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공화는 수입품이 아니다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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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의 2편 - 동서양의 공화 역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에서는 우리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설명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화’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민주보다 공화에 대해 다루는 글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화‘. 창작그룹 ’성찰과성장‘은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연재를 통해 ’공화주의‘에 대해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공화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려면, 공화주의가 탄생한 역사 배경과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하고 변화해 왔는지 그 변천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화주의의 유래와 그 역사적 진화 과정을 살펴본다면, 공화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공화주의의 역사를 살펴보자.


공화(republic)의 유래 

서양에서 사용되는 '공화국' 또는 '공화'라는 용어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기원했다. 이 라틴어 표현에서 'res'는 '사물', '물건', '재산'을 의미하는 명사이며, 'publica'는 '공적인'을 뜻하는 형용사다. 이 두 단어의 조합을 간결하게 해석하면, '레스 푸블리카'는 '공적인 것' 또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는 공화주의가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복리를 중시함을 암시한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레스 푸블리카를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법과 이익’이다. 특정 개인 또는 소수 권력자의 이익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국가가 레스 푸블리카인 것이다. 그래서 공화는 단순히 왕정이나 귀족정 등만이 아닌 다양한 정치 체제 요소가 섞여 있는 ‘혼합정’을 의미하기도 했다.


▲ 공화는 ‘혼합정’과 ‘공동의 이익’을 동시에 의미한다 Ⓒ성찰과성장


공화주의의 진화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미국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Jr), 프랑스의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등 여러 철학자에 의해 공화주의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담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자와 인민(people)이 덕성을 갖춘 상태에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절대권력을 제한'하는 형태의 공화정을 제안했다. 이와 비슷하면서 다르게, 제임스 매디슨은 다수가 권력을 독점해 소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안전장치로서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호 견제와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공화를 '혼합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토크빌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시민의 자발적 결사'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공화 사상가들의 이론은 공화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를 비극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화주의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비-지배의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1편에서 언급한 필립 페팃(Philip Noel Pettit)은 이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페팃에 따르면, '비-지배의 자유'란 개인이 타인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상태다. 그는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넘어서, 어떠한 외부 권력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 상태를 강조한다. 페팃의 이론은 공화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 오래 전 동양에도 이미 ‘공화’가 있었다 Ⓒ성찰과성장


동양 공화의 뿌리: 려왕에서 군신공치까지 

공화는 서양만의 개념이 아니었다. 동양의 '공화' 개념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본기(史記本紀)'다. 기원전 841년, 주나라 백성들이 려왕(厲王)을 나라 밖으로 추방한 후, 13년 간 왕이 없는 상태에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라는 두 재상이 정치를 맡았다. 이 시기를 가리켜 '공화'라고 불렀다. 후에 공백화라는 인물이 려왕을 대신해 국가를 통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긴 했지만, 역사적 맥락을 떠나 '공화'라는 용어는 오랫동안 왕이 없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상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려왕 사례를 통해 우리는 '공화'가 단순히 서구에 국한되지 않고, 동양에도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유교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모두의 것)'을 정치의 근본 방향으로 채택했다. 이는 정치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덕치(덕을 통한 통치)와 함께 법치를 중시하는 관점을 반영한다. 유교는 법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고, 특히 사대부 계층의 도덕적 자기 수양을 중요시했다. 조선을 포함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군주제 국가에서는 왕정과 귀족정이 혼합된 '군신공치(君臣共治)' 체제가 정착되었다. 이 체제에서 사대부와 신하들은 왕의 권력을 견제하며 국정을 공동으로 운영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혼합정 형태의 공화(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동 통치)가 이미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 조선의 독립운동가는 ‘공화’가 낯설지 않았다.Ⓒ성찰과성장


우리만의 공화를 재구성할 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는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자연스레 인식했다. 이러한 생각은 임금이란 백성을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이며, 만약 임금이 주권을 빼앗겼다면(혹은 포기했다면) 백성이 직접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했으며, 1948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서양의 '공화' 개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화주의는 서양만의 전유물이 아닌, 동양에서도 과거부터 이어 내려온 가치였음을 잊지 말자.


이제 우리의 과제는 '우리만의 공화주의'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권력 분산, 시민의 덕성, 자발적 결사, 소수의 권리 보호 등 기존의 공화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되,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반영해야 한다.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동양의 전통과 가치를 통합한 새로운 정치적 접근을 통해 공화주의를 재구성할 때 우리 사회에 더욱 적합하고 대중이 느끼는 '답답한 현실 정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 창작그룹 성찰과성장
글 작성 ・ 편집 : 김설, 박배민, 신동주
(성찰과성장.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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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넘어서, 어떠한 외부 권력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 상태"라는 설명이 인상적이네요. 시민들이 더 참여하고 더 주권을 가지면 이런 상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매번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 공화라는 단어는 주위에 많이 있지만 들을 때마다 거리감이 느껴졌는데요... 왜 공화라는 단어가 나왔는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