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즈
데모스X
데이터트러스트
그룹
은하
시티즌패스
투데이
뉴스
토론
캠페인
구독
검색
로그인
홈
토론
1
코멘트
정진아
2,765
3초의 장면을 위해 ‘마리아주’는 죽었다
마리아주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네 살이었다. 약 2년 여 간의 경주마 생활을 뒤로 하고 말 대여 업체에 팔려간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주인공 말의 대역으로 드라마 현장에 투입된 마리아주는 낙마 장면을 위한 고의적인 연출로 머리부터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사고를 당했다.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진 채 바닥에서 내리 헛발질을 하던 마리아주의 발목에는 로프가 묶여 있었다. 촬영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 마리아주가 겨우 몇 발짝 내달렸을 때 뒤쪽에 서있던 스텝 여럿이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고, 마리아주는 고개가 꺾이며 고꾸라졌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말은 일주일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우리에게는 ‘까미’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퇴역 경주마 ‘마리아주’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방영한 드라마에서 마리아주가 등장한 시간은 고작 3초 가량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대로 끝나서는 안됐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벌어진 죽음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예전부터 느껴왔던 불편한 감정을 떠올렸다. 그 사고는 단지 어느 운 없는 동물 하나에게만 일어난 예외가 아닐거라는, 슬프지만 분명한 짐작이었다. 모두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고 미디어 전반에 걸친 각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음으로 사건을 공론화했던 동물자유연대가 ‘방송 촬영을 위해 안전과 생존을 위협당하는 동물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리자 20만 명 넘는 시민들이 이에 동의했다. 그 결과 정부는 "2022년 상반기 중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현장에서 실행하도록 모니터링하겠다" 약속했고, 그 작업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그 후 1년 반,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인 미디어 출연 동물보호 가이드라인 그러나 사건이 가져온 파장에 비해 변화는 미미하기만 했다. 협의체 구성원 중 대다수는 미디어 업계 관계자였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가이드라인 제작에 부정적이었다. ‘가이드라인’이라는 호칭 자체에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2022년 상반기에 두 차례 있었던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촬영에 동원한 동물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는 동시에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 범위를 파악해 실효성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작해보고자 했던 의도는 찾을 수 없었다.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채 고작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이유 만을 역설하기 바빴고, 지금은 그마저도 중단된 상태로 일 년 넘게 답보 중이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동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새로운 제약에 발목 잡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까 우려했다. 촬영 현장은 대체로 열악하기 마련이라 사람에 대한 처우도 엉망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쉽게 말해 사람도 힘든데 동물까지 어떻게 챙기냐는 뜻이었다. 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동물의 안전을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동물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된다. 아직 가이드라인의 내용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만약 마련된다 해도 그 안에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만 담길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안전을 위한 담당자를 따로 지정한다거나 대기 시간에는 동물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 같은 것들 말이다. 고작 이 정도 항목조차 부담된다면 살아있는 동물을 촬영에 동원하지 않는 것이 맞다. 어떠한 영상물도 생명의 가치보다 귀할 수는 없고,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가이드라인은 종착지 아닌 시작일 뿐 앞서 언급했던 마리아주를 이용한 낙마 장면이 방송으로 송출되자 많은 시청자들이 말의 안위를 걱정하며 방송국 홈페이지에 항의글을 남겼다. 촬영 과정에서 고의적인 사고를 일으켜 말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음에도 짧은 시간 출연한 동물의 안전을 우려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인식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반면 촬영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해당 장면을 그대로 내보낼 만큼 동물을 이용하는 데에 무감각했다. 그곳에서 동물은 너무 오랜 시간 방송을 위한 소품처럼 다루어졌고, 말 한 마리의 죽음으로는 이를 바꾸기에 역부족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분노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건만 그토록 격렬한 흔들림에도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다. 이대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마리아주의 죽음은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촬영 현장에서 희생되었을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동물들과 앞으로도 이어질 고통은 또 무슨 낯으로 마주하겠는가. 그러한 마음으로 동물자유연대는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 페이지를 개설했고, 지금까지 5천명 가까운 시민들이 동참했다. 모아진 서명은 정부에 전달하여 조속한 가이드라인 제작을 요구할 계획이다. 제작부터 이러저러한 난항을 겪으며 그 완성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되었지만, 사실 출연 동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우리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많이 기울어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점에 불과하다. 동물을 고작 ‘방송을 위한 소품, 흥미 유발 소재, 연출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미디어의 동물 착취는 계속될 것이다.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 이제는 TV 방송 뿐 아니라 개인 방송, OTT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더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만약 미디어가 지금과 같이 아무 제약도 없이 동물을 수단으로 마음껏 이용하게 둔다면 다른 분야에서 동물의 위치 역시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디어는 동물 권익 향상에 있어 상당 부분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반면 어떠한 측면에서는 동물의 지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미디어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은 그 양날의 검을 올바르게 다루게 할 최소한의 장치다. 미디어가 동물을 인간보다 하찮은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엄에 대해 더 많이 살피고 고려해야할 약자로서 여기며 감수성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그제야 비로소 마리아주의 이야기는 끝맺을 수 있을 것이다.
동물권
2023.08.11
·
15
·
29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디지털 시민 멤버십
멤버십 가입하기
로그인
투데이
뉴스
구독
토론
캠페인
오리지널
투표
소식
이슈
인물
뱃지
은하
투데이
뉴스
구독
토론
캠페인
지금 간편하게 가입하고,
정진아님의 12번째 구독자가 되어주세요.
정진아님의
소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고,
정진아님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메일로 가입할게요
회원이신가요?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