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2016년 양재IC, 2024년 남태령
2016년 11월, 그때도 '전봉준투쟁단'은 서울로 트랙터 상경을 시도했다. 그때는 양재IC 부근에서 막혔다. 28명이 연행됐고, 3명이 다쳤다. 광화문 집회에선 '존경하는 시민' 운운하며 무기력으로 일관하던 경찰이, 양재IC의 농민은 때려잡았다. 그때는 농민들을 위해 달려나간 시민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8년 지난 12월, 오늘 전봉준투쟁단이 다시 막혔다. 이번엔 남태령역. 하지만 이번엔 응원봉 시민들이 달려나갔다. 시민들이 지켜보니 경찰도 무리한 진압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못 가고 있는 입장이지만... 운동권들은 경복궁에 집중했고, 남태령역에는 운동권 조직이 많지 않아 보인다. 2030 여성 시민들에겐 운동적 관성이 없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연대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일단 달려나간다. 농민단체의 무엇에 동의할 수 없어 연대를 꺼리는 식의, 그런 '전술적 판단'을 이들은 하지 않는다. 시민을 무작정 상찬하는 건 내 취향에 안 맞는 일이지만, 운동권의 관성을 직시케 하는 이들의 행동력은 상찬하는 수밖엔 없다. 늘 대중을 염원하면서 막상 대중이 몰려나오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우리 안의 비관주의를 직시해야 한다. 농민들의 안위가 걱정되면서, 시민들의 연대에 엄청나게 감동했다. 8년. 우리의 세계는 이만큼 달라졌다. 8년 동안 대중에게 각 부문의 가치를 환기하고 설득하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남태령 대첩을 보며 활동가의 역할을 생각하기
남태령 대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집회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흔한 논리를 시민들이 나서서 부수는 모습. SNS 등에서는 전장연 시위와 민주노총의 파업에까지 연결되어, 집회나 시위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막는 탄압이 시민들의 불편의 원인이며, 이에 대해 앞으로는 집회 측이 아니라 경찰에게 항의하겠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그 흔한 ‘불법집회’ 프레임에 대해서도, 민주주의 국가에 불법집회가 어딨냐며 응수한다. 사실 운동권들이 흔히 공격당하는 레파토리를 대중운동의 장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부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는 시민들이 나서서 단체에게 ’깃발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종북 빨갱이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에 대해 스스로 검열하는 정서가 시민들 사이에서도 작동했었다. 그러나 2016년 탄핵집회에서는 ’배후를 색출하라‘는 이야기에 시민들이 너도나도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왔다. ’내가 배후다‘라고 외치며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고나오는 항의행동은, 종북 빨갱이, 전문 시위꾼들을 배후로 삼는 전통적인 공격 프레임을 전면으로 조롱하며 무화시키는 기발한 기획이었다. 이번에는 불편함은 시위의 주체들 때문이 아니라, 시위를 보장하지 않는 경찰과 정부의 문제라고 시민들이 나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하나의 프레임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들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시민들을 주체성 없고 정체없는 집단으로 쉽게 상정하곤 하지만, 사실 다이나믹한 한국의 집회시위 역사에서 시민들 또한 운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시민들은 이전의 운동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반성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운동 내부에서는 부술 수 없는 논리들이 대중운동의 장에서는 부숴진다. ‘대중’이 발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들은 ‘순수한 대중’이라는 이미지조차도 전략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나는 대중운동이 분출하는 장에서만 가능한 진일보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시위에서 나오는 급진성이 대중운동이 끝난 이후로도 일상적으로 꾸준히 전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의 장에서만 가능한 진일보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그런 것들은 회귀하지 않는다. 2008년에는 ‘배후세력’ 프레임이 먹혀들어갔지만, 2016년에 ‘배후세력 색출’이라는 프레임이 파괴된 뒤, 2024년에는 그 프레임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처럼. 그런 부분들에 주목한다면, 대중운동의 장에서 활동가들이 해야 할 역할들이 좀 더 명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