과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학생인권 조례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인지는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폐지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학생을 ‘보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학생인권은 전면적인 해방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 말씀에 매우 동의합니다. 한국 사회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청소년/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제약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인권에 관한 걸 '반대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회에 산다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네요.

아래 댓글에 대한 제 의견을 쓰고자 합니다. 저는 오히려 학생인권을 교권과 연결짓는 프레임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교권은 교사의 권리가 아닌 교육권이다라는 말로 학생인권 대 교권의 프레임을 깨고자 하는 논의도 많은데요. 그러나 학생인권은 교권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하고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인권이 교권과 시너지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자칫 학생을 그 자체로 소중한 인격체가 아닌 '공부해야 되는 미성숙한 인격체', '인권조차 공부와 관련되어야만 지켜질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고 애초에 교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논의 전제 같은 것은 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불평등한 일이고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더욱이 교권에 방해가 될 수 있느냐 아니냐라는 소모적이고 인권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준이 적용되려 할 수 있고, 공부에 도움되지 않는 인권은 불필요하다라는 식으로까지 학생인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대중적 프레임이 아닌 인권과 권리의 논리가 학교에 필요합니다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자는 데 동조하는 일반 대중들은 다른 한편, 교권신장의 추락을 연결지어 얘기하던데 그 부분과 관련된 내용이 안 보여 조금 아쉽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처럼, 이 부분 역시 대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이 교권신장과 어떻게 긍정적 시너지를 만들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부분이 오히려 대다수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리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사회의 모든 곳에서 학생들 및 아동ㆍ청소년을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데, 학교 내에서 자유권을 보장하는 조례를 제정한다고 하여 그대로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의 본질은 이 문장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학생을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던 이전 방식이 본인들에게 더 편하고, 이익이 되는 방향이었다는 걸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함으로써 드러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논의를 발판 삼아 '학생이 인격체로 존중받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학생인권은 보장되고 있는가?',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등의 논의로 확장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