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회장님은 ‘재벌 연봉킹’ 될 때, 20년 롯데맨은 천막으로 [회사에 괴물이 산다 14화]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 앞.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지하철역에서도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너오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들려오는 언어들도 제각각이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몽골어, 이탈리아어…. 깃발 든 이를 따라가는 관광객들을 쳐다보고, 주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일지 짐작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시간은 더디 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더 무료해졌다. 주변 건물들에 내걸린 LED 광고판과 조명 불빛들로 여전히 거리 위는 화려했지만, 밀려오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거리에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곤욕스러웠다. 이 번잡스러운 곳에 천막을 치고, 한겨울부터 한여름까지 반년 넘게 밤을 지새우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2024년 가을의 선선한 날씨로는, 2년 전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추위도,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더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자나 계단에서 몇 시간 앉아 있는 것과,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리는 거리 위 천막에서 잠을 자는 건 비교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그곳이 꼭 외로운 섬 같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2월 16일, 한낮의 태양도 살을 에는 추위를 녹이지 못했다. 쓸쓸하게 천막을 지키던 이성훈(당시 51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회사에서 내용증명이란 게 왔어. 연차휴가 써서 유감이래. 당신, 그 천막농성이라는 거 그만하면 안 돼? 회사에 미운털 박혀서 지방에라도 가면 어떡해.” 아내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훈도 흔들렸다. ‘내가 괜히 노조를 한다고 했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백화점 명품관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만 봤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23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한겨울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게 될 줄이야. 24년 전 입사 때는 생각도 못했다. 롯데백화점은 그의 첫 직장. 무역학을 복수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98년 ‘유통맨’을 꿈꾸며 롯데, 신세계, LG, 유통 3사에 원서를 냈다. 롯데쇼핑(주) 백화점사업부에서 합격통지를 받은 뒤로는, 최종 합격한 LG도, 면접을 앞둔 신세계도 가지 않았다. ‘업계 1위’ 회사에서 능력을 펼쳐 임원까지 올라가보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Always with you : 언제나 고객과 함께” 백화점에 출근해서 이 슬로건을 볼 때마다 자부심이 차올랐다. ‘언제나’ 그와 ‘함께’할 롯데백화점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해외지점으로 발령 날 때를 대비해, 점심시간에 근처 어학원에 가서 영어회화를 익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롯데카드 채권관리를 시작으로 지원업무 기획, 남성의류, 스포츠의류, 화장품 및 잡화 영업관리, 마케팅 기획, 상품권 판매 등, 여러 지점을 오가며 다양한 부서에서 일했다.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해도, 상부의 매출 목표 달성 압박에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입사 8년 만인 2006년 과장으로 승진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일하던 2013년엔 사내 유공 표창도 받았다. 하루하루 정성 들여 살면 백화점의 화려함만큼 그의 노동도 빛이 날 줄 알았다. “롯데는 일본식 기업이니까 연공서열을 중시하긴 해도 (한번 채용한 직원과) 끝까지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원을 쉽게 자르지 않는 문화가 있으니 회사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죠. 책도 많이 읽고 새로운 시도들도 했죠." 그의 바람과 달리, 다(多)점포 전략으로 업계 1위를 유지해오던 롯데백화점은 온라인 쇼핑과의 경쟁에서 점점 밀리면서 직원들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펼친다. 승진에 누락돼 동일직급에 오래 머물면 기본급 인상에서 제외되고, 성과급, 상여금 등도 제대로 못 받게 됐다. 사원-대리-과장-부장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가 적어지니 승진 누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1년부터는, 인사고과 하위 10%는 기본급까지 삭감하는 ‘신(新)연봉제’를 실시하겠다고 예고했다. 신연봉제는 동료 간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옆 직원을 가르치고 협력을 하겠습니까? 옆 직원이 성과가 좋으면 나는 안 좋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데요. 팀워크를 방해하는 인사평가 시스템인 거죠.” 회사는 직원들에게 신연봉제 도입에 동의하는지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대부분 ‘동의’를 선택했다. 각자 사번을 입력하고 회사 시스템에 로그인해서 응답하는 방식. 사실상 ‘공개투표’라 여겨졌다. 직원들은 혹시 모를 불이익을 걱정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신연봉제 시행에 대해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회사 방침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순순히 따르기만 하는” 노조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입사 4년 선배인 최영철이 그에게 새 노조를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흔쾌히 응했다. “노조 만들려면 100명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두 명만 있어도 되더라고요. 형님(최영철)이 ‘다 만들어놨으니 너는 사인만 해’라고 해서 같이 노동청에 가서 설립신고서를 냈죠.” 그렇게 2020년 12월, 민주노총 서비스일반노조 롯데백화점지회가 생겨났다. 최영철이 지회장, 이성훈이 수석부지회장을 맡았다. 내부 전산망에 노조 설립 소식을 올리자 조금씩 가입 문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 노조에 가입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합원이 되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직원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중에 지회 사무국장을 맡은 한 조합원이 그랬다. 노조에 가입하고 얼마 뒤, 집이 인천인데도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고 3년이 넘도록 못 돌아오고 있기도 하다. 노조 결성 후, 이성훈은 수원점에서 노원점으로 발령이 났다. 품질평가사로 직무도 바뀌었다. 낯선 업무였지만 최선을 다했다. 2021년 식품안전평가에서 91.5점을 받았다. 전체 35개 점포 중 중상위권에 드는 점수였다. 그런데도 그해 인사고과는 하위 10%에 머물렀다. 이선규 서비스일반노조 위원장은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있는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노사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롯데 재벌은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삼성 저리 가라 할 정도입니다. 소위 민주노조가 들어서면, 어떻게든 그 노조를 박살내려고 합니다. 롯데면세점지회 같은 경우는 조합원이 450명쯤 됐는데, 지금은 두 명 남았습니다.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법원에서도 인정해, 대표이사가 징역형(집행유예)까지 받았습니다.”(이선규) 소수 노조인 롯데백화점지회가 활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섭권도 없으니 사측과 변변한 대화 한번 못했다. 신연봉제의 시행도 막지 못했다. 하위 고과를 받으면 기본급이 3% 삭감되고, 깎인 연봉을 기준으로 다음해 연봉이 책정되기 때문에 연봉이 오르기 힘든 구조가 됐다. 또한 3번 누적으로 하위 평가를 받으면 기본급 삭감에 더해 수당에 해당하는 업적가급까지 전액 삭감된다. 승진 누락자가 하위 고과까지 받으면 연봉은 더 깎였다. “신연봉제 전에는 기본급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업적가급도 전액 삭감은 아니었고요. 아무리 자본주의가 누군가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너무 과도하다 이겁니다.” 한번 저성과자로 평가받으면 주요 보직을 주지 않아 다음해에도 인사평가 등급이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될 여지가 컸다. 특히 회사에 청춘을 바친, 연차가 높은 직원들이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성훈도 계속된 승진 누락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아온 터였다. 2006년 서른여섯 살에 과장이 된 뒤로 번번이 승진심사에서 떨어지면서,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TV에 나오는 ‘만년과장’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 언젠가는 승진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안 되니까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죠. 일은 일대로 하는데도 승진이 안 되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싶고….” 과장 직급부터는 본사에서 승진 대상자를 승인하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지점에서 명단을 올리면 그대로 통과가 되는 편인데, 이성훈은 번번이 미끄러졌다. 후배들이 줄줄이 먼저 승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성훈은 팀장이 못 됐는데도 사람들이 예의 차린다고 ‘팀장’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면, 스스로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런데다 연봉까지 깎이니 가장 노릇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성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롯데백화점은 2021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권고사직도 실시했다. 고(高)연차 직원들에겐 승진보다 사직이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연봉제로 연봉이 깎일 게 두려워서, 미리 퇴직금을 정산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반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2019년 연봉은 181억 7800만 원으로, 재벌 총수들 중에서도 ‘1위’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기가 가라앉았던 2020년에도 149억 80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다. 여전히 초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진과 달리, 경영 실패의 후과는 직원들이 감당하고 있었다. 이성훈은 노조를 통해 그 점을 문제 삼고 싶었다. 기존 노동조합은 기능직이나 무기계약직은 가입 대상이 아니었다. 이성훈은 백화점 문화센터‧MVG(VIP라운지)‧상품권‧사은데스크 등에서 근무하는 ‘사내 전문직’들의 처우 개선과 관련해서도 회사와 논의하고 싶었다. 사실상 무기계약직인 사내 전문직들은 임금이 정규직들의 60% 선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 전문직은 원래 정규직이 하던 일인데 회사가 계약직 일자리로 바꾼 겁니다. 이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또 (정규직 전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일에 열정을 쏟겠습니까? 전문직이 일반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조를 설립하고 약 1년 동안 사내 게시판에 글도 쓰고 1인시위도 했지만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더 강도 높은 행동이 필요했다. 최영철과 이성훈은 천막농성을 결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타임오프(노조 전임자의 노조활동에 대한 근로시간 면제)를 인정받지 못해 근무시간 중에 노조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쓸 수 있는 연차를 다 끌어 모아, 2022년 1월 25일부터 휴가를 냈다. 상관들도 별 이견 없이 휴가를 승인했다. 그날부터 롯데백화점 본점 명품관 옆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기본급 삭감‧업적가급 수당 전액 삭감 가능한 신연봉제 철폐”, “직원 갈라 치는 정규직‧무기계약직 차별 반대” 구호를 내걸었다. 롯데백화점 창사 이래 첫 천막농성이자, 그룹 전체로 봐도 1987년 롯데호텔 농성 이후 처음 하는 천막농성이었다. “처음에는 천막에서 (최영철과) 둘이 같이 잤어요. 난생 처음 농성을 하는 건데 혼자 하면 외롭고 두렵잖아요. 며칠 하니까 피로가 누적돼 쉬어야겠더라고요. (낮에는 같이 천막을 지키고) 밤에는 한 명씩 번갈아가면서 남았죠. 거기가 중심가잖아요. 밤새도록 자동차 소리가 들려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그게 많이 힘들었습니다.” 항상 지켜보는 것 같은 보안요원들의 눈빛과, 천막 쪽으로 향한 CCTV 카메라가 부담스러웠다. 회사의 신고로, 구청에서 ‘사유지를 무단 점유했으니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철거하겠다’는 경고장을 붙여놓고 가기도 했다. 언제 철거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누구 한 사람은 항상 천막을 지켜야 했다. 실제로 백화점 주변에 달아둔 현수막이 여러 장 사라지기도 했다. “뭐든지 다 처음이었어요. 노동조합도 처음, 천막농성도 처음. 두려운 거죠. 천막에 혼자 누워 있으면 이걸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막막해서 자꾸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널뛰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농성 소식이 언론에 작게라도 나오는 날이면, 작게라도 성과를 내고 있다는 자긍심이 차올라 웃었다. 반면 농성을 시작해도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회사를 보면서는 끝도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일도 안 하면서 노조는 무슨 노조냐?”“천막농성? 그거 다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다.” 회사 게시판에 농성 소식을 올리면 응원의 댓글들도 달렸지만, 그들의 진심을 호도하는 글들이 올라와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우울감이 그들을 휘감았다. 잠 못 드는 밤이 계속 됐다. ☞ 다음 이야기 <백화점 명품관 앞 ‘천막’ 생활… 막막해서 눈물이 났다>로 이어집니다. 취재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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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3화]
[지난 이야기]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대성통곡하던 동생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 장향미(45)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향미 씨는 동생이 떠나고 나서 세 달 동안 동생의 동료들을 만나면서, 동생의 과로자살은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회사는 과로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향미 씨는 제일 먼저 증거보전신청을 하고 회사에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업무일지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기록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증거보전신청 소송에서 향미 씨가 이기자, 그제야 기한 직전, 그것도 출근 기록이 아니라 동생의 컴퓨터 로그 기록(시스템 접속 기록)을 A4용지에 인쇄해서 보내왔다. 모두 966장이었다. ‘엿 먹으라’는 걸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컴퓨터 로그 기록으로는 출퇴근 시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업무일지는 대부분 가린 채 제출했고, 면담 기록지와 야근식대와 같은 청구내역은 아예 제출하지 않았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회사가 가해자인데, 증거를 모두 가해자가 가지고 있다. ‘순순히’ 줄 리가 없다. 그렇다 해도 회사의 태도는 예상보다 더 괘씸했다. 인터뷰 내내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던 향미 씨 목소리가 화가 난 듯 점점 커졌다. “정말 웃긴 게, (회사가) 출퇴근 시간을 기록할 의무가 없어요. 회사가 당당한 것도 법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회사가 2016년에 근로감독을 받은 적이 있더라고요. 동생이 떠난 뒤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있었고요. 세 번이나 고발당했는데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노동법은 안 지켜도 되는 거예요.” 향미 씨는 2018년 4월 대책위와 함께 피켓시위를 시작했고, 기자회견을 열어 동생의 억울한 죽음과 과로자살 문제를 알렸다. “제가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요, 동생이 너무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동생이) 왜 죽었는지 꼭 밝혀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과로자살이라는 말이 언론에 나오고, 대책위와 매일같이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자, 회사는 그제야 동생의 과로죽음을 인정했다. 피켓을 든 지 네 달 만에, 동생이 떠난 지 반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회사는 공식사과를 했다. ‘면피용’ 사과조차 하지 않는 회사가 많다는 걸 알지만, 회사의 공식사과는 별 의미가 없었다. 대표는 ‘재발방지’ 같은 단어를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과문을 읽었다. 방송에서 보던 모습, 확신에 차서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어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네 달 동안 피켓시위를 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막상 대표의 공식사과에도 향미 씨는 무덤덤했다. “그런다고 동생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공식사과가 있은 후 다섯 달이 지난 2018년 12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신청을 위한 자료를 유가족이 직접 모아야 했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산재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7년에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 때문이다. 산재법에 따르면 증명책임은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 그러나 업무와 관련된 증거자료는 사용자에게 있다. 2013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사용자가 입증하도록 한국의 산재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들을 제출하지 않았고, 향미 씨는 회사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절당했다. 동생의 유품을 받을 때도 직원들이 아무도 없는 휴일에, 건물 바깥에서 건네받아야 했다. 정보는 차단돼 있었고 접근조차 어려웠다. 증거를 직접 수집해 과로죽음을 입증해야 하는 건 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가족들이 속상해할까봐 피해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 죽을 만큼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던 일들을 남은 가족들은 들어야 했다.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증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다. 증언 대신 비난이 더 많았다. 다른 과로자살 사건에서는, 입증책임 때문에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입증책임은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원칙”이지만 향미 씨는 증거를 모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생의 죽음은 묻힐 것이었다. 그 과정은 “엄청난 2차가해”라고, 향미 씨는 인터뷰 도중 거듭 얘기했다. “산재 신청하려고 하면 ‘돈 때문에 한다’고 (욕해요). 맞아요. 산재는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요. 그런데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명예예요. 지금도 사람들은,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나약해서 죽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는데, 가족의 죽음을 모욕적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 너무 큰 상처가 돼요. ‘그렇게 될 때까지 가족들은 왜 몰랐냐’는 것도 상처죠. 가족들한테 말 안 하면 모를 수 있어요. 과로자살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예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요.” 향미 씨는 “운이 좋아” 다른 유가족에 비해 덜 어렵게 증거를 모을 수 있다고 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출퇴근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교통카드 내역을 향미 씨 이메일로 보내뒀다. 또 퇴근 후에 집에서 일하느라 동생의 노트북에 업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던 덕에, 산재신청에 필요한 자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퇴사한 동료 서른 명이 증언을 해줬고, 대책위가 크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도 ‘운이 좋다’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향미 씨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승인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뚫고” 산재 신청을 해도 승인률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운이 좋았다. 2022년 경찰청 자살 통계를 보면,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1년에 404명으로 전체 자살사건의 3%다. 그 중에서 재해보상을 신청한 사람은 36%, 신청한 사람 중 산재 승인을 받는 것은 52%뿐이다. 전문가들은 업무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경찰청 통계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향미 씨도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동생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렇게 은폐되는 과로자살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산재 신청 이후 승인되기까지는 10개월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지만, 끝내 승인됐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과로와 직장 내 괴롭힘의 증거들이 적지 않았고, 회사도 공식사과를 한 뒤였다. 무엇보다 과로자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고, 대책위와 연대하는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동생이 떠난 뒤 산재 신청을 하면서 향미 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도록 일하는지, 일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이하 유가족모임)에 함께하면서, 유가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봤다. 유가족모임은 과로죽음 유가족들이 산재법을 공부하고 심리치료 등을 함께하면서 2017년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의 산재 신청 과정을 지원할 뿐 아니라, 과로죽음이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동생이 일했던 2년 반의 시간을 쫓다 보니, 동생을 죽인 건 회사였고 그 뒤에는 법과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과로죽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들이 바뀌지 않는 한 회사는 바뀔 리가 없고,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향미 씨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과,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의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만든 KWA(Karoshi Watch in Asia) 네트워크 모임에 참여하면서, ANROEV(아시아산재및환경피해자권리네트워크)에도 참가해 과로사 문제를 공유하고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는 ‘과로사 방지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1988년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가 상담전화 110번을 개통해 유가족 상담을 시작하면서 과로사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과로사 방지법)이 제정됐다. 법이 생겼다고 일본에서 과로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법률로 정의 내리고 과로사 방지대책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자, 과로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어갔다. 한국에는 과로사에 대한 정의가 없고, 따라서 관련 통계도 없다. 일 때문에 죽었다는 걸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입증을 한다 해도 산재 승인을 받기까지 기간이 너무 길었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제도들도 그대로였고, 동생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 대표는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그 덕분에 노동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포괄임금제로 계약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게 드러났다. 그래도 처벌받지 않는다. 일하다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만 잠깐 안타까워할 뿐, 사람 죽이는 제도와 구조는 그대로다. “법에 걸려도 처벌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걸 누가 지켜요? 기업 입장에서는 (법을 어기는 게) 훨씬 유리한데. 그러니까 노동법은 그냥, 그냥 만들어진 법이지 진짜로 지키라고 만든 법은 아닌 거죠. 몇 년 전부터 과로사 방지법 제정한다고 하는데, 뭐 근로기준법이라도 잘 지키면 좋겠어요. 이거라도 지키면 과로가 왜 생기겠습니까?” 일본의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시작된 과로사 금지법 제정 운동은, 실제로 그 결실을 맺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 거기에는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의 오랜 노력이 있다는 걸, 포기하지 않고 연대했기에 ‘결국’ 제정됐다는 걸 향미 씨는 안다. 향미 씨는 유가족모임과 함께 2021년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 과로사·과로자살 사건에 부딪힌 가족, 동료, 친구를 위한 안내서>를 썼다. 산재 사망이 왜 생겨났는지를 밝히고 유가족을 위해 산재 과정과 필요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더는 과로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유가족들의 바람을 담았다. 해외의 관련 서적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2019년 ANROEV 컨퍼런스에서 만난 대만직업안전보건연대의 황이링 씨에게 <과로지도(過勞之島)>를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서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향미 씨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업무 때문에 종종 번역을 해왔다. 책은 <과로의 섬 – 죽도록 일하는 사회의 위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2021년 국내에 출간됐다. 향미 씨는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다. 대만의 직장 과로 문제가 한국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두 나라의 과로 문제는 소름 끼칠 만큼 똑같았다. (…) 한국과 꼭 닮은 대만의 과로사 실태를 다룬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한국 사회의 과로사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었다.” 그는 한노보연 ‘업무 관련 정신질환 연구모임’ 회원으로 직장 내 정신건강 문제를 알리기 위해 활동했고, 지금도 유가족모임과 KWA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회사의 사과를 받았고, 그 어렵다는 ‘업무관련 자살’로 산재 승인도 받았다. 어찌 보면 동생의 과로자살은 끝난 사건이고, 향미 씨가 유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향미 씨와 부모님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 그 빈자리를 어떻게 해도 메울 수 없다는 공허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스에서 과로사, 과로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향미 씨는 2018년으로 되돌아갔고, 그 고통이, 그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동생의 죽음을 또 겪는 것만 같았다. 동생의 과로자살이라는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으려면, 다시는 누군가가 일 때문에 죽는 일이 없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실 향미 씨는 산재와 관련한 자료들을 다시 꺼내보는 것조차 힘들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런 향미 씨가 이렇게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KWA 모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것. “제 동생이 그렇게 죽은 다음에도 똑같은 문제가 매년 반복이 되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제 경우만 해결이 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똑같은 사건이 나오면, (동생이 세상을 떠난) 그때 그 시간으로 저도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지,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는 보이잖아요. 그게 다시 재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걸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저도 그 시간을 상기하기 싫은데, 사회가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거잖아요.” 향미 씨도 부모님도, 절대 ‘괜찮아지는 일은 아닌’ 일을 겪었다. 아마도 평생을 괜찮아졌다고, 또 해결됐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그냥저냥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다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과로자살이라는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그것이 과로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바라는 가장 최소한의 해결이다. <끝> 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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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에 “벌써 퇴근했냐”… 회사가 동생을 살해했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2화]
한 세계가 사라졌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던 막내이자, 고양이 루시와 루니의 다정한 집사. 언니를 잘 따르던 착한 동생. 누구와도 잘 지내던 둥글둥글한 사람. 예쁜 걸 모으고 꾸미는 걸 좋아하던 사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꿈꾸며 모든 순간 성실했고, 무엇이든 열심이던 그런 사람. 민순이라는 귀한 세계가 어느 날 사라졌다. 고작 서른여섯의 나이였다.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 민순 씨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민순이라는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왜 사라져야만 했는지 물음으로써, 그 세계의 무게를 잊지 않음으로써, 사라진 세계는 여기 남아 있다. 장향미(45) 씨는 그날을 기억한다. 2017년 12월의 첫 주말, 이른 아침이었다. 동생은 그날도 야근을 하고 아침에 들어왔다. 야근은 거의 매일 있었고, 밤샘 근무를 하고 아침 일찍 집에 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생은 꽤 지쳐 보였다. 그런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 펑펑”.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향미 씨는 동생을 진정시켜봤지만,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동생은 대성통곡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매일 야근을 하는 걸 보고 일이 많은 줄은, 그래서 힘든 줄은 알고 있었다. 향미 씨는 회사라는 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다. 향미 씨 자신도 유명 게임업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즈음 그 회사에서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향미 씨와 부모님은 동생에게 퇴사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그래도 동생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착하디 착한 동생이 그렇게 우는 걸 보니 향미 씨는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로 관할 노동지청에 회사를 신고하고 근로감독을 요청했다. 노동부에서 연락이 온 건 일주일 뒤였다. 그 사이 동생은 과중한 업무와 상사의 비상식적인 업무 질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탈진해가고 있었다. 향미 씨가 받은 답변은, 올해 근로감독 일정은 모두 끝났으니 내년 2월에 다른 신고업체와 ‘묶어서’ 근로감독을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근로감독을 요청해도 안 하겠다는데, 그런 노동부에 더 할 말이 없었다. 향미 씨는 몇 개월 전 회사 앞에서 팸플릿을 받은 게 생각났다. 향미 씨 회사의 과로사 문제를 고발했던 시민단체에서 나눠준 홍보물이었다. 내년까지 근로감독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시민단체에 연락을 취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는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같이 고발할 수 있는 동료들을 모아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줬다. 동생은 곤란해했다. 동료를 모으기도 어려울 것 같고, 출퇴근 기록도 없다고 했다. 향미 씨는 그게 좀 이상했다. “출입카드가 있잖아요. 그걸 찍고 들어가는데, 그 기록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게 돼 있대요. 취업규칙도 없고요.” 회사를 고발하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직원이 얼마나 될까. 동생은 같이 고발할 동료들을 모으는 건 좀 힘들겠다면서도, 자기 혼자서라도 회사를 고발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동생은 부모님의 걱정에도 회사를 고발하려는 이유를 말했다. “(동생) 자신은 여태껏 그렇게 회사를 다녔지만, 자기 후배들, 지금 입사한 20대 초반의 신입들은 이제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 마음으로 신고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어요. 엄마가 훌륭하다, 열심히 해보라고 얘기를 했고요.” 2018년 새해가 밝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왔다. 집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면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의 조사라는 게,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불화가 있었는지 물었고, 남자친구가 있는지, 금전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향미 씨는 경찰에게 동생이 회사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는데, 경찰은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이틀 전 동생과 말다툼을 했는데, 그게 동생과의 마지막이었다. 향미 씨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달려왔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와 변호사, 노무사도 ‘웹디자이너 과로자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는 이름으로 함께 왔다. 회사 사람들도 빈소를 찾아왔다. 가장 먼저 인사팀에서 왔다. 인사팀 직원들은 일손을 돕겠다며 빈소를 떠나지 않았고, 빈소에서 오고 가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회사 대표도 조문을 왔다. 유족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목인사만 하고 바로 떠났다. 동생의 상사였던 본부장과 팀장도 조문을 왔다. 두 사람이 동생을 괴롭힌 상사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인터뷰 도중 향미 씨는 두 사람 얘기를 하면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팀 사람들 있는 데서 물어봤어요.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본부장이, 우리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하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했어요. 오히려, 제 동생하고 면담을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힘들어했던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인사팀 직원이 대신 대답을 했어요. 우리 회사는 자율적인 업무를 존중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요.” 향미 씨는 빈소에 온 동료들, 동생과 잘 지내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뒀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동료들을 만나고 다녔다. 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서른 명 정도 만났고, 대부분 이미 퇴사한 사람들이었다. 동료들은 ‘회사 다니면서 우울감을 느꼈다’고 말했고,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로와 괴롭힘, 압박과 무기력, 우울과 탈진. 동생의 죽음은 문제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과로죽음’이었다. 과로로 인한 죽음에는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과로사뿐 아니라, 과로자살도 포함된다. 동생은 2015년 5월, 한 유명 온라인 교육업체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전에도 IT업체 디자이너로 일을 해왔던 터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업계 1위로 창업 6년 만에 매출 4000억을 달성했고, 직원 수가 불과 10명에서 1200명으로 엄청나게 성장하던 곳이었다. 회사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적’이라는 수식어 뒤에는 직원들의 “뼈를 갈아 넣는” 희생이 있었고, 그만큼 노동강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동생은 첫 출근을 앞두고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입사 4일째 새벽 4시에 퇴근을 했고, 그때부터 매일 야근이었다. 근로계약서 자체가 야근을 기반으로 작성됐다. 계약 연장근로만 매달 69시간에 야간근로 29시간. 주 5일 근무로 계산하면, 매일 3시간씩 더 일하고 매일 1시간씩 야근을 해야 하는 계약이었다. 실제로는 주말에도, 퇴근 후에도 일했다. 계약서에 적힌 시간을 항상 초과했다. 포괄임금제(근로시간과 상관없이 일정액의 수당이 포함된 월 급여를 지급하는 임금계약)라 시간외근로 수당도 없었다. 힘들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이 많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만 ‘미친 사람’이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전할 때마다 향미 씨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근이 엄청 심했어요. 새벽에 들어오고, 아예 밤을 새우고 안 들어온 날도 있었고요. 퇴근해서도 업무 연락이 왔어요. 밤 12시에, 벌써 퇴근했냐고, 아침까지 확인하라고….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하도 그러니까 ‘(나보고 회사를) 나가라는 건가?’ 그렇게 느낄 만큼 일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동생의 업무는 웹디자인. 기획이 생기면 디자인이 따라다녔다. 프로젝트가 없어지거나 기획이 바뀔 때마다 디자인도 함께 바뀌었고, 그 기획이라는 것도 수시로 바뀌었다.기획회의 때마다 디자인 시안을 ‘플랜A’부터 ‘플랜D’까지 만들었다. ‘까일(반려당할) 걸’ 알지만 아무렇게나 만들 수는 없었다. 밤을 새워 완성도를 높여 시안을 제출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과정은 본부장이나 대표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됐다.동생은 통상적인 디자이너 업무만 한 게 아니었다. 웹기획부터 상품 디자인 프로젝트, 팀관리 업무까지 수행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 됐다. 업무시간이랄 게 따로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기획에 따라 ‘초치기’로 일이 생겼다 엎어졌고, 일은 ‘컨펌(confirm, 승인)’을 받아야 끝이 났다. ‘자율출퇴근’이라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컨펌을 받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다. 상사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결과물은 몇 번이나 까이고, 디자이너는 질책을 받는다. 동생이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무한 대기와 컨펌 까이기’는 장시간 노동을 넘어 끝이 없는 무한노동이었다. 일이 아니라 벌을 받는 것 같아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새 일하고 무한정 컨펌을 기다리느라, 동생의 시간은 동생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그의 저서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말했다.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일상이 자기파괴적으로 변하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라고. 친구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동생은 “완전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회사 일 말고 뭘 할 수가 없어요.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친구들도 이해를 잘 못했죠. 점점 고립되는 상황이었고, (일이) 자기 생활을 다 잠식해간다고 했어요.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잠만 잤어요. 누구랑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어요.특히 월요일이 오는 걸 되게 불안해했어요. 일요일에는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못 잤어요. 입사하고 살이 엄청 많이 빠졌는데, 점심시간에 밥 안 먹고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대요.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아요.” 주말 역시 회사의 것이었다. 온라인 교육업체인 회사는 수강생들의 시험 일정이 있는 주말이면, 수험생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는 응원이벤트에 참여하도록 했다. 말은 ‘자발적’이라지만, 인사평가에 20%나 반영이 되는 ‘업무’였다. 야근하고 새벽에 들어온 날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팀장은 업무와 상관없는 책을 읽어오라고 하고, 채식을 하는 동생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 동생이 상사에게 어떤 말들을 들어왔고 어떤 요구를 받았는지, 괴롭힘은 업무일지에도 잘 드러났다. 업무일지가 아니라 반성문에 가까웠다. “머릿속에 온통 브랜드 생각뿐입니다. 지치지 않고 제대로 된 아웃풋(성과)을 내겠습니다.”"엉망으로 작업을 진행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는 이런 결과가 없도록 더욱노력하겠습니다.”“오늘 또 한 번 배우고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라도 발전된 아웃풋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생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키는 일을 다 했고, 무슨 일이든 허투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책임감이 강했고 스스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것도, 또 ‘아픈 사람’인 것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상사의 지시에 동생은 늘 “넵넵. 알겠습니다.”로 답했고, 살인적인 업무량과 업무지시를 가장한 괴롭힘에도 “웃으면서 어떻게든” 일을 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야근을 해도” 일은 줄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완치 진단을 받은 우울증이 도졌다. 공황장애까지 나타나 두 번이나 휴직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2017년 9월, 이번에도 휴직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한 달간 쉴 수 있게 됐다. “소모품처럼 쓰이는 것” 같다던 동생은 휴직 내내 방에만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쉬는 날이면 여행을 다니고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하던 동생이었다. 휴직기간 동안 동생이 회사 때문에 못했던 걸 했으면 했는데, 동생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향미 씨가 집에만 있는 동생을 데리고 ‘호캉스’(호텔+바캉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내는 휴가)를 하루 다녀온 게 전부였다. 동생이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만든 호텔이었고, 동생은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한 달을 쉬고 오자 일은 몇 배로 더 늘었다. 브랜딩 업무에, SNS에 올라가는 카드뉴스만 일주일에 서너 개. 상사는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카드뉴스를 매일 바꾸라고 요구했다. 팀에서 하는 업무들을 사실상 동생 혼자 맡아 했고, 몰아치는 업무에 동생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했다. 동료들은, 동생이 맡은 업무가 적어도 서너 명이 해야 할 분량의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더 심해졌다. 시간이 없어 병원에 가기도 어려웠다. 예약하고도 제때 못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동생은 병원에 가지 못했고, 폭음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동생은 집 앞 편의점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다. 술로 괴로움을 잊으려 했다는 걸, 폭음이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는 걸, 과로 때문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향미 씨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술로, 약으로 달래가며 일해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벌을 받는 것 같은 ‘무한노동’은 여전했고, 본부장에게 “이렇게 할 거면 왜 시간을 줘야 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처음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던 날, 동생은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동생 죽음의 ‘방아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던 향미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본부장이 잠 좀 자라고, 그래야 맑은 정신으로 일하지 않겠냐고 했대요. 거기서 폭발한 거예요. 저는 마음에도 급소가 있는 것 같아요. 급소를 맞았다면 즉사할 수 있다고 봐요. 급소가 아니더라도 상처를 계속 입으면 과다출혈로 죽기도 하잖아요.동생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들도 죽는 거 두려워한다고. 그런데 그것보다 내일 아침이 오는 게 더 두렵기 때문에 죽는 거라고요. 저는 동생이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상황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동생은 부모님이나 저를 정말 아끼고 사랑했고요,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정말 노력했던 것도 저는 알거든요. 살고 싶은 의지가 더 강한 애였어요.”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무엇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동생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 다음 이야기 <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으로 이어집니다.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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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간 일곱번 ‘반성문’ 다시쓰기… 직장 내 괴롭힘 인정 [회사에 괴물이 산다 11화]
[지난 이야기] 보육교사 이정윤(가명)은 어린이집 원장에게 계속 사표를 쓰라고 강요당한다. 확인서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반성문’도 강요당했다. 하나의 사건으로 3주간 일곱 번 다시 쓴 적도 있다. 이정윤의 정신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스스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우울증으로 휴직을 요청했던 그에게 원장은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해고 사유는 크게 두 가지. ▲병가 기간이 끝나고도 출근하지 않고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적응장애와 우울증이 있어서 영유아를 돌보는 업무를 맡기기에 부적절하다는 것. 그런데 이유가 서로 충돌한다. 이정윤의 정신질병이 심각하지 않다고 간주해서 병가 연장을 반려해놓고, 또 동시에 그의 정신질병이 심각해서 보육 업무를 맡길 수 없다는 논리라니. “두 번째 그렇게 하고(자살충동) 나서 남편이 너무 슬퍼하는 걸 봤죠.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저는 반대로 생각해보지는 못했어요. 만약에 반대로 남편이 그렇게 죽어버렸다면…. 내가 너무 큰 상처를 준 거더라고요. 그럼 내가 마음을 한번 바꿔보자, 죽으려고 했던 그 에너지를 살려고 하는 용기로 한번 바꿔보자, 생각했어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조용히 죽는 길이 아니라 시끄럽게 사는 길을 택했다. ‘경기도 마을노무사’ 제도와 김요한 노무사(노무법인 노동을잇다)의 도움이 컸다. 함미영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용기 내어 사실확인서를 써준 전 동료 교직원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을 수가 없다. 2023년 10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성남지청은 원장의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지속적인 퇴사 강요 중 부적절한 표현 ▲부당한 확인서·시말서 작성을 여러 차례 강요 ▲민감한 개인정보(노조 가입 사실)의 공표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했다. 과태료도 부과됐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과태료 부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2019년 이후 접수된 3만 9316건 중, 과태료 부과는 고작 1.3%(501건)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고용노동부가 밝힌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처리 결과 현황’에 따른 수치다. 산재도 승인됐다. 근로복지공단은 올해 2월 1일, 이정윤의 적응장애 등을 ‘업무상질병’으로 판정했다. 약 한 달 뒤인 3월 11일에는 부당해고도 인정됐다.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해고금지 기간인 산재요양 기간 중 발생한 해고”이므로 “위법하며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세 기관 모두 이정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어린이집 측은 세 가지 결정에 모두 불복했다. 직장 내 괴롭힘 과태료 처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거나, 부당해고 인정에 대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하는 등, 이의제기 절차에 들어갔다. 7월 5일 중앙노동위원회 날. 이정윤은 걱정이 컸다. 현장에서 원장을 만나면 어떡하나. 그 상황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날도 미리 진정제를 먹고, 공황발작에 대비해 응급약을 챙겼지만…. 심판위원들 앞에 이정윤이 자리했다. 그리고 바로 뒷자리에 남편이 앉았다. 혹시라도 이정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장 손을 뻗어 구할 수 있도록. 다행히 원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정윤은 미리 준비해간 한 장 반짜리 최후진술서를 직접 또박또박 읽었다. 눈물이 조금 나고 손이 약간 떨렸지만 참을 만했다. “‘힘들었던 일터로 왜 돌아가려 하느냐?’ 제가 요즘 받는 질문입니다. 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한, 그것도 부당함에 의한 퇴사로 제가 사랑했던 일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현장으로 돌아가서 제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가진 힘이 작다고 해서 포기하라고 강요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판정 결과는 ‘초심유지’. 부당해고가 다시 한 번 인정됐다. 네 번째 승리다. 사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는 보육교사의 비율은 상당히 높다. 그중 이정윤과 같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결국 인정받는 경우가 흔치 않을 뿐이다. 2021년 직장갑질119 등이 진행한 ‘2021 보육교사 설문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71.5%(246명)가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를 묻는 질문에는 78.0%(192명)가 ‘원장 등 어린이집 대표’라고 답했다.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61.4%(121명)가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라 답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의료적 진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본 결과, 36.6%(126명)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보육교사 해고 사건 경험이 많은 김요한 노무사는 이정윤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갑갑하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많은 현장에서 본 “상투적인 수법”이란 거다. “보육교사가 근로조건이나 법 위반 문제를 지적하면, (사용자가) 그 교사를 몰아내기 위해 쓰는 레퍼토리거든요. 교사들에게 ‘이 중에 누구랑 같이 일하기 싫은지 적어내라’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아주 오래된 얘기예요.”(김요한 노무사 전화인터뷰 2024. 6. 25.) 김 노무사는 “재원은 다 공적으로 운영되는데, 운영은 (원장) 개인에게 위탁을 줘서 마음껏 사적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게 한다”는 제도적 문제도 지적했다. 엄연히 ‘국공립’ 어린이집이지만 위탁운영자일 뿐인 원장 개인이 인사 등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다. “제가 살아 있는 건 사실 남편 덕분이에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우울증은 이정윤을 소파 하나만 한 세계에 가둬버렸다. 특히 집에서 어린이집이 가깝기 때문에, 혹시나 외출을 했다가 학부모나 동료교사나, 최악의 경우 원장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웠다. 뭘 잘못해서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편은 생업도 미루고 늘 이정윤의 곁을 지켰다. 남편은 그를 달래서 차에 태우고, 공원으로 카페로 데리고 나갔다. 일부러 집에서 적당히 멀고, 사람도 그리 붐비지 않는 카페만 찾아 다녔다. 지난 6월 21일 기자가 이정윤을 만난 경기 용인시의 한 카페도 그런 곳이었다. 평일 낮 대형 카페의 2층은 역시 한적했다. 인터뷰 도중 이정윤의 눈길이 때때로 계단 쪽을 향했다.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그때마다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고,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약속장소를 정할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에 카페에 갔는데 누구를 만나기라도 하면…. 저는 원장을 보거나 어떤 괴롭힘 상황에서만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비슷한 상황이 되면 이게 이렇게(공황발작이) 딱 되더라고요.”(이정윤 전화 인터뷰 2024. 6. 15.) 지금도 이정윤은 시간마다 상황마다 다른 약들을 챙겨 먹어야 한다. 기자를 만난 날도 미리 진정제를 먹고 왔다. 인터뷰 중에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다시 살아날까봐. “사실 공황장애라는 게 뭔지 잘 몰랐어요. 근데 겪어보니, 이게 제가 통제한다고 통제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괴롭힘과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어떤 스위치가 탁 켜지면 그게(공황발작이) 딱 오더라고요. 굉장히 무섭더라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아직도 고통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산재 요양기간은 10월까지 다시 연장된 상태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됐다. 산재도, 부당해고도 인정됐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과, 노동위원회가 이정윤이 당한 피해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복직 통보는 아직. 이제 남은 건 그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뭘 걱정하는지도 잘 안다. 가끔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아보자고 했던 이유도 다 이정윤의 ‘마음건강’을 가장 먼저 걱정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정윤에게는 어린이집으로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결국 (어린이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내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가긴 가야죠. 나중에 그런 걸(이직이나 퇴사) 하더라도, 내 첫 번째 발걸음은 내 원래 일터로 돌아가는 거여야 해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게 어디든 집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결국엔 제가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어디서부터인가 언제부터인가 뭔가 잘못돼서 길이 어긋났다면 일단은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그런 다음 새로운 길로 갈지언정. 그게 바로 잘못돼 있던 모든 것들을 끝맺는 마지막이자, 동시에 새로운 것들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카페 앞마당에 들꽃들이 피어 있다. 꽃무리를 향해 이정윤의 눈길이 간다. 발길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한다. 어느새 손길을 뻗어 조심스레 꽃을 만진다. “원래 꽃을 참 좋아해요.” 그의 아담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일터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동료들과 신뢰를 나누고, 가족들과 편안한 일상을 누리는 날은 언제쯤 올까. 그 손에 돌려받아야 할 것이 아직 많다. 지난달 1일 A 원장은 기자와 한 통화에서, 변호사를 통해 입장을 듣길 바란다며 “상처 받은 분들이 많은데 조용히 극복하고 지내려 하니 시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틀 뒤 C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이정윤이 원장과 부원장을 상대로 낸 공동감금과 공동강요 혐의 고소건이 ‘불송치’로 종결됐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정윤 측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한 상태다. C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산재 승인 ▲부당해고 인정 등 세 가지 결정을 모두 반박했다. 우선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결정에 대해 “면피성 행정”이라 비판하고, “괴롭힘이라 할 만한 사안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개원 초기) 운영상 조금의 미숙함은 있을지언정 직장 내 괴롭힘은 있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산재 판정 과정에서도 어린이집 측은 “(이정윤의 주장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거나 매우 과장된 것”(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 판정서 인용)이란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산재 승인에 대해 C 변호사는 “사용자(어린이집) 측에서 (부당함을) 다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부당해고 인정에 대해서는 “해고의 실질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되진 않으나 다만 절차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을 수는 있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해당 어린이집의 ‘진짜 주인’인 광주시 측 생각은 어떨까. 광주시청 국공립어린이집 담당자는 지난 6월 28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어린이집과 이정윤) 양쪽에 자료를 다 요구해둔 상태”라며, “자료를 입수한 뒤 각각 면담을 통해서 방향을 검토할 것”이라 밝혔다. 해당 어린이집의 위탁 만료일은 오는 10월 31일로, 재위탁 심사를 앞두고 있다. 담당자는 “(위탁)계약 해지 사유라 판단되면 계약해지나 재계약 불가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그건 따져봐야 할 문제”라며, “(법적) 결정이나 판결을 기다리면서 확인하는 중”이라 답했다. <끝>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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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당하고 우울증까지… 회사는 ‘해고’를 통보했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0화]
[지난 이야기] 보육교사 이정윤(가명)은 어린이집 원장에게 초과근무 문제 등 ‘바른말’을 했다가 미운털이 박힌다. 원장은 그가 ‘불편하다’며 계속 퇴사를 강요한다. 전 교사들에게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이정윤을 압박하기도 했다. ‘퇴사를 결정짓지 않으면 퇴근 못한다’고 잡아둔 날도 있었다. 이정윤은 공황발작이 시작됐다. 예전에 이정윤이 일하던 어린이집 원장은 그를 위해 추천서를 써줬다. 추천서 속에서 이정윤은 “밝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할 줄 알고”, “부모님과 소통할 때에도 배려와 공감의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유아의 개인적 발달과 어린이집 교육방향에 맞는 해결책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이 일하기 불편한 사람’, ‘장점이 없는 사람’, ‘동료들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란 비난을 듣고 있다. 이 극단적인 온도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22년 2월 말, 원장은 보직 변경을 통보했다. 담임교사에서 보조교사로. 이정윤은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고 그 사실을 원장에게 알렸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에 이정윤은 깜짝 놀랐다. 이정윤이 노조에 가입했다고, 원장이 지역 어린이집 원장단체 회장에게 알렸다는 거다. 이정윤은 한 달 전 보육교사 노조에 가입했다. 계속된 퇴사 압박을 혼자 버텨내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 개인정보보호법은 사상·신념, 노동조합·정당의 가입·탈퇴, 정치적 견해, 건강, 성생활 등에 관한 정보 등을 민감정보로 규정하고, 정보주체 동의 없이 이를 처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도 있다. 보조교사 생활은 한 달간 이어졌다. 그리고 3월 말 이정윤은 다시 담임교사가 됐다. 노동위원회 구제신청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원장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저를 향해 많은 교사들이 말했습니다. “어린이집은 원장이 사장이다. 직원을 자르는 것은 사장 마음이다.” “어린이집 교사가 노조 가입이라니, 빨갱이다.” “선생님(이정윤) 때문에 다른 교사들이 불편하다.” 어느새 저는 어린이집에 있어서는 안 될 ‘악의 축’이 돼 있었습니다.(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2022년 8월 22일, 원장이 이정윤과 또 다른 동료교사 한 사람을 교무실로 불렀다. 이번에는 사표가 아니라 경위서를 쓰라는 지시였다. 두 사람은 6월에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넘게 지나서 경위서를 쓰라고 한 거였다. 다음 날 이정윤은 경위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주쯤 더 지난 9월 6일. 원장은 다시 이정윤을 불러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확인서’라는 제목의 문서. 이미 경위서를 썼던 그 일, 약 3개월 전 말다툼에 관한 거였다. 이미 원장이 문구를 써둔 확인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원장과 부원장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 교무실에서 나갈 수 없다며 강요했다. 고함을 치고 책상을 두드리는 태도에 이정윤은 공포를 느꼈고, 결국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이걸 받지 못하고는 선생님들 나갈 수가 없어요. 이 자리에서. 아니, 선생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셔야 된다고요! 이거는 쓰실 수밖에 없어요.”(부원장 B 대화 녹취록 2022. 9. 6.)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경위서를 다시 써오라는 지시. 이번엔 ‘확인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정윤은 그날 확인서를 제출했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다시 써야 했다. 원장과 부원장은 고쳐 써야 할 곳, 삭제해야 할 곳을 직접 ‘첨삭’했다. 다시, 다시, 다시. 제출과 반려를 매일 반복했다. 8월 23일, 9월 6일, 9월 7일, 9월 8일, 9월 13일, 9월 14일, 무려 6차에 걸쳐 확인서(경위서)를 제출했다. 원장이 미리 문구를 써둔 확인서에 서명도 했으니, 하나의 사건으로 모두 일곱 번의 확인서를 제출한 셈이다. 원장이 요구한 건 경위서도 확인서도 아닌, 사실상 ‘반성문’과 다름없었다. ‘반성문 다시 쓰기’는 그 뒤에 또 있었다. 9월 16일, 이정윤이 돌보던 아이가 콧등이 쓸리는 일이 있었다. 연고를 바르고 나니 아이의 코는 이상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부모에게도 알렸지만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런데 사흘 뒤에 문제가 생겼다. 원장이 이정윤을 불러 호통을 치고, 이번에도 확인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역시나 계속해서 반려되고, 계속해서 다시 써야 했다. 9월 20일, 9월 21일, 9월 23일, 9월 27일, 10월 5일. 5차에 걸쳐 확인서를 다시 써서 제출했다. 같은 일은 다음 달에 또 일어났다. 11월 4일 원장은 이정윤을 불러 ‘시말서’를 쓰게 했다. 이번에는 하루 전 현장학습에서 짜증을 내며 “아이 씨”라고 상스러운 말을 했다는 게 이유. 이정윤은 그런 말은 안 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원장과 부원장은 ‘동료교사들이 들었다’며 이정윤을 몰아세웠다. 그날 이정윤은 1차 시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원장은, 원장 본인이 직접 문구를 쓴 시말서를 이정윤에게 내밀며, 서명하라고 했다. 억울하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상스러운 말을) 안 했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다그치고, “교회 다닌다며?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서명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윽박질렀다. “오늘 이거 지금 사인 안 하면 선생님(이정윤) 못 가.”“(서명)할 수 없으면 그냥 오늘 여기 계속 있는 거야. 집에 가지 말자, 우리.” (부원장 B 대화 녹취록 2022. 11. 4.) 실랑이는 약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날카로운 음성과 책상 두드리는 소리. 이정윤에게 또 공황발작이 시작됐다. 손발이 떨리고 꼬였다.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원장 : “그게 불미스러운 행동이 아니야? 어디다 대고서는 거짓말하고 있어?”이 : “거짓말 안 했습니다.”원장 : “어디다 대고 어거지 하고 있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2. 11. 4.) 이정윤은 보육교사 노조의 지부장, 함미영에게 SOS를 쳤다. 함미영은 바로 어린이집으로 두 차례 전화를 걸었다. 그 뒤에야 이정윤은 교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이정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내가 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아무 생각 안 들어요. 그저 너무 지치니까 이제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 제 존재를 계속 부정당했잖아요. 결국 ‘내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정말 내가 문제 있는 건가?’ 하면서 자신을 놓게 되더라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반성문 다시 쓰기’가 또 시작됐다. 11월 11일 2차, 11월 21일 3차, 11월 25일 4차까지 제출했다. 2차부터는 시말서가 아니라 ‘확인서’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대법원은 “시말서가 단순히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죄문 또는 반성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업무상 정당한 명령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10. 1. 14. 선고 2009두6605 판결). 이정윤의 정신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하니, 일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사람이 잠을 너무 못 자니까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여요. 집 안에 있는데 웬 남자들이 서 있어요. 그림자가 보여요. 저희 집이 2층인데, 창문에 블라인드를 다 해놨거든요. 가끔 남편이 환기도 시키고 빛도 들어오게 한다고 블라인드를 걷으면, 제가 ‘여보, 저기(창 밖에) 원장이 서 있어!’ 그런 얘기를 자꾸 했어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2023년 3월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물류센터에서 새벽일을 하던 함미영이 ‘마지막 인사’ 메시지를 받은 바로 그날. 그날도 이정윤은 ‘내가 없어지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충남 계룡시의 한 보육교사가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있었다. 유가족은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정윤은 숨진 보육교사가 꼭 자기 같았다. 이정윤은 사선에 서 있었다. 한 발짝 차이로 삶과 죽음이 나뉜 그날 밤. 함미영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정윤의 집으로 출동해 그의 안전을 확보했다. 살아서 견딜 수도, 죽어서 끝낼 수도 없는 고통. 결국 입원을 결정했다. 이정윤은 2023년 3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간 녹색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적응장애와 ‘상세불명 기원의’ 위장염 및 결장염. 온갖 검사를 다 해봤지만 신체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정윤은 이른바 ‘반성문’ 사건으로 처음 죽음을 떠올린 2022년 11월부터 녹색병원으로 옮겨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부터 담당의사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의사) 선생님이 저랑 상담을 하시더니, 제 남편하고 통화하고 싶대요. 나중에 들었더니, (의사가) 폐쇄병동(보호병동) (입원을 권하는) 얘기를 했대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입원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을 먹고 잠드는 일밖에 없었다. 죽음조차 떠올릴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 이정윤은 ‘적응장애’를 진단받았다. “일상생활 기능장애 동반되어 업무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사료”된다는 소견이 붙었다. 이어 ‘중증의 우울에피소드’ 진단이 더해졌다. 진단서에 적힌 치료기간은 계속 길어졌다. 3월 초 병원에 입원하면서 처음으로 냈던 무급 병가(휴직)를 두 차례 연장해야 했다. “우울증에 걸리면 ‘뭘 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없거든요. 아무것도 안 해요. 살림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소파에 누워만 있어요. 제 생활반경이 딱 거실 소파밖에 안 됐어요. 가끔 속에서 천불이 나면 아이스크림을 정말 미친 사람처럼 퍼먹는 거야. 다른 식사는 아예 안 하고, 먹는 건 딱 아이스크림 하나였어요.”(이정윤 전화 인터뷰 2024. 6. 15.) 세 번째 휴직 연장을 요청한 때가 2023년 7월 4일. 다시 한번 “중증의 우울에피소드”를 진단받은 날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휴직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건을 붙였다. “녹색병원이 아닌 다른 종합병원에서 ‘취업치료가 어렵다’는 진단서를 발급해서 전달 주시면 (…)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원장 A 문자메시지 2023. 7. 5.) 당시 이정윤은 이미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상태였다. 그는 녹색병원도 종합병원이라며, 산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휴직처리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답변은 없었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 이정윤은 어린이집이 보낸 서류 한 장을 받아들었다. 해고통지서였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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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는데 왜 버텨”… ‘싫은 사람’ 설문 후 퇴사 강요 [회사에 괴물이 산다 9화]
띵똥-.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날 밤 함미영은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육교사 노동조합의 ‘전’ 지부장. 잠시 어린이집 일을 쉬던 그는 이따금 물류센터에서 야간 알바를 했다. 3월 초, 이른 봄의 밤공기는 아직도 차가웠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창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 알림. 불길함이 확 끼쳤다. 이 시간에 오는 연락은 ‘한가한’ 일일 리가 없다. 바로 전화기를 꺼내들어 메시지를 읽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 안녕히 계세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보육교사 이정윤(48, 가명). 종종 함미영에게 어린이집에서 ‘당한’ 일들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던 사람. 메시지를 보고 함미영은 깜짝 놀랐다. 이정윤이 가끔 탄식처럼 내뱉던 ‘극단적인’ 말들이 떠올랐다. 설마. 함미영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함미영은 바로 112를 눌렀다. 이정윤의 집으로 출동해달라 부탁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눈을 뜬 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경기 광주시의 한 국공립 어린이집. 이정윤의 일터다. 2019년 12월 개원한 이 어린이집에는 14명의 보육교사가 소속돼 있다(2024년 4월 기준). 이정윤과 같은 ‘개원멤버’들의 고생이 컸다. 개원 전 15일가량은 무보수로 일했다. 개원 업무와 어린이집 평가인증(평가제) 준비, ‘열린어린이집’ 준비까지 겹쳐 업무량은 살인적으로 늘었다. 어린이날 행사, 산타 행사, 물놀이 행사 등 어린이집 행사도 유난히 많았다. 법으로 정해진 하루 한 시간의 휴게시간을 제대로 못 쓰는 건 당연(?)했다. 대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야근을 했다. 밥 먹는 시간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일찍 집에 가려고. 하지만 너무 늦게까지 일이 이어지면, 사발면에 김밥을 먹으면서 일했다. 그도 아니면 일거리를 집에 가져가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평일에 못다 한 일은 휴일에 나와서 끝내야 했다. 교사들은 지쳐갔다. 가족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교사들끼리는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정작 원장 앞에서는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다. 이정윤은 달랐다. 입바른 소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업무량을 줄여달라, 초과근무 수당을 달라’ 요구하는 그를, 원장은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원장님이 이정윤 교사를 심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일하는 동료교사들은 부당함에 대한 요구를 하는 이정윤 교사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원장님과의 갈등을 보면서 이정윤 교사를 피하게 되고 (…) 다른 교사들의 경우 원장의 부당함에 뒷담화를 할지언정 원장의 눈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동료교직원 문원정(가명) 사실확인서 중) 그 사이 시청도 업무 과중과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 문제를 알아차렸다. 2020년 6월 현장방문에서 문제가 지적됐고, 1년 뒤 지도점검에서 또 같은 문제가 지적됐다. 그에 따라 2021년 7월 어린이집은 약 1년 전부터 누적된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분 약 400만 원을 뒤늦게 지급해야 했다. 초과근무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개원 초기 수당은 포함되지 못했다. 원장의 ‘불편한 심기’가 누구를 향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다른 교사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였다. 어린이집의 공기는 묘하게 변해갔다. 동료들 역시 이정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서 힘들다’는 불만은 어느새 ‘이정윤 하나 때문에 어린이집이 시끄러워진다’는 비난으로 바뀌었다. 이정윤은 ‘모두의 적’이 됐다. “열악한 업무환경에 대해 함께 불만을 이야기했던 교사들은 원장님이 제게 가하는 행위를 보며 입을 다물었고 방관자가 됐습니다. (…) 공포의 학습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나를 따돌린 적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원장 눈 밖에 날 사람과 가까이 했다간 자신도 낙인찍힐 것 같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압니다.”(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어느 날부터 원장은 ‘퇴사’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편하게 계속 간다? 그러면 선생님(이정윤)하고 같이 못 갈 거고(고용할 수 없다는 뜻). 선생님에 대해서 뭐가 장점인지. 선생님이… 선생님이랑 같이 근무할 뭘 줘야 말이지? 어? 선생님이 뭘 잘했어요? 뭘 잘했어? 선생님이?”(원장 A 대화 녹취록 2020. 12. 16.)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건 2020년 12월이었다. 내년도 반 배정을 위한 교사 면담. 원장은 그에게 퇴사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불편하다, 장점을 알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떤 핑계를 갖다 붙여도, 그저 ‘네가 마음에 안 드니까 눈치껏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원장의 말은 이정윤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정윤은 작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매일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출퇴근 시간부터, 하루 종일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두 기록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무능한 사람이 아니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그리고 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원장의 퇴사 강요는 이때부터 약 14개월 동안, 녹음된 것만 해도 여덟 번이나 된다. 원장이 퇴사를 강요하면, 이정윤이 이유를 반문하며 항변하고, 마치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다. 불 같은 압박, 아니면 얼음 같은 냉대였다. 이정윤은 ‘투명인간’이 됐다. 출퇴근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 업무 보고에도 원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매일 모멸감이 쌓여갔다. “싫다고 이제. 같이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그런데 왜 버티고 있냐고? 왜?” (원장 A 대화 녹취록 2021. 11. 30.) 한 해가 지나, 다시 연말. 2021년 12월 원장은 새로운 근거(?)를 내밀었다. 다른 교사들에게 ‘짝꿍교사(공동담임)를 같이 맡고 싶지 않은 사람’ 이름을 쓰라는 설문조사를 한 거다. 결과는 뻔했다. 원장은 설문조사 결과 이정윤의 이름이 나왔다며 또 퇴사를 요구했다. “이정윤 교사는 운영자인 원장님 입장에서는 불편한 교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원장님과 갈등이 생겨서 힘들어하는 이정윤 교사에게 몇몇 동료교사들이, 보육현장은 변하지 않으니 원장님 운영방침에 따르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동료교직원 임은주(가명) 사실확인서 중) 무슨 ‘마피아게임’인가. 동료들의 손가락총에 따라 한 사람의 일자리를 뺏다니. 사실 해고할 명분이 확실하다면, 굳이 이정윤에게 사표를 쓰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다. 원장이 교사 설문조사 결과까지 들고 나온 건, 오히려 그만큼 해고의 명분이 없다는 반증이다. 원장 : “(원을) 운영하는 건 나야! (…)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지!”이정윤(이하 이) : “근데 제가 왜 퇴사해야 되는지 이유를 명확히 얘기 안 해주시는데….”원장 : “아이, 진짜 이 사람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8.) 퇴사가 아니면 보직 변경을 선택하라고 했다. 보직 변경은 담임교사에서 보조교사로 ‘강등’되는 걸 뜻했다. 급여상 불이익을 보는 건 당연. 이정윤은 퇴사도 보직 변경도 원치 않는다는 뜻을 계속 밝혔다. 원장은 점점 언성을 높이고,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기도 했다. “그때 너무 비참했거든요. 어떻게 내가 싫다고 사람들한테 그런 설문조사를 받을 수 있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렇게 함부로 할 수 있지? 정말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어요. 괴롭힘 당하고 (공황 발작이 나타나면) 약을 털어 먹어요. 그런데 그걸 또 다 토해요. 그러면 빨리 (구토를 멈추는) 다른 약을 또 먹고…. 아이들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혹시라도 옷을 버릴까봐 (출근할 때) 항상 여벌옷을 갖고 다녔어요. 토하면서 (용쓰다가) 소변이라도 나올까봐 속옷까지 다 챙겨서…. 정말 비참하다….”(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이정윤은 2021년 6월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불면증과 공황장애 증상 때문이었다. 처음 ‘정신과’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아냐? 왜 혼자 못 이겨내?’ 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 고통이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거듭된 퇴사 강요와 따돌림을 겪으면서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혼자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일터를 떠날 수도 없었다. 약을 먹으며 ‘지옥’ 같은 날들을 견디는 수밖에. 새해가 다가올수록 원장의 퇴사 압박은 강도를 더해갔다. 아마도 새 학년도가 시작되기 전에 이정윤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새 교사를 채용하기 위함인 듯했다. “선생님(이정윤)이 운영자야? 어디 이야기를 하면 하나하나 듣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따져! (…) 항상 거기다 대고 꼬박꼬박 말대답 하고! 말대꾸 하고! 거기다가 꼬박꼬박 납득이 안 된다고 그러고! (…) 주임선생님. 들어와 봐요.”(원장 A 대화 녹취록 2021. 12. 30.) 원장은 동료교사까지 불러놓고 그 앞에서 계속 이정윤을 압박했다. 이정윤은 울음이 터졌다. “언제까지 그러실 건데요. 저 원장님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제가 (집에서) 잠이나 자는 줄 아세요? (…) 저는 저대로 살아야 되는데 어떡해요, 원장님. 도대체 뭘 얼마나 제가 잘못했다고. 하루아침에 지금 나가라는 거잖아요.”(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0.) 다음 날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202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원장은 막 퇴근하려는 이정윤을 교무실에 앉혀놓고 또 한 번 퇴사를 강요했다. 책상을 두드리고 고함을 쳤다. 원장 : “선생님(이정윤)이 (의사)결정자야? 선생님이 원장이야! 왜 이렇게 버릇없어!” (…)이 : “제가 퇴사할 만한 어떤 중대한 잘못을….”원장 : “내가 얘기, 이 씨.”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1.) 압박이 계속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이정윤에게 ‘뭔가’가 느껴졌다. “저는 먼저 알아요. 딱 (공황발작) 증상이 올 때 전기처럼 뭔가 오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경련으로 먼저 오거든요. 손발이 이렇게 뒤틀린다고 해야 되나, 막 꼬여요. 제 의지하고 상관없이 손이 꼬이고 몸이 막 덜덜덜 떨리거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또 울음이 터졌다. 공황 증상도 시작됐다. 이정윤은 퇴근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이 : “원장님 저… 가고 싶어요. 저 지금 토할 것 같다고요. 지금 숨이 안 쉬어진다구요. 그만하세요, 좀, 원장님.”원장 : “물 한잔 마시러 갔다 와.”이 :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원장님, 됐어요. 저 갈 거예요. (…) 저 퇴근하고 싶어요. 저 퇴근할거예요. 저, 지금, 지금….”원장 : “난 결정짓고 가야 되겠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1.) 이정윤은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함께 바로 정신과 병원으로 향했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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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라도 걸렸나" 직장 성범죄 피해자, 병가도 '불허' [회사에 괴물이 산다 8화]
[지난 이야기]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는 성범죄 피해자를 향해 2차가해를 일삼으며, 김한솔(가명) 씨의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결국 그는 17년이나 다닌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솔 씨는 지역의 노동 활동가들을 만나 퇴사 소식을 전한다. 그게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한 채. 한솔 씨가 겪은 일들을 알게 된 활동가들은 “비상식적인 일”이라 분노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한솔 씨는 5년 만에야 비로소 타인에게 진심으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한솔 씨는 한번 더 힘을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3월 28일 한솔 씨는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때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도 함께 넣었다. 고용노동부의 조사 결과는 지난달 3일 나왔다.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이후 회사의 관리자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한솔 씨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준 행위와, 계속된 병가 승인 거부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했다. 그제서야 회사는 ‘문제의 관리자들’에게 감봉 1개월, 견책 등의 가벼운 징계를 내렸다. 산재 신청 결과는 24일 나왔다. 결과는 이번에도 ‘인정’. 당연하고도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개인이 아니라 노조 차원에서 나서니까 회사도 눈치를 보더라고요.” 민주노총 경남본부에서도 나섰다. 지난 4월 12일 군수와 이사장을 각각 만나 면담도 했다. 노조 활동가들이 이사장 면담을 진행하자, 인사 담당자가 한솔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병가 (신청) 올리세요.” 지난 5년간 수리되지 않았던 요구를 이제야 처리하겠다는 건가. 한솔 씨는 혹시 회사가 말을 바꿀까봐 그날 급히 병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번에는 신청서에 진단서만 첨부했다. 그동안 병가를 신청할 때는 구구절절 간곡하게 속사정을 설명한 사유서를 덧붙였었다. 어느 때보다 간단한 병가 신청서. 하지만 그날 바로 병가 승인이 떨어졌다. 회사는 2021년 직원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표어를 공모했다.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사건으로부터 2년 하고도 반이 더 지난 때였다. 한솔 씨가 거듭 전보 신청을 하고, 그게 모두 좌절되면서 본격적인 정신과 치료를 시작한 해였다.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꼽힌 표어는. “성범죄는 한순간, 상처는 영원히” 사무실을 오르내리는 계단마다 표어가 게시됐다. 한솔 씨는 표어를 보며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공감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지.’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사건의 범인 A는 2019년 7월 1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3일간 이어진 불법촬영만 범죄사실로 인정했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한솔 씨에게 전해준 “정기적으로 백업하고 다시 설치했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판사는 이번 범행으로 “피해 여성들이 엄청난 배신과 수치심 등을 경험하고, 피해 여성들 다수가 엄벌을 거듭 탄원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서도, “A가 자백한 점, 영상으로 여성들의 신상이 특정되지 않는 점, 부양할 처와 어린 세 자녀가 있다는 점 등”을 참작해 양형을 정했다. 검사는 양형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항소심에서 형량이 더 높아졌다.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항소심 재판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장 동료’ 관계라는 점에 주목해 “범행의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이 호소하는 고통과 두려움을 고려하면 형이 “너무 가볍다고 인정된다”는 것. 2020년 1월,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160시간의 사회봉사 및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 그리고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혹은 장애인복지시설에 3년간 취업제한 조치도 이뤄졌다. 신상정보가 공개·고지되는 조치는 피했다. 재판 과정에서 A는 한솔 씨에게 장문의 사과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탄원서 작성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바람처럼 A는 실형을 피했다. 그는 멀쩡히 세상을 활보할 수도 있고, 취업제한 기관만 아니라면 조용히 새 직장을 구할 수도 있게 됐다. A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아마 새 직장의 동료들은 아무도 모를 거다. 그가 회사 내 여자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직장 동료들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자라는 사실은. 죄를 지은 가해자를 향한 형벌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죄 없이 받고 있는 형벌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끝도 없이 그들의 인생을 짓눌렀다. 사건 이후 한솔 씨를 더 힘들게 한 건 오히려 회사 내 관리자들이었다. 직원들을 입단속시키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원한 전보나 병가·휴직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줌마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말로, ‘겉보기에 멀쩡한데 왜 병가를 내느냐’는 말로, ‘병원 가는 날에만 병가를 허락하겠다’는 말로 2차가해를 일삼았다. “성폭력방지법, 남녀고용평등법,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을 위반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만큼 이에 따른 법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임.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 및 피해자 보호 조치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군 등은 주기적인 모니터링을 하도록 해야 함.” (<◯◯◯◯◯◯◯◯◯ 성폭력 피해 후 직장괴롭힘 진상조사 보고서> 민주노총 경남본부, 2024. 5. 22.) 한솔 씨는 지난 4월 처음으로 약 2달간 병가휴직을 인정받았다. 지역의 노동조합 활동가와 함께 사건을 공론화하면서 생긴 변화다. “너무 악랄하지 않아요? (회사는) 이제 나 혼자 (저항)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서 (병가휴직을) 승인한 거예요. 그동안 저는 회사에서 완전 그런 취급받았거든요. (옛날) 사대문에 대역죄인들 목 걸어놓는 거 있잖아요. ‘조직에 찍히면 이렇게 된다, 봐라.’ 그게 저였어요.” 한솔 씨는 병가휴직 연장을 신청했다. 회사에는 여전히 한솔 씨에게 ‘2차가해’를 서슴지 않았던 관리자들이 남아 있었고, 복귀 대책 역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지난달 5일 한솔 씨의 병가휴직 연장 신청을 승인했다. 다만 한솔 씨는 1년간의 휴직을 신청했으나, 회사는 3개월만 인정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19일 회사에 사건 관련 대응 및 조치에 관한 질문지를 보냈다. 그리고 지난 2일부터 5일 사이 세 차례 전화로 답변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홍보팀 관계자는 “본인에게 답변할 권한이 없다”며, “(상부에) 전달은 하겠지만 답변을 주실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22일 현재까지 서면 답변도 오지 않은 상태다. 한솔 씨 회사는 경남 ◯◯군 산하의 지방공기업. 기관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 12조(감독 등) 1항에는 “군수는 공단의 사무를 관리·감독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군은 지난 5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산하기관이지만 개별 법인이고 독립된 기관이라 관리·감독은 (기관) 자체 인사위원회나 내부 규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며, “군청에서 ‘규정대로 이행해라’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병가휴직) 3개월은 금방 지나가버리겠죠. 걱정은, 복직해도 또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저는 지금도 가해자들 생각하면 손발이 굳거든요. 휴직이 인정됐어도, 나중에 회사로 돌아갈 거 생각하면 걱정이 되죠.” 인터뷰 내내 씁쓸한 미소를 짓던 한솔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 중에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야기는 대체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로 시작해서 ‘이런 자신이 답답하다’고 책망하며 끝났다. 누구에게도 속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함구령이 떨어졌고, 가족들 앞에서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성범죄 피해자, 그것도 불법촬영 카메라에 신체가 노출됐다는 사실은 가족들에게 전하는 것도 힘들었다.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관계자들은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에게만 ‘성 보호권’이 있다고 보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 “성에 대한 편협하고 잘못된 인식이 깔렸으니 성범죄 피해를 당한 중년 여성들이 피해를 당해도 신고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라며 “성폭력 피해자의 나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여성경제신문 <“나이 많은 여자를 왜?”…외면과 상처에 시달리는 ‘중년여성 성범죄’> 김연주 기자, 2019. 6. 30.) 한솔 씨는 사건 발생 한 달 만에 남편에게만 속마음을 겨우 털어놨다. 당시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에게는 말을 꺼낼 수 없었고, 다만 큰딸에게 공중화장실을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부모님께는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겪은 일들을 말하지 못했다. 병원에 가는 것 역시 비밀에 부쳤다. 분노도, 원망도, 우울함도, 답답함도, 어디 하나 있는 대로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한솔 씨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있었다.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게 용서와 자비인데, 용서를 못하는 제 마음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정말 많이, 많이 기도했거든요.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용서를 청하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거예요. 본인들은 잘못했다고 생각도 안 할 텐데, 저는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는 거예요.” 한솔 씨는 그날의 기억을 지워내고 싶었다. 회사의 말처럼 덮는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고도 절실히 기도했다. 하지만 괴물은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고, 삶의 의지마저 꺾어버렸다. “주홍글씨가 제 사원증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조직 부적응자, 상사를 고발한 자, 회사를 욕보인 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회사가)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되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지금 회사의 상황에서 과연 내가 복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괴물의 눈은 오늘도 그를 지켜보고 있다. <끝>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젠더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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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불법촬영 피해자에게 “아줌마가 뭘 그러냐” [회사에 괴물이 산다 7화]
[지난 이야기] 김한솔(가명) 씨는 회사 여자화장실에서 불법촬영 피해를 입는다. 범인은 한솔 씨가 살뜰히 챙기던 ‘직속후배’ A.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던 한솔 씨에게 회사는 범인 A의 업무까지 떠넘기고, 휴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범죄 피해 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솔 씨는 당시 불안, 불면, 배뇨불안 등 신체적·정신적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 그런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아직 학교도 다니는데 혹시나 엄마가 정신병원 다니는 게 알려져서 마이너스로 작용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증상이 심할 때만 잠깐 병원 가서 수면제 처방받고… 그냥 버텼어요.” 심리적인 장벽이었다. ‘정신력이 약해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손가락질과,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들만 가는 데 아니야?’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솔 씨는 꾸준히 치료를 받는 대신,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간헐적으로 수면유도제만 처방받으며 견뎠다. “이사장님, 잠깐이라도 다른 사업소에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산에서 산토끼 똥을 치우라고 하면 치울 거고, (군립공원) 입장 티켓을 팔라고 하면 팔겠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다가 여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근데 지금은 잠깐이라도 떠나 있고 싶습니다. 자꾸 그날 일이 생각납니다. 그 뒤로 화장실에 불을 켜고 갈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인 이사장까지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A를 향한 배신감보다, 휴가도 전보도 안 된다고만 하는 회사를 향한 분노가 조금씩 더 크게 자라났다. 사건이 발생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한솔 씨는 약 열 번이나 전보를 요청했다. 특히 이사장이 교체되던 해인 2021년에 요청이 집중됐다. 전임 이사장에게 문제를 해결하고 떠나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신임 이사장에게 인계하고 갈 테니 조금만 버텨달라”고 했다. 그해 11월 신임 이사장이 부임하자, 한솔 씨는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업무 파악이 되지 않아서 전보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네요.” 떠나갈 사람은 떠나갈 사람이라서, 새로 온 사람은 일을 잘 몰라서. 결국 안 된다는 말은 똑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사건 이후 남아 있던 문제들. 한솔 씨는 그 문제를 열심히 가리키며 얘기했지만, 회사는 되레 그런 한솔 씨를 가리키며 ‘문제’로 여긴 거였다. 계속 거부당하면서도 한솔 씨는 계속 전보를 요청했다.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위태로웠다. 그에게 2021년은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였다. 약을 안 먹으면 잠들 수 없고, 약에 취해 잠들면 악몽이 따라왔다. 해맑게 웃던 얼굴이 조금씩 음흉한 낯빛으로 변하는 A를 마주하거나, 뭔가로부터 도망치고 피해 다니는 꿈을 꿨다. 수면을 방해한 건 또 있었다. 한솔 씨는 ‘사건’ 이후로 집 밖에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방광염이 생겼다. 참다 못해 화장실을 찾는 경우에는 깜깜하게 불을 끄고 들어갔다. 혹시나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을지 모르니,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밖에서는 화장실을 못 가는 게 문제였다면, 집에서는 너무 자주 가는 게 문제였다. 집을 벗어나면 또 화장실을 못 갈 거란 불안 때문일까. 집에서는 조금이라도 요의가 느껴지면 참을 수 없었다. 자다가도 자꾸 깨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불안이 일상을 압도했다. 한계. 한솔 씨는 자신의 삶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려 있단 걸 알았다. 이대로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2021년부터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됐다. 간헐적으로 수면제만 처방받아온 지 2년이나 지나서였다. 한솔 씨는 정신과 진단서를 가지고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아니, 암이 걸린 것도 아니고, 팔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할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병가 신청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이가?” 반전은 없었다. 회사는 완고했다. 한솔 씨가 느끼는 고통의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때 진짜 직장을 떠나야 하나, 고민을 무척 많이 했어요. 계속 벽에 부딪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참고 버틴 건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죠.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되는데, 남편한테 외벌이 맡길 수는 없잖아요. 또, 마흔도 넘긴 나이에 전문직에만 있었으니까 나가면 경력단절이죠, 뭐. 내가 다른 데 어디를 또 갈 수 있겠어요?”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동안에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요령 없이 참고 견딜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볕 들 날 올 거라고 간절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신앙의 힘을 빌려 겨우 마음을 지탱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해성사도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면 또 용서 못하는 제 자신 때문에 너무 괴로워져요. 결국에는 자책이에요, 자책.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왜 나만 그럴까, 회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만 계속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회사에는 직원고충상담센터가 있었다. 한솔 씨는 지난해 2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신고글을 올렸다. 그런데 상담센터 위원들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4년간 한솔 씨가 휴가나 전보를 요구할 때마다 완강히 거부했던 관리자가 속해 있었다. 결국 한솔 씨는 자신의 신고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가 그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일말의 기대도 사라졌다. 한솔 씨는 그때부터 자살을 떠올렸다. “직원들끼리는 속된 말로 ‘가둬놓고 직인다(죽인다)’고 했어요.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부당하고 힘든 요구였나.” 그 사이 회사에서 전보나 병가를 승인해준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니다.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여섯 명이 전보발령·휴직·병가를 승인받았다는 사실이 기관 인사발령사항 공문을 통해 확인된다. 다만 이상하게도 한솔 씨는 그 장벽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 “계속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던 거죠. 조금씩 나아지겠지, 이 순간을 참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요. 끝까지 현장에 있다가 명예롭게 퇴직하고 싶었으니까, 그 꿈을 접기 힘들어서 계속 버텼던 것 같아요.” 불법촬영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솔 씨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지금껏 가슴속에 품고 있던 꿈도 놔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지난해 9월 한솔 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루에 더 많은 약을 삼켜내야 했다. 귀에는 쿵쿵대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린 통증도 동반됐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지만 이상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한솔 씨는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해하거나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었는데, 이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결심을 당장 멈추고 싶지만, 나의 아픔을 외면한 채 눈과 귀를 닫고 병가도 반려하고, 휴직도 반려한 이사장과 팀장들, 인사팀의 카르텔에 대응할 방법도 없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지금, 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런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산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10월 쓴 유서 일부) 모든 일이 시작된 회사 여자 화장실. 그곳에서 죽음을 맞겠다고. 유서를 품에 넣은 채 약을 한 움큼 털어넣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면 회사도 내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단서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음’ 이렇게라도 명시를 했어야 하나?” “저번에(어제) 운동 가서 산에서 그냥 돌아오지 않으면 이 심각성을 좀 알려나?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어야 끝이 나는 걸까?” (2023년 업무수첩에 남긴 메모 일부) 한솔 씨를 다시 살게 만든 건 가족들이었다. 가슴에 묻어야 할 상처,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진 않았다. 대신 한솔 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17년간 다니던 회사. 그렇게라도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지난 2월 지역의 노동 활동가들을 만날 자리가 있었다. 한솔 씨네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솔 씨 퇴사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한솔 씨) 연차에 퇴직한다는 게 흔치 않은데,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왜 퇴사하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터닝포인트. 그 한마디에 사건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 한솔 씨를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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