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지하철,버스만 타도 어디든 이동과 접근성이 편리하죠. 그런데 서울만 벗어나도 자동차 없인 이동이 불편해서 이동권 보장이 어려운 경우가 많더군요.. 시스템의 문제를 방치한 채 혼자의 노력으로 돌리게 할 때 사고가 발생한다는 지점을 지적한 기사로 읽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출근길에 요즘 최성환 작가의 <익명과 상식에 관하여> 책을 읽고 있는데요. 우리가 외면해오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대상들을 익명이라 칭하며 이들의 특징을 다루는 책입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스피커로 ‘4호선에서 특정 장애인 집단의 시위가 있어서 해당 운행 구간을 무정차 통과한다’ 는 안내방송이 들리는데요, 여기서 특정 장애인 집단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입니다.
이들의 시위는 무정차 통과해버리는 서울교통공사와 이동권 시위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경찰에 의해 무력화 됩니다. 장애인은 이 책에 나온 익명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알기 거부합니다. 나의 출근길 지연으로부터 생겨나는 불만과 불편에 기대느라 이들을 알 여력이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그 사이 장애인은 공공기관, 경찰 심지어 시민에게 모두 따가운 눈총을 맞습니다. 환대받지 못하고 정상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벼랑 끝에 메달립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에게 기대야 할까요? 정상성에 부합한 자들로 꾸린 세상에서 우린 장애인을 비정상이라 부르고 계급을 나누느라 이들의 권리를 쉽게 알지도, 알 방법조차 알 도리 없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오르는 사람들 다수는 정상성에 속한 이들이겠지요. 저들이 진정으로 불편해하는 것은 출근 시간이 늦어져서 오는 불편과 답답함이 가장 클 것입니다. 매끄럽게 잘만 가고 있는 출근길에 전장연 시위가 제동을 건 셈이니까요. 하지만 평생을 투쟁하고 투지한 이들의 절실함은 마치 저들을 통제하는 것에 가담하는 건 아닐까 칼럼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책에 읽은 대로 우리를 결속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떠올려보았습니다. ‘익명이 암시를 통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구성원을 통제한다면, 우리는 필시 익명의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위 책 79쪽) 라는 문장처럼 우린 자본주의라는 익명 속에서 사로잡힌 채 지내는 건 아닐까란 근본적인 생각과 소외된 익명들을 못 본체 하는 행위가 집단적으로 이뤄진다면 해결할 문제를 방치하는 (78쪽) 결과를 낳지 않은가 돌아보게 합니다.
한국에도 생겼군요. 학생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했다는 게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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