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아홉 살’ 아빠를 돌보는 딸… 이 청년에겐 보호자가 없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사는 부녀. 강하라(31) 씨의 하루는 아빠를 기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성종(60) 씨는 아홉 살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 하라 씨는 스물여섯 살이던 2019년부터 아버지 돌봄을 전담했다.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1박 2일 동안 이들의 일상에 동행했다.(관련기사 : <‘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이들은 4년째 상속재산분할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20년 할머니가 숨을 거두자 친척들은 소송을 걸었다. 할머니가 부녀에게 물려준 언덕배기의 집 때문이었다. 믿었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보다 당장 변호사 비용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안 그래도 레슨실 월세도 3개월째 밀리고 있는데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것 같아요.” 집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집이 재산으로 잡혀 있어 장애수당도 받을 수 없다. “아빠는 하우스푸어예요. 지적장애인은 가난했을 때 가장 혜택을 많이 줘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 연금이라도 나오고 뭐라도 받거든요. 근데 겸업은 안 돼요. ‘딱 100만 원(장애수당)으로 살든가, 일을 해서 100만 원을 벌든가’예요. 밸런스 게임처럼.” 하라 씨의 월 수입이 100만 원이 안 되는 달도 있다. 그런 때는 하라 씨의 노동시간이 더 늘어나기 마련.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마케팅 외주를 받거나, 레슨실이 있는 건물 3층에서 사장님 일을 도와주고 알바비를 받는 식이다. “잠을 많이 못 자고 밥을 잘 못 먹거든요. 과로하고 그러니까 호르몬 리듬이 완전 깨졌어요. 그러면서 자궁근종이 생겼어요. 그때 알았어요. 잘 먹고 잘 자야 되는 거구나. 그런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가 저한테 굉장히 어려운 과제인 거예요.” 과로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지난 2월 혈복강 수술을 받았다. 난소 근처에 있던 물혹이 터지면서 간까지 피가 차버렸다. “수술 마치고 제가 비몽사몽할 때, 의사 선생님이 아빠한테 수술 과정을 설명을 했나 봐요. 그런데 아빠는 저한테 그 내용을 전달 못해줬어요. 며칠 뒤에 간호사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수술하면서 왼쪽 난소를 절제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하라 씨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비혼을 생각했던 하라 씨가 처음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계기이기도 하다. 아빠는 아픈 딸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줬다. 하라 씨는 그때부터 성종 씨가 “아빠 역할을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수술 이후 자궁내막증 치료제를 매일 먹는다. 담당 의사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약물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중 하나가 뼈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기타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라 씨에게는 치명적이다. 완경 시기 여성들과 비슷한 골밀도 수치. 그는 올해 골감소증 진단을 받았다. 기타를 두 시간 넘게 잡고 있으면 손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제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이랑 소통을 계속해 둬야 해요. 혹시나 아빠나 제가 무슨 일이 생겨서 움직이지 못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요.” 하라 씨는 이날도 장애인가족지원센터로부터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면접에 앞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전달받았다. 서류를 준비하고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도 하라 씨의 몫이다. 성종 씨는 지난해 한 중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로 9개월간 근무했다. 하루 4시간 근무에 월급은 약 100만 원. 아파트에서 3개월간 경비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장애인 일자리는 같은 곳에서 근무를 연장할 수 없다. 정해진 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형태다. 성종 씨의 꿈은 카페 창업이다. 매일 커피를 직접 내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중년 장애인인 그가 취업할 수 있는 카페는 없었다. “제가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체 활동에 문제는 없지만, 일상적인 은행이나 관공서, 병원을 혼자 가지 못합니다. 늘 제가 일하는 시간을 빼서 함께 다녀와야 했습니다. 저도 일하고 쉴 수 있도록 활동지원서비스를 원했지만, 심사 내용을 보면 모두 신체장애인에 맞춰져 있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강종 씨가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은 딱 하나. 보호자 1인을 동반한 지하철 무료 탑승이다.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주차를 했다가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지적장애인은 주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나마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과태로의 절반을 감면해줬다. 하라 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혜택(?)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성종 씨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하라 씨 덕분이었다. 2019년 하라 씨가 아빠 성종 씨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한글 공부도 같이 시작했다. 당시 아빠는 ‘안녕하세요’도 읽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라 씨는 학습이 더딘 아빠와 병원으로 향했다. 지적장애 판정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도 되게 힘들었어요. 아빠가 글을 못 읽으니까 제가 언어치료 검사, TCI 검사, 기질검사 문항을 다 읽어 줬거든요. 200문항이 넘는 걸 세 시간 동안 다 읽어줬어요.” 검사 결과는 중증 수준의 지적장애. 등급으로 구분하면 2급이었다. 하라 씨는 아빠가 학습을 하기 위해 천 번이 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종 씨에게는 활동지원 서비스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오셔서 질문을 해요. 근데 질문이 ‘혼자 샤워할 수 있는가’, ‘혼자 밥을 먹는가’, ‘외출해서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질문은 신체 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더라구요. 아니면 지적장애 1급에만 해당되는 거죠.사실 저희 아빠는 이미 천 번을 반복하고 학습해서 (질문 속 행동들을 혼자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안 된대요. 떨어졌어요, 심사에서.” 활동지원사가 없으니 그 자리를 채우는 건 24시간 하라 씨의 몫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을 가질 수도 없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사치다. 그나마 집과 가까운 곳에서 기타 레슨 수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나 지역 복지센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취업을 위한 면접장이나 병원에 동행하는 서비스 등이다. 다만 이러한 복지 역시 누리는 것도 쉽지 않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립을 위해 한 장애인복지관에 언어치료를 신청했는데, 4년 전쯤에 400번대 대기표를 받았습니다. 2년 전쯤에는 200번대였으며, 최근에 전화해보니 언어치료 선생님이 퇴사를 하셔서 공석이라 언어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동 지적장애에 비해 성인 지적장애는 기회가 더 적습니다. 인지치료나 언어치료를 신청해도 아동이 우선이기에 기회도 없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국가의 ‘돌봄’은 부족했다. 국가의 빈자리는 오롯이 딸 하라 씨의 인생을 ‘갈아넣어’ 채워야 한다. “지적장애는 원래 티가 잘 안 나요. 특히 아빠는 2급인데도 (사회성이) 많이 개발된 거고. 근데 약간 어수룩하죠.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상황 판단 능력이 빠르지 않은 거예요. 물건을 떨어뜨리면 주워야 되는데, 그걸 인식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성종 씨는 살갑고 정 많은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손수 만든 커피 나누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기자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날 하루 동안 그가 주는 커피를 이미 넉 잔이나 마신 뒤였다. 자기가 내린 커피는 마셔도 잠이 잘 온다며 능숙하게 회유(?)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이거는 마셔도 잠 잘 오는 커피야.” 그의 ‘남다른’ 사회성은 하라 씨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길러진 듯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성종 씨에게 ‘할 수 있어’, ‘괜찮아’ 하는 격려를 보내왔고, 그것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이 됐다. 하라 씨의 인생에도 그런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보호자’가 있었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보호자가 있었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떠오르는 건… 할머니?” 침묵 끝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라 씨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양육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빠 성종 씨는 아홉 살 딸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었다. 하라 씨는 일찍 어른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막내고모의 미용실에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교육 한번 받지 못했다. 이러한 성장기는 그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줬다.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해 원망한 적도 많았어요. 삶이 너무 힘드니까. 왜 나를 낳기만 하고 제대로 키우지도 않았지? 그런 생각. 그러다 보면 내가 훗날 가정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신이 양육자로서, 배우자로서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고민은 하라 씨를 괴롭혔다. 편부 가정이라는 점, 아버지가 지적장애인이라는 점,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는 점 역시 그에게는 ‘결점’처럼 느껴졌다. 다만 유년기의 기억이 언제나 괴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빠 성종 씨의 역할이 컸다. “아빠를 계속 돌볼 수 있는 건 과거의 기억 덕분인 것 같아요. 아빠는 주 6일, 7일 근무하면서도 쉬는 날마다 저 데리고 공원에 나가서 놀아줬거든요. 그 기억 속에 아빠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어요. 일 때문에 힘들어도 저를 정말 사랑하니까 그랬던 거잖아요.그런 게 (지금 제가 아빠를) 부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아빠가 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하라 씨는 자정이 돼서야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CTS 기독교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작은방 미닫이문 틈으로는 드라마 소리가 들렸다. 성종 씨는 또 동시에 태블릿PC로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했다. 하라 씨가 이불 속에 누울 때까지, TV 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행 가고 싶더라고요. 사람이 없는 곳으로요.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세상이 조금 더 자극적이에요. 너무 바쁘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저는 그 버드나무가 바람에 이렇게 흔들리면서 사르륵거리는 걸 좋아하는데….” ‘아홉 살’ 아빠를 돌본 지 5년. 하라 씨에게는 미래를 그리는 일은 사치스럽다. 일상을 버텨내는 것만으로 버겁다. 그는 차라리 회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도, 빚도, 잿빛 미래도 없는 곳으로. 하라 씨는 잠에 빠진 뒤에야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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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낮은 빌딩들 사이 가파른 1차선 좁은 길을 버스가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강하라(31) 씨가 살고 있다. 아홉 살 지능의 아버지 강성종(60) 씨와 단둘이.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했다. 갈색 벽돌이 겹겹이 쌓인 양옥 주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철문 옆에서 나뭇가지를 치고 있던 강성종 씨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반쯤 감긴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하라 씨는 줄곧 아빠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성종 씨가 케이크를 포크로 찍는 순간 하라 씨가 입을 열었다. “아빠, 기자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하라 씨는 아빠에게 ‘매너’와 ‘주도성’을 가르치고 있다. 성종 씨는 기자가 사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은 꼭 표현을 하라고 해요.” 지난 10일은 아빠 성종 씨의 생일이었다. 하라 씨에겐 1년에 한 번 때 맞춰 축하하는 것도 버겁다. 적게는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일을 하면, 밤 10시가 훌쩍 지난다. 지적장애인 아버지를 부양하고,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딸 연습’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빠를 돌보기 시작한 지 4년째였던 지난해. 하라 씨는 휴식이 절실했다. 일과 간병의 굴레는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만난 심리상담사가 은인이었다. 그는 하라 씨가 보호자의 역할만 하고 있다며, ‘딸 역할 해보기’를 권했다. 아빠를 통제하고 책임만 지는 게 아니라, 어리광도 부리고 부탁도 해보라는 거였다. 하라 씨가 아버지 돌봄을 전담한 건 2019년부터다. 그전까지는 성종 씨의 노모, 즉 하라 씨의 할머니가 아들과 손녀를 돌봤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양을 위해 시골로 가셨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집에는 단출한 두 식구만 남았다. 처음엔 각자 생활비를 벌었다. 성종 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하라 씨는 기타 레슨과 각종 아르바이트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여유는 있었다. 아빠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한글 공부도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지적장애인 성종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30여 년간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긴 세월 ‘막노동’에 몸이 버티지 못했다. 어깨와 무릎의 연골이 찢어졌다. 허리 디스크도 두 군데가 돌출됐다. 그때부터 지적장애인 아빠를 돌보는 건 온전히 하라 씨 몫이 됐다. “기자님, 여기부터가 진짜 영케어러의 일상이에요.” 영케어러(Young-carer).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키는 말. 하라 씨는 ‘진짜 일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성종 씨를 마주 봤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연체된 보험료였다. 성종 씨가 5개월간 미납한 보험료는 82만 3770원. 하라 씨는 절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돈 이야기에 성종 씨이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지금까지 치료받는다고 병원비 많이 썼잖아. 그동안 낸 돈 일부 환급도 받고, 앞으로 나갈 치료비도 생각하면 (보험) 부활 시켜야 돼.” “돈 없어. 놔둬.” “보험 없앨 거야? 그럼 아빠 아프거나 다치면 수술도 못 받아. 100만 원 낼 거, 300만 원 내야 될 수도 있어. 자전거 타다 넘어지면 수술 못 받는다고. 아빠 나이 더 많아져서 보험 들려고 하면 보험료도 더 비싸져. 지금 빨리 반반 내자.” 부녀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라 씨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성종 씨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내냐는 식이었다. 하라 씨는 대안을 제시했다. 두 달치 미납금만 먼저 해결하자는 것. 성종 씨가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타협 뒤에는 해결할 숙제가 생겼다.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계좌이체를 하는 것이다. 하라 씨는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직접 계좌이체 화면에 접속할 때까지 기다린다. 성종 씨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에서 방황했다. 서른 번 넘게 해 본 일이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오늘은 제 일정이 여유로워서 괜찮아요. 만약 제가 퇴근하고 밤 9시, 10시 돼서 들어왔는데 이런 일들을 밤에 또 해요, 그러면 일이 끝나지가 않는 거죠.” 성종 씨가 계좌이체를 하는 데 걸린 시간 30분. 아빠가 핸드폰을 쥐고 분투하는 동안, 하라 씨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성종 씨가 포기하려는 타이밍에 약간의 힌트를 주고 응원을 하는 요령도 생겼다. 출근하기도 전에 하라 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은 아빠를 헬스장에 바래다주고 레슨실로 가는 일정이 남아 있었다. 성종 씨는 오전에 10분 운동하고 왔다며 헬스장 가기를 거부했다. 하라 씨는 능숙하게 아빠를 회유(?)했다. 성종 씨가 운동하는 모습을 취재하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성종 씨는 그제야 나갈 채비를 했다. 한 손에는 그가 직접 내린 커피를 챙겼다. 헬스장에 있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줄 선물이다. 부녀의 걷는 모습은 참 재미있다. 토끼와 거북이 같달까. 하라 씨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앞서 걸으면, 성종 씨는 뒤에서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하라 씨는 이동 중에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이동 시간은 장애인가족지원센터, 기타 레슨생, 레슨실 사장님과 연락하는 시간이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숨을 쉬며 성종 씨를 재촉하기도 한다. 역시나 한 쪽 귀에는 전화기를 대고서. 성종 씨는 딸의 한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등학교 동창들과 있었던 일화를 기자에게 들려줬다. 그는 지난 2월 서울 숭인동에 있는 진형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평생교육시설로, 학급 평균 연령이 67세에 달한다. 동년배들이 대학에 진학한 이야기, 87세 초고령 학생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된 일은 그의 자랑거리다. “아빠, 나 기자님이랑 레슨실 가 있을 테니까 운동 마치고 7시까지 레슨실로 와. 너무 일찍 오지 말고. 알았지?” 성종 씨는 운동에 흥미가 없는지 헬스장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5분 동안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는 트레드밀, 다음에는 상체, 다음에는 하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헬스장에는 장애인 재활을 돕는 트레이너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등록했다. 그것도 하라 씨의 역할이 컸다.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자기계발비’ 지원을 받았다. 언덕배기 집에 살면서 고도비만에 관절까지 좋지 않은 아빠를 위한 일이었다. PT 20회를 끊고 남은 돈은 언어치료, 인지치료, 재활치료비로 쓰인다. 남은 돈은 이제 겨우 10만 원 남짓이다. 하라 씨가 헬스장으로, 여러 치료센터로 아빠를 보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아빠는 동묘 앞 벼룩시장을 즐겨 찾았다. 성종 씨는 고장 난 데스크톱, 노트북, 모니터, CD 등을 ‘바가지를 쓰고’ 비싼 값에 사온다. 그리고 작은 방에 숨겨둔다. 아빠의 ‘보물’을 찾아내 고장난 것을 골라 버리는 일은 하라 씨의 몫이다. 심지어 아빠가 밖에 나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라 씨는 그를 “어딘가에 꽂히면 완전히 몰두한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실종신고를 몇 번 하기도 했다. 지능이 7~9세 수준인 아빠가 밖에서 사고라도 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한다. 다행히 성종 씨는 지인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미혼모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평범한 가정이 너무 부러운 시기도 있었고…. 그냥 그런 평범한 것들이 좀 부러웠던 거 같아요. 지금은 부러워하진 않아요. 소용이 없으니까.” 하라 씨는 헬스장에 아빠를 데려다 놓고 레슨실로 향했다. 지하철로 네 역 떨어진 곳에 있는 3층짜리 건물. 그곳에 하라 씨의 레슨실이 있다. 이날은 두 타임만 소화하면 퇴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저녁 6시를 조금 넘기자, 갑자기 레슨실 안으로 성종 씨가 들어왔다. 하라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강생에게 복습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레슨실 옆 빈 공간에서 성종 씨는 한글 공부를 했다. 3층에 있는 학원 아르바이트생에게 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하라 씨의 일상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라 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기타 레슨을 이어갔다. “저녁식사는 보통 3층에 계신 학원 사장님이랑 같이 해결해요. 제 사정을 생각해주시는 고마운 분이죠.” 하라 씨는 식비를 쓰지 않는다. 웬만하면 3층 학원 사장님이 끼니를 때울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같이 먹는 식이다. 혹은 운영하는 블로그에 협찬을 해준 식당에서 해결한다. “사람들은 제가 ‘돈미새(돈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아요. 근데 상관없었어요. 저는 먹고살려고 하는 거니까.” 레슨이 끝났다. 레슨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밑반찬 세 개뿐인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성종 씨는 자연스레 식사를 시작했다. 하라 씨는 이날도 쉽게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하라 씨는 또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기타 레슨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기타 레슨은 수능시험 직후, 학교 방학 기간, 새해, 졸업 시즌 등이 성수기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수입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성종 씨 돌봄 비용에 레슨실 월세와 관리비, 병원비, 공과금 등을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하라 씨를 ‘돈미새’로 만든 결정타는 다름 아닌 친척들이 날렸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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