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화장실 불법촬영 피해자에게 “아줌마가 뭘 그러냐” [회사에 괴물이 산다 7화]
[지난 이야기] 김한솔(가명) 씨는 회사 여자화장실에서 불법촬영 피해를 입는다. 범인은 한솔 씨가 살뜰히 챙기던 ‘직속후배’ A.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던 한솔 씨에게 회사는 범인 A의 업무까지 떠넘기고, 휴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범죄 피해 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솔 씨는 당시 불안, 불면, 배뇨불안 등 신체적·정신적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 그런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아직 학교도 다니는데 혹시나 엄마가 정신병원 다니는 게 알려져서 마이너스로 작용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증상이 심할 때만 잠깐 병원 가서 수면제 처방받고… 그냥 버텼어요.” 심리적인 장벽이었다. ‘정신력이 약해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손가락질과,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들만 가는 데 아니야?’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솔 씨는 꾸준히 치료를 받는 대신,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간헐적으로 수면유도제만 처방받으며 견뎠다. “이사장님, 잠깐이라도 다른 사업소에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산에서 산토끼 똥을 치우라고 하면 치울 거고, (군립공원) 입장 티켓을 팔라고 하면 팔겠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다가 여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근데 지금은 잠깐이라도 떠나 있고 싶습니다. 자꾸 그날 일이 생각납니다. 그 뒤로 화장실에 불을 켜고 갈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인 이사장까지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A를 향한 배신감보다, 휴가도 전보도 안 된다고만 하는 회사를 향한 분노가 조금씩 더 크게 자라났다. 사건이 발생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한솔 씨는 약 열 번이나 전보를 요청했다. 특히 이사장이 교체되던 해인 2021년에 요청이 집중됐다. 전임 이사장에게 문제를 해결하고 떠나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신임 이사장에게 인계하고 갈 테니 조금만 버텨달라”고 했다. 그해 11월 신임 이사장이 부임하자, 한솔 씨는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업무 파악이 되지 않아서 전보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네요.” 떠나갈 사람은 떠나갈 사람이라서, 새로 온 사람은 일을 잘 몰라서. 결국 안 된다는 말은 똑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사건 이후 남아 있던 문제들. 한솔 씨는 그 문제를 열심히 가리키며 얘기했지만, 회사는 되레 그런 한솔 씨를 가리키며 ‘문제’로 여긴 거였다. 계속 거부당하면서도 한솔 씨는 계속 전보를 요청했다.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위태로웠다. 그에게 2021년은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였다. 약을 안 먹으면 잠들 수 없고, 약에 취해 잠들면 악몽이 따라왔다. 해맑게 웃던 얼굴이 조금씩 음흉한 낯빛으로 변하는 A를 마주하거나, 뭔가로부터 도망치고 피해 다니는 꿈을 꿨다. 수면을 방해한 건 또 있었다. 한솔 씨는 ‘사건’ 이후로 집 밖에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방광염이 생겼다. 참다 못해 화장실을 찾는 경우에는 깜깜하게 불을 끄고 들어갔다. 혹시나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을지 모르니,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밖에서는 화장실을 못 가는 게 문제였다면, 집에서는 너무 자주 가는 게 문제였다. 집을 벗어나면 또 화장실을 못 갈 거란 불안 때문일까. 집에서는 조금이라도 요의가 느껴지면 참을 수 없었다. 자다가도 자꾸 깨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불안이 일상을 압도했다. 한계. 한솔 씨는 자신의 삶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려 있단 걸 알았다. 이대로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2021년부터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됐다. 간헐적으로 수면제만 처방받아온 지 2년이나 지나서였다. 한솔 씨는 정신과 진단서를 가지고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아니, 암이 걸린 것도 아니고, 팔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할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병가 신청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이가?” 반전은 없었다. 회사는 완고했다. 한솔 씨가 느끼는 고통의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때 진짜 직장을 떠나야 하나, 고민을 무척 많이 했어요. 계속 벽에 부딪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참고 버틴 건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죠.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되는데, 남편한테 외벌이 맡길 수는 없잖아요. 또, 마흔도 넘긴 나이에 전문직에만 있었으니까 나가면 경력단절이죠, 뭐. 내가 다른 데 어디를 또 갈 수 있겠어요?”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동안에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요령 없이 참고 견딜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볕 들 날 올 거라고 간절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신앙의 힘을 빌려 겨우 마음을 지탱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해성사도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면 또 용서 못하는 제 자신 때문에 너무 괴로워져요. 결국에는 자책이에요, 자책.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왜 나만 그럴까, 회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만 계속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회사에는 직원고충상담센터가 있었다. 한솔 씨는 지난해 2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신고글을 올렸다. 그런데 상담센터 위원들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4년간 한솔 씨가 휴가나 전보를 요구할 때마다 완강히 거부했던 관리자가 속해 있었다. 결국 한솔 씨는 자신의 신고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가 그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일말의 기대도 사라졌다. 한솔 씨는 그때부터 자살을 떠올렸다. “직원들끼리는 속된 말로 ‘가둬놓고 직인다(죽인다)’고 했어요.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부당하고 힘든 요구였나.” 그 사이 회사에서 전보나 병가를 승인해준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니다.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여섯 명이 전보발령·휴직·병가를 승인받았다는 사실이 기관 인사발령사항 공문을 통해 확인된다. 다만 이상하게도 한솔 씨는 그 장벽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 “계속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던 거죠. 조금씩 나아지겠지, 이 순간을 참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요. 끝까지 현장에 있다가 명예롭게 퇴직하고 싶었으니까, 그 꿈을 접기 힘들어서 계속 버텼던 것 같아요.” 불법촬영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솔 씨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지금껏 가슴속에 품고 있던 꿈도 놔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지난해 9월 한솔 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루에 더 많은 약을 삼켜내야 했다. 귀에는 쿵쿵대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린 통증도 동반됐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지만 이상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한솔 씨는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해하거나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었는데, 이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결심을 당장 멈추고 싶지만, 나의 아픔을 외면한 채 눈과 귀를 닫고 병가도 반려하고, 휴직도 반려한 이사장과 팀장들, 인사팀의 카르텔에 대응할 방법도 없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지금, 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런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산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10월 쓴 유서 일부) 모든 일이 시작된 회사 여자 화장실. 그곳에서 죽음을 맞겠다고. 유서를 품에 넣은 채 약을 한 움큼 털어넣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면 회사도 내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단서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음’ 이렇게라도 명시를 했어야 하나?” “저번에(어제) 운동 가서 산에서 그냥 돌아오지 않으면 이 심각성을 좀 알려나?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어야 끝이 나는 걸까?” (2023년 업무수첩에 남긴 메모 일부) 한솔 씨를 다시 살게 만든 건 가족들이었다. 가슴에 묻어야 할 상처,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진 않았다. 대신 한솔 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17년간 다니던 회사. 그렇게라도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지난 2월 지역의 노동 활동가들을 만날 자리가 있었다. 한솔 씨네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솔 씨 퇴사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한솔 씨) 연차에 퇴직한다는 게 흔치 않은데,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왜 퇴사하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터닝포인트. 그 한마디에 사건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 한솔 씨를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젠더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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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여자화장실에 카메라가… 범인은 ‘김 대리’였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6화]
“과장님! 저희 어떡해요? 화장실 변기에… 카메라가 있어요!” 다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사무실로 뛰어 들어온 인턴 사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김한솔(가명, 여) 씨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의 손이 파들거렸다. 한솔 씨는 손을 맞잡고 화장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세면대 하나, 그리고 커튼 뒤로 놓은 변기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화장실. 자세를 낮춰 변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비데 노즐 옆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변좌를 들어올리니 그 실체가 드러났다. 악취 나는 화장실에 그보다 더 구린 것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초소형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매일같이 화장실 가도 변기(변좌) 아래를 들여다볼 일이 있겠어요?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데, 그날은 날짜도 못 잊어요.” 2019년 1월 29일. 한솔 씨는 지금도 카메라를 목격한 순간을 떠올리면 털이 쭈뼛 선다. 사무실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됐다. 매일같이 화장실을 오가던 여직원들은 사색이 됐다. 은밀한 신체가 촬영됐다는 수치심, 영상들이 어디선가 공유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무엇보다 범인이 자신들과 동고동락하던 동료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압도됐다. 함께 밥을 먹던 유 대리일까. 눈을 마주칠 때면 미소 짓던 한 차장일까. 별 이유 없이 꾸중만 하던 백 부장일 수도 있고, 퇴근 후 가끔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성 대리일 수도 있다. 회사 안에 ‘몰카범’이 있다니…. 피해자들은 인두겁을 쓴 끔찍한 괴물 앞에서 미련하게 웃고만 있었을 ‘나’를 자책했다. 왜 카메라를 진작 발견하지 못했을까. 왜 그 괴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괴물을 향한 분노의 화살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자책으로 돌아와 박혔다. 한솔 씨는 우는 여직원들을 달랬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 또한 불법촬영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후배 동료들을 다독여야 하는 과장이기도 했다. 공포에 질려 손발이 떨려도 당장 챙겨야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동료들을 달래며 경찰에 신고했다. “누가 신고했어! 이게 신고할 일이에요?” 이내 불호령이 떨어졌다. 관리자들은 인상을 팍 구겼다. 한솔 씨가 다니는 회사는 경남의 한 지방공기업. 회사는 가장 먼저 방어 시스템을 가동했다. ‘함구령’. 사건이 회사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범인을 색출하기보다 오히려 경찰에 ‘누설’한 이를 몰아세웠다. 공공기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오겠냐는 식. 겁에 질린 여직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공기업으로서 회사의 명성과 ‘윗사람’들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나중에 경찰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카메라 용량이 작으니까 주기적으로 백업하고, (다시 카메라를) 갖다두면서 녹화했다고.” 경찰 조사 결과, 한솔 씨는 불법촬영 피해자로 특정됐다. 촬영 기간에 그가 당직 섰던 날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출근한 여직원은 한솔 씨가 유일했으니, 이는 곧 그날 촬영물에는 오직 한솔 씨의 모습만이 찍혔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도 없이 드나들던 화장실이란 곳이,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두려운 장소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끔찍한 기억은 차라리 어둠 속에 밀어넣어야 했다. 한솔 씨는 그날 이후 공중화장실 불을 켤 수 없었다. ‘혹시나’ 또 불법촬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에, 화장실을 깜깜하게 해두고 사용해야 했다. 한솔 씨는 2007년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2011년 7월 발령받은 사무소에서 ‘직속후배’ A(남)를 만났다. 동문을 만나기 어려운 사회에서,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출신이라는 점만으로도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한솔 씨는 A를 살뜰히 챙겼다. 다른 기관 직원들을 만날 때면 A를 동행해 소개했고, 그의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물려주기도 했다. 그 각별한 후배는 ‘그 사건’ 이후로 종적을 감췄다. “A는 화장실에서 카메라가 발견된 날부터 못 만났어요. 보통 11시 50분 되면 오전 업무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그날은 안 오더라고요. 퇴근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는 게 의아하기는 했는데, 당시에는 (불법촬영) 카메라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충격이 너무 크니까… 그냥 다른 생각은 못했죠.” ‘그 사건’이 터진 순간부터 갑자기 얼굴을 비치지 않던 A. 당시 회사에서는 오후 6시 이후 순환당직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는 홀로 당직을 서는 날 여자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한솔 씨가 살뜰히 챙기던 직속후배 A가, 범인이었다. ‘A가 나를 보고 짓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언제부터 촬영됐을지 모를 영상에 내 모습은 얼마나 등장할까. 혹시 사무실 직원들끼리 영상을 공유한 건 아닐까. 촬영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놈을 살뜰하게 챙기던 나를 보면서, 그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여자화장실을 이용하던 직원들과 소형 카메라를 목격한 직원까지 총 9명이 경찰서에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경찰은 “영상이 공유되고 불법 사이트에 업로드된 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한솔 씨는 믿지 못했다. 그 영상들은 그저 ‘혼자 보기 위해’ 촬영된 걸까. 정말 그 영상들을 혼자 가지고만 있었을까. 수사의 한계는 아닐까. 그러나 경찰은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유포는 없었다고. “몰래카메라 범죄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피해자에 대한 낙인효과의 심각성이 높아서 유포와 배포가 자유로워 온라인 공간의 불특정 다수에게 포르노로 소비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피해자는 일상적 생활이 어려워진다.” (김은지, 「불법촬영범죄에서 온정적 성차별주의와 노출수준 및 관계유형에 따른 피해자 비난과 처벌판단」,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2020년) A는 그날부터 종적을 감췄고, 회사의 바람대로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돼갔다.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았고, 직원들끼리도 언급을 금기시했다. 그 침묵이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했다. 약 130명에 달하는 직원들 중 “성비는 8:2 정도”로 남성이 훨씬 많았다. 한솔 씨는 생각했다. 그래서 ‘여직원’들이 느낄 공포나 수치심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한솔 씨는 여성 관리자인 B를 찾아갔다. 그동안 특별한 교류는 없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여성 피해자들의 심정에 공감해줄 수 있는 상사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카메라가 설치된 화장실을 사용하던 불법촬영 피해자니까. “범인이 매일같이 마주치던 같은 부서 직원이잖아요. 다들 충격이 큰데, 여직원들 3일 정도라도 휴가를 좀 다녀올 수는 없을까요?” 긴장 때문에 한솔 씨 손이 떨렸다. 그 손으로 B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절실한 심정이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B의 반응은 냉담했다. 다른 여직원들의 휴가는 인정해도 한솔 씨에겐 휴가를 줄 수 없다는 것. 이유는 황당했다. 첫째는 회사에서 사라진 범인 A의 업무를 맡을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그리고 둘째는 한솔 씨가 ‘아줌마’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솔 씨는 40대 중반이었다. ‘아줌마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말. 모욕감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가 누군가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충격은 피해여성 누구에게나 같았다. ‘아줌마’라서 견뎌야 하는 것도,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심은 더 컸다. 각별한 후배였던 A에 대한 배신감은 불면, 그리고 악몽으로 이어졌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감으면 A의 불쾌한 미소가 떠올랐고, 또 그놈의 더러운 카메라에 노출됐을 제 몸이 떠올랐다. 회사는 ‘피해자’인 한솔 씨를 외면했다. 그 경험은 한솔 씨의 행동까지 지배했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는 가족들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여직원들이 3일간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한솔 씨의 업무는 더 쌓여갔다. 회사는 피해자 한솔 씨에게 가해자 A의 업무를 떠넘겼다. 당장 일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한솔 씨는 휴가는커녕 야근에 허덕였다. 사건 발생 바로 다음 달인 2월 한 달간, 그가 초과노동을 한 날은 휴일근무를 포함해 11일이나 됐다. 특히 한솔 씨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2인 1조로 움직이는 일이었다. 외부 시설물을 관리하는 동안 남성 직원과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단둘이 차를 타고 이동했고, 시설물을 둘러보는 일, 끼니를 때우는 일 역시 함께했다. 물론 그들은 불법촬영 사건의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한번 무너진 동료에 대한 신뢰는 단숨에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즉 남녀고용평등법은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지체 없이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해야 한다(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2항). 또한, 조사 기간 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피해자에 대해 근무 장소의 변경, 유급 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제3항). 그러나 회사는 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고, 피해자 보호조치가 필요한 시기에 한솔 씨를 피해 현장으로 여전히 출근하게 했다. 한솔 씨는 사건 발생 4일 만에 휴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는 휴가를 주는 대신 가해자의 업무까지 이중으로 맡겼다. 피해자 한솔 씨에게 사무실은 범인과 함께 있던 공간, 화장실은 ‘범죄’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매일같이 출근해야 한다는 건, 한솔 씨에게 큰 고통이었다. 사무실에서 떨어져 있기라도 해야 그 끔찍한 기억을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보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서 두드려볼 수 있는 창구는 모두 찾아갔다. 면담을 요청하고, 자신이 느낀 모멸감과 절박한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소문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하며 입단속하고, 대체인력이 없다거나 결정 권한이 없다는 식의 답변만 늘어놨다. 서로 다른 변명으로 한솔 씨의 호소를 외면했다. 그 즈음이었다. 난생 처음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찾아간 게.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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