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할머니를 뉴스에서 더 많이 보고 싶다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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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의심하고 연대를 신뢰하는 저널리즘 연구자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A신문 2023년 9월 14일 목요일 특집면에 아흔살 신달막 할머니가 등장했다. 서울 가는 기차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효율성’의 피해자였다. 할머니가 사는 곳은 평균 나이 80살, 주민 67가구가 사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2. 이 마을 주변엔 기차역 두 곳이 있었는데, 2021년 8월 하루 한 번씩 이 역에 오던 용산행 무궁화호가 사라졌다. 이에 대해 한국철도공사는 ‘적자 노선이라 운영 효율성이 낮다’는 근거를 댔다. 고속열차(KTX) 수혜 지역이 확대 되면서 수요가 감소할 것이기 때문에, 장거리 무궁화호를 없애(‘효율화’라고 표현한다) 영업 손익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KTX가 서는 역으로 가서 환승한 뒤 서울 가란 뜻이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쉽지 고령의 시골 마을 주민들이 따르기엔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서울서 있던 남편 제사나 아들 생일, 병원 방문 등의 일상을 빼앗겼다.

 

B신문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6면 머리기사로 ‘SRT’ 감축 불편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는 내용이 실렸다. SRT는 공기업 ‘주식회사 SR’이 운영하는 열차(SR Train)로,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고속철도들을 운영하고 있다. B신문 해당 기사는 SRT가 운행을 감축했는데 불편하다는 시민 목소리가 크지 않다는 내용이다. B신문은 누구를 취재해서 이런 기사를 썼을까? 자세한 편집국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기사에 나온 바로는 철도노조(전국철도노동조합의 준말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산하의 철도산업 노동조합이다)와 국토교통부를 ‘불편 없음’의 근거로 삼은 모양이다. B신문은 [철도노조는 시민 불편에 대해 취합된 게 없다고 했고, 국토부도 “이달 1일 시행해 데이터를 뽑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시민 불편의 실체가 아직까지는 구체적이지 않은 셈이다.]라고 썼다.

 

어느 지역에선 선택할 수 있는 SRT 좌석이 줄어든다. 그런데 B신문 기사처럼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없을까? B신문에 언급된 줄어든다는 노선은 경부선 SRT 열차다. SRT는 기존에 경부선·호남선에서만 운영되고 있었는데 지난 9월 1일부터 SR이 경전·전라·동해선으로 노선을 확대했다. 그러나 열차 수는 정해져 있어서 3개 노선을 추가하는 만큼 기존 2개 노선에서 운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경전·전라·동해선이 신설된 만큼 진주·여수·포항 쪽 주민들은 서울 강남권으로 바로 가기에 편리해졌다. 그러나 경부선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선택권은 줄어들었다. 자신들의 선택권이 줄어들었다는 데에 대해 모를 수도 있고, 수서행 고속철도를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주민이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철도노조와 국토교통부의 취합된 불편 없음, 취합된 데이터 없음을 가지고 불편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고, 언론은 진정 말할 수 있는가?

 

A신문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A신문과 B신문 둘 다 이러한 기사 유형을 대표하는 기사로 봐주면 좋겠다. A신문은 시골 마을에 사는 여성 노인 주민의 사례를 들어 철도의 공공성에 대해 일깨운다. 사실 SRT 감축과 사라진 용산행 무궁화호는 큰 관련성이 있다. 둘은 분명 ‘열차’이고 철도가 깔린 지역 주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공공성 높은 대중교통인데, 운영 주체가 다르다. 무궁화호는 한국철도공사가, SRT는 SR이 운영한다. SR은 2011년 이명박 정부의 ‘수도권 고속철도 운영 민간 개방’ 기조 이후 설립된 회사다. 당시 이를 철도 민영화 첫 단추로 보는 우려가 컸는데 이러한 걱정의 시선은 여전하다. SR은 흑자가 나는 고속철도, SRT만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고속철도 자체가 흑자가 나는 이른바 알짜배기 노선이다. 수서행 고속철도 운영을 떼어준 한국철도공사는, 수익 성적에서 SR과 차이가 난다. SR은 코로나19 시기인 2020년, 2021년 외에 모두 흑자를 냈지만 한국철도공사는 계속해서 적자다.

 

흑자가 예상되는 SRT를 떼어준 한국철도공사는, 적자가 나는 걸 보면서 무궁화호 운행을 줄인다. 무궁화호 운행 감소는 오봉2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철도공사는 무궁화호 운행을 전체적으로 줄여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예정이다. 한국철도공사의 경우 KTX에서 흑자가 나고 무궁화호와 새마을호에서는 적자가 난다. 한국철도공사와 SR이 별도의 회사로 운영됨에 따라 중복 비용이 발생하고, 한국철도공사의 적자가 눈에 띄면서 이용 수요는 적지만 국민의 철도 공공성 보장을 위해선 필요한 이른바 ‘적자노선’을 자꾸 감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SRT 감축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철도노조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서행 KTX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와 SR로 쪼개진 철도 운영에 대해 제동을 거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정부의 이 같은 철도 운영으로 왜 국민들은 열차를 가지고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하는가?

 

노동조합과 정부에서 취재 그치지 말아야

언론 신뢰를 말하는 공간에서 열차 이야기가 길었다. B신문의 경우처럼 정부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결사체가 있는 이들의 말에서 취재와 보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노동조합의 경우 기울어진 한국 언론 지형에서 가장 많이 소외받고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야 했던 집단 중 하나다. 이들을 취재하지 말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노동조합과 정부에서 시민 불편의 목소리를 찾아다닌 것이 의아하다는 뜻이다. 언론은 그동안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았고 보호받지 않았던 시민들을 더 많이 찾아다녀야 한다. 흔히 우리나라 언론 신뢰도는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때 한국 언론이 정치적 편향성을 다 같이 벗어나자고 결의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뒤에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공정성, 균형성, 중립 등인가? 아니다.

 

언론 신뢰는 언론이 공공성 회복으로 보도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고, 그에 따라 취재원과 수용자를 철저히 재설정 하는 것과 관련 있다. 영미권 커뮤니케이션 학자 셋이 저널리즘의 위기를 진단하고 개혁 또는 혁명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하는 책 <저널리즘 선언(오월의봄)>에서, 학자들은 저널리즘이 스스로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포용성 △사회정의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는 대안적 규범을 수용하라고 조언한다. 언론계에서 흔히 인용되는 정확성, 진실성, 책임성, 독립성, 투명성, 객관성, 균등성, 기계적 중립 등은 규범적 상상 속에서 존재할 뿐 우리의 생각처럼 명확하지도,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지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의의도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주류 언론에서 규범처럼 지켜왔던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았던 사람들을 포함하는 저널리즘(포용성), 지면에 싣기 적합한 뉴스가 아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뉴스를 우선하는 저널리즘(사회정의), 낯설거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온 장소에서 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호기심을 갖는 저널리즘(코스모폴리타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취재원으로도 독자·소비자로도 여기지 않았던 수용자들과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고도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 수용자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야 하며, 수용자의 뉴스 관련 의례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런 지점에서 B신문 기사는 우리나라 언론에서 보기 쉬운 평범한 기사이다. 기자들이 자주 찾아가고 기자들을 자주 상대하는 조직들은, 마련해 둔 ‘홍보실’이 있고 기자들은 그들을 상대해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B라는 언론사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저런 부류의 기사엔 공공성에서 소외된 시민의 불편이 없다. 실제로 불편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류 언론에서 규범처럼 써왔던 취재원이 아닌, 소외돼 왔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정말 불편함이 없다’는 말이 나와야 한다.

 

한계를 핑계로 저널리즘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정파를 핑계로 신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이런 대안을 내놓으면 시간 부족, 인력 부족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뉴미디어 환경에서 경쟁에 내몰려 있고, 올드미디어라고 하더라도 마감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편집국 인원수가 몇천몇만 명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철도노조 파업 기사 하나를 쓴다고 파업으로 인한 시민 불편을 밖에 나가서 계속해서 인터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라고 한다면 벌써 저널리즘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언론 신뢰를 포기하겠다면 지금처럼 쓰면 된다. 그러면 변화할 수 없다.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은 더욱 커져야 하고(정치가 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에 의존하는 보도 행태 또한 계속된다. 그렇게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정치적 편향을 포함한 언론의 권력 편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사실 현재의 언론은 시민에게서 신뢰받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운영비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민 후원이나 구독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언론사의 경우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언론은 몇 없는 데다 최근 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둘러싼 논의를 볼 때 다수 시민이 ‘신뢰할 만한 언론 키우기’에 관심 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시민들은 언론이 편향돼 있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이 뉴스를 선택할 때 편향된 상태로 고르기도 한다. 언론은 시민을, 시민은 언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인 걸까? 그러나 그런 우울한 시대로 정의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이 이 글의 목표는 아닐뿐더러, 시민으로서 우리의 역할도 아니다.

 

P.S. A신문의 해당 특집면은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A신문이 너무나 뛰어나서 쓸 수 있었던 기사는 아니었던 점을 말해두고 싶다. 다만 우리는 이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 공공성을 지켜내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A신문과 노동조합이 신달막 할머니를 포함한 오봉2리의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 목소리를 곁에서 듣던 철도노동자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특집면 기사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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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공공성

구독자 66명
현대 사회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언론의 역할과 해당 이슈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어서 특히 좋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의 할머니와, 곧 할머니가 될 나의 엄마와, 또 언젠가 할머니가 될 나를 생각합니다. 뒤켠으로 비껴난 시민의 삶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게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되겠군요.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론 공공성의 중요성을 사례를 통해 직관적으로도 논리적으로 알려주시는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과 국가가 아닌 시민들의 언론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만큼 반드시 실현하거나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결사체가 있는 이들의 말에서 취재와 보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엄청 공감가는 한줄을 꼽아봤습니다. 물론 바쁘고 마감의 압박도 있고 몸은 하나인데 취재가 필요한 현장은 여럿이라 힘들겠지만, 언론인들이 언론의 존재이유를 취재로 답해주길 바랍니다.
현재 언론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언론이 욕먹지 않은 시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욕을 먹어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경험이 기반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본문에 써주신 사명감을 갖고 활동한다면 시민들이 깊은 신뢰를 갖고 언론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포용성 △사회정의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는 대안적 규범을 수용하라고 조언한다. 언론계에서 흔히 인용되는 정확성, 진실성, 책임성, 독립성, 투명성, 객관성, 균등성, 기계적 중립 등은 규범적 상상 속에서 존재할 뿐 우리의 생각처럼 명확하지도,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지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의의도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라는 말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고민할 수 있는 점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의 관점에서 쓸 것인가가 핵심이라 느껴지네요. 언론의 역할을 나누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권력감시와 약자 대변이라는 두 가지의 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권력감시가 언론의 역할로 정리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스피커가 없는 사람들, 텍스트 속 세상이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다면 언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철도노조 파업의 사례처럼 취재의 방식과 과정은 다양하겠지만 누구의 관점으로 보도하고 있는지, 취재를 할 것인지 언론이 더 많이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