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연구원정] 거리에 섰던 2030 여성들의 시간을 기록하는 연구를 하려 해요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이건 세 번째 글이에요! 첫 번째, [연구원정] 기록되지 않은 여학생,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의 역사를 찾습니다  두 번째, [연구원정]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대한 선행연구의 모양새 오밤중에 비상 계엄을 듣고 놀라고, 오늘 오후엔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에 방방 뛰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 거리의 한복판에 계셨나요? 계시지 않았더라도 혹시 생중계 영상으로 함께 해주시지는 않았나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12월 14일에 가결됐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여의도 광장은 사람들로 빽빽했죠. 그 중 단연 주목을 많이 받은 것은 바로 응원봉을 든 2030여성들이었습니다. 집회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건,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가득한 2030 여성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안에 들어있었고요. 사실 언론에서는 갑자기 2030여성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처럼 주목했지만, 사회운동을 2030여성이 이끌어갔던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젊은 여성들은 늘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갔고, 거리에 섰습니다. 다만 이 사회가 그걸 주목하고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죠. 이번 시위를 겪으며 더욱 여성이 거리에 선 시간들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직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들이 이미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여성들이 만들어낸 공간과 시간을, 촘촘하게 연결짓는 연구가 많아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요? 혹은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게 될까요? 2000년에도 여전히 거리에 섰던 여성들이 있어요 2030 여성들이 거리의 선봉에 서서 한국 사회를 바꿔낸 역사는 유구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2000년대에 2030 여성들이 진행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2000년 여성국제법정(공식명칭: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앞서 여성 대학생들의 시민들의 참여 독려를 위해 2000년 학생법정을 기획하고 운영합니다. 지역별로 양상과 기간은 다양했어요. 2000년 학생 모의법정은 1998년 8월에 기획해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이뤄졌어요. 정대협이 서울대, 이화여대, 홍익대, 명지대 등 국내 50여 대학 여학생 모임과 일본 오비린대학 학생 중심으로 출범 소식을 밝힌 것이 시작이었죠. 어떻게 이 사회에 의제를 던질 것인가, 그 방법들이 차곡차곡 모였습니다. 시위로, 문화제로, 법정의 형태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쳤죠. 그 시간을 글로 엮어낸 자료는 부족했지만, 당시의 2030여성들은 당신들이 남길 수 있는 사진과 회의록을 철두철미하게 기록해뒀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남긴 족적을 더듬어 따라가 보려 해요. 여성의 시선에서 질문합니다. ‘객관성’이란 뭐죠? 페미니스트 질적연구에서는 ‘기록이 곧 문헌’이라는 공식을 해체하고 모든 감각으로 들어오는 자료를 기록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는 몸 조차도요. 언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지 밝혔을 때 오히려 객관성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아주 주관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연구자가 문서의 구성성을 밝혀 문서가 가진 역사성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그 문서를 통한 하나의 역사적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도나 해러웨이라는 학자는 이것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기도 했죠. 연구자가 자신의 특수한 장소성과 위치를 연구에 반영할 때야말로 그가 가진 주관성과 한계를 드러내고 역설적으로 객관성에 더욱 근접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회과학적인 지식 생산의 장에서 여성의 경험과 지식은 지식의 형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는 결국 사회적인 맥락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분리가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 질적연구는 흔히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대표되는 ‘객관성’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죠. 시간을 찾는 여정은 이렇게 진행될 거에요 연구의 핵심 자료는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들이 남겼던 사진과 문서 자료들, 다른 하나는 그 자료를 더 심층적으로 연결해 줄 사람의 이야기들입니다.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는 어떤 자료를 어떻게 배치할 지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 회의록의 글자를 들여다보면서 또 눈물을 뚝뚝 흘렸답니다. 누가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뚜벅뚜벅 자신들의 시간을 쌓아 올렸던 당시의 2030 여성들의 마음이 와 닿았어요. 마치 윤석열 탄핵 시위에서, 내가 꼭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당시의 여성들은 내가 꼭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들은 길에 나왔고, 저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역사로 만드는 일입니다. 큰 숙제를 받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이 글이 잘 정리가 된다면, 이후에 다가올 사람들에게 어떤 용기, 어떤 응원을 줄 수 있을까 기대도 되어요. 연구원정 부트캠프 일원으로 작성하는 글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구독은 저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지워주니까요, 혹시 지나가다가 이 글을 읽으셨고 공감하셨다면 구독을 해주세요. 그럼 제가 도망가지 못하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을 겁니다 크크. 앞으로도 계속 저는 기록하고 쓰는 역할을 다하겠어요. 20년 뒤에, 30년 뒤에, 100년 뒤에 다가올 여성들을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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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대한 선행연구의 모양새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 입니다. 🚀 지난 글 [연구원정] 기록되지 않은 여학생,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의 역사를 찾습니다 에서 이어집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대한 선행연구는 2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운동사 연구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 학술동향 중 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이미 그 자체로 양이 아주 방대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운동사를 2가지 분류로 나눠 살펴봅니다. 대중들이 문제해결운동에 개입하는 여러 방식에 주목하는 연구가 첫번째, 한국 안팎 지역과 경계를 넘어선 초국적 운동으로 분석하는 것이 두번째입니다. 나눈 기준은요, 제 문제의식에 기초해 자의적으로 나눈 것이니 읽을 때 참고해주세요. 물론 이 중에선 서로 겹치는 것들도 있고 관점이 상당히 다양하기도 합니다. 운동 과정을 어떤 형태로 볼 지 연구자마다 관점이 달랐거든요. 이번 글에서는 간단히 선행연구들의 요점과 의의를 살펴보면서 운동사가 축적되어 온 모양새를 더듬어보려해요. 제가 읽고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 많을 수 있고, 독자 여러분의 관점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사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한 톨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글을 써봅니다. 🎧 듣고자, 기억하고자 하는 대중이 계속 생겨요 일본군성노예제문제 해결운동을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중의 참여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이 더 많이 인식하고 있는데요. 여러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이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다루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한 각계각층 중에서도 일반 시민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원인과 과정에 주목한 연구도 있었습니다. 이나영(2017)은 공적 청중(audience)이라는 개념을 경유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수요시위, 평화의 소녀상(약칭 평화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나비기금 등 여러 매개가 운동을 잇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이지요. 운동의 당사자성이 확대되어 역사적 책임을 계승하고 유기적인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공감적 청중'이 생긴 것입니다. 또 다른 연구자인 김명희(2018)는 운동의 확장되는 매개로 교과서와 평화비를 주목합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이 쌓아온 시간은 사회적인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고,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합니다. 피해생존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세대가,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해결을 위해 앞장서는 이유를 여러 학자들이 탐색했던 것입니다. Hana Jun(2020)은 고등학생들에 주목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언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역사적 공감과 국가적 정체성을 토대로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학생들을 인터뷰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편협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알아갈수록 점점 넓어져 학생들이 '우리'에 대한 역사적인 경계를 확장시키는 과정을 촘촘하게 추적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의 확산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현시원(2017)은 평화비에 시민들이 목도리를 두르거나 꽃을 두고 가는 등 여러 참여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평화비를 보살핀다는 생각이 “마치 애완동물과 자신보다 작은 아이들을 ‘귀엽다’고 바라보는 인식의 틀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본 것이죠(190). 허윤(2021)은 평화비가 기억의 대상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고 피해생존자를 단순하게 "보호와 부조의 대상으로 사유"하게 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406). ‘작은 소녀상’이라는 이름으로 일상화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섹슈얼리티, 고통 등 대중이 불편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제거한 “친근감”(381)이 있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들고요.  하지만 저는 이런 비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비판의 비판이죠. 사실 평화비를 감각하는 개인의 경험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평화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 인상, 경험은 다 다르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자세한 논의는 장소정(2023)을 참고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학술지에 실린 글 중에서는 이나영(2022)의 논의가 비슷한데요. 이나영(2022)은 젊은 여성들이 평화비를 통해 개인의 성폭력 경험을 환기하는가 하면 피해생존자를 무력한 대상이 아니라 고발의 주체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계속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중입니다. 저의 관심사도 이런 부분에 있어요. 운동을 계속 이어온 사람들의 시간과 경험을 잇다보면 새로운 연구와 비판이 축적되겠지요. 기대가 됩니다. 🌐 해결을 위해 지역, 경계 넘어 모이기도 했죠 한국 안에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북한에서도요. 이 과정을 주목한 연구도 있습니다. 문소정(2021)은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이하 부산 정대협) 활동이 등장한 지역적 맥락과 정체성을 토대로 지역성, 차이성, 혼종이 어떻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과의 사이성을 구성했는지 고찰합니다. 문경희(2022)는 경남지역 활동가들의 기억과 구술증언을 듣고 피해생존자와 활동가 간의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성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살펴보죠. 이경희(2022)는 경남지역에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이자 연구자로서 한국정부가 이 문제해결 운동을 지원할 때 서울중심으로 편협하게 바라봤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지역에서의 문제해결운동은 지역사회의 시민사회단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죠. 2000년 법정 그 자체가 보여준 초국적성에 주목한 연구도 있습니다. 2000년 법정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해 아시아 10개국이 참여한 시민법정입니다. 양현아(2021)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국제법정이 보여준 초국적 운동에 주목합니다. 국경의 경계를 넘어 여성 활동가와 연구자가 연대한 "여성시민법정"이었고(7), 남북한 공동기소를 이뤄내 통일운동의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8). 안연선(2015) 역시 2000년 법정에서 제시된 의제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단체가 상호작용한 경험을 주목하기도 했지요. 일본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많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는 피해국 숫자가 상당했고 그만큼 지원단체 역시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시도들이 있었거든요. 일본의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후사 도시오(2022)는 관부재판이라는 사건에 주목해, 일본의 시민사회단체가 법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시간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평화비 설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최근 더욱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문경희(2018)는 2016년 호주 시드니에 평화비가 건립된 것을 보고 코스모폴리탄 기억 정치라는 개념을 이용해 과정을 분석합니다. 이 평화비 설립에 참여한 이민자 집단에 주목하고 민족국가의 트라우마적 기억을 초국적으로 전환한다고 보았습니다. Elizabeth Son(2018)은 다양한 지역에서 설립된 평화비가 어떻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촘촘하게 따라가는 분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마치며 여기까지 살펴봤을 때에도 '아 연구가 정말 많구나!' 싶으실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 운동은 계속되고 있어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매일매일 새로 생기죠. 운동을 연구하는 선배 연구자들에게 들은 말 중에 기억에 오래 남는 말이 있어요. 운동을 보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한 발을 연구에, 한 발을 운동에 담그고 있어야 한다'고요. 활동가이자 연구자로서 위치성을 계속 고민하고 있는 저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문장입니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운동도 참 넓고, 지나간 운동은 얼마나 긴지. 공부하는 게 지난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알아가는 과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여러 전공의 연구자들이 운동에 대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죠. 시간은 계속 흐르니까, 제가 썼던 글도 언젠가는 '너무 옛날 얘기잖아!' '이건 관점이 너무 편협해!' 혹은 '이 사람은 아직 운동 역사를 잘 모르는구만' 하면서 지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빠르게 오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제 자리에서 계속 연구와 활동을 이어갈게요.  참고문헌 김명희. 2018. “일본군‘위안부’운동과 시인(recognition)의 정치 : 한국의 사회적 기억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34(3): 113-146.  문경희. 2018. “호주 한인들의 ‘소녀상’ 건립과 일본군 ‘위안부’운동” 『페미니즘 연구』 18(1): 47-92.  문소정. 2021. “부산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사이성에 관한 연구 - 부산정대협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41: 471-499.  안연선. 2015. “따로 또 같이: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운동을 둘러싼 초국가주의여성운동” 『비교한국학』 Comparative Korean Studies23, no.1 39-62 양현아. 2021. “식민주의의 견지에서 본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일본군성노예제라는 ‘전시 성폭력’” 『2000년 여성국제법정: 전쟁의 아시아를 여성과 식민주의의 시각에서 불러내다』 양현아·김수아 편. 일본군‘위안부’연구회 기획. 경인문화사.  이나영. 2017.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다시 보기 - 문화적 트라우마 극복과 공감된 청중의 확산” 『사회와역사』 115: 65-103. 이나영. 2022. “한국 여성운동의 ‘새로운 물결’과 ‘혐오’의 백래시: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가?” 『문화다양성과 아시아, 그리고 접점의 현상과 갈등』 변유경 엮음. 중앙대학교 다문화콘텐츠연구소 기획. 글로벌콘텐츠. 장소정. 2023. "일본군'위안부'운동을 둘러싼 기억과 정동의 배치: 평화나비 활동가 경험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허윤. 2021.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기억의 물화” 『구보학보』 27(1): 375-408 현시원. 2017. “‘위안부’소녀상과 ‘국민 프로듀스’의 조우: 이상한 이상화” 『소녀들: K-pop스크린 광장』 조혜영 엮음. 도서출판 여이연. Elizabeth Son. 2018. Embodied Reckongings: “Comfort Women,” Performance, and Transpacific Redress.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Hana Jun. 2020. ““I think the comfort women are us”: National identity and affective historical empathy in students’ understanding of “comfort women” in South Korea“ The Journal of Social Studies Research. 44(1): 7-19 * 이 글은 장소정의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운동을 둘러싼 기억과 정동의 배치" 제2장 3절을 일부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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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기록되지 않은 여학생,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의 역사를 찾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2018년즈음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다루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자원활동을 했던 적 있습니다. 온라인 문서 사용이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 당시 활동가들이 손으로 쓴 성명서와 가위로 잘라 모아둔 언론 기사 모음을 스캔하는 작업이었죠. 그때 마주했던 한 주먹의 종이뭉치가 준 위로와 충격은 지금까지도 제가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자료였어요.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 앞서 열린 2000년 학생법정 당시에 제가 만난 자료는 2000년에 열린 학생법정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와 준비자료습니다. 흔히 ‘2000년 법정’ 혹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되어있죠. 이 법정의 전체 이름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에요.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 10여 개국이 참가해 2001년 12월 3일과 4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앞서 여성 대학생들은 2000년 학생법정을 기획합니다. 1998년 8월에 기획에 들어가서 1999년 4월에 2000년 법정보다 먼저 학생들끼리 법정을 운영한 것이지요. 이유지님(당시 22세, 경기대 영문과 4학년)과 민승해님(당시 24세), 정은정님이 각각 임시위원장과 준비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운영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 등 국내 50여 대학 여학생 모임과 각 대학 총여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이 행사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죠.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를 담당했던 양미강님의 글을 보면 2000년 학생법정의 운영에 대한 이야기 조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전쟁의 아시아를 여성과 식민주의 시각에서 불러내다, 경인문화사, 2021년 33~35쪽) 학생법정은 원래 전국 5개 대학에서 개최하려고 했지만 호응도가 매우 좋아 이화여대, 조선대, 부산대, 창원대, 동아대, 경희대, 해양대, 원광대, 서원대, 한신대, 전주대, 서울대까지 전국 11개 대학에서 각자 학생법정이나 문화제를 개최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릴레이 수요시위를 열기도 하고 각자 지역단체들과 연대해 독자적인 행사를 만들기도 했지요. 일본의 오비린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 캠프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글로컬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여학생이 만들고 이끌어간 운동의 역사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각 대학 총여학생회와 여성위원회는 여러 여성인권행사를 개최했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는 그 가운데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예컨대 1999년 10월 26일부터 2주간 이화여대 여성위원회는 성폭력 관련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이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광주 민주화운동, 한국전쟁, 동티모르 사태 등 여성 성폭력 피해 사례를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이화여대 여성위원회는 문제해결을 기원하며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강덕경님의 초상을 완성하는 행사를 진행했고 이 지문 초상을 2000년 모의 학생 법정에서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2000년대 초반까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이화여대 여성위원회,홍익대학교 여성모임 ‘딴짓’등 이전부터 여학생 운동을 하고 있던 단위들은 적극적으로 운동을 도모합니다. 수요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하고 각 대학의 총여학생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2000년 학생법정을 홍보하기도 했지요. 일본군성노예제문제에 심각성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제 또래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보다도 다른 문제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떤 외로움의 감각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사를 읽다보니 시대를 거슬러 계속 청년 여성들이 이 운동에 결합하기도 하고 서로 끌고 밀면서 나아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료의 발견은 저에게 잔잔한 위로였습니다. 단절되어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00년 학생법정, 90년대부터 이어진 여성운동의 감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을 하고 있더군요. 운동의 지속성을 여기에서 찾았습니다. 여학생들은 누가 기록했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운동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여학생들을 추적하는 연구는 아직 부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운동에 개입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이 문제를 각자의 자리에서 기억하고 고군분투하며 함께 하고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후원으로, 누군가는 교육으로, 누군가는 활동가로서요. 지난 주 수요일(2024년 10월 9일) 1669차 수요시위가 열렸습니다. 한 연대발언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위 발언문을 준비하며 걱정이 되어 엄마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엄마도 대학생 시절 수요시위 현장에 있었다고요. 시위에 참여했던 한 사람이 엄마가 되고, 그 사람의 아이가 다시 학생이 되어 수요시위에 나올때까지의 시간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는 아무리 지우려는 사람들이 많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오래된 만큼, 누군가는 낡고 오래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운동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외롭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20대 여성들이 만들어낸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 운동을 역사화할 계획입니다. 2000년 학생법정은 저의 첫 시작이 될 거에요. 여학생들을 기사로 쓰지 않던 시대를 거슬러 그들이 손으로 남긴 메모, 오려붙인 종이들,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는 회의록들을 들춰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10년이 걸리던, 15년이 걸리던 이 운동에 참여했던 2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고자 합니다. 제가 외롭지 않게 운동하고 싶어서라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시작한 연구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제 연구가 응원과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봅니다. 문제해결운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이번 주에 1670차를 맞습니다. 길에서, 박물관에서 언젠가 독자 여러분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주세요. 그 마음이 사람과 운동, 연구를 이어가는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저는 다음 칼럼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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