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마이스터고 붐” 밀어붙이는 정부… ‘다음 선우’ 없을까 [열아홉, 간이 녹았다 4화]
인천공항에서 차로 약 15분 떨어진 인천국제공항 물류단지. 잿빛 건물 틈으로 대형 화물차들이 바삐 움직였다. 5차로를 사이에 두고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장들. 바로 그곳에 스태츠칩팩코리아가 있었다. 오후 2시를 넘기자 공장 정문에 택시 세 대가 멈춰 섰다.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노동자들이 여럿 내렸다. 이들은 부리나케 달려가 개찰구를 통과했다. 안쪽에도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앳된 얼굴이었다. 김선우(가명, 23) 씨도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근무했다. 그는 2020년 10월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의 ‘1호’ 취업생이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에 이상이 생겼다. 간이 녹아내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이식 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열아홉이었다.(관련기사 :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얘가 그냥 인문계(고등학교)를 갔으면… 대학을 갔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엄마 이하영(가명) 씨는 선우 씨가 아픈 게 꼭 엄마인 자기 탓 같았다.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한다던 선우 씨를 말리지 못한 것도, 울산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에서 일한다는 선우 씨를 붙잡지 못한 것도, 안색이 좋지 않았을 때 병원으로 바로 가지 못한 것도. 선우 씨는 2022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산재를 신청한 것. ‘일’을 하다가 아프게 됐단 걸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앞으로 들 치료비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1년 8개월 만에 산재 ‘불승인’ 결정을 통보했다. 그는 지난 8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에서 산재 승인을 다시 다퉈보겠다는 취지였다. “솔직히 알리고 싶기도 한데, 학교에서도 안 들을 것 같아서요. 취업 담당 선생님 말고는 안 알렸어요. (…) 다른 분들은 뭐 없죠. 졸업하면 끝인데.” 선우 씨는 취업 담당 교사 외에는, 아파서 퇴사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그는 “학교가 취업률을 더 신경 쓸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후배들을 거기(스태츠칩팩코리아)에 보내는 것 같더라고요.” 선우 씨가 졸업한 고등학교 홈페이지에는 졸업생 취업 현황이 공개돼 있다. 최근 5년간 90% 이상의 취업률을 자랑했다. 10월 집계된 취업 현황에 따르면 올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취업한 3학년 학생은 8명이다. 지난해에는 6명이 취업하고, 2명이 현장실습을 나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회사는 전국 수많은 직업계 고등학교, 대학교와 산학협력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2021년에는 “전국 특성화고등학교 출신 학생 500명 이상 채용”을 홍보했다. 선우 씨는 마이스터고등학교를 다녔다. 정식 명칭은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로, 직업훈련을 통한 전문기술인 양성을 목표로 했다. 직업계고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3학년 2학기가 되면 학교와 협약을 맺은 업체에 ‘현장실습’을 나간다. 선우 씨도 2020년 10월 ‘실습생’으로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출근했다. 학교에서 교사의 소개로 구한 일자리. 검증된 회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제 취업률 올리니까 그냥 아무 곳에 나가서, 선생님들은 이제 일일이 확인하지 않거든요. 근데 저희는 이제 중요하잖아요. 저희는 3년이 걸린 거니까. 그래서 학교에서는 이제 선별해서 갖다줬다고는 하는데 저희가 알아보면 아, 이거는 아닌 거 같은데, 싶은 회사가 많은 거죠.”(면접참여자 H, 김혜진 외 2인, <직업계고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노동환경 및 노동세계 진입 실태> 중) 현장실습생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병을 얻었다는 소식은 흔한 뉴스가 됐다. 올해만 해도, 지난 5월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이 설비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유족들은 ‘황화수소 중독’을 의심했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삼성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 출신 이승환 씨 이야기도 화제가 됐다. 그는 2021년 10월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케이엠텍’에서 일했다. 케이엠텍은 삼성의 1차 하청 업체로 갤럭시 휴대전화 등을 조립하는 곳이다. 그는 이듬해 1월 영진전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업무를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해 9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승환 씨는 이후 7차례 항암 치료를 받았다. 올해 3월에는 조혈모세포 이식수술도 받았다. 통증으로 잠 못 드는 날이 늘었고, 이식 후 염증반응으로 온몸이 까맣게 변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4월 산재를 신청했다. 산재보험법상, 업무와 질병간의 인과관계는 피해노동자 측에서 입증해야 한다. 케이엠텍은 회사 내부 자료를 승환 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선우 씨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산재 신청을 하기에 앞서 회사에 작업환경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자료를 주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내부 자료를 요청하라고 답했다.(관련기사 : <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현장실습생 F : “학교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교육은 딱히 잘 못 받았던 것 같아요.”현장실습생 D : “얘기해줬을 수도 있는데 기억 안 나요.”현장실습생 C : “딱히 얘기해 준 게 없는 것 같아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등 3단체, <특성화고 학생의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과 노동세계진입연구> 중) 현장실습을 앞둔 학생들을 상대로 한 노동안전 교육은 여전히 미흡하다. 일터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현장실습생 B : “바닥 미끄러우니 유리 조심하고, 뜨거운 거 조심하고… 그 정도밖에 없어요.”현장실습생 A : “그냥 몸에 안 좋다는 것만. 그래서 토시랑 마스크 끼라고. 그거 할 때는 꼭 마스크 끼라고 하죠.”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등 3단체, <특성화고 학생의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과 노동세계진입연구> 중) 사회는 실습생에게 친절하지 않다. 선우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라고 경고할 뿐이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 아니, 그 새끼들 공장 나갔던 것들이 다 처돌아와. 몇 달 더 버티라니까. 아유, 우리 반이 바닥 찍을 것 같아. 니는 괜찮지? 사고 안 쳤지? 소희야, 버텨야 된다이?”(영화 <다음 소희> 대사 중)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퇴사는 쉽지 않다. 직업계고 3학년 학생은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에 거의 의무적으로 참여한다. 법률상 의무는 없지만 관행처럼 굳어졌다. 심지어 현장실습 중 돌아오는 학생에게 징계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당장 저희 학교만 해도, 업체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은 학생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반성문을 쓰게 하고 징계를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의 실습 기회는 가장 마지막에 주어졌습니다.”(김종하, 2017 인권논문 수상집 <특성화고 현장실습의 현실과 개선방향> 중) “선생님들은 현장실습 보냈다고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알아서 버티라고만 하고. 무책임해요. (실습 중에 학교로) 돌아오면 욕하고. (…) 선생님들이 안 좋아했어요. 실적이 떨어지니까.(면접참여자 D)”(김혜진 외 2인, <직업계고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노동환경 및 노동세계 진입 실태> 중) 왜 현장실습생들은 안전하지 않은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을까. 현장실습제도는 산업체 인력 공급을 목적으로 시작됐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직업계고 학생들에 대해 재학 중 현장실습을 의무적으로 이수하도록 강제했다. 이후 여러 정권을 거치며 실습 기간은 2개월에서 1년까지 늘어났다. 실습생의 인권침해 문제와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하자, 200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제도에 제약이 생겼다. 수업 일수와 취업 보장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실습을 나갈 수 있게 된 것. 규제는 2년이 지나지 않아 풀렸다. 이명박 정부는 청년 취업난을 해소하기 위해 ‘고졸시대’의 포문을 열고자 했다. 그는 현장 중심 직업교육을 강조하며, 특성화고 취업률 목표를 60%로 잡았다. 취업률은 학교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때부터 학교의 취업률 경쟁은 시작됐다. 감사원은 2015년 고등학교 직업교육 활성화 분야에 관해 이렇게 지적했다. “일부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취업률을 높이고자 전공과 무관하거나 현장실습이 제한된 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거나 현장실습 협약과 배치되는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등 현장실습 제도 도입 취지에 맞지 않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감사결과보고서-산업인력 양성 교육실책 추진 실태(2015)> 중)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2011년 광주 기아자동차 공장 뇌출혈 사고 이후, 2012년 울산 금영ETS 공장 지붕 붕괴 사망사고, 2014년 울산 신항만 공사 작업선 전복 사망사고, CJ제일제당 진천공장 사망사건, 2016년 성남 토다이 사망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2017년 전주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사망사건, 제주 생수업체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교육부는 2018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시도교육청 평가 기준에서 ‘직업계고 취업률’을 폐지한다는 대안이었다. 이어 조기취업 형태의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이 폐지되고, 학습 중심의 현장실습만 허용됐다. 취업 시기 역시 3학년 2학기가 종료된 겨울방학부터 가능했다. 다만, ‘현장실습 선도기업’인 경우, 3학년 2학기 수업 중 3분의 2 이상을 이수하면 취업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장실습 선도기업’은 현장실습을 운영하는 기업 중 교육청 심의를 통해 우수한 실습 여건을 갖추었다고 인정받은 기업이다. 이후에도 사건·사고는 이어졌다. 2021년 여수 요트 선착장 실습생 사망사고, 2024년 전주 페이퍼 사망사고로 현장실습생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선도기업’이라는 꼼수로 여전히 ‘값싼 노동력’이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2월 ‘현장실습 제도’를 ILO 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도제 제도나 직업훈련 참여 최저 연령은 16세인 것으로 보이며 현장실습생은 노동에 진입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을 초과하고 있다”며 “실습생에 대한 안전과 훈련 감독 부재의 상황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현장실습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8월 중등직업교육 발전 방안을 내놓았다. ‘제2의 마이스터고 붐’을 조성하겠다며, 첨단산업 중심 마이스터고를 육성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은 정말 많은 유해화학물질이 집약적으로 사용되는 산업입니다. 새로운 공정과 새로운 물질이 끊임없이 사용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이윤추구 논리가 안전보다 늘 우선돼 왔습니다. (…) 10대의 몸은 성인의 몸보다 유해물질에 민감합니다. 따라서 10대 후반부터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을 정부가 적극 육성하는 게 걱정될 수밖에 없죠.”(이종란 노무사, 2024. 10. 23.) 이종란 노무사는 고 황유미 씨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근무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발병한 것이다. 유미 씨는 산재를 신청한 지 7년 만에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집단역학조사가 실시됐다. 이때 반도체 산업노동자들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김선우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그는 입사 1년 2개월 만에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질환으로 간 이식을 받았다. 산재 신청 결과는 불승인. 행정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지, 그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현장실습생으로 열아홉의 나이에 공장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2014년 CJ 현장실습생 김동준 군 사망사건을 소재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쓴 은유 작가는 책에 이렇게 썼다. “청소년 노동이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환경과 문화에서는 누구의 노동도 안전하지 못하다.” 오늘도 다음 소희, 다음 동준, 다음 선우가 공장으로 출근한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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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때문에 19살 간이 녹았다? 당신들이 틀린 이유 [열아홉, 간이 녹았다 3화]
고등학교 3학년 김선우(가명) 씨는 반도체 공장으로 나갔다. 학교의 ‘1호 취업생’이었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인 스태츠칩팩코리아. 일터에는 화학물질이 가득했다. 그는 얇은 덴탈마스크와 방진복을 착용한 채 하루 9시간, 많게는 11시간 30분씩 작업장에 머물렀다. 24시간 가동되는 기계에 맞춰 생체리듬을 바꾸다 보면 밤낮이 바뀌기도 했다. 취업 14개월 만인 2021년 12월, 간이 녹아내렸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치의는 ‘마지막 인사’를 하라며 가족들을 불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위독했던 상황. 겨우 만 열아홉이었다. 기적적으로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았다. 몸 밖으로 나온 선우 씨의 간은 형체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났지만 더 큰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선우 씨는 2022년 9월 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당시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상황입니다.”(스태츠칩팩코리아 측 의견서) 회사는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을 지적했다.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건 ‘특수건강검진표’. 결과지에는 “절주 또는 금주가 필요하다”는 소견이 적혀 있었다. “제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요. 교수님이 ‘20대 초반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이 정도로 간이 상하지 않는다고, 절대 안 상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근데 회사가 그 얘기(음주습관 지적)를 하니까 너무 어이가 없더라고요.”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정기적으로 ‘특수건강진단’을 받는다. 선우 씨도 2021년 4월 특수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간 기능 검사, 빈혈 수치 등에서 이상 소견은 없었다. 다만, 음주력에 ‘주의’가 표기됐다. ‘일주일 1잔 하루 4잔’이라는 수치 때문. ‘주의’가 필요하다는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은 ‘1주 1회, 1회 소주 기준 0.5병’ 수준이었다.(관련기사 : <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결과지를 보면 혈청 지티피(ALT), 혈청 지오티(GOT), 감마지티피(γ-GTP) 모두 정상이어서 음주력은 있지만, 이로 인한 간에 영향은 없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감마지피티는 음주로 인한 간 영향 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혈액검사 지표로, 이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은 음주로 인한 간 영향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송홍석 신천연합병원 내과 진료부장은, 선우 씨의 진료기록을 검토한 뒤 “알코올성 간질환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당시 간 기능 검사가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 이어 “음주가 원인이었으면 (진료기록상) ‘알코올성 간 질환’이라고 명시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간을 녹일 수 있는 또 다른 원인에는 독성간염이 있다. 이는 한약, 양약, 건강기능식품 등과 같은 약제를 복용하다가 발생하는 간 기능 손상을 말한다. 동아대학교병원 입원기록에 따르면, 선우 씨는 과도하게 약물을 복용한 이력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급성간염이 일어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점, 회사에 근무하고 1년이 지나 상기 질환이 발생한 시간적 선후 관계를 고려할 때 피재자(김선우)의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 질환은 작업장에서 노출된 미상의 세척 용제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됨.” 선우 씨 주치의는 사업장을 의심했다. 입사 및 업무 중 특수검진을 할 때 특이사항 없이 건강했던 점, 가족력도 없고, 바이러스 간염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는 점 등을 들어 외부 요인이 작용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라인에 있을 때는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거든요. 선우가 (2021년) 5월 말부터 의자에 앉아서 조는 걸 자주 봤어요. 제가 자주 깨워주기도 했는데, 그 뒤로 코피도 되게 자주 흘렸던 것 같고요.” 동료 이창민(가명) 씨는 선우 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던 2022년 1월, 선우 씨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씨는 동일한 공정, 바로 옆 라인에서 근무했다. 선우 씨는 집에 돌아가면 쓰러지듯 잠들면서도, 내내 피로를 호소했다. 선우 씨는 반도체칩에 전자기판을 부착하는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에 있었다. 4조 3교대 근무 형태. 6일 근무하고 이틀 쉬는 식이었다. 6일 중 하루 이상 연장 근무는 필수였다. 한 주에 약 51시간 30분을 일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한도인 ‘주 52시간’을 넘지 않게끔 맞춰진 시간이다. “역한 냄새. 약물이랑 아세톤 냄새가 나죠. 주유소보다는 조금 약한데, 맡으면 불쾌한 냄새예요. 퀴퀴한 냄새라고 해야 되나.” 선우 씨에게 주어진 건 방진복과 얇은 덴탈마스크, 천코팅장갑, 비닐장갑이었다. 입술 모양이 다 보이는 얇은 마스크를 뚫고 독한 냄새가 들어왔다. 기계에 묻은 화학물질을 씻어내다 보면 비닐 장갑이 찢어져 손이 젖기도 했다. 환경부가 운영하는 화학물질종합정보시스템에는 사업장에서 다루는 화학물질 정보가 공개돼 있다.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다루는 화학물질은 혼합물질을 포함해 모두 365가지. 이를 단일물질로 구분하면 111개에 달한다. 여기에는 구리, 주석, 은 등 간 독성을 유발하는 물질 26개도 포함된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반도체 공정 중 유해성이 낮은 후공정을 담당하고 있는 업체”라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작업환경측정 결과 측정대상 물질 유해인자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 결과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작업환경측정 제도의 한계가 있다. 사업장에서 다루는 모든 화학물질을 대상으로 이뤄지지 않고, 일부 요인만을 대상으로 실시한다는 점. ‘작업환경측정 대상 유해인자’로 정해진 물질에 한해 노출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검사 대상이 된 화학물질은 111개 중 46개. 간 독성을 유발하는 물질 26개 중에서는 15개만 측정 대상이 됐다. 또한, 복합적으로 유해인자에 노출된 경우 신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선우 씨는 4조 3교대로 근무했다. 야간작업은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2급 발암물질이다. 동시에 다량의 화학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 노출돼 있었다. 야간작업, 또는 각각의 유해인자에 대한 개별 인과관계를 연구한 결과는 존재한다. 반면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 자료는 부족하다. 그 때문에 업무상질병 여부를 판단할 때, 복합적인 유해인자가 질병에 미칠 영향을 보다 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도 있다. “유해인자 노출기준은 해당 유해인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거나 평균 근로시간 이상으로 장시간 근무하는 경우나, 작업강도가 높거나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등 작업환경의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등에는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대법원 2017년 11월 14일 선고, 2016두1066)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결정을 통보한 것은 지난 5월. 산재 신청으로부터 약 1년 8개월이 지난 때였다. ▲직업환경연구원 조사 결과, 독성 간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물질의 노출이 없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에서 측정대상 물질 유해인자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이었다 ▲사업장 측 진술상, 동일공정 근무자 중 유사 증상 발병자 또는 검진 결과 이상소견자는 발생한 적 없다는 점들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다만 판정위원 중 한 사람은 “작업 중 간독성 물질은 일부 있”었다면서도, “독성이나 노출량을 고려할 때 상병을 유발할 수준은 아닐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사업장) 조사하는 날 (연구원) 태도를 보고 마음의 준비는 했어요. 회사 설명만 듣고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고,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고.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판정위원) 만장일치로 불승인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진 못해서 충격 먹었어요. 전원(불승인)은 말이 안 되죠.”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데 있다. 대법원은 이를 고려해,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업 관련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바 있다.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대법원 2017년 8월 29일 선고, 2015두3867) 선우 씨는 녹아버린 간 때문에 그 원인을 명확히 알아낼 길이 사라졌다. 대신 평생토록 약값과 치료비가 따라다닌다. 그는 2022년 5월 회사를 퇴직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떠넘겼다는 죄책감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3년간 든 치료비와 약값만 약 2억 원. 평생 얼마나 더 들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선우 씨가 산재를 신청한 이유에는, 가족에게 짐 지운 돈 걱정을 줄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선우 씨는 지난 8월 행정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취소를 구하겠다는 취지다.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힘들어요. 결과가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희망고문이 제일 힘들죠. 그래도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서 이겨내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아직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자 산재 승인의 벽을 넘어야 했다. 무엇이 선우 씨의 간을 녹게 했는지 누구보다 알고 싶은 사람은, 바로 선우 씨 자신이다. 음주 습관이나 가족력, 약물 과복용은 원인은 아니었다. 작업장에 대한 의심은 있지만, 복합요인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 산재 불인정의 근거로 제시된 역학조사 결과나 작업측정보고서 역시 한계가 지적된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 번 더 고비를 넘겼다. 당시 주치의는 재이식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간 이식을 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 다행히 약물로 위기는 넘겼다. 다만 앞으로 몇 번의 위기를 더 넘겨야 할지, 또 몇 번의 재이식을 받아야 할지, 아니 재이식을 받을 수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법원(판례)에서는 산재보상보험법에서 말하는 업무와 질병 간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니고,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규범적’ 인과관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왔다. 그럼에도 (근로복지)공단은 협소한 의학적 판단기준으로 산재불승인을 남발하여온 것이다.”(이종란 노무사, 2024년 7월 ‘산재 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산재보험 개선 과제 토론회’ 자료집 중)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 8월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 8월 30일 기자는 인사팀 관계자, 안전팀 관계자, 임원급 관계자와 번갈아 소통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 “당시 사내 공지로 헌혈 활동을 권하는 등 선우 씨를 도우려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보도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하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안전팀 관계자는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후 비보도를 요청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셜록의 보도 이후, 지난달 11일 내용증명을 보냈다. 앞선 보도에서 “허위사실을 포함하여 당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선우 씨에게 음주 때문에 질병이 발생한 것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없고, 본건 직원이 손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용액도 역학조사 당시 ‘물’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작업환경측정 및 역학조사 결과 안전하다는 판정을 받은 점, 매월 직원들을 상대로 안전교육을 실시하는 점, 사내 유사한 병명이 발생한 적도 없는 점”을 강조했다. 끝으로 “당사의 명예를 침해하는 위법한 보도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본건 기사를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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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3화]
[지난 이야기]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대성통곡하던 동생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 장향미(45)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향미 씨는 동생이 떠나고 나서 세 달 동안 동생의 동료들을 만나면서, 동생의 과로자살은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회사는 과로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향미 씨는 제일 먼저 증거보전신청을 하고 회사에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업무일지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기록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증거보전신청 소송에서 향미 씨가 이기자, 그제야 기한 직전, 그것도 출근 기록이 아니라 동생의 컴퓨터 로그 기록(시스템 접속 기록)을 A4용지에 인쇄해서 보내왔다. 모두 966장이었다. ‘엿 먹으라’는 걸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컴퓨터 로그 기록으로는 출퇴근 시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업무일지는 대부분 가린 채 제출했고, 면담 기록지와 야근식대와 같은 청구내역은 아예 제출하지 않았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회사가 가해자인데, 증거를 모두 가해자가 가지고 있다. ‘순순히’ 줄 리가 없다. 그렇다 해도 회사의 태도는 예상보다 더 괘씸했다. 인터뷰 내내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던 향미 씨 목소리가 화가 난 듯 점점 커졌다. “정말 웃긴 게, (회사가) 출퇴근 시간을 기록할 의무가 없어요. 회사가 당당한 것도 법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회사가 2016년에 근로감독을 받은 적이 있더라고요. 동생이 떠난 뒤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있었고요. 세 번이나 고발당했는데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노동법은 안 지켜도 되는 거예요.” 향미 씨는 2018년 4월 대책위와 함께 피켓시위를 시작했고, 기자회견을 열어 동생의 억울한 죽음과 과로자살 문제를 알렸다. “제가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요, 동생이 너무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동생이) 왜 죽었는지 꼭 밝혀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과로자살이라는 말이 언론에 나오고, 대책위와 매일같이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자, 회사는 그제야 동생의 과로죽음을 인정했다. 피켓을 든 지 네 달 만에, 동생이 떠난 지 반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회사는 공식사과를 했다. ‘면피용’ 사과조차 하지 않는 회사가 많다는 걸 알지만, 회사의 공식사과는 별 의미가 없었다. 대표는 ‘재발방지’ 같은 단어를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과문을 읽었다. 방송에서 보던 모습, 확신에 차서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어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네 달 동안 피켓시위를 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막상 대표의 공식사과에도 향미 씨는 무덤덤했다. “그런다고 동생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공식사과가 있은 후 다섯 달이 지난 2018년 12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신청을 위한 자료를 유가족이 직접 모아야 했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산재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7년에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 때문이다. 산재법에 따르면 증명책임은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 그러나 업무와 관련된 증거자료는 사용자에게 있다. 2013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사용자가 입증하도록 한국의 산재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들을 제출하지 않았고, 향미 씨는 회사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절당했다. 동생의 유품을 받을 때도 직원들이 아무도 없는 휴일에, 건물 바깥에서 건네받아야 했다. 정보는 차단돼 있었고 접근조차 어려웠다. 증거를 직접 수집해 과로죽음을 입증해야 하는 건 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가족들이 속상해할까봐 피해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 죽을 만큼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던 일들을 남은 가족들은 들어야 했다.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증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다. 증언 대신 비난이 더 많았다. 다른 과로자살 사건에서는, 입증책임 때문에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입증책임은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원칙”이지만 향미 씨는 증거를 모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생의 죽음은 묻힐 것이었다. 그 과정은 “엄청난 2차가해”라고, 향미 씨는 인터뷰 도중 거듭 얘기했다. “산재 신청하려고 하면 ‘돈 때문에 한다’고 (욕해요). 맞아요. 산재는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요. 그런데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명예예요. 지금도 사람들은,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나약해서 죽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는데, 가족의 죽음을 모욕적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 너무 큰 상처가 돼요. ‘그렇게 될 때까지 가족들은 왜 몰랐냐’는 것도 상처죠. 가족들한테 말 안 하면 모를 수 있어요. 과로자살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예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요.” 향미 씨는 “운이 좋아” 다른 유가족에 비해 덜 어렵게 증거를 모을 수 있다고 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출퇴근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교통카드 내역을 향미 씨 이메일로 보내뒀다. 또 퇴근 후에 집에서 일하느라 동생의 노트북에 업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던 덕에, 산재신청에 필요한 자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퇴사한 동료 서른 명이 증언을 해줬고, 대책위가 크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도 ‘운이 좋다’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향미 씨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승인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뚫고” 산재 신청을 해도 승인률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운이 좋았다. 2022년 경찰청 자살 통계를 보면,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1년에 404명으로 전체 자살사건의 3%다. 그 중에서 재해보상을 신청한 사람은 36%, 신청한 사람 중 산재 승인을 받는 것은 52%뿐이다. 전문가들은 업무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경찰청 통계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향미 씨도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동생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렇게 은폐되는 과로자살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산재 신청 이후 승인되기까지는 10개월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지만, 끝내 승인됐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과로와 직장 내 괴롭힘의 증거들이 적지 않았고, 회사도 공식사과를 한 뒤였다. 무엇보다 과로자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고, 대책위와 연대하는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동생이 떠난 뒤 산재 신청을 하면서 향미 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도록 일하는지, 일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이하 유가족모임)에 함께하면서, 유가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봤다. 유가족모임은 과로죽음 유가족들이 산재법을 공부하고 심리치료 등을 함께하면서 2017년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의 산재 신청 과정을 지원할 뿐 아니라, 과로죽음이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동생이 일했던 2년 반의 시간을 쫓다 보니, 동생을 죽인 건 회사였고 그 뒤에는 법과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과로죽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들이 바뀌지 않는 한 회사는 바뀔 리가 없고,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향미 씨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과,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의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만든 KWA(Karoshi Watch in Asia) 네트워크 모임에 참여하면서, ANROEV(아시아산재및환경피해자권리네트워크)에도 참가해 과로사 문제를 공유하고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는 ‘과로사 방지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1988년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가 상담전화 110번을 개통해 유가족 상담을 시작하면서 과로사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과로사 방지법)이 제정됐다. 법이 생겼다고 일본에서 과로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법률로 정의 내리고 과로사 방지대책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자, 과로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어갔다. 한국에는 과로사에 대한 정의가 없고, 따라서 관련 통계도 없다. 일 때문에 죽었다는 걸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입증을 한다 해도 산재 승인을 받기까지 기간이 너무 길었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제도들도 그대로였고, 동생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 대표는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그 덕분에 노동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포괄임금제로 계약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게 드러났다. 그래도 처벌받지 않는다. 일하다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만 잠깐 안타까워할 뿐, 사람 죽이는 제도와 구조는 그대로다. “법에 걸려도 처벌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걸 누가 지켜요? 기업 입장에서는 (법을 어기는 게) 훨씬 유리한데. 그러니까 노동법은 그냥, 그냥 만들어진 법이지 진짜로 지키라고 만든 법은 아닌 거죠. 몇 년 전부터 과로사 방지법 제정한다고 하는데, 뭐 근로기준법이라도 잘 지키면 좋겠어요. 이거라도 지키면 과로가 왜 생기겠습니까?” 일본의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시작된 과로사 금지법 제정 운동은, 실제로 그 결실을 맺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 거기에는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의 오랜 노력이 있다는 걸, 포기하지 않고 연대했기에 ‘결국’ 제정됐다는 걸 향미 씨는 안다. 향미 씨는 유가족모임과 함께 2021년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 과로사·과로자살 사건에 부딪힌 가족, 동료, 친구를 위한 안내서>를 썼다. 산재 사망이 왜 생겨났는지를 밝히고 유가족을 위해 산재 과정과 필요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더는 과로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유가족들의 바람을 담았다. 해외의 관련 서적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2019년 ANROEV 컨퍼런스에서 만난 대만직업안전보건연대의 황이링 씨에게 <과로지도(過勞之島)>를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서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향미 씨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업무 때문에 종종 번역을 해왔다. 책은 <과로의 섬 – 죽도록 일하는 사회의 위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2021년 국내에 출간됐다. 향미 씨는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다. 대만의 직장 과로 문제가 한국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두 나라의 과로 문제는 소름 끼칠 만큼 똑같았다. (…) 한국과 꼭 닮은 대만의 과로사 실태를 다룬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한국 사회의 과로사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었다.” 그는 한노보연 ‘업무 관련 정신질환 연구모임’ 회원으로 직장 내 정신건강 문제를 알리기 위해 활동했고, 지금도 유가족모임과 KWA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회사의 사과를 받았고, 그 어렵다는 ‘업무관련 자살’로 산재 승인도 받았다. 어찌 보면 동생의 과로자살은 끝난 사건이고, 향미 씨가 유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향미 씨와 부모님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 그 빈자리를 어떻게 해도 메울 수 없다는 공허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스에서 과로사, 과로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향미 씨는 2018년으로 되돌아갔고, 그 고통이, 그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동생의 죽음을 또 겪는 것만 같았다. 동생의 과로자살이라는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으려면, 다시는 누군가가 일 때문에 죽는 일이 없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실 향미 씨는 산재와 관련한 자료들을 다시 꺼내보는 것조차 힘들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런 향미 씨가 이렇게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KWA 모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것. “제 동생이 그렇게 죽은 다음에도 똑같은 문제가 매년 반복이 되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제 경우만 해결이 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똑같은 사건이 나오면, (동생이 세상을 떠난) 그때 그 시간으로 저도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지,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는 보이잖아요. 그게 다시 재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걸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저도 그 시간을 상기하기 싫은데, 사회가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거잖아요.” 향미 씨도 부모님도, 절대 ‘괜찮아지는 일은 아닌’ 일을 겪었다. 아마도 평생을 괜찮아졌다고, 또 해결됐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그냥저냥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다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과로자살이라는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그것이 과로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바라는 가장 최소한의 해결이다. <끝> 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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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열아홉, 간이 녹았다 2화]
지난 5월 김선우(가명, 23) 씨는 한 통의 우편을 받았다. 발신자는 근로복지공단 경인지역본부. 앞서 제출한 ‘요양급여신청서’에 대한 회신이었다. 약 20개월 만에 돌아온 대답은 ‘불승인’이었다. 고등학생 때 반도체 공장에 취업하고,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려 이식 수술을 받은 청년. 선우 씨의 기막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처럼 대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돈을 빨리 벌고 싶었어요.” 선우 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심했다. 통학 거리, 학업 분위기, 대학 진학률은 등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건 오직 하나. ‘취업률’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마이스터고등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로, 직업훈련을 통한 전문기술인 양성을 목표로 한다. 마이스터(Meister)는 ‘장인’이란 뜻. 학교에서 ‘장인’을 육성해 고졸 채용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다.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이스터고는 높은 취업률을 자랑했다. 선우 씨가 입학하기 직전인 2017년에는 졸업자 119명 중 109명이 취업했다. 취업률 91.6%. 돈을 빨리 벌고 싶었던 선우 씨에게는 매력적인 수치였다. 그는 ‘고졸 장인’의 길을 택했다.그는 바람대로 경제활동을 일찍이 시작했다. 전교생 중 가장 먼저 회사로 출근한 ‘1호 취업생’.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10월에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임직원만 3038명(잡코리아 2023년 12월 기준)에 달하는 대기업. NICE평가정보가 제공하는 기업신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기타 반도체소자 제조업’ 분야 매출로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회사였다.선우 씨는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4일간 교육을 받았다. 고가의 장비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주의도 빼놓지 않았다.근무 형태는 새벽, 주간, 야간 4조 3교대. 6일 근무하고 이틀 쉬는 식이었다. 6일 중 하루 이상 연장근무는 필수였다. 그런 날은 작업장에 11시간 30분이나 머물렀다. 식사시간은 50분.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끼니를 때우고 라인으로 돌아오기도 빠듯했다. 이후에는 연장근무 전 30분 휴식을 취하는 게 전부였다.근로시간은 주 51시간 30분.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한도인 ‘주 52시간’를 넘지 않게끔 맞춰진 시간이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 사람의 생체리듬을 맞춰 일했다. 연장근무를 하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뻗기 일쑤였다. 선우 씨가 맡은 건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 반도체칩에 전자기판을 연결하고 부착하는 등의 일이다. 이때 다량의 화학물질을 다루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솔더 페이스트(solder paste)였다. 여기에는 간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리, 주석, 은 등이 포함된다. 그 때문에 작업장에는 늘 퀴퀴한 냄새와 타는 냄새, 아세톤 냄새로 가득했다. 선우 씨는 방진복과 얇은 덴탈마스크, 천코팅 장갑, 비닐장갑을 착용했다. 마스크는 입 모양이 다 보일 정도로 얇아 냄새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방진복이 화학물질로 오염되면 집에 가져가 세탁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었다. “블레이드라는 날카로운 날에 용액을 바르고 세척하는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회사에서 주는 게 천장갑, 비닐장갑이니까 비닐 찢기고 (용액에) 손도 젖고 했죠.”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과 불규칙한 노동시간. 선우 씨는 취업한 지 약 1년 2개월 만에 몸이 망가졌다. 간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의료진마저 선우 씨가 살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선우 씨와 ‘마지막 인사’까지 나눴다. 다행히 선우 씨는 2022년 1월 간 이식 수술을 받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만 열아홉 살이었다. (관련기사: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당시 병원은 급성간염을 동반한 독성간질환, 상세 불명의 무형성빈혈, 무과립구증을 진단했다. 적출된 간은 광범위한 출혈성 괴사 상태로,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 손상 원인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수준.생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선우 씨는 회사 복귀 또는 퇴사라는 극단적인 갈림길 앞에 섰다. 몸이 좋지 않았던 선우 씨는 회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기자에게 “사직을 권고한 바 없다”고 해명했으나, 선우 씨 아버지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달랐다.선우 씨가 죽음의 문턱에서 ‘병원 뺑뺑이’를 도는 동안 아버지는 회사에 병가 휴직을 신청했다. 사측으로부터 “6개월간 병가 휴직을 인정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기억했다.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일부터 병가 상태로 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 “회사로 복귀하라”는 통보를 들었다.당시 선우 씨는 상처 부위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의사 소견서 등을 보냈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회사가 무단결근 누적을 이유로 퇴사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산재를 신청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무단결근에서 병가로 기록을 정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완치라는 건 없고, 평생 면역억제제 먹으면서 살아야 돼요. 심지어 앞으로 재이식(수술)이 한 번이 될지, 두 번, 세 번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계속 걱정이 되죠. 경제활동도 차차 해야 되는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격이었다. 2023년 12월 28일 선우 씨에게 정말 고비가 찾아왔다. 몸이 이식받은 간을 거부하며 공격하고 있다는 것. 선우 씨의 면역체계는, 이식받은 ‘타인의 간’을 외부에서 들어온 위험요소로 인식하고 공격했다. 면역억제제를 사용해 공격 정도를 낮추면 간 수치가 나빠졌다.간 이식 수술을 받은 지 3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재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위기가 닥칠 거라곤 생각 못했다.선우 씨는 평생 3년마다 간을 새로 이식받으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다행히 한 달간 입원 끝에 적절한 약물 배합을 찾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불안은 늘 곁을 맴돌았다.지난 3년간 든 약값과 치료비만 2억 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지는 미지수다. 선우 씨가 언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그 또한 불투명하다.선우 씨는 2022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약값 부담이라도 덜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근로계약서, 급여명세서, 출근부 등 기초적인 자료와 작업환경과 유해요인 관련자료 등을 회사에 요청했다. 하지만 사측은 모두 제공을 거부했다. 공단을 통해 받으라는 답변.‘녹아버린 간’도 문제였다. 어떤 요인이 간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 의학적으로 더 따져볼 길이 사라진 셈이었다.선우 씨는 자기 자신이 어떤 화학물질을 다루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사업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반도체 작업환경 연구보고서 등과,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경험’뿐이었다.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특수건강진단’을 받는다. 선우 씨도 2021년 4월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다.특수건강진단표에 기재된 취급물질로는 간 독성 및 손상을 유발하는 주석, 구리, 이소프로필알콜(IPA) 등 화학물질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 질환은 작업장에서 노출된 미상의 세척 용제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는 주치의 평가 소견서를 덧붙였다. “제가 사용하던 용액에 ‘신체에 접촉하지 마세요’가 적혀 있었어요. 근데 회사는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하니까….” 선우 씨와 주치의는 그의 간 손상 원인이 ‘일 때문’이라 의심했지만, 회사는 다른 것을 의심했다. 바로 ‘술’이었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공식’ 의견서에 이렇게 적었다.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회사는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 결과 ‘절주 또는 금주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음을 근거로 들었다. 건강했던 20대 청년이 불과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릴 정도가 되려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셔야 할까.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표에는 ‘일주일 1잔, 하루 4잔’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선우 씨는 빈혈 수치, 간장질환 수치 등은 모두 정상이었다. 발병 이후 초진 기록에도,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은 ‘주 1회 소주 1~2병’이라고 적혀 있다. “제가 산재 (신청) 준비하면서 대학병원에 상담을 받았어요.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20대 초반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간이 이 정도로 상하지 않는다고. 외부 (원인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이렇게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가 하는 말이 너무 황당한 거예요.” 회사 관계자들은 선우 씨와 엄마 하영 씨 눈앞에서도 ‘술 때문’이란 주장을 입에 올렸다. 지난해 11월 직업환경연구원이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그때도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술을 많이 마셔서 아픈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선우 씨 가슴속의 상처를 후비는 말이었다. 그날 선우 씨는 연구원 2명과 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작업장에 들어갔다. 하영 씨는 ‘영업상 기밀 보안’을 이유로 공장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선우 씨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연구원들은 회사 관계자들에게만 질문할 뿐, 선우 씨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선우 씨에게 그날은 마치 “회사의 변명을 듣기 위한 자리”인 것 같았다. “회사 관계자가 ‘용액이 손에 직접 닿을 일이 없다’고 말하면, 연구원이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는 식이에요. 제가 직접 겪은 건데,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요. 실제로는 비닐장갑이 찢어지면 손에 직접 닿아서 젖고 하거든요. 그때 느꼈어요. (이 조사는) 내 말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고, 그냥 업무 하나를 처리하러 온 거구나.” 선우 씨는 그날 직감했다. ‘산재 승인이 안 되겠구나.’ 선우 씨는 그 뒤에 직업환경연구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현장 조사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적었다.산재 신청 이후 약 1년 8개월의 기다림 끝에 결과가 나왔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5월 ‘불승인’을 통보했다.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우선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질환은 확인되고, 개인적인 발병요인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위원 7인 중 6인은 “독성 간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물질의 노출이 없어 업무 관련성은 낮다”고 봤고, 1인은 “작업 중 간독성 물질이 일부 있으나, 독성이나 노출량을 고려할 때 상병을 유발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판단해 전원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소송으로 (산재 승인을) 다투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없잖아요.” 선우 씨는 지난 8월 산재 불승인 결과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몇 년이 걸릴지,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소송이 진행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선우 씨와 가족들이 더 지치고 힘들어질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하지만 그 불확실한 미래에 한 번 더 희망을 걸었다. 열아홉 나이에 녹아버린 간. 그의 간을 사라지게 한 원인을 찾는 일도, 그의 남은 인생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기에.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기자는 인사팀 관계자, 안전팀 관계자, 임원급 관계자와 번갈아 소통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 “절차에 따랐고 오히려 선우 씨를 도우려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덧붙여 “(셜록 보도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하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산재에 관한 사측의 의견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문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보험가입자의견서에 “해당 작업은 회사 창립 후 수십 년간 이어온 공정이며 그동안 동일 상병 혹은 유사 상병이 발생된 적 없다”고 주장했다.이어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이며, 작업환경측정결과와 역학조사 결과 기록을 보면 유해인자에 대해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임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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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열아홉, 간이 녹았다 1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아우성이 울려 퍼지는 병원 응급실. 그 틈에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김선우(가명) 씨가 있었다. 그는 엄마 이하영(가명) 씨에게 몸을 지탱한 채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장 간 이식하지 않으면 아드님 죽을 수도 있어요.”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날카로운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2021년) 10월쯤이에요. 그때 부딪힌 적도 없는데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 성격이 워낙 덜렁대니까 그냥 어디 부딪혔겠지, 하고 넘어갔죠.” 선우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20년 10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집은 울산, 회사는 인천에 있었다. 그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 3교대 근무.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그해 모교의 ‘1호’ 취업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입사한 지 1년 만인 2021년 10월. 몸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메스꺼워 구토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먹은 음식을 다 토해도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저 교대근무에 누적된 피로 탓이라고 여겼다. 코피를 쏟는 날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지혈이 안 돼 회사 인근 이비인후과에서 코 혈관을 지졌다. 다음 달에도 코피가 쏟아졌다. 공장 안 화장실에 앉아, 반쯤 남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다 뜯어 썼다. 그래도 코피가 멎지 않았다. 선우 씨를 찾는 파트장의 전화.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빨리 복귀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지났다. 그제야 코피는 간신히 멎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마저 닦아내고 자리로 복귀했다. 잠이 쏟아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선우야, 너 얼굴이 좀 누런 것 같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결혼기념일을 맞아 울산 본가에 온 선우 씨에게 엄마 하영 씨가 말했다. 최근 한 달간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던 선우는 일 때문에 피곤할 뿐이라고 답했다. “엄마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랜만에 아들이 집에 와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이상해요. 너무 노래. 근데 선우도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 애 아빠는 둔감하니까 그런 거 잘 모르겠다고 하지…. 그때 같이 병원 가자고 못했던 게 제일 후회돼요.” 몸이 지쳐도 주기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보면 ‘그래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넘은 스무 살짜리 사회초년생은 요령 없이 버틸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교대근무를 하던 동료도 선우 씨를 걱정했다. 황달이 있는 것 같으니 병원을 가보라는 말. 그저 피곤해서 낯빛이 안 좋다고 하기에는 눈자위까지 너무 노랗게 변했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 회사 주변에 그 시간에 문을 여는 병원은 없었다. 선우 씨는 두 달째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새벽조, 주간조, 야간조 어디에 투입되든 눈뜨는 게 힘겨웠다. 이튿날 오전 병원에 가려 했지만, 늘어진 잠으로 갈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누렇게 뜬 얼굴로 출근했다. 상사는 선우 씨의 안색을 살피더니 병원에 가라고 조퇴를 시켜줬다. 뜻밖의 배려. 평소 같으면 ‘열이 없으면 감기에 걸려도 출근하라’던 상사였다. 선우 씨는 그제야 병원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가까운 내과로 향했다. 의사는 황달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며, 근처에 있는 인하대학교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피 검사를 마친 선우 씨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대학병원은 평일 오후에도 환자들로 북적였다. 순서가 되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간호사가 선우 씨 이름을 불렀다. 앞서 방문한 환자들을 뒤로하고 진료실로 먼저 들어갔다. “당장 입원 안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바로 입원하세요.” 선우 씨는 그제야 심각성을 느꼈다. 의사는 일반인의 정상 간 수치(ALT)가 40IU/L 이하인데, 선우 씨의 간 수치가 2236U/L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혈소판도 말썽이었다. 당시 선우 씨의 혈소판 수치는 혈액 1㎕(마이크로리터)당 5000개. 정상인들의 혈소판 수치가 1㎕당 15~40만 개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현저히 부족한 수치였다. 코피가 한두 시간씩 멈추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엄마,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 왔는데 당장 입원해야 될 것 같대.”“몸이 안 좋아? 입원해야 되는 거면 여기 내려와서 입원해도 되지 않아?” 전화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말곤 통증도 없었다. 간 수치가 정상의 약 56배 이상 나왔다는 것도, 혈소판 수치가 80배 적게 나왔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할 뿐이었다. 엄마의 말에 선우 씨는 비행기를 타고 울산 본가로 갔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울산대학교병원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보고 질겁했다. 간 이식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수치였다. 의사의 말에 하영 씨는 눈앞이 노래졌다. 그렇다고 당장 입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는 “아직 우리 병원은 간 이식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며,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하영 씨는 옆에서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참는 아들을 차에 태웠다.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도로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거의 다 왔어, 선우야. 조금만 버텨. 괜찮지?” 평소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꽉 막힌 도로 위에 두 시간을 넘게 갇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아들을 보면 조급해졌다. 초행길, 꽉 막힌 도로, 옆자리에는 쓰러져가는 아들까지. 운전대를 잡은 하영 씨의 손이 덜덜 떨렸다. 혹여나 아들이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봐…. 부산에 진입해 가장 가까운 소방서를 찾았다. 하영 씨는 ‘미친듯이’ 뛰어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우리 애 좀 도와주세요!” 엄마의 외침에 구조대원들은 선우 씨를 구급차에 태웠다. 사이렌을 울리니 꽉 막혀 있던 도로에도 숨통이 트였다. 하영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는 코로나19 위기대응 수위가 높던 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도 대기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를 낸 의사들도 많았다. 하영 씨의 속이 타들어 갔다. 선우 씨는 구급차를 타고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겨우 병상에 누웠다. 그마저도 치료가 아닌 ‘응급조치’였다. 하영 씨는 서울로 가야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21년 12월 27일 새벽 6시, 선우 씨를 사설 구급차에 태웠다. 서울에 있는 ‘빅5’ 병원 중 하나인 A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 안 하셨으면 진료받기 어려우세요. 오늘은 돌아가시고 예약하신 날 방문해주세요.” 기대와 달리 병원의 대처는 냉담했다. 하영 씨는 속이 뒤집혔다. ‘절차’대로 하라는 말. 혈액검사 결과지를 들이밀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병원 인근 숙소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남는 방도 없었다. 택시에 선우 씨를 태우고 또 이동했다. 겨우 찾은 모텔 방에 아들을 눕혔다. 하영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른바 ‘잘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는 병원 없냐, 아는 의사 없냐, 제발 도와달라. 당장 아들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는 이튿날 ‘절차’대로 예약 진료를 받았다.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이번에는 남은 병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해가 바뀌고 1월 10일이나 돼야 자리가 생길 거라고 했다. 서울 외곽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선우 씨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한 곳을 찾아냈다. 경기 부천시에 있는 병원이었다. 선우 씨는 그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혈소판을 수혈받고, 코피가 흐르면 ‘땜질’을 했다. 치료가 아니라 ‘조치’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마지막 날, 드디어 대학병원 특실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지옥 같던 ‘병원 뺑뺑이’는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병원에서 맞는 새해. 그래도 이제는 치료에만 전념하면 좋아질 거라 여겼다. 하영 씨는 ‘이젠 다 잘될’ 거라며, 아들의 걱정까지 떠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님, 지금 선우 씨가 너무 위험해요. 피가 안 멈추고 간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불안한 일상은 금세 무너졌다. 가족들은 울산의 집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350㎞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당시 선우 씨는 간 이식 대기자 ‘0순위’였다.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식받는 사람. 그만큼 상태는 위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장기 기증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선우 씨는 간성혼수에 빠졌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열흘이 지나자 주치의가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져 다른 장기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위독하다고. 몸에서 간을 먼저 떼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거예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포기해요. 그(간을 떼어낸 뒤) 4일 동안 기증자가 안 나타나면 우리 애는 그대로 죽는다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죽어도 못한다고 싸웠죠.” 병원에서는 선우 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주치의는 잠든 선우 씨에게 ‘마지막 배웅’을 하라며, 가족들에게 면회 기회를 주곤 했다. 하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병원 가까운 절로 향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을 기증해줄) 뇌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게… 누군가 죽어야 우리 선우가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죠. 그게 스스로도 너무 괴로운 거예요.” 입원 20일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다. 밤까지 기도를 올리던 하영 씨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반기는 건 병원의 낯선 공기였다. 의료진은 선우 씨의 이식 수술을 두고 찬반 토론을 했다. 의료진 10명 중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은 8명. 수술 성공 확률이 30%로 너무 낮다는 이유였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다른 대기자에게 이식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엄마 하영 씨의 귀까지 전해졌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가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수술에 호의적인 의료진 두 명이 “그래도 아직 스물한 살이고 젊은데, 회복이 빠를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밀어붙였다. 가족들의 호소와 의료진들의 설득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수술대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선우 씨의 간이 몸 밖으로 나왔다. 의료진은 “간이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직검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손상됐다. 간이 녹아버린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은 훗날 선우 씨 가족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긴 잠에서 깬 선우 씨. 수술 전 약 2주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간 손상이 심해 뇌의 인지기능도 떨어졌다. 배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십자 모양의 수술 자국이 남았다. 커다란 흉터는 통증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제 청춘을 빼앗긴 기분이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내가 아파야 하는 걸까. 저는 그냥 취업을 빨리 하고 싶었던 건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선우 씨는 일찍 철이 들었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등급생 중 ‘1호’로 서둘러 취업했다. 첫 월급을 받은 때부터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 보람은 선우 씨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선우 씨는 수술 4개월 뒤인 2022년 5월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퇴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선우 씨와 사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선우 씨는 “사직서와 같은 문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데, 돈이 계속 나가니까 죄송하고 눈치 보이죠. 생활에 제약도 많고, 친구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복하더라도 약값은 계속 평생 나가니까 그것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한 건데, 만장일치로 기각됐더라고요.” 그해 9월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답변을 듣기까지 1년 하고도 8개월이 더 걸렸다. 결과는 ‘불승인’. 2024년 5월에 나온 답이다. “산재 승인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판정위원) 전원 불승인이라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사업장에 문제가 있다고 (근로복지공단에) 말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돼 있고, 그냥 회사가 하는 말만 있더라고요.”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1년 만에 간이 녹아내렸다. 평생 약을 복용해도 언제 또 건강이 악화될지, 재수술을 몇 번이나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반도체 소년’. 그는 가혹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인사팀 직원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사건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후 연락 줄 것을 요청했지만, 3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안내드리기 어렵다, (산재와 관련한 일은) 근로복지공단 쪽에 문의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총무팀을 통해 연결된 안전팀 관계자는 “연중 2회 안전교육을 수행하고 있다”는 등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신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비보도를 요청했다. 또 한 번 인사팀 임원급 관계자에게 연락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며, “회사는 절차에 따랐을 뿐 특별히 근로자(김선우 씨)와 분쟁적인 이슈는 없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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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산재’ 기어코 대법원까지 끌고간 대한민국[그녀의 우산 9화]
끝내 대법원까지 간다. 16년간의 투병. 이제 온몸이 굳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신호영(가명, 48) 씨의 사정은 얼마나 고려됐을까. 두 차례 패소 판결에도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은 뜻을 꺾지 않았다. 공단은 지난 13일 법원에 상고했다. 결국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 신 씨의 파킨슨병에 대해 ‘일터에서 생긴 병’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법원은 앞서 두 차례 공단이 신 씨에게 내린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소송을 시작한 지 4년째, 산재 승인을 신청한 지는 7년째다. 희망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금세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신 씨에게 이번 여름도 그랬다. 그는 과거 LED 개발과 생산 업무를 하다가 파킨슨병을 얻어 16년간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두 번째 승소 판결은 지난달 25일 있었다. 거듭되는 법원의 전향적인 판단. 여기에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사람은 있었다. 다름 아닌 신 씨의 모친 김정혜(가명, 72) 씨였다. “대법원까지 안 갈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데인 적이 있으니까….” ‘한 번 데인 적’이 있다는 건, 공단이 1심 패소 이후 사건을 고등법원까지 끌고 간 일을 말한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번에도 공단은 상고 기한인 2주일에 거의 맞춰 13일 만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공단이 2019년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린 것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 산재를 인정하지 않은 셈. 사건을 담당한 문은영 변호사는 지난 14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항소든 상고든 무조건 하는 게 아니라, 이유가 명확하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원고(신 씨)가 1심, 2심을 다 이겼는데, (공단이) 대법원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공단 측 입장이 궁금했다. 지난 14일 문자메시지로 받은 답변. “유기화합물과 파킨슨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특히 LED제조업, 반도체 등에서 파킨슨병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 선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규범적 법리적 추가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판단됨.” 공단은 계속해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왔다. 하지만 법원은 ‘발병원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은 질병 전반에 대해 상당인과관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직 밝혀지지 못했어도 상당성이 있다면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긴 세월 재판에 정신적으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제 몸도 병이 많이 진행되어 저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상태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간병하고 계신데, 연세가 많으시다보니 어머니도 한계점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실 같은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저의 삶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신호영 씨는 지난 13일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의 보도자료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더 이상 산재 소송을 지연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 산재 신청 → 공단의 불승인 결정 → 신 씨, 행정소송 제기 → 1심 신 씨 승소 → 공단 항소 → 2심 신 씨 승소 → 공단 상고까지, 이미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조는 ‘근로자를 위한 신속한 보상’이라는 법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단은 거듭 항소와 상고를 결정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이번에 공단이 밝힌 입장 가운데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법무부의 지휘를 받아” 상고를 제기했다는 부분이다. 1심 패소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결정했던 배경에도 ‘법무부의 지휘’가 있었다. 지난해 10월 공단 관계자는 항소 결정의 배경에 대해 “행정소송의 최종 결정 권한을 지닌 법무부로부터 ‘의학적 판단을 다시 받아보자’며 항소를 제기해보라는 권고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고객의 눈높이에 맞게 공정, 적시,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여 더 넓고, 더 두터운, 더 누리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나누는 일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파트너가 되도록 전 임직원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에서는 공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2017년 시작된 산재 싸움. 그리고 2020년부터 이미 4년간 진행돼온 산재 소송. 공단의 상고 결정은 과연 신 씨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파트너”로서 “공정, 적시,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한 일이었을까. 하루하루 지날수록 신 씨의 건강 상태는 그만큼 악화되고 있다. 그가 처음 소송에 나설 때만 해도 거동이 조금 불편했을 뿐, 소통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수십 년간 같이 살아온 어머니조차 그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법원까지 간 산재 소송.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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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산재 또 승소… ‘법정고문’은 7년으로 족하다 [그녀의 우산 8화]
파킨슨병 진단을 숙명으로 인정하기엔 서른세 살은 너무 젊었다. 뇌신경계 파괴로 몸이 굳어가는 와중에 생각은 자꾸 20대 첫 직장 시절로 돌아갔다. 신호영(가명, 48세) 씨는 그때 그 공장에서 LED 제품을 만들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생각했다. ‘혀마저 굳어가는 내 병은 그 공장에서 얻은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아닐까….’ 법원은 그 추측이 맞다고 다시 한 번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구회근 재판장)는 지난 7월 25일,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이 신호영 씨에게 내린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산재가 아니라는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을 뒤집은 또 한 번의 판결. 산재 신청 이후 7년 만이다. LED 생산 공장에 취업한 지 22년, 파킨슨병 진단받은 지 15년 만의 일이다. 신호영 씨는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누구보다 이 소식을 기다렸을 호영 씨에게 7월 31일 전화를 걸었다. 앉는 것도 힘들어 거의 누워 생활한다는 신 씨 대신 그의 모친 김정혜(가명, 72세) 씨가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도 공단이 상고 안 할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데인 적이 있으니까….” 근로복지공단이 다시 상고를 결정한다는 건, 사건이 대법원까지 간다는 의미다. 큰 기대가 없다는 다소 힘 빠지는 반응. 가만 들여다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 2심 재판부의 판결은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사실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신 씨의 발병 원인과 업무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1심 재판부 역시 신호영 씨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의 핵심 요지를 보자. “비록 의학적으로는 현재까지 이 사건 상병(파킨슨병)의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 원고가 이 사건 각 사업장에서 근무할 당시에 다수의 유기용제 및 유기화합물에 직간접적-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 내지 촉진되었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서울행정법원 2020구단51146 일부) 이 판결이 나온 때는 2023년 6월 7일, 싸움은 이때 끝나야 마땅했다. 판결 당시 이미 신 씨의 투병 생활은 16년째로,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와 가족에게 산재 인정과 요양급여는 시급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근로복지공단도 1심 판결을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법무부에 밝혔었다는 점이다. 법정 다툼을 멈추고 신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법무부가 ‘항소를 진행하라’고 지휘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은 현 국민의힘 대표인 한동훈이었다. 공단이 ‘항소 포기’를 밝히면 법무부도 이를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2021년과 2022년, 공단의 ‘항소 포기’ 의견에 법무부가 항소 이행을 지시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이수진 당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2023년에만 신 씨를 포함해 ‘반대 사례’가 네 건이나 나왔다. 어쨌든 공단은 자기 의지와 반대로 항소를 했다. 그것도 항소 기한 마감 날 늦은 오후에 말이다. 아들 신 씨를 간병하는 모친 김정혜 씨는 당시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항소도 마감 날짜에, 마감 시간에 딱 맞춰가지고 했는데, 얼마나 잔인합니까. 안쓰러운 사람들한테 (기계적으로) 항소한다는 건 진짜 피해자들을 죽이는 일이죠! (이름이 근로’복지’공단이라면서) 무슨 이런 ‘복지’가 있어요!” (김정혜 씨 인터뷰 2023. 10. 17.) 의지도 의미도 없는 항소. 공단 측은 항소이유서도 4개월 후인 10월 23일에야 접수했다. 신 씨의 안타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김정혜 씨는 “근로복지공단이 불쌍한 산재 피해자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난해 10월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시 기준으로도, 산재 판정을 기다린 지 이미 6년째. 간병인을 들일 여력이 안 돼 일흔 넘은 노모가 간병을 도맡고 있었다. 신 씨가 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때는 2017년. 공단의 불승인 결정 → 행정소송 제기 → 1심 승소까지 6년이나 걸렸다. 이번 2심 판결까지 따지면 7년 세월이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공단이 2심 판결마저 불복해 대법원으로 사건을 끌고 가면? 해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투병 중인 신 씨와 가족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몸이 성한 사람도 10년 가까이 재판을 하면 힘든데, 몸 아프고 생계도 막막한 사람들은 재판이 길어지면 어떻겠어요? 환자도 힘들고, 돌보는 나도 힘에 부치죠.” 김정혜 씨가 2심 승소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다. 기자는 신호영 씨에게 심정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그의 건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작년 10월에 만났을 때도 신 씨는 인터뷰 도중에 잠들기도 했다. 요즘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혀마저 굳어가고 있다. 앉아 있는 것도 어려워 옆으로 고꾸라지는 일도 잦다. 넘어진 아들을 일으켜 세우는 건 모친 김정혜 씨의 몫이다. “옆으로 넘어져도 혼자 못 일어나요. 그러다 질식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죠.” 법원의 1·2심 판결은 신 씨에게만이 아니라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세계 1위권의 첨단산업을 보유한 한국사회에 주는 의미가 크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의 말을 보자. “산재는 보통 피해자가 상병과 작업장의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되는데, 어떤 유해물질이 있는 작업환경에서 일했는지 노동자들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판결은 첨단산업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헌법상의 의무를 다한 판결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종란 노무사 전화 인터뷰 2024년 7월 31일) 이어 이 노무사는 그는 “첨단산업 분야에서 직업병 관련 연구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고, 그 발전 속도가 빨라 취급 물질이 빈번하게 바뀌고 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작업환경에 대한 조사와 안전관리 매뉴얼이 신설되는 등 조사부터 예방책까지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노무사의 평가대로 최근 법원의 판결은 산업발전 상황을 따라가는 모양새다. 대법원은 이미 판례로 첨단산업분야의 산재 판정 방향을 잡아놨다.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과 기능 등 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대법원 2017년 8월 29일 선고 2015두3867) 공은 다시 근로복지공단으로 넘어갔다. 신 씨 모친 김정혜 씨는 이런 당부를 했다. “이번에는 소송이 끝이 나서 겨우 버티고 있는 지금 상황이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냥 딱 ‘남들처럼만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돈 걱정 없이 치료에 전념하는 거, 간병인 몇 시간이라도 불러서 마음 편히 있는 거, 고등학교 올라간 손주 학원도 보내고 싶고, 며느리도 좀 숨 돌렸으면 좋겠고…” 산재 다툼만 7년. 이 싸움은 이쯤에서 끝날까 아니면 더 연장될까. 근로복지공단은 아직 상고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또 잔뜩 희망고문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상고를 신청할 수도 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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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불법촬영 피해자에게 “아줌마가 뭘 그러냐” [회사에 괴물이 산다 7화]
[지난 이야기] 김한솔(가명) 씨는 회사 여자화장실에서 불법촬영 피해를 입는다. 범인은 한솔 씨가 살뜰히 챙기던 ‘직속후배’ A.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던 한솔 씨에게 회사는 범인 A의 업무까지 떠넘기고, 휴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범죄 피해 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솔 씨는 당시 불안, 불면, 배뇨불안 등 신체적·정신적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 그런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아직 학교도 다니는데 혹시나 엄마가 정신병원 다니는 게 알려져서 마이너스로 작용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증상이 심할 때만 잠깐 병원 가서 수면제 처방받고… 그냥 버텼어요.” 심리적인 장벽이었다. ‘정신력이 약해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손가락질과,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들만 가는 데 아니야?’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솔 씨는 꾸준히 치료를 받는 대신,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간헐적으로 수면유도제만 처방받으며 견뎠다. “이사장님, 잠깐이라도 다른 사업소에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산에서 산토끼 똥을 치우라고 하면 치울 거고, (군립공원) 입장 티켓을 팔라고 하면 팔겠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다가 여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근데 지금은 잠깐이라도 떠나 있고 싶습니다. 자꾸 그날 일이 생각납니다. 그 뒤로 화장실에 불을 켜고 갈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인 이사장까지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A를 향한 배신감보다, 휴가도 전보도 안 된다고만 하는 회사를 향한 분노가 조금씩 더 크게 자라났다. 사건이 발생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한솔 씨는 약 열 번이나 전보를 요청했다. 특히 이사장이 교체되던 해인 2021년에 요청이 집중됐다. 전임 이사장에게 문제를 해결하고 떠나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신임 이사장에게 인계하고 갈 테니 조금만 버텨달라”고 했다. 그해 11월 신임 이사장이 부임하자, 한솔 씨는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업무 파악이 되지 않아서 전보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네요.” 떠나갈 사람은 떠나갈 사람이라서, 새로 온 사람은 일을 잘 몰라서. 결국 안 된다는 말은 똑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직장 내 불법촬영 성범죄 사건 이후 남아 있던 문제들. 한솔 씨는 그 문제를 열심히 가리키며 얘기했지만, 회사는 되레 그런 한솔 씨를 가리키며 ‘문제’로 여긴 거였다. 계속 거부당하면서도 한솔 씨는 계속 전보를 요청했다.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위태로웠다. 그에게 2021년은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였다. 약을 안 먹으면 잠들 수 없고, 약에 취해 잠들면 악몽이 따라왔다. 해맑게 웃던 얼굴이 조금씩 음흉한 낯빛으로 변하는 A를 마주하거나, 뭔가로부터 도망치고 피해 다니는 꿈을 꿨다. 수면을 방해한 건 또 있었다. 한솔 씨는 ‘사건’ 이후로 집 밖에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방광염이 생겼다. 참다 못해 화장실을 찾는 경우에는 깜깜하게 불을 끄고 들어갔다. 혹시나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을지 모르니,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밖에서는 화장실을 못 가는 게 문제였다면, 집에서는 너무 자주 가는 게 문제였다. 집을 벗어나면 또 화장실을 못 갈 거란 불안 때문일까. 집에서는 조금이라도 요의가 느껴지면 참을 수 없었다. 자다가도 자꾸 깨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불안이 일상을 압도했다. 한계. 한솔 씨는 자신의 삶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려 있단 걸 알았다. 이대로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2021년부터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됐다. 간헐적으로 수면제만 처방받아온 지 2년이나 지나서였다. 한솔 씨는 정신과 진단서를 가지고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아니, 암이 걸린 것도 아니고, 팔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할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병가 신청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이가?” 반전은 없었다. 회사는 완고했다. 한솔 씨가 느끼는 고통의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때 진짜 직장을 떠나야 하나, 고민을 무척 많이 했어요. 계속 벽에 부딪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참고 버틴 건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죠.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되는데, 남편한테 외벌이 맡길 수는 없잖아요. 또, 마흔도 넘긴 나이에 전문직에만 있었으니까 나가면 경력단절이죠, 뭐. 내가 다른 데 어디를 또 갈 수 있겠어요?”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동안에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요령 없이 참고 견딜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볕 들 날 올 거라고 간절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신앙의 힘을 빌려 겨우 마음을 지탱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해성사도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면 또 용서 못하는 제 자신 때문에 너무 괴로워져요. 결국에는 자책이에요, 자책.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왜 나만 그럴까, 회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만 계속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회사에는 직원고충상담센터가 있었다. 한솔 씨는 지난해 2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신고글을 올렸다. 그런데 상담센터 위원들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4년간 한솔 씨가 휴가나 전보를 요구할 때마다 완강히 거부했던 관리자가 속해 있었다. 결국 한솔 씨는 자신의 신고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가 그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일말의 기대도 사라졌다. 한솔 씨는 그때부터 자살을 떠올렸다. “직원들끼리는 속된 말로 ‘가둬놓고 직인다(죽인다)’고 했어요.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부당하고 힘든 요구였나.” 그 사이 회사에서 전보나 병가를 승인해준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니다.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여섯 명이 전보발령·휴직·병가를 승인받았다는 사실이 기관 인사발령사항 공문을 통해 확인된다. 다만 이상하게도 한솔 씨는 그 장벽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 “계속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던 거죠. 조금씩 나아지겠지, 이 순간을 참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요. 끝까지 현장에 있다가 명예롭게 퇴직하고 싶었으니까, 그 꿈을 접기 힘들어서 계속 버텼던 것 같아요.” 불법촬영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솔 씨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지금껏 가슴속에 품고 있던 꿈도 놔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지난해 9월 한솔 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하루에 더 많은 약을 삼켜내야 했다. 귀에는 쿵쿵대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린 통증도 동반됐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지만 이상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한솔 씨는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해하거나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었는데, 이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결심을 당장 멈추고 싶지만, 나의 아픔을 외면한 채 눈과 귀를 닫고 병가도 반려하고, 휴직도 반려한 이사장과 팀장들, 인사팀의 카르텔에 대응할 방법도 없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지금, 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런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산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10월 쓴 유서 일부) 모든 일이 시작된 회사 여자 화장실. 그곳에서 죽음을 맞겠다고. 유서를 품에 넣은 채 약을 한 움큼 털어넣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면 회사도 내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단서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음’ 이렇게라도 명시를 했어야 하나?” “저번에(어제) 운동 가서 산에서 그냥 돌아오지 않으면 이 심각성을 좀 알려나?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어야 끝이 나는 걸까?” (2023년 업무수첩에 남긴 메모 일부) 한솔 씨를 다시 살게 만든 건 가족들이었다. 가슴에 묻어야 할 상처,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진 않았다. 대신 한솔 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17년간 다니던 회사. 그렇게라도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지난 2월 지역의 노동 활동가들을 만날 자리가 있었다. 한솔 씨네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솔 씨 퇴사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한솔 씨) 연차에 퇴직한다는 게 흔치 않은데,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왜 퇴사하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터닝포인트. 그 한마디에 사건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 한솔 씨를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젠더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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