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은 우리의 정동을 어떻게 빨아먹는가
소셜미디어, 유튜브, 검색엔진, 번역, 포털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상업 플랫폼의 알고리즘들은 하나의 신경망을 조직했다. 오늘날 알고리즘은 인간 정동의 복잡한 굴곡들을 평평하게 다지고 있다. 이 촘촘한 알고리즘 그물망은 우리는 생각과 감정, 의사표현의 과정들을 포획한다. 평소에 좋아요를 누르던 사람이 새 피드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계속 신경이 쓰인다. 검색엔진이나 유튜브에서 키워드를 입력할 때마다 이것과 관련된 광고와 추천이 한동안 화면을 뒤덮을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만 모인 커뮤니티에서 노는 것이 편하고, 지인의 글에서 상반된 입장이 느껴지면 언팔할 것인가 갈등한다. 내가 듣던 음악, 보던 콘텐츠와 비슷한 결로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의 마법에 감탄하면서도, 때때로 영화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 않는 결계가 주변에 쳐 있는 건 아닌가 폐소공포증을 느낀다. 유튜버들은 공식미디어에서 하지 않는 말들을 속시원히 해 준다. 욕설, 선 넘는 농담, 혐오, 자극적인 문구와 언설들. 결국 모든 것들이 구독과 좋아요 때문에 연출되는 한 편의 촌극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면서도 열심히 구독을 누른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평평한 신경망은 부정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세계다. 뭔가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거나, 피곤하게 공동선을 추구할 필요도 사회적 계약을 지킬 필요도 없다. 나와 비슷한 사람끼리만 연결되고, 내가 즐겼던 콘텐츠가 반복 재생되며, 최신 트렌드와 이슈가 가장 유행하는 밈으로 수사된다. 이렇게 평평하고 마찰 없는 단면에서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더 이상 이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사라져가고, 고통도 해학도 심연에 산 채로 묻어버린 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덤덤히 살아가는 것. 감응도 성찰도 없이, 알고리즘이 신경을 대체해 동물처럼 반사신경으로 살아가는 삶이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자아내는 세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에 대한 의구심을 멈출 수 없는 존재다. 헤겔이 ‘비천한 의식’이라 명명했던, 세계라는 대타자와 맞서며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고자 하는 인간 정신은 역사라는 과정의 본질이다. 그것이 중단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좌절을, 그리고 우울함을 느낀다. 비판적인 지식인이건, 예술가이건, 아니면 모든 감각에 대해 백기투항하고 알고리즘이 조작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건 마찬가지다.
최근 나는 크리에이터들의 노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겉보기에 명랑하고 창의 발랄한 에너지로 넘쳐나는 크리에이터들은 방송을 마치고, 유튜브 클립을 올릴 때마다 깊은 슬픔과 허무함을 느낀다고 증언했다. 수익을 창출하는 대다수의 크리에이터들은 항우울제와 상담치료 없이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우리가 알고리즘에 이끌려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영상들, 구독과 좋아요를 부탁하는 제스쳐에는 어떤 필사적인 호소가 뒤섞여 있다. 미디어와 빅테크는 그렇게 광고수익과 구독으로 연결된 주목 자본이 진정한 시장적 가치이며 프런티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들이 손쉽게 자기 자신을 팔아서 벼락부자가 된 로또 맞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모든 것을 좋아요와 조회수의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알고리즘은 그렇게 우리의 정동을 빨아먹고 성장한다.
알고리즘이 강요하는 상품적 욕망과 주목자본의 챗바퀴는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서 정동을 빼앗아갈 뿐 아니라 연결 그 자체를 빼앗아간다. 배달의 민족과 쿠팡이츠 앱을 만지며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데 식사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된다. 몇천 원의 배달비와 라이더의 위험을 품고 도착한 식사를 연 다음, 넷플릭스로 뭘 볼지 리모콘을 누르다 보면 어느 새 밥은 다 먹고 없다. 이런 역설은 소셜미디어에서도, 심지어 과제를 하거나 창작을 할 때도 이어진다. 뭔가를 써내려가는 과정보다 무엇을 써야할지 알고리즘 속에서 헤매는 과정이 더 길어지고, 내적인 갈등을 하기 전에 먼저 어떤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가 방황하는 데 시간을 더 써야 한다. 알고리즘은 그렇게, 인간과 인간 그리고 뉴런과 중추신경 사이에 존재하는 부정성을 제거한 다음 정체된 정동의 흐름을 포식한다. 그런 다음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돈벌이로 메타버스나 암호화폐같은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미래저당 수익으로 스페이스X, 화성이주 같은 허황된 사회혁신을 실현하기 위해 기술을 개량한다.
자유민과 시민사회는 알고리즘이 욕망하는 평평한 신세계에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알고리즘에 대한 시민적 감시와 공개를 동시에 요구하는 선언 및 사회 제도의 정착으로 이어져야 한다. 배달의 민족을 둘러싼 인공지능 배차 알고리즘의 갈등과 위협, 소셜미디어의 피드와 홍보 알고리즘의 사회영향평가, 연결과 디바이드가 일어나는 매커니즘에 대한 기술적 공유가 요청된다. 기업들이 이른바 ‘영업 비밀’ 이라고 이야기하는 알고리즘의 숨은 사회적 설계에 대해, 공통의 권리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한다. EU의 경우 주요 플랫폼들의 알고리즘 공개를 골자로 하는 디지털 서비스법(DSA)을 합의해 2024년부터 발효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해서 본격적인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도록 시민사회 수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공장 기계의 매커니즘이 지닌 사회적 분업 효과에 저항하기 위해 러다이즘을 전개했는데, 우리는 이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러다이트는 무지성으로 기계를 부수는 반달리즘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선거권을 요구하는 보편적 시민권 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두뇌를 조작하는 기계인 알고리즘도 마찬가지다. 이 기계들의 네트워크가 펼쳐내는 신자유주의 혹은 플랫폼 중심의 각자도생 사회구조를 알아내기 위해선, 먼저 그 설계가 투명하게 공개되도록 해야 한다. 알고리즘 신경망에 연결된 우리는 정동기계가 되어가고 있고, 이 작동의 세계에 대한 설계도를 얻어내야 할 때다. “문제는 지적인 기계가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느냐가 아니라, 기계가 아무런 감정 없이 지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마빈 민스키)
신현우(기술문화연구자, 문화연대 집행위원)
정보기술 공간에서의 노동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연구하는 기술문화연구자이다. 플랫폼, 게이밍,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에 걸쳐진 IT 기술문화를 미디어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문화연대 집행위원,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기술, 기술비판이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코멘트
3"배달의 민족과 쿠팡이츠 앱을 만지며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데 식사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된다. 몇천 원의 배달비와 라이더의 위험을 품고 도착한 식사를 연 다음, 넷플릭스로 뭘 볼지 리모콘을 누르다 보면 어느 새 밥은 다 먹고 없다." 너무나 와닿는 현재 상황이네요.
"알고리즘에 대한 시민적 감시와 공개를 동시에 요구하는 선언 및 사회 제도의 정착" 정말 필요합니다.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기업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용자들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보호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개인도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