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작업물로 말해야 해.” 과거 디자이너와 대화 중 들은 말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디자이너들은 항상 포트폴리오를 쌓는다. 포트폴리오를 통해 외주를 따거나, 회사 입사 지원을 한다. 그런데 만약 디자이너가 자기 작업물을 포트폴리오로 가져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으로 디자이너의 언어가 없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언어와 말을 없애는 게 과연 맞을까?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이하 FDSC)는 디자인 업계의 불공정 계약이나 법적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만연한 문제에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고자 한다. 과거 디자인 외주를 맡겼던 여성 디자이너가 내게 말했다. “이거 혹시 제 포트폴리오로 올려도 될까요?” “당연하죠"라고 말하면서도 ‘왜 당연한 걸 묻지?’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 FDSC와의 대화를 통해 그때의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FDSC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은 성평등을 주제로 다양한 실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활동으로 2022년 1기 13팀에 이어 올해는 9팀이 참여하고 있다. |
<그럼에도 우리는>을 꾸려가는 빠띠의 활동가 우디(맨 오른쪽 아래)가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 FDSC’(이하 FDSC)의 팀원 윰(위쪽 중간), 지경(맨 오른쪽 위). 경주(맨 왼쪽 아래), 소미(아래 중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arti
사라지는 것에 ‘왜?’라는 의문을 갖고 시작된 ‘FDSC’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이하 FDSC)의 시작은 간단했다. 여성 디자이너끼리 모여 정보 공유하고,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모임의 질문이 있었다면, “왜 여성 디자이너가 35세 이상이 되면 사라지는가?”였다. ‘사라진다’에 집중된 것. 그러던 중 사라지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왜 사라지는가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의문을 갖고 그렇게 되는 문제를 하나씩 뒤집어 보자고 생각하고 운영하게 됐다.
“모임을 통해 나보다 가진 게 많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다양한 사람이 이야기를 나눠서 목소리를 내면 바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FDSC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겠구나 생각했다.” (소미)
“참여 계기는 각자가 다르겠지만, 디자인 업계에서 느꼈던 공통 분모가 있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디자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동료가 필요했다.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점점 디자인 업계를 떠나는 걸 보면서 더욱더 갈구 했던 것 같다.” (윰)
“디자이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대학교 졸업 후 바로 신청했다.” (경주)
“디자이너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주변에 아는 디자이너가 많이 없어서 외로웠다. FDSC에서 동료가 많이 생기고, 관심사 표출도 가능했다.” (지경)
동료가 필요해서 들어온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도 많았다. 또한, FDSC의 활동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내가 차별을 받았구나, 평범하지 않았구나.”라는 걸 자각하기도 했다.
나만의 디자인으로 존중하는 문화, FDSC에 남아있게 하는 힘
FDSC의 매력은 다양하다. 이곳에 오면 일로 쌓인 긴장감을 풀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스타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된다. 디자이너들은 멋진 결과물을 만든다는 인식이 있다. 때론 나와 다른 디자이너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런 점이 긴장을 만든다. 하지만, FDSC는 그런 게 없다. 너무나 많은 디자이너가 있고, 작업물이 있다. 나만의 디자인이 있고, 그게 존중받는다.
“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디자이너가 있고, 다양한 작업물이 있다. 그 때문에 나도 나만의 디자인이 있고, 내가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지경)
“기존 디자인업계는 항상 스타 디자이너만 주목하고, 그런 사람들이. 인터뷰나 행사에 초청받는다. 그러나 FDSC에서는 꼭 스타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게 쌓인 긴장도를 해소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게 매력이다.” (윰)
활동을 하면 할수록 긴장도가 내려간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해 알아가고, 일에서 오는 번아웃이 해소가 된다. 그것이 FDSC에 남아 있게 되는 힘인 것 같다.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FDSC를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여기서 알게 된 걸 현장에서 직접 말해 변화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힘을 얻는 게 매력이자 장점이다.
디자이너의 ‘몫+소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럼에도 우리는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이너들이 겪는 불공정 계약이나 법적 분쟁에 대응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콘텐츠는 칼럼 형태다. 변호사님과 3편을 만들고, 노무사님과 2편을 만든다. 현재 3회 분량 녹음이 진행됐고, 3회가 공개된 상태다.
칼럼은 FDSC와 협력하고 있는 변호사님이 작성해 주신다. 디자이너들이 겪는 사연을 모아서 변호사님께 전달해 드렸다. 전달해 드린 내용은 디자인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법적 문제점 등이다. 이 부분에 변호사님이 답변하는 형태로 칼럼이 진행된다. 이 콘텐츠를 통해 공정한 계약과 협상, 디자이너 본인의 권리를 지키는 법에 대한 법률 정보를 알리려고 한다. 12월 2일(토)에는 디자이너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진행했다. 꼭 디자인 업계가 아니어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40명 정도 규모로 계획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행사에 함께 해주셨다.
디자이너의 목소리로 여성의 일을 말하는 팟캐스트 디자인FM을 통해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법을 근거로 대응하는 방법을 들을 수 있다. ⓒFDSC
FDSC 활동 자체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말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 중에 여성 비중이 높다. 70% 이상이 여성으로 알고 있는데 여성의 수는 많지만 정규직 형태가 아닌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프리랜서 입장에서는 외주를 받을 때 회사와 비교하면 협상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개인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벅찬데 법적인 권리를 찾아 배우는 게 쉽지 않다. FDSC의 활동이 그런 여성 디자이너들에게 내 권리를 알려주고 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현실적인 면에서 계약서를 잘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법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여성 프리랜서 비율이 70% 이상으로 높다. 회사와 계약을 진행할 때 협상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런 여성 디자이너들이 혼자 전전긍긍 하는 게 아니라, 물어볼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소미)
또한 비단 여성에게만 도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약자를 위한 무언가가 존재할 때, 그것이 모두에게 혜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FDSC 활동도 여성만 혜택을 받는 게 아니라. 소수자 혹은 약자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약자에 대한 권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 모두의 권리를 옮기는 것이다.
12월 2일(토)에 진행한 ‘법딱뚝딱' 행사 장의 모습.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이 도움 받을 수 있는 법 지식을 다루고 있다. ⓒFDSC
FDSC가 꿈꾸는 변화
현재 팟캐스트를 3화까지 녹음했다. 내용이 계약상의 권리와 의무다. 디자인권, 저작권 권리 관련 내용을 다뤘다. 결론적으로 현재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바꿔야 할 부분도 많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예를 들면, 작업물이 회사에 귀속되어 내가 쓰지 못하는 게 현재 법이다.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로 말하는데, 내 작업물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법은 이런 디자이너의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회사와 협약을 통해 바꿔야 한다. 시작은 작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확산이 된다면 디자인 업계 전체에 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하고 싶다.
“최근 스타트업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계약서상 내용을 변경했었다. 저작물이 회사에 귀속된다는 부분이었다. 스타트업에 직접 말씀드려서 수정했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전혀 몰랐다며 오히려 고마워하셨다. 이런 점에서 자신감을 얻고, 법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서 자신감이 생겼다.” (경주)
FDSC의 프로젝트 강연 ‘법딱뚝딱'의 강연을 듣고 있는 참가자의 모습 중 ⓒFDSC
FDSC 팟캐스트를 통해 디자이너가 아님에도 디자이너 문화에 대해 이해했다는 분들이 계셨다. 꼭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시는 분들은 공감되는 내용이 많을 거 같다. 이렇게 그동안 넘어갔던 부분들을 되짚어 보고, 문제를 제기를 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팟캐스트도 그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변화를 상상하는 사람이 변화를 만드는 것 같다. 내가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목소리를 내고, 함께 만들어 가는 것 같다. FDSC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경험이 쌓여서, 내 권리와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지경)
“법이라는 게 완벽하지 않고, 개선되어야 하고, 더 편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법이나 법정이 염라대왕 앞에 가는 느낌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처럼 법에 대한 거리감을 좁혀보고 싶다. 법적으로 주장하지 못할 때, 같이 권리를 요청할 수 있는 연대가 강화됐으면 좋겠다.” (윰)
“'디자인 업계가 디자인 작업만 잘하면 되고, 다른 건 문제가 아니야' 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권력이나 높은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일에서 소외된 채 기존 질서에 따라가거나 참고 견딘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외된 사람들은 본인들의 경험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디자인하면서 접해야 하는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인식개선을 하고 싶다. 이런 활동이 넓게 보면 디자인 업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디자인업계에 들어오는 후배들이 억울하거나 부당한 경험을 더 이상 겪지 않도록, 앞으로의 나에게도 이런 일을 미연에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활동을 하고 싶다.” (소미)
“법이나 저작권뿐만 아니라 디자인 업계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다양한 분야에서 바꿔야 할 부분들을 개선하는 활동을 하다 보면 많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향후에는 내가 기획해서 목소리를 직접 내보고 싶다.” (경주)
글ㅣ윤성민
한량이다. 말과 글,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다. 우선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해내려고 한다.
코멘트
3디자이너 중 여성이 많고, 프리랜서도 많군요. 법딱뚝딱이라는 행사명이 참 인상적이네요 😆 이런 활동은 처음 알았는데요, 서로 앎과 연대를 나누며 안전망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하겠구나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