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요?

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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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남성성'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단체입니다.
<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요?>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A는 ‘먹방’을 즐겨 본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쌓아놓고 탐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은 그에게 왠지 모를 충족감을 주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먹을 수 없으니 누군가의 폭식을 보며 대리 만족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모니터 화면 속 스트리머는 무엇인지 모를 고기를 한가득 쌓아두고 바삐 먹고 있다. A는 일만 원을 후원하며 고기 세 점을 한 번에 쌈에 싸서 먹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먹방을 보던 A는 이제 조금 질린다고 생각하며 ‘더 재미있는 영상’을 찾아 다른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 접속한다.

해당 방송 플랫폼 메인에는 현재 인기 있는 라이브 방송이 순위별로 나열되어 있다. 대부분 게임 방송이나 스포츠 혹은 소위 ‘벗방’이다. A는 눈에 들어오는 한 여성의 라이브 방송에 접속한다. 화면 상단으로는 엄청나게 쌓인 후원금 수치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게 보인다. 화면 한 쪽에는 후원금 액수별로 해당 스트리머가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선정적인 ‘모습’들이 정리되어 있다. 후원은 이어지고 스트리머는 받은 돈에 비례하는 포즈나 자세를 취해 ‘보여’준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A는 이내 해당 방송을 끈다.

A가 다음으로 들어간 라이브 방송은, 분명 ‘벗방’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한 여성 스트리머의 라이브 방송이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음악 방송인 듯 하다. 이내 후원금이 들어오는 알림음이 들리고, 요청사항이 올라온다. … ‘만 원에 발 보여주세요’ … ‘3만 원에 겨드랑이 보여주세요’ … 해당 스트리머는 당황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요청을 넘기는 모습이다. 곧 이어 ‘돈을 냈는데 왜 안 보여주냐고’ 화내는 시청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듯 스트리머를 향해 날것의 분노를 표출한다. 더 이상 보고 있는 게 께름칙한 A는 해당 라이브 방송에서도 도망치듯 나온다. 잠시 쉼이 필요해 이내 컴퓨터를 끈다.

어두워진 모니터에는 지친 얼굴이 비친다. “난 뭘 보고 있었던 걸까?”


본다는 것은 뭘까. 단순히 내 앞에 있는 어떤 현상, 사물, 사람을 인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는지 알고 있다. 때로는 직접적인 말 한 마디보다 한 줄기 시선이 더 강한 메시지가 된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줄곧 “눈 깔아!”를 남발하는 사람들을 지나왔다. 엄하기로 소문한 선생님은 꾸중할 때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냐’고 물었고, 학교에서 만난 선도부와 군대에서 만난 선임은 자꾸 ‘눈을 깔라’며 내 시선을 통제했다. 내 시선은 곧 내 방향이었고, 내 의사였으며, 내 권위와 주체성이었다. 나를 통제하거나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은 내 시선부터 순종시키려 한 것이다.

‘판옵티콘’을 아는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밴덤’이 고안한 감옥의 설계로, 감옥 건물이 둥글게 중앙 망루를 둘러싼 형태로 지어져, 간수는 가운데 망루에 서서 모든 죄수를 빠짐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죄수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자에게 노출될 것을 의식하며 24시간 경계하게 된다. 죄수들은 실제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중앙에 놓인 ‘시선의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통제 당하게 된다. 이렇듯 시선은 분명 권력이다.

@쿠팡플레이 SNL KOREA


다른 시선은 어떠한가. ‘사키 바트만’을 아는가. 인류는 불과 200여 년 전, 한 인간을 광장과 대학에서 알몸으로 ‘전시’했다. 당시 그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의 평범한 소녀였는데,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납치되어 영국에 팔려 ‘인종 전시’를 겪다 다시 프랑스에 팔린 후 성적으로 착취당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서양인들이 ‘만국박람회’ 등에서 유색 인종을 ‘인간 동물원’의 형태로 전시했었다. 당장 우리나라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2명을 전시했던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해 서울 도심을 누볐던 얼룩말 ‘세로’를 기억하는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연이어 부모의 사망을 겪은 뒤 방황하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반대편 우리에서 지내던 캥거루와 싸운 일도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스스로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동물원을 탈출해 서울 도심을 활보했다.

‘동물권’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차치하도록 하고, 시선 권력을 대입해 얼룩말 ‘세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둘 수 있는 우리를 만들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집어넣고 나오지 못 하게끔 울타리를 높게 세운다. 그리고 밖에서 ‘안전’하게, 안에 갇혀 ‘전시’된 존재를 ‘구경’하고 일방적으로 말을 걸거나 가지고 있는 걸 주기도 한다. 그렇게 권력과 위계의 차이는 가시화 되고, 차별은 더 명확하게 전시되고 공인된다.

얼룩말 ‘세로’가 갇혀있던 우리를 빠져나와 서울 도심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세로’를 걱정하고, ‘세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세로’가 겪었던 외로움이나 아픔에 공감했다. ‘세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울타리 안에 있던 ‘세로’가 그저 ‘전시’된 얼룩말로 취급되며 ‘구경’의 대상이었던 것에 비해, 울타리라는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세로’는 하나의 ‘존재’이자 ‘주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원부터 과거 서구권의 제국주의가 ‘사키 바트만’과 ‘유색 인종’을 전시하고 구경하려 했던 그 모든 시도는 ‘주체’를 ‘대상’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대상화’였던 것이다.

@Pixabay

온라인 환경이라고 오프라인과 다를까. 라이브 방송 같은 환경에서 스트리머나 유튜버가 겪는 일부 폭력적인 상황은 마치 ‘디지털 동물원’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각종 매체를 가리지 않고 댓글이나 실시간 채팅에서 보이는 성적대상화와 성희롱, 외모 이야기와 분별없는 비난은 정말 심각하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마치 본인이 판옵티콘의 가운데 망루에 선 간수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여성은 아무 잘못 없이 판옵티콘의 죄수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가.

시선은 분명한 권력이다. 시도 때도 없이 꺼내놓는 보잘 것 없지만 폭력적인 그것은 분명한 의사와 방향을 가지고 대상을 향한다. 동성 커플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면 지나친 후 살짝 뒤돌아보는 눈길이 따른다. 흘깃. 외국인이 지나가면 누군가 슬그머니 쳐다본다. 흘깃.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목발을 짚는 사람이 대중교통에 타면 슬쩍 쳐다본다. 흘깃. 지나가는 여성의 신체를 흘깃거리는 남성의 시선. 흘깃. 흘깃하고 지나가는 이 모든 것이 시선으로 저지르는 권력 행위이자 차별과 폭력이 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시선을 통해 한 번 더 짚어내는 그 행위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찍어내며 사회와 구분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지나가는 여성의 신체를 함부로 훑는 남성의 시선. 그 시선이 카메라에 담기면 불법 촬영이 된다. 그 시선이 모여 단톡방에서 여성을 품평하고 성희롱하며, 그 시선이 만든 ‘불법 촬영물’을 서로 돌려 본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선으로 자신의 지인이나 동료를 음란물과 합성해 인터넷에 유포하는 ‘지인능욕’도 존재한다. 이 시선들은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성욕과 소유의 대상으로 구분하며 ‘대상화’ 한다. 이때 ‘대상화’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대상’으로 격하하거나 폄하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폭력이고 혐오다. ‘사람을 물건 다루듯이 하면 안 된다’는 표현 역시 이러한 맥락인 것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소유의 대상,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그 시선은 여성에 대한 ‘대상화’이며 곧, 시선으로 행하는 ‘폭력’이 된다. 앞서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어떤 존재가 ‘대상화’ 되었을 때, 얼마나 쉽게 더 큰 폭력에 노출되는지 함께 보았다.

‘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많은 이들이 불편해 하는 ‘시선 강간’이란 명명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강간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안된 표현은 분명 아닐 것이다. 흘깃거리고 훑어보고 뚫어져라 보는 그 시선을 통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소유와 욕정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그러한 대상화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의 전조 현상이 될 수 있는지 경고하기 위한 표현이 아닐까.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시선 폭력’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경각심을 갖는 일이다.

2018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하던 황다건 치어리더가 있었다. 당시 나이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미성년자였던 그는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치어리더 중 한 명이었으나, 일베 등 커뮤니티의 성희롱과 욕설, 성적대상화로 결국 해당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황다건 치어리더는 개인 SNS를 통해 이러한 성희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으나, 이를 일베 등 커뮤니티에서 ‘그런 시선 강간이 싫다면 치어리더를 안 하면 된다’고 발화한 것이 보도(기사 링크 : 황다건 성희롱 피해 호소.. 일베 “싫으면 치어리더 안 하면 된다” - 한강타임즈) 되기도 했다. 평소 남성들이 어떤 눈으로 치어리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일베 속 발화자의 말처럼 정말 황다건 치어리더가 칼군무를 췄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게임 속 멋있는 기사 갑옷이 여성 캐릭터에게 닿으면 비키니 갑옷이 되고, 수많은 아이돌이 박자 맞춰 칼군무를 춰도 여전히 '섹시 아이콘'이자 '움짤'로 소비되는 현실을. 게다가 황다건 치어리더는 당시 미성년자였음을 빼놓을 수도 없고 말이다. 아직도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과하다 생각하는가. 솔직히 정말 과하고 말이 되지 않는 건 치어리더로서의 꿈을 이어나가고 싶은 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성희롱과 성적대상화, 메일 게이즈(Male Gaze) 쪽 아닌가. 그 시선, 분명 폭력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포스터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남을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냐’고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틀렸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문제다. 애정하는 영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이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시선을 통해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이 소유가 아닌 흘러가는 추억이자 시선으로 하는 예술임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보여준다. 추천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한 마디로 추천사를 쓴다면 ‘메일 게이즈(Male Gaze)’를 전복시키는 퀴어 영화이자 시선으로 사랑을 그려낸 걸작이라 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정 남성이 나와 특정한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남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엄존하는 가부장제 속 여성에게 내면화된 폭력과 억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가부장제 속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강요받던 주인공은 또 하나의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 시선에는 착취도, 대상화도, 평가도, 의도도 없다.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이다. 응시를 통해 존재 자체를 보려하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자꾸 훑어보거나 흘깃 보거나 곁눈질로 본다. 노려보거나 내려볼 때도 많다. 함께 살아가는 동료가 ‘대상’으로 격하되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나. 어떻게 안심하고 관계 맺을 수 있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암묵적인 편견과 차별의 렌즈를 벗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만드는 시선이 아닌, 그 존재의 있는 그대로를 응시하는 시선이어야 한다. 여성을 신체로만 본다면, 당신은 여성과 관계 맺을 수 없다. 아니, 관계 맺어서는 안 된다. 이미 여성을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시선 강간’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안한다. 스스로 의식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검수하는 일을 하자. 이미 오랜 시간 써 온 암묵적인 편견과 차별의 렌즈 없이 살아가는 일은 분명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여성 동료와 동행하고, 약자와 소수자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과감히 그 시선을 벗어야 한다. 내 시선이 내 의도 혹은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경계하며 지속적으로 검수해야 한다. 소유나 구경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누군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을 하자. 당신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날까지.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6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OEtOY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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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항상 피해자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그의 옷차림, 예민함, 시간대 등이 자주 언급됩니다. '밤에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걷는다'는 지극히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성폭력을 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어린이, 유아, 비인간동물에게 '귀엽다'는 이유로 쉽게 거두어지지 않는 시선 또한 조심하자는 제안도 기억이 남네요.
시선에 무엇이 담겨있는가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네요. 의도와 상관없이 시선에 위계가 담겨 있다면 권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시선을 의식하고 검수하자는 제안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