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의Siora Photography
대통령의 한마디에 들썩이는 한국교육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공교육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라는 한 마디에 온 나라가 들썩 들썩…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교과과정에 없는 초고난도 ‘킬러문항’을 수능에서 없앤다는 것이었는데요. 수능을 5개월 앞두고 이러한 수능 출제 사항의 변경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나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이런 문제로 이규민 교육과정평가원장이 6월 모의 평가에 출제된 킬러 문항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하게 되었고요.
교육은 한 인간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백년지대계’라고 해서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세우는 큰 계획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대통령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교육시스템 전체가 휘청거리는 한국 교육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권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백년지대계의 교육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2022년 7월에 설치된 교육정책 합의체인 국가교육위원회는 아직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육 문제의 핵심되는 대입문제는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바뀌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입 시험의 근본적인 문제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인 대입문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결코 사교육비 경감이나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킬러문항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입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아니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몇년 전,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상이 있습니다. 현재 구독자 571만명의 ‘영국남자’라는 유튜브 채널인데요. 이 채널에서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학생 13학년(고3) 학생들 12명에게 수능 영어 문제를 10분동안 풀어 보게 했습니다. 우리의 수능 시험문제를 풀어 본 영국 학생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어요.
“지문이 말이 안된다.”
“이 시험을 누가 쓴 거에요? 얘기 좀 하고 싶네요.”
“제가 영어를 진짜 아는지 혼란스럽게 만드네요.”
“진짜 어렵다.”
“저는 그냥 펜이 가는데로 찍을게요.”
“이게 어떻게 외국어 시험이지?”
“다시는 안하고 싶어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해요. 스트레스를 왜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영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절대 안 만나고 싶어요.”
“구글 번역기에 돌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이런 시험은 어떻게 공부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보기들 차이가 너무 적어서 모두가 정답일 것 같아서 더 어려워요.”
“영어를 매일 쓰는 저희도 쩔쩔매고 있는데…”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읽는 거에요.”
그리고 그 채널의 다른 콘텐츠에서는 수능 영어 문제 다섯개를 뽑아 영국학교의 영어 선생님 4명에게 풀어 보게 했습니다. 한 문제당 50초의 시간을 주고요. 한국 학생들이 수능 시험 문항을 다 풀기 위해서는 약 1분 안에 한 문항을 풀어야 하니까요. 대부분 선생님들이 거의 모든 문항에서 정답을 맞추지 못했었어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헐 대박! 너무 어렵네요.”
“이걸 어떻게 읽는 거야? 50초 안에? 장난해?”
“여기 나오는 말 표현이랑, 어휘 자체가 터무니없네요.”
“이런 단어를 누가 사용해? 심지어 단어를 읽지도 못하겠다구요!”
“근데 이걸 뭐라고 발음해요?”
“심지어 제가 모르는 단어들도 있어요.”
“이런 건 누가 쓰는 거죠?”
“이런 지문은 어디서 구하는 거죠?”
“아무도 일상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잖아요.”
“1950년대 이후론 아무도 ‘상정’이란 걸 하지 않는다구요.”
“이거 하는 학생분들 진짜 영어가 싫어지겠다. 너무 지루해”
“이거 진짜 진짜 어려워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시험을 영국 학생들한테 제2외국어 시험으로 준다는 건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건 아무래도 아주 특정한 영어 능력을 테스트하는 거라고 봐요. 엄청 빠르게 지문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요.”
“이런 시험이 도움이 될 몇 가지 상황이 생각나긴 해요. 그치만 많지는 않아요. 이 정도의 시간적 압박 속에서 읽고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요. 동시통역사 정도?”
“정말 빨리 훑어 읽는 걸 잘한다고 하면, 아마 쓱 훑어 읽고는 바로, 그래 맞아. 이게 답이다. 할 수 있겠지요. 근데 사실 그런게 어떤 능력을 증명하냐는 거죠. “
“암기학습이라면, 그게 과연 아이들에게 필요한 걸까요? 시험 문제는 풀수 있겠죠. 그런데 5시간 뒤나 혹은 1년 뒤에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아이들이 그 때도 알고 있을까요? 아님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배운 걸까요?”
“내 머리 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은 도대체 왜냐는 거에요. 이게 왜 필요하냐는 거지. 시간 제한은 전혀 도움이 안돼요.”
“제가 한국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니지 않지만, 저도 지금 그 압박감이 느껴져요! 정말이지 진짜 놀랍네요.”
“모두가 자신의 잠재능력을 실현하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건 알잖아요. 근데 학생분들이 안쓰럽네요. 진심으로요.”
“이거 진짜 그냥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싶어요. 여러분들 정말 고생하시네요. 한국에 있는 학생분들, 여러분들은 정말 열심히 해오셨어요.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되든 축하드려요. 왜냐하면 전 이거 못하거든요. 진짜 못하겠어요.”
수능 시험이 대학에서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입학생을 뽑기 위한 테스트로 전락해서 진짜 우리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배움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영어권의 학생들이나 교사들도 풀기 힘든 시험을 치기 위해서 비싼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자신과의 싸움과 시험의 압박감을 견디고 참으며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는 우리의 불쌍하고 안쓰러운 학생들이 생각나 참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정말 우리 학생들을 위한 교육인지, 시험을 위한 교육인지 다시 되짚어 봐야 합니다.
왜 우리는 수능을 포기하지 못하나?
그런데 왜 이런 비합리적이고 반윤리적인 시험을 우리 사회는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수능이 허울 좋은 공정한 테스트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우리 나라의 수능과도 비슷한 SAT(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라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미국에서는 대학 입시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있고, SAT 의무화를 폐지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왜냐하면 SAT가 줄곧 ‘부유한 백인’이 유리하다는 결과를 일관되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비판교육학 분야의 연구자로, 교육과 불평등에 관한 연구·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워싱턴대학교의 웨인 아우 교수는 “SAT는 자본의 차이를 측정하는 시험”이라며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의 자녀가 표준화된 시험을 더 잘 준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특권층을 위한 시험은 공정한 시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최근 대부분의 미국 대학들은 신입생 선발에 SAT 점수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정했고, 학생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SAT 점수 제출 의무화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SAT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수능이 공정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미국에서 생각하는 ‘공정함’과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공정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생각하는 ‘공정함’은 학생의 소득·인종·부모 학력에 영향받지 않고, 학생 자체의 능력과 가능성 등으로 평가받는 것을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공정한 것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고등학교 2년 간의 학교 성적, 활동내역, 에세이 등의 포트폴리오로 학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사회· 경제적 배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도 소득·인종·부모 학력에 관계없이 그들의 남다른 잠재력이나 가능성이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 Interaction Institute for Social Change | Artist: Angus Maguire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정함’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발생되는 차별에 눈감아 버립니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의 능력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성공을 만들어 내는 사회나 시험은 결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수로 줄세우기를 하는 수능은 공평(equality)한 것이지, 공정(equity)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공평하다는 시험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가 되어 가고 있고, 그리하여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극도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요? 나만 잘산다고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굶주린 자들이 있고,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한 공정한 교육으로
한 사람의 경험, 생각, 성실도는 저마다 그 분량이 다릅니다. 그들이 태어나기를 열등하게 태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만 지게 만드는 사회가 정말 공정한 사회일까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 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개발하고 보상해 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이라고 말하면서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공동선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킬러 문항’ 사태를 통해 교육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나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교육 안에서의 참다운 ‘공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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