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아홉 살’ 아빠를 돌보는 딸… 이 청년에겐 보호자가 없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사는 부녀. 강하라(31) 씨의 하루는 아빠를 기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성종(60) 씨는 아홉 살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 하라 씨는 스물여섯 살이던 2019년부터 아버지 돌봄을 전담했다.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1박 2일 동안 이들의 일상에 동행했다.(관련기사 : <‘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이들은 4년째 상속재산분할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20년 할머니가 숨을 거두자 친척들은 소송을 걸었다. 할머니가 부녀에게 물려준 언덕배기의 집 때문이었다. 믿었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보다 당장 변호사 비용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안 그래도 레슨실 월세도 3개월째 밀리고 있는데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것 같아요.” 집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집이 재산으로 잡혀 있어 장애수당도 받을 수 없다. “아빠는 하우스푸어예요. 지적장애인은 가난했을 때 가장 혜택을 많이 줘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 연금이라도 나오고 뭐라도 받거든요. 근데 겸업은 안 돼요. ‘딱 100만 원(장애수당)으로 살든가, 일을 해서 100만 원을 벌든가’예요. 밸런스 게임처럼.” 하라 씨의 월 수입이 100만 원이 안 되는 달도 있다. 그런 때는 하라 씨의 노동시간이 더 늘어나기 마련.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마케팅 외주를 받거나, 레슨실이 있는 건물 3층에서 사장님 일을 도와주고 알바비를 받는 식이다. “잠을 많이 못 자고 밥을 잘 못 먹거든요. 과로하고 그러니까 호르몬 리듬이 완전 깨졌어요. 그러면서 자궁근종이 생겼어요. 그때 알았어요. 잘 먹고 잘 자야 되는 거구나. 그런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가 저한테 굉장히 어려운 과제인 거예요.” 과로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지난 2월 혈복강 수술을 받았다. 난소 근처에 있던 물혹이 터지면서 간까지 피가 차버렸다. “수술 마치고 제가 비몽사몽할 때, 의사 선생님이 아빠한테 수술 과정을 설명을 했나 봐요. 그런데 아빠는 저한테 그 내용을 전달 못해줬어요. 며칠 뒤에 간호사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수술하면서 왼쪽 난소를 절제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하라 씨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비혼을 생각했던 하라 씨가 처음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계기이기도 하다. 아빠는 아픈 딸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줬다. 하라 씨는 그때부터 성종 씨가 “아빠 역할을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수술 이후 자궁내막증 치료제를 매일 먹는다. 담당 의사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약물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중 하나가 뼈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기타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라 씨에게는 치명적이다. 완경 시기 여성들과 비슷한 골밀도 수치. 그는 올해 골감소증 진단을 받았다. 기타를 두 시간 넘게 잡고 있으면 손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제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이랑 소통을 계속해 둬야 해요. 혹시나 아빠나 제가 무슨 일이 생겨서 움직이지 못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요.” 하라 씨는 이날도 장애인가족지원센터로부터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면접에 앞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전달받았다. 서류를 준비하고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도 하라 씨의 몫이다. 성종 씨는 지난해 한 중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로 9개월간 근무했다. 하루 4시간 근무에 월급은 약 100만 원. 아파트에서 3개월간 경비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장애인 일자리는 같은 곳에서 근무를 연장할 수 없다. 정해진 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형태다. 성종 씨의 꿈은 카페 창업이다. 매일 커피를 직접 내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중년 장애인인 그가 취업할 수 있는 카페는 없었다. “제가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체 활동에 문제는 없지만, 일상적인 은행이나 관공서, 병원을 혼자 가지 못합니다. 늘 제가 일하는 시간을 빼서 함께 다녀와야 했습니다. 저도 일하고 쉴 수 있도록 활동지원서비스를 원했지만, 심사 내용을 보면 모두 신체장애인에 맞춰져 있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강종 씨가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은 딱 하나. 보호자 1인을 동반한 지하철 무료 탑승이다.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주차를 했다가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지적장애인은 주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나마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과태로의 절반을 감면해줬다. 하라 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혜택(?)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성종 씨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하라 씨 덕분이었다. 2019년 하라 씨가 아빠 성종 씨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한글 공부도 같이 시작했다. 당시 아빠는 ‘안녕하세요’도 읽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라 씨는 학습이 더딘 아빠와 병원으로 향했다. 지적장애 판정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도 되게 힘들었어요. 아빠가 글을 못 읽으니까 제가 언어치료 검사, TCI 검사, 기질검사 문항을 다 읽어 줬거든요. 200문항이 넘는 걸 세 시간 동안 다 읽어줬어요.” 검사 결과는 중증 수준의 지적장애. 등급으로 구분하면 2급이었다. 하라 씨는 아빠가 학습을 하기 위해 천 번이 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종 씨에게는 활동지원 서비스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오셔서 질문을 해요. 근데 질문이 ‘혼자 샤워할 수 있는가’, ‘혼자 밥을 먹는가’, ‘외출해서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질문은 신체 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더라구요. 아니면 지적장애 1급에만 해당되는 거죠.사실 저희 아빠는 이미 천 번을 반복하고 학습해서 (질문 속 행동들을 혼자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안 된대요. 떨어졌어요, 심사에서.” 활동지원사가 없으니 그 자리를 채우는 건 24시간 하라 씨의 몫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을 가질 수도 없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사치다. 그나마 집과 가까운 곳에서 기타 레슨 수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나 지역 복지센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취업을 위한 면접장이나 병원에 동행하는 서비스 등이다. 다만 이러한 복지 역시 누리는 것도 쉽지 않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립을 위해 한 장애인복지관에 언어치료를 신청했는데, 4년 전쯤에 400번대 대기표를 받았습니다. 2년 전쯤에는 200번대였으며, 최근에 전화해보니 언어치료 선생님이 퇴사를 하셔서 공석이라 언어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동 지적장애에 비해 성인 지적장애는 기회가 더 적습니다. 인지치료나 언어치료를 신청해도 아동이 우선이기에 기회도 없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2024. 10. 29. 국제돌봄의날 기념 증언대회, 강하라 씨 발언문 일부) 국가의 ‘돌봄’은 부족했다. 국가의 빈자리는 오롯이 딸 하라 씨의 인생을 ‘갈아넣어’ 채워야 한다. “지적장애는 원래 티가 잘 안 나요. 특히 아빠는 2급인데도 (사회성이) 많이 개발된 거고. 근데 약간 어수룩하죠.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상황 판단 능력이 빠르지 않은 거예요. 물건을 떨어뜨리면 주워야 되는데, 그걸 인식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성종 씨는 살갑고 정 많은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손수 만든 커피 나누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기자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날 하루 동안 그가 주는 커피를 이미 넉 잔이나 마신 뒤였다. 자기가 내린 커피는 마셔도 잠이 잘 온다며 능숙하게 회유(?)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이거는 마셔도 잠 잘 오는 커피야.” 그의 ‘남다른’ 사회성은 하라 씨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길러진 듯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성종 씨에게 ‘할 수 있어’, ‘괜찮아’ 하는 격려를 보내왔고, 그것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이 됐다. 하라 씨의 인생에도 그런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보호자’가 있었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보호자가 있었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떠오르는 건… 할머니?” 침묵 끝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라 씨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양육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빠 성종 씨는 아홉 살 딸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었다. 하라 씨는 일찍 어른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막내고모의 미용실에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교육 한번 받지 못했다. 이러한 성장기는 그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줬다.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해 원망한 적도 많았어요. 삶이 너무 힘드니까. 왜 나를 낳기만 하고 제대로 키우지도 않았지? 그런 생각. 그러다 보면 내가 훗날 가정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신이 양육자로서, 배우자로서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고민은 하라 씨를 괴롭혔다. 편부 가정이라는 점, 아버지가 지적장애인이라는 점,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는 점 역시 그에게는 ‘결점’처럼 느껴졌다. 다만 유년기의 기억이 언제나 괴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빠 성종 씨의 역할이 컸다. “아빠를 계속 돌볼 수 있는 건 과거의 기억 덕분인 것 같아요. 아빠는 주 6일, 7일 근무하면서도 쉬는 날마다 저 데리고 공원에 나가서 놀아줬거든요. 그 기억 속에 아빠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어요. 일 때문에 힘들어도 저를 정말 사랑하니까 그랬던 거잖아요.그런 게 (지금 제가 아빠를) 부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아빠가 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하라 씨는 자정이 돼서야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CTS 기독교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작은방 미닫이문 틈으로는 드라마 소리가 들렸다. 성종 씨는 또 동시에 태블릿PC로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했다. 하라 씨가 이불 속에 누울 때까지, TV 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행 가고 싶더라고요. 사람이 없는 곳으로요.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세상이 조금 더 자극적이에요. 너무 바쁘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저는 그 버드나무가 바람에 이렇게 흔들리면서 사르륵거리는 걸 좋아하는데….” ‘아홉 살’ 아빠를 돌본 지 5년. 하라 씨에게는 미래를 그리는 일은 사치스럽다. 일상을 버텨내는 것만으로 버겁다. 그는 차라리 회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도, 빚도, 잿빛 미래도 없는 곳으로. 하라 씨는 잠에 빠진 뒤에야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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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홉 살’… 돌봄청년 하라 씨와 함께한 1박 2일
낮은 빌딩들 사이 가파른 1차선 좁은 길을 버스가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최고 높은 곳’에 강하라(31) 씨가 살고 있다. 아홉 살 지능의 아버지 강성종(60) 씨와 단둘이. 기자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했다. 갈색 벽돌이 겹겹이 쌓인 양옥 주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철문 옆에서 나뭇가지를 치고 있던 강성종 씨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반쯤 감긴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하라 씨는 줄곧 아빠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성종 씨가 케이크를 포크로 찍는 순간 하라 씨가 입을 열었다. “아빠, 기자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 하라 씨는 아빠에게 ‘매너’와 ‘주도성’을 가르치고 있다. 성종 씨는 기자가 사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은 꼭 표현을 하라고 해요.” 지난 10일은 아빠 성종 씨의 생일이었다. 하라 씨에겐 1년에 한 번 때 맞춰 축하하는 것도 버겁다. 적게는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일을 하면, 밤 10시가 훌쩍 지난다. 지적장애인 아버지를 부양하고,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딸 연습’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빠를 돌보기 시작한 지 4년째였던 지난해. 하라 씨는 휴식이 절실했다. 일과 간병의 굴레는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만난 심리상담사가 은인이었다. 그는 하라 씨가 보호자의 역할만 하고 있다며, ‘딸 역할 해보기’를 권했다. 아빠를 통제하고 책임만 지는 게 아니라, 어리광도 부리고 부탁도 해보라는 거였다. 하라 씨가 아버지 돌봄을 전담한 건 2019년부터다. 그전까지는 성종 씨의 노모, 즉 하라 씨의 할머니가 아들과 손녀를 돌봤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양을 위해 시골로 가셨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집에는 단출한 두 식구만 남았다. 처음엔 각자 생활비를 벌었다. 성종 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하라 씨는 기타 레슨과 각종 아르바이트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여유는 있었다. 아빠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한글 공부도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지적장애인 성종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30여 년간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긴 세월 ‘막노동’에 몸이 버티지 못했다. 어깨와 무릎의 연골이 찢어졌다. 허리 디스크도 두 군데가 돌출됐다. 그때부터 지적장애인 아빠를 돌보는 건 온전히 하라 씨 몫이 됐다. “기자님, 여기부터가 진짜 영케어러의 일상이에요.” 영케어러(Young-carer).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가리키는 말. 하라 씨는 ‘진짜 일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성종 씨를 마주 봤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연체된 보험료였다. 성종 씨가 5개월간 미납한 보험료는 82만 3770원. 하라 씨는 절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돈 이야기에 성종 씨이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지금까지 치료받는다고 병원비 많이 썼잖아. 그동안 낸 돈 일부 환급도 받고, 앞으로 나갈 치료비도 생각하면 (보험) 부활 시켜야 돼.” “돈 없어. 놔둬.” “보험 없앨 거야? 그럼 아빠 아프거나 다치면 수술도 못 받아. 100만 원 낼 거, 300만 원 내야 될 수도 있어. 자전거 타다 넘어지면 수술 못 받는다고. 아빠 나이 더 많아져서 보험 들려고 하면 보험료도 더 비싸져. 지금 빨리 반반 내자.” 부녀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라 씨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성종 씨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내냐는 식이었다. 하라 씨는 대안을 제시했다. 두 달치 미납금만 먼저 해결하자는 것. 성종 씨가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타협 뒤에는 해결할 숙제가 생겼다.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계좌이체를 하는 것이다. 하라 씨는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직접 계좌이체 화면에 접속할 때까지 기다린다. 성종 씨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에서 방황했다. 서른 번 넘게 해 본 일이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오늘은 제 일정이 여유로워서 괜찮아요. 만약 제가 퇴근하고 밤 9시, 10시 돼서 들어왔는데 이런 일들을 밤에 또 해요, 그러면 일이 끝나지가 않는 거죠.” 성종 씨가 계좌이체를 하는 데 걸린 시간 30분. 아빠가 핸드폰을 쥐고 분투하는 동안, 하라 씨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성종 씨가 포기하려는 타이밍에 약간의 힌트를 주고 응원을 하는 요령도 생겼다. 출근하기도 전에 하라 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은 아빠를 헬스장에 바래다주고 레슨실로 가는 일정이 남아 있었다. 성종 씨는 오전에 10분 운동하고 왔다며 헬스장 가기를 거부했다. 하라 씨는 능숙하게 아빠를 회유(?)했다. 성종 씨가 운동하는 모습을 취재하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성종 씨는 그제야 나갈 채비를 했다. 한 손에는 그가 직접 내린 커피를 챙겼다. 헬스장에 있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줄 선물이다. 부녀의 걷는 모습은 참 재미있다. 토끼와 거북이 같달까. 하라 씨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앞서 걸으면, 성종 씨는 뒤에서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하라 씨는 이동 중에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이동 시간은 장애인가족지원센터, 기타 레슨생, 레슨실 사장님과 연락하는 시간이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숨을 쉬며 성종 씨를 재촉하기도 한다. 역시나 한 쪽 귀에는 전화기를 대고서. 성종 씨는 딸의 한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등학교 동창들과 있었던 일화를 기자에게 들려줬다. 그는 지난 2월 서울 숭인동에 있는 진형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평생교육시설로, 학급 평균 연령이 67세에 달한다. 동년배들이 대학에 진학한 이야기, 87세 초고령 학생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된 일은 그의 자랑거리다. “아빠, 나 기자님이랑 레슨실 가 있을 테니까 운동 마치고 7시까지 레슨실로 와. 너무 일찍 오지 말고. 알았지?” 성종 씨는 운동에 흥미가 없는지 헬스장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5분 동안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는 트레드밀, 다음에는 상체, 다음에는 하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헬스장에는 장애인 재활을 돕는 트레이너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등록했다. 그것도 하라 씨의 역할이 컸다.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자기계발비’ 지원을 받았다. 언덕배기 집에 살면서 고도비만에 관절까지 좋지 않은 아빠를 위한 일이었다. PT 20회를 끊고 남은 돈은 언어치료, 인지치료, 재활치료비로 쓰인다. 남은 돈은 이제 겨우 10만 원 남짓이다. 하라 씨가 헬스장으로, 여러 치료센터로 아빠를 보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아빠는 동묘 앞 벼룩시장을 즐겨 찾았다. 성종 씨는 고장 난 데스크톱, 노트북, 모니터, CD 등을 ‘바가지를 쓰고’ 비싼 값에 사온다. 그리고 작은 방에 숨겨둔다. 아빠의 ‘보물’을 찾아내 고장난 것을 골라 버리는 일은 하라 씨의 몫이다. 심지어 아빠가 밖에 나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라 씨는 그를 “어딘가에 꽂히면 완전히 몰두한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실종신고를 몇 번 하기도 했다. 지능이 7~9세 수준인 아빠가 밖에서 사고라도 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한다. 다행히 성종 씨는 지인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미혼모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 평범한 가정이 너무 부러운 시기도 있었고…. 그냥 그런 평범한 것들이 좀 부러웠던 거 같아요. 지금은 부러워하진 않아요. 소용이 없으니까.” 하라 씨는 헬스장에 아빠를 데려다 놓고 레슨실로 향했다. 지하철로 네 역 떨어진 곳에 있는 3층짜리 건물. 그곳에 하라 씨의 레슨실이 있다. 이날은 두 타임만 소화하면 퇴근할 수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저녁 6시를 조금 넘기자, 갑자기 레슨실 안으로 성종 씨가 들어왔다. 하라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강생에게 복습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레슨실 옆 빈 공간에서 성종 씨는 한글 공부를 했다. 3층에 있는 학원 아르바이트생에게 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하라 씨의 일상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라 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기타 레슨을 이어갔다. “저녁식사는 보통 3층에 계신 학원 사장님이랑 같이 해결해요. 제 사정을 생각해주시는 고마운 분이죠.” 하라 씨는 식비를 쓰지 않는다. 웬만하면 3층 학원 사장님이 끼니를 때울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같이 먹는 식이다. 혹은 운영하는 블로그에 협찬을 해준 식당에서 해결한다. “사람들은 제가 ‘돈미새(돈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아요. 근데 상관없었어요. 저는 먹고살려고 하는 거니까.” 레슨이 끝났다. 레슨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밑반찬 세 개뿐인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성종 씨는 자연스레 식사를 시작했다. 하라 씨는 이날도 쉽게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하라 씨는 또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기타 레슨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기타 레슨은 수능시험 직후, 학교 방학 기간, 새해, 졸업 시즌 등이 성수기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수입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성종 씨 돌봄 비용에 레슨실 월세와 관리비, 병원비, 공과금 등을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하라 씨를 ‘돈미새’로 만든 결정타는 다름 아닌 친척들이 날렸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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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도 미련도 없이…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20화]
붉은색으로 염색한 풍성한 머리로 이마와 뒷목을 덮은 청년이 스타벅스에 나타난 건 늦은 오후였다. 검은색 뿔테 안경과 오른 손목의 은색 팔찌는 조명으로 더 반짝거렸다. “접니다, 기자님….” 키 180cm쯤 되는 호리호리한 청년은 내가 앉은 자리로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셔츠 탓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저 도영입니다. 강도영.” 그럴 리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가 씩 웃었다. 하얀 이가 도드라졌다. 3주 전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사람 치고 너무 알록달록한 거 아닌가 싶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강도영(가명)과 체격이 너무 달랐다. “저 강도영 맞습니다. 편지로 살 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교도소에서 60kg 정도 뺐습니다.” 강 씨는 뇌출혈로 온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간병하다 사망에 이르게 한 존속살해 혐의로 2021년 8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그해 11월 프로젝트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를 통해 그의 사연을 자세히 보도했다.  간병노동과 영케어러(young carer)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떠올랐다.(관련기사 : <“쌀 사먹게 2만원만..” 22살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 그때 법정에서 본 강 씨는 130kg의 거구였다. 대구교도소에서 면회했을 때도 인상은 비슷했다. 면회실 투명창 너머의 강 씨는 몸집이 크고, 얼굴은 둥글고, 표정은 어두웠다. 그를 직접 본 건 그 두 번이 전부였다. 지난 7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셜록은 그와 편지로만 소통했다. 지난 8월 20일, 대구 그랜드호텔 1층 스타벅스에 반쪽이 된 얼굴로 나타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 ‘강도영 알아보기’를 방해한 건 내 가슴속 편견이었다. 존속살해 혐의로 복역 후 갓 출소한 가난한 청년은 머리 염색이나 액세서리를 하지 않을 테고, 웃음기 없는 위축된 얼굴이나 울분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란 고정관념 말이다. 편견을 버린 뒤에야 ‘병든 아버지를 굶겨죽인 패륜아 사건’의 숨겨진 진실이 보였던 2021년 11월 그때처럼, 나는 내면의 생각부터 정리해야 했다. 살인범이란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하는 스물다섯 살 강도영과의 대화는 그 후에야 가능할 듯했다. 이렇게 다짐을 해도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편지로 이야기한 대로, 많은 사람이 도영 씨 근황을 궁금해 해요.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구요.” 강 씨는 ‘패륜살인 가해자’로 언론에 처음 등장했다. 셜록의 보도로 그를 향한 여론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밥을 사고 싶다는 사람부터 복지 혜택을 알려주겠다는 사회복지 공무원까지, 강 씨의 안부를 묻는 독자의 문의는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관심은 고맙지만, 기자님과 인터뷰를 끝으로 저는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고 싶습니다. 제가 잘난 일을 해서 관심 받은 것도 아니고….” 오래 생각한 일인 듯 강 씨의 낮은 목소리는 단호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약 3주가 된 때, 강 씨는 친구 집에 머물고 있었다. 출소 후 주민등록을 마치자마자 그에게 날아온 건 돈을 갚으라는 독촉장이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채무였다. 강 씨는 상속 포기 등 생소한 일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예전에 아버지랑 살던 집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거기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사망하고 자신이 용의자로 체포된 현장, 그의 옛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의 근황만이 아니라 정말로 누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그때의 이야기를 강 씨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 장소와 날짜가 잡혔다. 9월 6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대구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다세대 주택이 빽빽한 골목 사이로 덥고 습한 바람이 불었다. 강 씨는 역시 ‘컬러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살던 다세대 주택의 2층은 비어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부터 쭉 그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마당 한쪽 구석에서 저 혼자 높이 자란 엄나무의 이파리만 무성했다. “저 때문에 세입자가 안 들어오는 건가 싶어, 1층에 살던 주인집 할머니에게 죄송하네요. 아버지 쓰러지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그 할머니가 10만 원도 빌려주셨는데….” 강 씨의 아버지는 2020년 9월 13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강 씨는 군 입대를 앞둔 21세 휴학생이었다. 갑자기 간병청년이 된 그에겐 돈이 없었다. 약 2000만 원에 이르는 아버지 치료비를 삼촌이 댔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 5월까지, 월세·도시가스·전기요금·통신료 등 모든 게 밀렸다. 당시 강 씨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10만 원을 빌렸다. 강 씨가 외부인에게 빌린 유일한 돈이다. 그의 삼촌도 더는 병원비를 댈 수 없게 된 2021년 4월 23일, 강 씨는 사지가 마비된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에서 간병했다. 약 보름 뒤인 5월 8일, 아버지는 안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는 왜 공공기관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을까. “공적 도움을 아예 안 알아본 건 아니에요. 주민센터에 전화로 물었는데 ‘아버지 장해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그 진단서를 받으려면 사설 앰뷸런스 이용 등 최소한 10만 원 이상이 들더라구요. 그때 저는 쌀값 2만 원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돈을….” 강 씨는 당시 친구들에게도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에요. 친구들이 ‘왜 우리에게 말을 안 했느냐’고 저를 질책하더라구요. 제 성격 탓이에요. 저는 친구들에게 신세 지기 싫었고, 그게 타인에게 부담 주지 않는 배려라 여겼어요. 근데 친구들은 반대로 제 태도에 실망을 했더라구요.” 후회하는 만큼 강 씨는 출소 후 조금 달라졌다. 이제 그는 타인에게 어려움을 말하고, 필요할 땐 도움도 요청하곤 한다. 그의 친구는 출소 후 지낼 거처를 제공했고, 친구 부모님은 강 씨가 주민등록을 할 수 있도록 주소지를 제공했다. 강 씨는 ‘전태일과친구들’ 관계자와 함께 공공기관을 찾아 긴급생활지원금도 신청했다. 대구 수성구청은 강 씨에게 임시 거주지를 제공했고, 9월 현재 그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곧 청년임대주택에 입주할 예정이다. 강 씨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건 이기적이고 나약한 태도가 아닌 시민의 권리라는 걸 배우고 있다. 교도소에서 편지로 소통할 때, 강 씨가 가장 자주 언급한 건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즈음에 엄마와 헤어졌다. 일터에 나간 아버지는 늘 밤늦게 귀가했다. 캄캄한 유년의 빈집은 그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에도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 역시 빈집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 대소변 치우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그건 별 고통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병원에 있던 4개월간 혼자 집에서 지낼 때 정말 막막하고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퇴원해 집에 돌아온 4월 23일, 저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어요. 아,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아버지가 옆에 있구나….” 그 안도감은 또 다른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강 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도시가스가 끊긴 집에선 끼니 해결도 어려웠다. 돈을 벌어야 했다. 당혹스런 일은 아버지 퇴원 바로 다음 날인 4월 24일 밤부터 벌어졌다. “편의점에서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온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어두운 집에 홀로 두고 일하러 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혼자 있으면 아버지도 나처럼 막막할 텐데, 혼자 있다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별 걱정이 다 들고 너무 불안했죠.” 이미 깊은 우울증을 앓던 그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인 5월 1일 강 씨는 편의점 사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강 씨는 “그날의 해고가 결정타였다”고 회고했다. “굉장히 우울하고, 무기력할 때였거든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알바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못하고, 그러다 해고당하고….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나아질 희망도 없고, 노력을 한다고 내일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다 엉망이었죠.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날 모든 게 끝장났구나 싶었어요. 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도 컸구요.” 바로 그날부터 강 씨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재판부는 강 씨의 방치를 고의에 의한 존속살인으로 판단했다. 약 3년 4개월이 지난 지금, 에둘러 가지 않고 강 씨에게 물었다. “재판부 판결대로, 아버지를 본인이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강 씨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하늘을 한 번 보고, 땅도 잠시 바라봤다. 작은 한숨도 뱉었다. “그게… (잠시 침묵) 제가 그런 거죠. 제가 아버지를 죽인 거죠.” 뜻밖이었다. 강 씨는 재판 과정에서 유기치사를 주장했었다. 근데 이제 와서 왜? “제가 아버지 누워 있는 방에 안 들어갔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고…. 아버지를 죽일 목적으로 안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안 들어가서 돌아가신 건 맞으니까….” 뭔가 애매한 말이었다. 강 씨의 이런 태도는 처음이 아니다. 사건이 벌어진 그때부터 모든 게 그랬다. 판결문에도 당시 상황이 담겼다. “피고인(강도영)이 피해자(아버지)의 사망을 의욕하고 적극적인 행위로서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고, 피고인은 피해자를 사망하도록 놔두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로도 피해자가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호소하면 물과 영양식을 호스에 주입하는 등 포기와 연민의 심정이 공존하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대구지법 제11형사부 판결, 2021고합248) 여전히 그때의 심정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했다. 내가 따지듯 물었다. “그때 도영 씨가 안방에 들어갔으면 아버지가 생존했을 거 같아요?” “(한참 동안 침묵) 확답하긴 어렵네요. 아버지는 제 방치가 아니라 뇌출혈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긴 하죠. 퇴원할 때 의사도 ‘언제든 사망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사망 원인은 누구도 알 수 없죠.” 부검 결과 아버지의 사인은 ‘영양실조에 따른 폐렴’이었다. 언뜻 강 씨의 방치에 따른 결과로 보이지만, 아버지는 병원에 있을 때부터 영양실조였다. 입원 당시에도 생명이 위중한 응급상황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사인과 사망 시점을 엄밀히 따져야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판정하기 어려운 내면의 풍경, 즉 ‘강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의도했는지’ 여부만 쟁점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도 사인을 정확히 모르는데, 강도영 씨만 처벌받았잖아요! 그게 억울할 수도….” 강 씨가 내 말을 끊었다. “억울하지 않아요. 정말로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결국 확실한 사실로 남은 건, 제가 책임을 안 졌다는 거잖아요.” 세상에서 잊히고 싶다고 말하던 때처럼 강 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도의적인 책임에서 비롯된 감정일까? “누구를 탓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달라질 일도 없잖아요. 그냥 제가 책임을 못 졌으니까… 아픈 아버지는 제 책임이었으니까요. 제가 방에 들어가지 않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강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어떤 말을 해도 세상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이란 아쉬움도 밝혔다. 교도소에서 그때의 사건을 수없이 곱씹어 봐도 답을 딱히 내릴 수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마음만 괴로웠다. 결국 그는 “모든 건 내 책임”이라고 스스로 정리했다. 스물한 살 때 겪은 그 엄청난 일을 자기의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하려면 아직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한 듯했다. “구치소, 교도소 감방 동료들에게 왜 구속됐는지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길 했는데, 다들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더라구요. 감방에 와서야 위로의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기분이 디게 묘하더라구요.” 셜록 보도 직후, 강 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에 시민 약 6000명이 서명했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강 씨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가 복지 사각지대에 대해 사과했다. 강 씨는 역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감방에서 TV 뉴스를 보는데, 제 이야기가 나오니까 얼떨떨 하면서도 힘을 얻는 계기가 됐죠.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나쁘게 볼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구요.” 강 씨에게 “다시 아버지가 쓰러진 스물한 살 그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것 같느냐”는 다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수없이 생각했는지 막힘 없이 답이 나왔다. “아버지와 제가 같은 처지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퇴원시키지 않고 제가 멀리 도망갈 거 같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잖아요. 최소한 아버지는 살해 피해자, 저는 살인자는 되지는 않겠죠.” 아픈 부모를 병원에 두고 연락 끊어버리기. 벼랑 끝으로 몰린 가난한 누군가에겐 최악의 수가 곧 최선의 선택이란 걸, 강 씨는 교도소에서 배웠다. 그가 홀로 아버지를 돌볼 때 도움의 손을 내밀거나, 연락을 끊어버리라는, 최악이면서 최선인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강 씨는 학업을 이어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강 씨의 꿈은 힙합 뮤지션이다. 그는 구속 전부터 작사·작곡을 했다. 기존에 다니던 대학의 전공은 음악과 거리가 멀었다. 다시 수능을 보는 것까지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알바 등 일자리도 알아보는 중이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구속 기간 내내 생각했다. 가족이 없는 그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공부도 해야 한다. 버거운 길을 앞둔 그에게 다시 물었다. “돕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다 거부하고 세상에서 잊히고 싶다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계속 간병살인 청년으로 불리면서 과거에 묶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잖아요. 좋은 일도 아니고, 제가 잘한 것도 없잖아요. 좋은 음악인으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어요.” 인터뷰는 그가 살던 집 근처에서 끝났다. 우리는 어느 허름한 치킨집 앞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큰길 쪽으로, 강 씨는 그의 옛집 골목 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당장 재개발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누추한 동네의 골목길에서 강 씨 뒷모습만 유난히 알록달록하게 보였다. 카카오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서울행 KTX를 타러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더는 강 씨를 간병살인 청년이라 부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한 당부이기도 했다. 래퍼 강도영이 어떤 곡을 들고 세상으로 나올지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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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살인 청년’ 강도영 씨 가석방으로 출소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19화]
‘간병살인’ 청년으로 알려진 강도영(가명) 씨가 만기 약 9개월을 앞두고 7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강 씨는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생활고에 시달려 끝내 부친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지난 2021년 5월 구속됐다. 강 씨는 살인 고의가 없었다며 유기치사를 주장했으나, 1심-2심 재판부는 모두 존속살해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강도영 씨의 사연은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2021년 11월부터 진행한 프로젝트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관련 기사 보기 – “쌀 사먹게 2만원만.. 22세 청년 간병인의 비극적 살인] 강 씨의 부친 고 강영식(가명. 당시 56세) 씨는 지난 2020년 9월 목욕탕에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강영식 씨는 응급 수술을 받고 의식을 찾았지만, 사지 마비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콧줄을 통한 경관급식으로 식사를 했고, 대소변 처리 역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강영식 씨는 뇌출혈 전문병원과 요양병원에서 약 8개월 치료를 받았으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간병비 포함 치료비 약 2000만 원이 아들 강도영 씨에게 청구됐다. 입대를 위해 대학 휴학 상태였던 강 씨(당시 22세)에겐 돈이 없었다. 강 씨의 삼촌이 직장에서 퇴직금을 중간정산 받아 치료비를 댔다. 강영식 씨는 계속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아들 강도영은 더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강도영 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엄마의 거주지는 물론 생사도 모른다. 강 씨는 2022년 4월 23일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에서 홀로 돌봤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살던 집의 월세는 아버지 입원 직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도시가스, 인터넷, 휴대폰이 요금 미납으로 차례대로 끊겼다. 강 씨는 “쌀 사먹게 2만 원만 빌려달라”는 문자메시지를 지인에게 보내는 처지가 됐다. 결국 강 씨는 5월 초부터 아버지를 안방에 방치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5월 7일 안방에서 발견됐다. 강도영 씨는 집에서 체포돼 구속됐다. <셜록> 보도 이후 많은 시민이 돌봄과 간병 살인, 특히 ‘영 케어러(young carer)’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강도영 구명운동’에 나섰다.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와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공개 사과를 하고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영 케어러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관련 대책 정비에 나서기도 했다. [관련 기사 보기 – ‘강도영 선처 6천명 탄원.. 총리, 장관, 대선후보도 관심] 구속된 강도영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힌 시민도 많았다. 특히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2021년 11월부터 월 1회 강 씨를 면회하며 심리, 생활지원을 해왔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 전 국회의원은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강도영 씨를 수차례 직접 만나는 등 강 씨가 ‘전태일-이소선 장학재단’ 제1호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데 힘을 보탰다. “강도영 씨의 사연을 처음 접했을 때 ‘타인의 도움이 없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오빠 전태일도 22세 때 사망했는데, 오빠 생각도 많이 났다. 오빠가 외로웠을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강도영 씨가 사회에서 잘 적응해 살 수 있도록 계속 힘을 보탤 생각이다.” 전순옥 전 의원이 지난 7월 말 <셜록>과의 통화에서 한 이야기다. 출소한 강도영 씨는 고향 대구광역시의 한 친구 집에서 머물고 있다. 곧 살아갈 집을 마련해 독립할 예정이다. <셜록> 역시 강도영 씨의 생활을 지원할 예정이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