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설거지론을 설거지하다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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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남성성'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단체입니다.

2화 <설거지론을 설거지하다>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그는 모니터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으로 보이는 한 커뮤니티 게시판, '퐁퐁남'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게시판에는 소위 '퐁퐁남'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두고 키득 거리며 조롱하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이내 그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세상은 고요하고 그는 생각에 잠긴다. 

‘가만, 이거 내 얘기인가?’

@Pixabay

‘설거지론’ 그리고 ‘퐁퐁남', 21년도를 기점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야담(野談)이다. 나는 오늘 이 야담의 실체를 드러내고, 키득거리는 농담 뒤에 암약한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대상화를 고발하려 한다.

‘설거지론'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1. 사회 초년생 시기, 소위 20대 때 ‘연애’ 한 번 못 하고 공부만 하던 ‘순수한' 남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
  2. 본인이 가진 ‘능력’을 동원해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3.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여러 연애 경험을 가진 ‘순결’하지 않은 여자였고, 이제는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지내게 된다.
  4. 남자는 여자가 주는 ‘용돈'만 받고 경제권을 잃은 채, 가사노동의 대표격인 ‘설거지’를 ‘퐁퐁'으로 ‘해줌'으로써, 간신히 성관계를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동반자 간의 성관계를 ‘의무방어전’이라 부르며 피하거나 억지로 임하기도 한다.
  5. 이 남자는 ‘좋은 직장'이라는 ‘능력'을 가진 억울한 ‘퐁퐁남'이고, 이에 비해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 하고 연애 경험이 일천한 남자를 두고 ‘도태 한남'이라 한다. 그와 결혼한 여자가 20대 시절 만났던 잘생기고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는 ‘지뢰 설치반'이라 부른다.


‘퐁퐁남’ 야담은 그야말로 폭력의 마라탕이다.

유해한 남성성으로 팔팔 끓는 육수에 각종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대상화인간 경시의 문화가 가득 들어있다. 무한 경쟁의 능력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 여성을 트로피로 여기는 폭력적인 도구화, 가사노동에 대한 무시와 차별, 연애와 관계를 ‘성적 거래'로만 여기는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와 외모지상주의까지. 마라탕으로 비유한 것이 마라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특이한 것은 여성에 대한 왜곡되고 폭력적인 시선으로 대놓고 일관하는 이 야담(의 발화자들)은 오히려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군다는 것이다. ‘옛날이랑 다르게 요즘 남성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든데'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식당과 맥주집에서 테이블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들었던 아저씨들의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 ‘에이~ 마누라한테 잡혀 살아~’라며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 아저씨는 ‘잡혀 산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사노동을 여성 배우자에게 일임했던 가부장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퐁퐁남 야담’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오히려 지긋지긋한 성차별의 동어 반복일 뿐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설거지론'은 왜 계속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설거지론’을 계속 소비하고 있는 이들의 사고나 정서가 ‘식민지 남성성’의 그것과 이어진다고 느꼈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 지배로 인해 상처받은 남성성과 사회적 지위를 내부의 여성과 약자에게 ‘가부장적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회복하려는 고유의 남성성을 일컫는다. 설거지론을 소비하는 이들은 무엇에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가? 소위 ‘연애 경험’과 ‘잘난 외모’, ‘사회적 성공’을 거둔 '더 나은' 남성들에게서다. 이 남성들을 상위 계층으로 상정한 뒤, 자신은 하위 계층에 속하는 남성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계속 갈급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채찍질은 그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에게도 향하는데, 그것이 바로 설거지론이 지목하는 '집에서 놀고 먹는다고 일컫는' 여성이다. 이 ‘식민지 남성성’에 빠진 남성들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상상 속 상위 계층과 비교하며 받은 억압을 주변의 여성에게 푼다. 지질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성공'을 꽤나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나 정도면'을 시전하기도 한다. 스스로 상위 계층이 되지 못 한다고 상정해놓고, ‘나 정도 능력이면' 하위 계층은 아니라는 태도다. 자신보다 ‘사회적 성공’이 부족한 남성을 ‘하위 계층’으로 정하고 깔보기도 하고, 상위 계층이 되어봐야 결국 ‘퐁퐁남'이 될 뿐이라고 자위(自慰)하기도 한다. 본인은 ‘연애 경험'이 부족해도, ‘사회적 성공'을 가진 ‘순수한' 남성인데 “왜 본인을 만나주지 않느냐고” 여성들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면 머리가 띵하고 어지럽다. 동시에 정작 본인이 만나는 여성을 자신의 ‘능력을 보고 만난다’고 혐오하기도 하는 등 논리 내(內) 모순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혐오와 ‘구분 짓기'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식민지 남성성'이 ‘퐁퐁남'의 그림자 위로 보였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설거지론'의 가장 해로운 대목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다.

설거지론을 제창하는 남성들이 가장 크게 놓치고 있는 부분은, 첫째, 본인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사회적 성공과 지위’를 획득한 후에도 여전히 관계를 능숙하게 맺지 못 한다는 것이다. ‘배경이 아닌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사랑 이전에 사람과 제대로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게 먼저다. 사람 간의 관계가 어떻게 ‘사회적 성공과 지위’의 획득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좋은 관계’는 힘과 권력에 근거해 형성되는 게 절대 아니다. 즐겁고 안전한 관계 맺기, 평등한 관계 맺기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면 답은 가까이에 있다. 외롭고 쓸쓸한 당신이 기대야 할 곳은 ‘설거지론’이 아니라 ‘성평등론’, 즉 ‘페미니즘’이다. ‘구분 짓기’가 아닌 ‘평등해지기’가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둘째, 여성을 주체이자 인격체, 사회의 동료로 보는 것이 아닌 ‘능력’과 ‘자본’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폭력적 시선이다. 당신에게 소위 ‘여사친’이나 친밀한 ‘여성 동료’가 없는 것은 그들이 나빠서도, 당신에게 ‘매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당신의 시선과 생각이 ‘폭력적’이라서 그렇다. 설거지론을 제창하며 여성을 대상화 하는 당신을 좋아할 사회적 동료는 없다. 누군갈 구분 짓거나 조롱하며 맺는 남성 연대만 곁에 남을텐데, 그들 중 일부는 분명 속죄하며 떠날테고, 쪼그라든 집단엔 돌봄은 부재하고 한탄만 남아, 커지는 고독은 영원한 미해결 과제로 남을 것이 선하다.
셋째, 설거지론은 여성에게 성적 ‘순결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성에게 귀속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는 여성을 트로피로 여기는 폭력적인 도구화로 이어지면서, 종국에는 연애와 관계를 ‘성적 거래'로만 생각하는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결국 그 여성과 함께 하는 건 본인이 아닌가. 본인은 그 사람을 '매력적'이라 생각했고, '선택'해서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아까우니 이제 그만 떠나겠어”도 아니고, “내가 너보다 더 아까운데 그걸 몰라주고 이런 푸대접을 한다니”라니 이런 자기모순과 지질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질함’이 아닐 수 없다.

‘설거지론’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어느 누구와도 친밀하고 진솔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나아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거나 제대로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할 것은 더욱 분명하다. ‘식민지 남성성’으로 사람들을 알량한 기준의 저울 위에 올려두고 값을 매기고, 성급하게 일반화 하여 판단한 후, 시간을 쌓고 감정을 공유하는 게 아닌 ‘성적 거래’를 하고자 하는 이와 누가 친밀하게 지내고 싶겠는가. 아니, 지낼 수 있겠는가. 모든 관계가 서열을 다투는 처연한 계급 투쟁의 장이라니, 너무 끔찍한 인생이다. 이는 결국 ‘설거지론’을 소비하는 당신을 외롭게 하고 열등감 속에서 고통받게 할 것이다.


‘아침밥'은 받아야 하고, ‘브런치’는 허락할 수 없다는 그 남자.

‘설거지론’에는 ‘아침밥’과 ‘브런치'가 각각 대조되어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아침밥 차려주기, 넥타이 매주기, 배웅해주기 등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뒤섞여 있는 ‘자발적 봉사'를 바라는 남자는, 본인이 출근한 후 배우자가 본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카페에 가서 ‘브런치 먹으며 수다 떠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신은 ‘쌔 빠지게 일’하는데, ‘농땡이’ 피우냐는 것이다.
이 역시 앞서 살펴 본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와 맥락이 같다. 본인과 결혼한 여성이 본인에게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더 나아가 하나의 상품이자 서비스로 ‘아침밥’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받아 마땅한 상품과 서비스가 제때 제대로 제공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태도로 연애와 결혼, 관계를 ‘측정’하는데, 이때 배우자인 여성은 남성의 트로피로 전락해 대상화 된다. 여성 혐오이자 성차별인 것이다.

장담컨대 세상 어떤 여성도 남성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브런치 먹으며 수다 떨기' 위해, ‘농땡이' 피우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 한국의 3040 여성 고용률은 OECD 하위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대 여성 고용률이 OECD 평균을 웃도는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는 심각하고, 결혼과 임신 그리고 육아를 선택한 여성은 경력보유 여성으로서 어떻게 본인의 커리어를 이어나갈지 고민한다. 가사노동은 기획부터 인력 배치, 실행과 평가까지 많은 업무 과정을 갖춘 고강도의 어려운 노동이다. ‘정돈된 상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시포스의 바위 속으로 빠지게 되는 일이다. 동시에 이따금씩 내외부의 변화나 수요를 반영하여 루틴을 재정비하는 구조조정까지 동반되어야 한다. 규모는 작지만 하나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 일은 그럼에도 경력이 없고, 임금도 없고, 사회적인 관계도 없다. 가사노동을 전담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세상과 현실을 전혀 담지 못 하는 ‘설거지론’이 진짜 론(論)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빠진 내용이 있다. 도대체 아내와 그 동안 어떻게 소통해 왔던 것일까? 어느 날은 분노에 가득차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속상하고 실망해서 이불을 뒤집어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퐁퐁남’을 자처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파트너와 진중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했다는 내용은 없다. 오로지 '안 봐도 비디오'라는 식의 지레짐작이나 한두 마디 정도의 관습적이고 단편적인 반응을 언급할 뿐이다. 명색이 함께 살기로 서약한 배우자일 텐데, 정작 자신의 배우자와는 제대로 소통하지도 않은 채 익명의 커뮤니티에 불만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문제라고 느끼는 게 있다면 함께 고쳐나가면 되지 않을까? 대접 받는 데는 저돌적인 남성들이 문제 해결 앞에서는 회피적이다. 이 모순을 어찌하면 좋을까.


@Pixabay


‘설거지론’을 심판대에 올려 고발한다. 그리고 부디 ‘허상의 공동체’를 깨고 진정으로 관계 맺길.

혐오와 조롱으로 손에 손을 잡은 인터넷 커뮤니티 속 연대는 허상에 불과하다. ‘설거지론’은 틀렸다. 아니, 그릇되었다. 폭력이다. ‘설거지론’이 세상인 것처럼, 현실인 양 살아간다면 허상 속에서 관계는 점차 메말라 갈 것이다. 그 곳에서 당신은 무한하게 평범한 악일 것이다.

설거지론의 연대기가 처음 시작된 20대로 돌아가보자. 연애 대신 공부를 선택했던 '순수한' 당신의 젊은 시절 말이다. 이때 공부했다면 공부한 것이고, 연애했다면 연애한 것이다. 왜 공부를 선택한 당신의 20대가 마치 밑지는 장사였던 것처럼, 저당이라도 잡힌 것처럼 말하는가. 남성 섹슈얼리티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여자를 어떻게 잘 만날 수 있을지'를 넘어서, 여성과 연애를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를 말이다. 왜 연애를 마땅히 해야 했던 의무 또는 권리로 여겼는지, 그 시절 하지 못 했던 것에 미련을 가지며 '보상' 받으려고 애쓰는 것인지 말이다. 20대는 연애로 물들어야만 하는가?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내의 헌신과 수용으로 완성되는가? 설거지론은 파트너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품질처럼 따지는 심각한 성차별인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도 열패감으로 가득한 가격표를 붙이도록 강요하는, 오로지 상처와 패자만 존재하는 세계관이나 다름없다.

현실이 외롭고 고단하다면, 당신의 손에 든 ‘설거지론’을 버려라. 그리고 ‘성평등론’을 들고 펼쳐보자. 그렇게 펼쳐진 넓고 다채로운 세상에서 당신은 성별과 정체성으로 차별받지 않을 것이고,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관계 맺고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의해 함부로 구분 짓거나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미끄러질 때 조롱 대신 위로가 함께 할 것이고,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함께 서로의 행복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허상의 공동체’를 깨고, ‘식민지 남성성’을 건너, 혐오와 조롱의 페이지를 뜯어내 버리는 일. 늦지 않았다.


@Pixabay

들여다보던 모니터 화면이 어두워지며 컴퓨터 전원이 꺼지고 이내 고개를 돌렸을 때,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현실에선 웃을 수 없다는 것을.

“고독하구만.”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2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6MtO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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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퐁남이라는 표현이 있었군요... 혐오 관련 창의력은 참 끝이 없는 듯 합니다. ‘좋은 관계는 힘과 권력에 근거해 형성되는 게 절대 아니다'는 문장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누가 누구한테 잡혀산다'는 우습지도 않은 농담보다 평등한 관계 맺기를 고민하는 공동체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이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퇴근하고 와서 설거지도 열심히 하는 나'를 재미있게 표현한 말인줄 알았습니다 ㅠㅠ 실제로 자취청년들 다 퇴근하고 와서 집안일 하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런 내용이 뒤에 숨어 있단 걸 알고 많이 놀랐었네요. 여성을 철저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고있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자기 보호와 합리화가 타인을 혐오하는 방향으로 구현되는 것이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종국에 남는 것은 허탈함 뿐일 거란 생각에 측은해지기까지 합니다. 페미니즘은 배척해야 할 사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게 맞아?'라는 생각이 글을 읽고나서 더 션명해지고, 근거를 바탕으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거지론은 새로운 담론처럼 등장했지만 결국은 기존에 있던 혐오의 반복, 심화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이런 구도가 깨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