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 등교일 공업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눈에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게 있다. 이미 친구들에게 “공돌이 학교”, “양아치 우글거리는 곳” 등 온갖 혐오의 말을 몇 번씩 들었을 테니, 아이들의 위축된 눈빛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다. 아프지만 현실이 그렇다.
그런 만큼 첫 수업시간엔 일부러 힘찬 자기소개를 아이들에게 당부한다. 지난 봄날, 어느 1학년 교실 첫 국어수업에서 이정희(가명)는 열여섯 번째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중학교에서 온 이정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 갈래의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정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난히 짧은 소개에 한 남학생이 짓궂게 물었다.
“남친 있나?”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약 40개의 눈이 일제히 정희의 입으로 향했다. 정희는 대답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느그들 첫날부터 너무한 거 아이가? 정희야, 그냥 대답 안 해도 된다잉.”
나는 얼른 정희를 자리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저는 몰라요.”
갑자기 정희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모른다‘고 한 게 어색했지만, 요즘 아이들이 많이 쓰는 일명 ‘황당 어법‘으로 여겼다.
“그래 정희야, 좋은 대답이다. 개인정보를 쉽게 알려주면 안 되는 기다.”
직업계고는 목적에 따라 공업, 상업, 보건 계열 등으로 나뉘는데, 여학생이 공업 계열에 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흔하지 않아 쉽게 눈에 띄고, 그 탓에 더욱 놀림과 차별의 대상이 되곤 하는 여자 공고생 이정희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나는 자기소개를 마무리 한 뒤, 활동지를 나눠주고 작성하게 했다.
<내가 원하는 수업>
1. 나를 소개해보세요.
2. 고등학교에 오기 전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수업은 어느 선생님의 수업인가요?(교사명, 과목, 좋았던 이유)
3. 어떤 수업이 싫은가요?
4. 선생님께 바라는 점을 자유롭게 작성해주세요.(비밀 보장됨. 엄마, 담임선생님에게 말 안 함.)
5. 꿈을 적어주세요.(취업, 대학, 전학, 기타)
6. ○○공고에 온 이유는?
나는 주로 모둠 수업과 활동 수업을 많이 한다. 자존감 낮은 공고 아이들이 모둠 내에서는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모둠 수업을 위해서는 먼저 아이들의 성향을 파악하는 게 순서다.
1학기 시작 3주차가 됐을 때, 정희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저희 반에 다문화 학생이 있는데, 국어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는 미달자가 아니길 바라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모님 중 한 명이 외국인이어도, 고교에 올 정도가 되면 다들 소통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문화 학생이어도 조금만 노력하면 기초학력반, 일명 ‘나머지공부반‘에 배정되지 않았다.
“근데, 걔가 한국말을 몰라요.”
매주 세 시간씩 벌써 2주 수업을 마쳤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내 수업에서 발표를 한 번도 안 한 학생은 없었다. 근데, 한국말 모르는 학생이 있다니?
“정희예요. 정희! 정희가 한국말을 몰라요. 쓰기는 전혀 안 되고, 말하기도 거의 안 돼요.”
더 믿기 어려웠다. 정희는 이미 내 수업에서 세 차례나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 설명에 따르면 정희는 ‘중도입국자녀‘였다. 정희 어머니가 한국에 와서 결혼을 했고, 이듬해 열두 살인 정희를 베트남에서 데려왔다.
그렇다 해도 정희는 벌써 고교 1학년, 입국한 지 5년이나 지났다. 한국 기준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한국어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을 터다. 내가 몰랐던 정희의 비밀은 이어졌다.
“사실 정희는 열일곱 살이 아니에요. 이미 우리 학교에 2년 전에 입학했고, 두 번이나 휴학해서 지금 열아홉 살이에요.”
학교 자체를 싫어하거나, 공고 ‘스펙‘을 지우려는 공고생은 보통 자퇴를 선택한다. 하지만 정희는 휴학을 했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두 번씩이나 말이다. 어떻게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난 첫 수업 때 정희가 쓴 ‘내가 원하는 수업’ 활동지를 꺼내 보았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나를 소개해보세요.
“저는 이정희입니다.”
(2~5번은 모두 공란)
6. ‘○○공고에 온 이유는?
“잘 부탁드립니다.”
어떤 아이는 문장 한 줄 쓰는 걸 버거워 하고, 몇몇 아이는 아예 백지로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정희의 허전한 활동지에서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나의 실수다. 며칠 뒤 정희 반의 수업에 들어가, 나는 일부러 천천히 출석을 불렀다.
“16번, 이정희!”
“네.”
정희는 여유롭게 대답하고 책을 폈으며, 칠판을 바라봤다. 수업을 하는 동안 조심스럽게 정희를 살폈다. 내가 반 전체에게 질문을 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면 정희도 함께 입을 움직였다. 한 박자 느리게 말이다.
모둠별 활동 때 정희는 말하기 대신, 정성스럽게 듣는 사람의 역할을 했다. 졸지도 않고, 딴짓을 하지도 않았다. 조심성 많은 조용한 아이로 보였다. 수업이 끝난 뒤 정희를 따로 불렀다. 정희의 눈을 똑바로 보고 천천히 말했다.
“정희야, 샘하고 이야기 좀 할래? 이따가 교무실로 좀 온나.”
망설이던 정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꾸벅이며 짧게 “네”라고 답했다. 몇 시간 뒤 정희가 교무실로 왔다. 난 정희를 옆에 앉히고 다시 천천히 물었다.
“정희야, 샘 말 얼마나 알아듣노?”
“저는 머얼라요(몰라요).”
정희는 자기를 바라보는 나보다 몇 배는 더 진지하게, 나의 눈빛, 표정, 몸짓을 뚫어질 듯이 살폈다. 목소리 톤에도 집중하는 듯했다. 상대방의 움직임에서 정보를 종합해 의중을 파악하는 듯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니, 내 말 알아듣나?”
“저는 머얼라요(몰라요).”
첫 수업 때의 정희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와 교실의 아이들은 정희가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베트남에서 왔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 후에도 쭉 이어진 정희의 침묵과 튀지 않는 조용한 행동, 그 모든 건 다문화가정 출신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진즉에 알아챈 정희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차별은 통역 없이도 너무 쉽게 심장에 박힌다는 걸, 차별당하는 자들은 몸으로 안다. 수업 때마다 정희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알아 듣노? 60%? 70%?”
베트남어를 모르는 나는 이 말을 한글로 종이에 적었다. 그런 다음 종이와 펜을 정희에게 내밀었다. 정희는 ‘아!’ 감탄사를 내뱉더니 “40%“라고 적었다. 숫자와 기호를 조합해 내 질문을 알아들은 것이다. 순간 내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오케이! 이해가 안 될 땐, ‘몰라요‘라고 말해야 된데이. 오케이?”
“네.”
당시 학교의 큰 화두는 기초학력반 운영이었다. 쉽게 말해, 기초학력 테스트에서 떨어지는 학생이 없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정희에게 테스트 통과는 무척 중요했다. 무엇보다 국어(정희에겐 한국어) 과목 통과가 필요했다. 국어 테스트에서 탈락한다는 건, 정희에겐 ‘강제 커밍아웃’을 의미했다. 베트남 출신이란 걸 알리거나 감추는 건 정희가 선택할 문제였다. 정희는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정희는 자신이 아는 어휘와 손짓발짓을 모두 동원해 ‘국어 테스트에선 꼭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어 읽기·쓰기·듣기·말하기 모두를 힘겨워 하는데, 어떻게 시험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했다. 정희는 그런 나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정희에게 고통스런 제안을 했다.
“정희야, 일단 ‘읽기‘부터 잡자, 응? 시험까지 일주일 남았는데, ‘쓰기’ 시험까지 통과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그렇게 하는 게 너한테도….”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난 정희가 베트남에서 온 아이라는 걸 순간 잊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말의 진정한 뜻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잠시 정희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머얼라요(몰라요).”
처음부터 다시, 손짓발짓은 물론 눈빛과 입술 모양을 총동원해 정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말의 요지는 이랬다.
‘국어 기초학력평가는 읽기와 쓰기를 테스트하는데, 하나라도 점수가 미달하면 탈락이다. 네가 당장 이걸 통과하는 건 무리다. 기초학력반으로 가서 ‘나머지공부‘를 하면 좀 어떤가. 거기에선 1:1 한국어 수업도 가능한데, 내가 도와주겠다. 당장은 힘들어도 한국에서 살아갈 너한테 꼭 필요한 수업이다. 읽기부터 시작하자. 절대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면 졸업 무렵엔 한국인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너한테 진정으로 필요한 게 아니겠냐.’
한참을 떠들었더니 입은 물론 팔다리도 아팠다. 가만히 보고, 듣던 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읽기 테스트 통과를 목표로 노력하겠다는 한다는 걸 동의한 거다. 정희의 두 눈은 새로운 도전이 설렌다는 듯 반짝거렸다.
다음 날, 나는 ‘이정희 문해력 향상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일주일 뒤의 기초학력평가는 물론이고 그 후의 교육까지 염두했다. 학교에서는 ‘학습튜터‘ 제도를 활용해, 정규수업 시간에도 정희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방안을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정희만을 위한 첫 번째 국어수업. 나는 읽기 테스트 통과를 위해 여러 준비를 했다. 먼저 기출문제와 예상문제를 정리해 문제풀이 강의를 시작했다. 정희는 쓰기와 말하기는 잘 못했지만, 읽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 정도는 했다. 다만, 어휘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정희야, ‘직장(直腸)’ 아나?”
“저는 머얼라요(몰라요).”
“베트남어로 하면 ‘trực tràng’이야.”
“알아요.”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는 구글 번역기와 네이버 파파고, 챗GPT를 활용했다. 단, 가급적 한국말로 설명하고 도저히 의사소통이 안 될 때는 번역기를 사용했다. 구체적인 상황까지 설명해서 정교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때는 챗GPT를 이용했다.
나는 시험 지문에서 ‘중심문장’ 찾는 방법과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 정답을 찾는 비법까지 설명했다. 마치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것처럼 한국어 어휘카드를 만들어 암기하도록 했고, 부정과 긍정 표현, 종결어미에 주목해 문장의 의미를 아는 법도 알려줬다. 접속 부사가 나올 경우에는 반드시 네모를 치고 문장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연습도 시켰다.
10~20점 정도였던 정희의 읽기 점수는 이틀 만에 30점까지 올랐다. 합격 커트라인은 60점. 즉 20문제 중 12개를 맞춰야 읽기 테스트 통과였다. 더욱 서둘러야 했다. 나는 예상문제를 풀어오는 숙제를 내줬고, 정희는 빠짐없이 과제를 해왔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시험 전날이 됐다. 마지막 문제집을 푼 뒤 정희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선생님… 저… 베트남에선… 공부… 잘했어요.”
정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낀 차별과 고독, 언어 장벽에 따른 학습 결손을 경험하면서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래, 안다. 여기서도 잘하게 될 끼다. 걱정하지 마레이.”
마침내 기초학력 진단평가 시험을 치는 날. 정희는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정희가 읽기 과목에서 받은 점수는 딱 60점. 일주일간의 벼락치기는 가까스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렇다고 정희가 기초학력반을 벗어난 건 아니다. 쓰기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희는 국어, 영어, 수학 모든 과목의 기초학력반에 편성됐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희가 실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목표로 했으니,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정희와 나는 1:1 한국어 수업을 꾸준히 하기로 했으니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하지만, 우리의 도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아니 시작도 못했다. 정희는 기초학력반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정희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정희 담임선생님에게 사정을 물었다.
담임선생님은 정희 부모님께서 정희가 학교에 오래 남는 걸 원하지 않았다는 것과, 정희 역시 학교에 올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설명했다. 더 꼬치꼬치 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열아홉 살 정희가 또 휴학을 하나보다 여기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성적 처리를 하며 정희의 상황이 ‘무단결석‘에서 ‘자퇴‘로 바뀐 걸 알게 됐다. 대한민국 많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이 공고를 어떻게든 다니려고 두 차례나 휴학했던 ‘베트남 소녀’ 정희는, 그렇게 완전히 학교를 떠났다.
학교의 누구도 정희가 왜 자퇴를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백인이 아닌 외국인을 향한 차별이 한국어처럼 자연스럽게 통하고 공유되는 이 땅에서 정희는 강제 커밍아웃 되는 것이, 그것도 전 과목 ‘나머지공부‘로 밝혀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말 못할 처지가 있을 수도 있고.
공고에 입학한 남자아이들의 주눅 든 눈빛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다는 자각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공고에 다니는 여학생의 위축은 어느 정도일까? 세상이 공고에 다니는 여자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떠올리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정희가 왜 학교를 떠났는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우리 사회가 ‘베트남 출신 여자 공고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져보기로 했다. 구글 번역기로도 쉽게 알 수 없던 정희의 마음은 그때 비로소 이해될지도 모른다.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코멘트
3'몰라요'라는 대답이 가지는 복합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네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본인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할 수 없는 다문화 이제는 대비해야할 때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