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억] 모두의 10년, 다시 찾아온 봄
모두의 10년, 다시 찾아온 봄 초등학교 5학년 봄방학식이었다. 5학년 교실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 정리를 도와달라고 하셔서 친구와 함께 학교에 남아 책상을 옮겼다. 교실에 돌아오니 꺼져있던 텔레비전에 뉴스가 틀려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보고 있던 뉴스에는 지하철에 불이 났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대구에 사는 누구든 자주 놀러가던 그 지하철역까지 불이 옮겨붙었다고 했다.  6학년이 되던 봄, 동네는 지하철 참사로 어수선했다. 관계망이 좁은 대구에는 조금만 건너면 아는 이가 참사 피해자였고, 유가족이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어떤 이야기는 소문처럼, 가십처럼 동네를 떠다녔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도 우리는 방과후에, 주말에 중앙로역에 갔다. 참사를 잊고 살다가도 중앙로역 벽에 새까맣게 남은 재와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 그 날이 다시 떠올랐다. 속보를 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의 뒷모습, 정신없이 나오던 참사 장면, 그리고 텅 빈 교실, 그런 순간들이….  10년 전,  4월의 기억 10년이 지나, 나는 사범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교사를 꿈꿨다. 임용고시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학생으로 경험했던 학교는 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공간이었다. 퀴어인 내가, 여성인 내가 지켜지는 학교에서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졸업 직후, 나는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삶을 이어갔다. 2014년이었다. 처음 교사가 된 나는 기쁘고 신나는 마음으로 가득찬 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우리반, 우리학교, 아직 교사로서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하고픈 것은 많은 3월이었다. 그저 학교에 가고, 교실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직 잘 몰랐기에 함께 웃을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 더 좋았다.  4월 16일, 어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날이었다. 우리학교는 전자기기 사용이 금지되어있었다. 학생들은 전자기기 대신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온 지 2달째, 나 또한 전자기기 사용에 대해 눈치를 보며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휴대폰과 노트북과 멀어졌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선배들이 저녁을 사줬다. 굽이 굽이 산길을 따라가야있는 작은 산골마을에 온지 2달밖에 되지 않은 초임교사를 선배들은 매일 저녁 챙겨줬다. 그날도 그러했다. 맛난 밥을 먹으며 학교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집, 그제서야 처음으로 휴대폰을 켜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밤 늦게서야 세월호 참사를 알게 됐다. 우리끼리 농담삼아 사회와 동 떨어져 있다고 했지만 그걸 몸소 경험한 날이었다. 너무나 많은 기사들이 흩어져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지? 배가 가라앉았다고? 근데 구조를 하지 못했다고? 어째서? 그 시간부터, 며칠간 기사를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러다 두려워졌다.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내가 함께하는 학생들과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학생들을, 그리고 나를 지킬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는 타인의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다가올 수 있는 참사였다.  2016년, 학생들과 함께 만든 노란 리본 (사진 :유랑) 우리 모두의 10년,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10년이 지났다. 이제 곧 4월 16일이 온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한 10년을 돌아보면 몇 개의 장소들이 떠오른다. 팽목을 오가는 셔틀을 타기 위해 새벽에 모인 이들, 세월호와 구조현장이 모이지 않았던 팽목항, 잊지 않기 위해 갔던 화랑유원지, 리본을 함께 만들었던 광화문. 주변에 함께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을 때, 이 곳에 가면 함께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보고, 함께한 시간을 들으면 지치지 않고 함께 기억하고 진실을 향해 계속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마주한 5번째 4월이었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1,000명의 시민이 모였다. 천명의 시민은 합창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있음을,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화랑유원지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는 노래의 힘을 느꼈다. 노랫말로 우리의 마음을 전하고, 한 목소리 내며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이 곳에 함께 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합창을 하기 위해 서로의 입과 시선을 맞추는 것,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음과 박자를 맞추는 것, 곁에 있는 이의 온기를 느끼는 것. 그 감각들로 우리의 연대를 느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천인 합창 현장 (사진 :유랑)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것, 우리가 연대하는 것, 그리고 추모한다는 것. 그 기억과 행동이 그저 무겁지만은 않은 일임을 처음 깨달았던 날이다. 함께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서로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힘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 희망을 만들어가는 길이 하나의 방법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이제 11일 뒤,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올해는 화랑유원지에 4,160명의 시민이 모인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기억하고, 진실을 향해 목소리내려 한다.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는 또 다른 사회적 참사와 재난을 마주한다.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18개월 전에도, 사회는 시민을 지키지 못했다. 국가와 정부가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두려움은 무력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떠한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감, 그리고 나 혼자 생존하기도 급급한 일상을 우리는 보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리고 사회는 더디지만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무력해졌을 때, 희망을 놓고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할 때 사회는 더 속도를 늦춘다. 혼자인 것 같을 때, 나 혼자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을 때, 각자의 기억 공간에 찾아가자. 팽목항에, 광화문에, 화랑유원지에, 그리고 내 주변에 있을 노란 리본에. 그 공간 속에 있는 10년의 기억과 함께했던 이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조금씩 나아가자, 안전한 사회를 향해, 그리고 그 누구도 죽임 당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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