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원인) 때문에 Y(결과)가 일어났을 때, X와 Y의 관계를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만약 늦잠을 자서 학교에 지각했다면, 늦잠과 지각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과관계는 특히 법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피해가 발생했는지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처벌을 내리는 것이 법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아래의 네 가지 상황을 볼까요?
- A가 B에게 치사량의 독약이 든 음료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C가 나타나 B를 칼로 찔렀고, 곧이어 B가 사망했습니다.
- C가 D를 강간했습니다. 강간으로 인해 극심한 수치심과 절망감에 고통받던 D는 결국 자살했습니다.
- 교사 E가 학생 F의 뺨을 때렸습니다. 뇌수종을 앓고 있던 F는 뺨을 맞아 넘어졌고, 그대로 사망했습니다.
- G의 공장에서 오랜 기간 일한 H는 퇴사 후 희귀질환에 걸렸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입사 전 H는 건강했으며, G의 공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법적 기준치 이하의 유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습니다.
각 상황에서의 인과관계를 한번 고민해 봅시다. (1)의 경우는 A가 치사량의 독약을 먹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B를 죽인 것은 C입니다. 그러므로 A의 행위와 B의 죽음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살짝 찜찜하지만 그래도 인과관계가 명확합니다. 그러나 (2), (3), (4)의 경우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C의 강간이 D의 자살에 상당한 영향을 주긴 했지만, C가 D를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아닙니다. E의 폭행으로 인해 F가 죽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뺨을 맞고 넘어진다 해도 죽지는 않습니다. G의 공장에서 일한 후 H가 희귀질환에 걸린 것은 사실이나, 희귀질환의 발병 원인이 공장에서의 유해물질 노출 때문이라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인과관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정의 이상으로 인과관계를 엄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인과관계에 관한 학설들을 소개하여 법이 인과관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합니다. 시민이 법에서의 인과관계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곧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피해가 발생했냐는 질문은 곧 피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노동자, 소비자, 국민의 죽음 앞에서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날,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책임 있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시민 차원에서 인과관계론을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설
조건설은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관계’에 있는 모든 행위를 원인으로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결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결과 발생에 한 조건으로서 작용하기만 했다면 모두 동등한 원인으로 봅니다. 조건설에 따른다면, 위에 소개한 (1)의 경우에서 A가 독약을 먹이지 않았다면 B는 죽지 않았을 것이므로 A의 행위는 B의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같은 원리로 (2), (3), (4)의 경우에도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봅니다. 가장 직관적인 학설로,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첫 번째로 소개되는 학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건설은 치명적인 비판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가장 큰 결함은 인과관계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된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했듯 조건설은 결과 발생에 작용한 모든 조건을 동등하게 파악합니다. 이를 적용할 경우 (1)의 상황에서 A에게 독약을 팔거나 제조법을 알려주는 행위, 독약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점을 교육하는 행위, 심지어는 A를 출산하는 행위까지 모두 살인의 원인이 됩니다.
조건설을 적용하면 특정 상황에서 매우 불합리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갑과 을이 병에게 동시에 독약을 먹여 병이 죽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조건설에 따르면 갑과 을은 둘 다 무죄입니다. 갑(을)이 독약을 먹이지 않았더라도, 을(갑)이 독약을 먹여 병이 죽었을 것이므로 갑과 을의 행위 자체는 병의 죽음과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순들로 인해 실제 판결에 조건설을 적용하는 경우는 없지만, 조건설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과관계론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분명 존재합니다.
합법칙적 조건설
합법칙적 조건설은 조건설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합법칙성’이라는 요소를 도입한 학설입니다. 합법칙성을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법칙에 맞는 성질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때 법칙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바로 자연과학 법칙을 말합니다. 합법칙적 조건설에서는 가장 발전된 과학 지식을 활용하여 인과관계의 존재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서 조건설을 설명하면서 든 사례를 다시 보겠습니다. 갑과 을이 병에게 동시에 독약을 먹였을 때, 조건설의 관점에서는 둘 중 한 명이 독약을 먹이지 않았더라도 병은 죽었을 것이므로 둘 다 무죄로 보았습니다. 합법칙적 조건설의 경우에는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독약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 것이 확실하고, 해당 사례에서 갑과 을 모두 병에게 독약을 먹여 병이 죽었으므로 둘의 행위 모두 병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고 봅니다.
이처럼 합법칙성을 적용하면 조건설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신의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만큼 ‘과학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장점들이 있어 합법칙적 조건설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합법칙적 조건설의 경우에도 몇 가지 결점이 존재합니다. 우선 최신의 자연과학 내용을 활용해도 연구 부족, 과학지식의 한계 등으로 인해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4) 사례의 경우, 정황상 공장 내 유해물질과 희귀질환 간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관련 연구가 부족하다면 인과관계를 인정하기가 곤란할 수 있습니다.
합법칙적 조건설의 경우 그 활용에 있어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합법칙적 조건설은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분명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조건설과 마찬가지로 인과관계의 범위를 너무 넓게 보기에 행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따라서 ‘객관적 귀속이론’을 추가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객관적 귀속이론은 쉽게 말해 사건의 결과가 바로 그 행위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를 판단하는 이론으로, 오늘날 법학계에서 매우 논쟁적인 분야입니다. 이처럼 합법칙적 조건설을 실제로 판결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이론이, 그것도 논쟁이 매우 활발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상당인과관계설
상당인과관계설은 ‘상당성’을 원인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상당성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준 조건만을 원인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상당성의 판단은 사회생활을 통해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경험법칙에 근거합니다.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구체적인 판단기준이 제시됩니다. 첫 번째는 주관적 상당인과관계설로, 이는 행위자가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던 사정을 근거로 상당성을 판단합니다. 이 경우 위의 (3) 사례는 E가 F의 질병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E의 폭행은 F의 죽음에 대해 상당한 조건이라 볼 수 없고, 따라서 인과관계가 부정됩니다.
두 번째는 객관적 상당인과관계설로, 이미 존재했거나 일반인이 알 수 있는 사정을 근거로 상당성을 판단합니다. (3)의 사례에 적용해 보면, E가 몰랐다 하더라도 뇌수종이 존재했으므로 E의 폭행은 F의 죽음에 대해 상당한 조건이 되어 둘 사이의 인과관계가 긍정됩니다.
세 번째는 절충적 상당인과관계설로, 이는 행위자뿐만 아니라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알거나 예측할 수 있었던 사정까지 고려하여 상당성을 판단합니다. 절충적 입장은 전체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이 중 절충적 상당인과관계설의 경우 합법칙적 조건설 이전에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견해로, 현재도 판례의 기본입장에 해당합니다.
상당인과관계설 역시 비판점이 존재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상당성의 판단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행위자나 일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사정이 어디까지인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판단에 있어 주관이 강하게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판결의 일관성 결여로 이어져 법의 안정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법원은 위의 (3) 사례에 대해서는 E의 폭행과 F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하였으나, 뇌수종이 아닌 고혈압, 심장질환 등이 문제가 된 경우에는 인과관계를 인정하였습니다. 또 피해자가 강간을 피하는 과정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사망 또는 부상을 입은 두 개의 사례에 대해 인과관계를 각각 인정 또는 부정하여 서로 반대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렇듯 상당인과관계설의 판단이 다소 비일관적이다보니 학계에서의 지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법에서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주요한 학설들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의견이 필요한 차례입니다. 법의 관점에서 인과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는 것이 옳을까요? 저희가 소개한 견해들 중 선택하셔도 좋고, 새로운 주장을 해주셔도 좋습니다.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 주세요!
코멘트
6법에 대해 공부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모를 부분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작성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이렇게 또 새로운 상식을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면, 이론에 대해 소개한 후 사례를 들어 설명하실 때, 그림과 같은 자료를 첨부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내용의 전달이 목적이라면, 독자들이 글보다 그림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어 사례를 설명하거나, 마지막 내용을 정리하는 단락에서 윗 글에서 배운 내용들은 정리, 비교하는 간단한 그림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다시 꺼내 읽을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평소에 인과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법적 차원에서 인과관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이 논의만 봐도 '사회조사방법론'에서 가르치는 사회과학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 즉 법칙을 통계적 상관성을 확인하는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 환원하는 관점인 실증주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여러 요인들의 우연적인/복합적인 결합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그 요인들중 어느 것이 근본적인지, 주요한 것인지 판별해야 하고, 그 판별이 애매모호하거나 불가능할 경우에 파악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완전 쉽지만은 않았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인과관계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서 좋네요?
법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했는데요. 이 글을 읽으니 판결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 과정 중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지는 참 선택하기 어렵네요. 하지만 읽고나니 상당인과관계설을 바탕으로 부족함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글이 알기 쉽게 풀어져 있어서 이해가 잘 되네요. 덕분에 '법'을 좀더 알게 된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