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인문학술장의 자율성과 재생산의 재생산을 위한 소고' 발표와 토론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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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1일. 연구자 복지를 위한 공동추진위원회가 출범됩니다!

2024년 8월 31일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 2부 1발표와 토론 녹취록

사회자 (이미애연구자의집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안녕하세요 저는 2부 사회를 맡은 이미애입니다. 연구자의집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부터 제주대 학술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중앙대에서 이민 관련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런 뜻깊은 자리에 사회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 분의 발표가 있을 예정인데요, 김강기명 선생님과 김민환 선생님, 정두호 선생님의 발표가 이어질 것이고요. 그 다음 네 분의 토론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후 종합토론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발표는 연결된 내용이라서 같이 진행하고 그 다음 세 분이 토론을 해주시는 것으로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첫 번째 발표자인 김강기명 선생님은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의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인문학술장의 자율성과 재생산을 위한 소고’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발표자 (김강기명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오늘까지 일하는 김강기명입니다. 연구재단에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이 있는데요, 어제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9월 1일이 사업 시작인데 탈락 연락을 8월 말에 받은 것인데요, 그간 강사도 여러 군데 지원했었는데, 지난 학기와 이번 학기 합쳐 한 20군데 원서를 넣었지만 다 떨어져서 오늘까지만 소속이 경희대입니다.

발표 원고는 ‘대학체제전환운동포럼 2024: 현장에서 묻고 실천으로 답하라’에서 발표했던 것이고, 오늘 오신 분들 중 1/3은 거기 오셨던 분들이셔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저도 가족들에게 문송한 상황이 되었는데요,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이공계로 보내라는(?) 옛 말을 거역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문송한 상황에서 문과에는 학부생도 잘 오지 않으려하고 대학원도 얼마 전부터는 서울의 명문대도 BK 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대학원에 학생들이 거의 오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방학 등을 활용해 학교 밖 연구단체에서 강의를 하는데요, 제 전공이 스피노자여서 인기가 많은 철학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강의를 하면 대학원생, 학부생이 꽤 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들이 홍대 인근에만 20군데 정도 될 것입니다. 다 합치면 큰 대학의 인문대 단과대 2개를 만들 수 있는 규모인데요, 연구재단에서는 마치 이런 기관들이 없다는 듯이 대학에들만 ‘인문도시사업’이란 인문학 대중화 사업을 맡깁니다. 하지만 이런 기관들이야 말로 사실 인문도시 사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박사급 연구원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업의 질도 높습니다.

여기에 오는 수강생들을 보면, 막상 대학원에서는 들을 만한 수업이 없어서 오는 것인데요, 대학 밖의 연구자들은 알아서 학생들을 모집해야 하고, 대학원생은 알아서 밖에서 공부해 와서 논문을 쓰고 있는 거지요. 이는 사실상 대학원 기능의 일부를 아웃소싱하는 것인데, 이러한 구조를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누구도 보상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착취구조이지 않나요?

물론 대학은 아웃소싱을 인정하지 않고 관심도 없을 텐데요, 학생들은 대학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내고 대학 밖에서 수강료는 수강료대로 내며 공부를 해야 되고 연구자들은 학생들을 모집해야 됩니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 1장에서 조교나 연구원을 고용하는 미국대학들과 다르게 독일대학에서는 연구자들이 사강사로서 직접 수강료 내는 학생을 모집해야 한다고, 독일에서는 돈이 없으면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데요, 오늘날 우리는 이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쓴 글이 많이 공유되는 바람에 다소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는데요, 학단협의 배성인 선생님이나 대구대의 박치현 선생님이 주장하신 ‘국가박사제’ 같은 제도를 제안하면 사람들은 인문학의 쓸모에 대해 얘기합니다. 인문학은 쓸모가 없거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인데요. 저는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여 이 얘기로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할 때 통상 사회적 쓸모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한국만큼 인문학의 쓸모에 대해 많은 담론이 있고 공감대가 있는 곳이 없습니다. 서양근대철학회 회원이신 강용수 선생님께서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올해 6월까지 40만 권이 판매되었습니다. 교보문고 매대에 가면 인문학을 쉽게 설명하거나 비판적 지성의 성장에 기여하는 좋은 책들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베를린에서 11년을 살았는데 베를린에 두스만(Dussmann)이라는 커다란 서점이 있지만 거기 베스트셀러 매대에는 인문학 책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인문학을 쓸모 있게 만드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 강의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유럽인문아카데미 같은 프로그램을 듣는데요, 독일에서는 대학에서 청강을 하는 정도이지 이러한 문화가 없습니다. 한국은 이런 문화가 있는 드문 곳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천대받는다 할 때 인문학이 과연 그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천대를 받았는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인문학이 그 실력을 증명하지 못해 무시받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점이 제 발표문의 주요 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 학술장 바깥의 대중은 인문학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인문학 학술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주요 원인 중 하나이지 않은가 합니다. 학술장의 위기는 학술장의 자율성의 위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학술장이 그 고유의 논리나 토론, 학술장 내부의 고유한 담론과 평가 같은 기능이 부재하고 오히려 외부 기준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면 논문 편수, 학생 모집 현황 등이 외부 기준인데요, 학술장 내부로부터 자율적 방식으로 연구자의 삶의 터전이자 직업, 그리고 연구 등을 포괄하는 영역을 제대로 가꾸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지 않은가 합니다.

사람들은 인문학은 집에서 혼자 해도 되는 것인데 왜 연구실이 필요한가, 실험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혼자 할 수 있는 것인데 왜 대학에 있어야 되냐고 얘기를 하는데요, 이러한 얘기는 인문학이 삶에서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전문적 학술영역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문학이 삶을 위한 것이 될수록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지 않은가 합니다.

이런 얘기에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논문 한편이라도 더 써서 점수를 맞춰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자들의 현실이지요, 아니면 책을 써서 학술 상업 출판 시장에서 자신의 평판을 올려야 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삶의 방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학이 고용을 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지금 박사 연구원 중 5% 정도나 정년트랙 전임교수, 즉 유일한 정규직 교원이 되어 안정적인 연구환경에서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너무나 불안정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들 울며 겨자먹기로 교수가 되기 위한 극심한 경쟁 속에서 논문 점수를 채우거나 평판을 올리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심지어 경쟁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혁신을 항상 입에 올리는 이공계에서도 ‘과학자 공동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는데, 제 주변 어느 누구도 ‘인문학자 공동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고 개인이 공부해서 개인의 성과를 내는 것이 일종의 아비투스가 되었고, 이런 습속이 우리에게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학술장이라면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를 만나는 것이 반갑고 좋은 일이어야만 하는데요,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같이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을 수 있고요, 이런 것이 당연한 것일텐데 많은 연구자들이 대학원생 때부터 극심한 경쟁을 통과해야 하니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극심한 경쟁 속에서 개인적 업적 쌓기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보니 학술적 대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 욕을 하든지 무관심하게 대하든지 동료 연구자의 작업을 절대 인용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동료 연구자의 글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대가는 모두 프랑스, 독일에 있고 참고할 수 있는 중견 연구자들, 신진 연구자들은 다 영미권에 있다 보니 이들만 참고해서 논문을 쓰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은데요, 이를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른다는 점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인문사회 학술연구교수 A형이 있지 않습니까? 1년에 4천 만 원을 지원하여 최대 5년 동안 지원하는 것인데요, 이 제도를 확대해서 이를테면 국가박사제 같은 형태로 박사학위를 받고 자신의 학술역량을 증명했으며 중장기 연구 프로젝트 계획서를 쓸 수 있는 정도의 역량을 가진 연구자 전반에 지원을 해주는 제도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배성인, 박치현 선생님 등이 일찌감치 제안하신 제도인데요, 인문사회 학술연구교수A형은 현재 선발식으로 되어 있지요. 일단 수를 5배 정도 늘리고 그 다음에 10배 정도 늘려서 재임용 시스템으로 만들어 정년까지 갈 수 있다면 괜찮은 제도이지 않을까합니다. 이 제도를 통해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를 수행하고 연구 외에, 예를 들면 학술출판이나 대학의 각종 연구사업, 강의 등을 하는 형태로 유연 안전성을 구축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성이 없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현재 연구자 1인당 1년에 4천만 원이니까 천 명이면 400억이거든요. 지금 인문사회분야 예산이 너무 적은 것이 문제이지 사실 영일만에 가스관 하나만 박아도 천억인데 과연 큰 액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 논문 개수로만 학자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있는데요. 학술 단행본이나 혹은 연구자들이 한 주제로 같이 쓴 편집본에 대한 평가 시스템이 부족한 실정인데, 그나마 연구재단이 제일 인정을 많이 해주는 편이고요. 대학들은 단행본이나 북챕터로 출판한 작업을 업적으로 거의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행본과 학자들의 공동작업에 대한 양적 질적 인정이 임용, 승진, 연구비 심사 등에서 제대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왜 인문학의 대가가 나오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말할 때 저는 개개인의 연구 역량이 모자라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요, 개개인의 연구 역량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좋은 글을 써도 아무도 이를 평가해주고 서평해주며 토론을 하고 논쟁을 거는 동료 연구자들이 없는 한에서는 대가가 나올 수 없다고 봅니다. 발표문에 ‘슈뢰딩거의 석학’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상자를 열어 관측을 하지 않은 채로 있으니 모두가 이 사람이 석학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는 게 현재 한국 인문학의 현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에  「‘아무도 안 보는 논문’ 늘어… 91>#/u###가 피인용 ‘0’」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결국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을 계속 써야 되는 것이지요. 점수를 채워야 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짧은 주기로 계속 써야 되는데요. 예를 들면 인문사회 학술연구교수 B형이나 신진연구자지원은 모두 지원기간이 1-3년인데 성과를 바로 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장기연구를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어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장기연구는 거의 못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박사논문이 학술 단행본인데 예컨대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바로 출판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심사기준이 되고 영미권에서도 인문학의 경우에는 학계에 자신의 출사표를 내는 것이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한 학술 단행본을 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박사논문에 대해 경시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제가 계속 들었던 얘기가 박사논문의 챕터를 잘 나눠서 학술지 논문으로 발전시켜 내서 논문 점수를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박사논문을 책으로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습니다. 커리어만 생각하면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학술 단행본이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됩니다. 또한 박사논문의 질적 평가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전문 학술출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문 학술출판물을 편집해낼 수 있는 전문 편집인의 역할도 한국에서는 경력이나 승진 등에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인데요, 저는 이것이 학술장의 기획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인문학이 자꾸 어떤 사회적 쓸모를 증명해야 되는 상황 속에 부딪히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과제는 무엇보다도 학술장의자율성 없이 외부 기준에 맞춰가며 개개인들이 극한경쟁 속에서 서로 미워하거나 서로에게 무관심하면서 자기 실적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이후 전망이 있다면 대학원생들이 대학원에 올 것입니다. 연구를 계속하면서 정년까지 갈 수 있다는 전망만 있더라도 우리 같은 인문학 바보들은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연구자 복지법이 논의되는 이 자리에 같이 얘기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오늘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이미애)

김강기명 선생님의 ‘인문학술장의 자율성과 재생산의 재생산을 위한 소고’ 잘 들었습니다. 저는 공대를 나온 후 ‘돈도 안 되고 자율성도 없는’ 인문학 시장에 진입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너무 잘 짚어주셨는데요, 경쟁에 내몰리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많은 연구자들한테 위안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자로 박서현 선생님께서 멀리 제주도에서 오셨습니다. 지식공유연대에서 활동하시면서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에서 근무하고 계신 박서현 선생님의 토론을 듣겠습니다.

 

토론자 (박서현지식공유연대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소개받은 박서현입니다. 저는 김강기명 선생님의 지적과 제언에 대해서 다 동의해서 제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더 고민하게 된 부분을 소개해 드리는 식으로 토론문을 작성을 했습니다. 본 토론문은 인천대 후기산업사회연구소에 발행하는 학술지 『후기산업사회연구』에 게재한 논문 「후기산업사회에서의 생산의 변화에서 비롯하는 과제들」의 후반부를 일부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읽겠습니다.

김강기명 선생님의 글은 인문학술장의 문제를 통렬히 지적합니다. 인문학술장은 그것이 임용·승진·평가 및 연구비심사 시스템에 종속되어 무한 경쟁 속에서 개인적 성과 창출에만 몰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율성, 고유성을 갖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고용시장에서의 경쟁을 중심으로 단기적 학술활동에 몰두하게 되는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응당 제도적 변화입니다. ‘국가박사제’는 시스템의 개혁을 통한 인문학술장의 인큐베이팅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에는 학술지 논문에만 편중되어 있는 평가시스템을 바꾸는 것과 함께 대학출판부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서평논문 역시 동료평가를 거쳐 논문과 같은 정도로 평가하는 것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좋은 학술장을 만드는 데 학자들이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며, 그 구체적 활동은 존경과 인정을 담은 리뷰를 많이 쓰는 것, 힘을 합쳐 제도 변화와 예산 확보를 위한 목소리를 같이 내는 것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술장의 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통렬한 지적과 학술장의 변화를 위한 제언은 모두 깊이 새길 필요가 있는 중요한 논점이지 않을까 합니다. 본 토론에서는 다만 논문에서 제시한, 좋은 학술장을 만들기 위해 학자들이 힘을 합쳐 목소리를 같이 내는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추가적으로 어떤 활동이 필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불안정 노동자를 의미하는 소위 프레카리아트가 연구자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입니다. 불안정성의 차이는 분명 있으나 오늘날 인구의 많은 수가 프레카리아트라고 하더라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 중 하나로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자율주의(Autonomism) 혹은 네오오페라이스모(Neo-Operaismo)를 들 수 있습니다.

네오오페라이스모는 오늘날 비물질생산이 물질생산만큼 중요해진다고 보면서 특히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 생산에서 갖는 중요성에 주목합니다.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은 지식·정보·데이터·이미지·언어·코드 등과 같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물 중에서 사회적 상호작용 및 차후의 생산에 필요한 것으로서 비물질적 생산수단인 동시에 이를 사용하여 다시금 생산되는 비물질적 생산물이기도 합니다.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의 중요성은 농업노동이나 산업노동 같은 전통적인 물질노동만큼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다시금 비물질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비물질노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물질생산을 변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마트팜, 적시생산이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인 지식·정보 등이 각각 농업생산·산업생산에 적용되어 이루어진 농업노동·산업노동의 변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중 하나는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더 이상 핵심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생산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소위 가치법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가를 되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스마트폰앱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드는 시간과 앱을 구현하는 데 드는 시간을 굳이 비교해본다면 인기 있는 앱이 가져오는 부가가치와 관련하여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드는 시간이 앱을 구현하는데 드는 시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당수의 일자리에서 최저시급을 기준으로 임금이 지불되며 최저시급을 둘러싼 투쟁이 사회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여전히 핵심적 기준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는 힘듭니다. 이미 연구노동에서는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이 구분이 거의 소멸했다고 하더라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소멸은 비단 연구노동만이 아니라 비물질노동 일반에서 ‘경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비물질노동의 생산성이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에 토대를 누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소통·협력이 비노동시간과 ‘구분되는’ 노동시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삶시간과 경향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일종의 삶노동시간 자체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물질노동의 생산성은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을 체화하고 있거나, 이를 사용하면서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역량 및 이들의 상호 소통·협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들의 역량 발전 자체가 이들의 경험·마주침·네트워킹 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비물질노동의 생산성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주체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의 수단이자 산물인 비물질적인 공통적인 것, 공통의 부 역시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의 결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은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의 소통·협력의 결과로 생산된 공통의 부를 수탈하는 식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생산을 조직하면서 물질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식으로 임노동을 착취해온 자본의 역할이 ‘착취’에서 ‘수탈’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산을 조직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진보를 추동해온 자본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네오오페라이스모의 진단은 자본의 이러한 역할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는 1940-1970년대라는 예외적 기간에 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 있었던 안정고용이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면서 자본이 성장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분명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임을 함의합니다. 활발하게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생산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발전시키더라도 인구의 많은 수가 프레카리아트를 벗어나기 힘든 것은 자본이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임노동을 착취하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삶의 안정성을 모색하는 활동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국가박사제는 이러한 모색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색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확인했듯 연구자만이 프레카리아트가 아닌 인구의 많은 수가 프레카리아트라는 점, 아마도 프레카리아트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당연히 이를 타개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실천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연구자가 주체로서 참여하게 될 이러한 연구·실천의 하나가 아마도 연구자 자신에서부터 시작하는 ‘공동연구’(co-research)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특정한 의미의 공동연구란 무엇일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네오오페라이스모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 오페라이스모에서 이루어진 활동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주의(Workerism)로 번역되는 오페라이스모는 196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붉은노트』(Quaderni Rossi)의 작업과 이후의 『노동자계급』(Classe Operaia)의 작업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붉은노트』에는 튜린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노동조건 등을 조사했던 ‘노동자설문’(workers’ inquiry)의 결과가 실렸습니다. 노동자설문의 목적은 인터뷰를 통해 노동자가 처한 조건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노동조건을 드러냄으로써 대립의 공간을 새로이 열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노동자설문과는 다소 초점이 다른 ‘공동연구’가 시작되어 그 결과가 『노동자계급』에 실렸습니다. 네그리도 참여했던 공동연구의 목적은 공장 상황에 대한 지식 생산을 넘어,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노동자들의 적대,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연구의 주창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설문인 공동연구를 지식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 조직화의 구성 사이의 구분, 학술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구분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노동자설문이 일종의 보편주의적인 인식론적 패러다임에서 시작하여 공장 상황에 대한 모델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공동연구는 사회적 실재의 초상이 아닌 지배 형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공동연구가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어떤 객체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상상하고 실현하는 능동적 주체들로서의 노동자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투사적 지식인은 대체로는 공장이고 때로는 근린인 대상영역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 영역에 덧붙여진 주체적 활동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살아가는 주로 노동자들이고 때로는 학생들, 주부들인 주체들은 연구과정에 능동적으로 연루되어 단순한 연구 대상, 객체들이 아닌 주체적 연구자가 됩니다.

이러한 이중의 운동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연구과정을 통한 지식 생산이 공장과 근린에서의 자기 역량 강화와 함께 저항적 주체성의 생산을 고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조건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 포함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식을 투쟁을 위한 조건으로 변환하는 실험을 한 것입니다.

또한 공동연구는 연구자가 노동자와의 대항적 협력을 확인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공동연구가 자본이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 지식에 맞서 대항적 지식을 발전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연구의 과정은 연구자와 노동자가 함께 집단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열린 과정으로서, 지식 생산의 방법인 동시에 조직화의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공동연구가 이루어진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은 오늘날의 그것과 다릅니다. 우선적으로 공동연구는 튜린, 올리베티의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오늘날 연구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노동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인구의 많은 수가 오늘날 재생산의 위기를 겪고 있는 프레카리아트인 상황에서 연구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노동자는 우선적으로 프레카리아트 연구노동자 자신이지 않을까요. 오늘날에는 공동연구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연구자일 수 있는 것, 혹은 적어도 오늘날에는 연구자 자신에서부터 공동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요.

오늘날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아마도 연구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상상하고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공동연구일 것입니다. 연구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 국내 사례로는 지식공유연대에서 진행한 「포스트 코로나19 대응 학술단체 지원 사업 개선 방안 연구」, 연구자의집에서 진행한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 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확인했듯 연구자만이 프레카리아트인 것이 아니라 인구의 많은 수가 프레카리아트인 현실에서 공동연구는 연구자의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인구의 많은 수의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고리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과 함께, 나아가 한편에서는 연구자의 특수성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돌봄·교육·의료·홍보·통신·보험·배달·여가·오락·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프레카리아트와 연구자의 공통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후자는 분야는 다르지만 모두가 오늘날 수탈을 통해 성장하는 자본으로 인하여 재생산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구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프레카리아트와 연구자가 재생산의 위기라는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구가 학자들이 힘을 합쳐 제도 변화와 예산 확보를 위한 목소리를 같이 내는, 좋은 학술장을 만들기 위한 활동과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연구자의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동시에 인구 전체의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과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이미애)

박서현 선생님이 마치 발표 같은 토론을 해 주셨네요. 박서현 선생님께서 당사자로서의 연구자인 저희가 어떻게 불안정 노동자와 연대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며 공동지식을 생산해 낼 것인가라는 문제를 당사자로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발표자 (김강기명)

박서현 선생님 말씀을 듣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식공유연대에서 문제 제기를 할 것 같은데요, 저희가 쓰는 논문도 약탈적 구조 속에서 공유되지 않습니까? 저희는 게재료를 내고 논문을 쓰는데, 논문은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고 데이터베이스는 인공지능 회사에 팔립니다. 저희가 쓴 모든 논문이 이미 다 이렇게 넘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스프링거 등의 출판사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인공지능 회사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연구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공통의 부가 그렇게 민간기업에 팔리고 출판사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데, 이런 문제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디비피아(Dbpia) 같은 회사에 재단을 만들어 출연을 하고, 논문을 가지고 장사를 한 회사들에게 기금을 내라는 대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연구자복지법이든 국가박사제든 이는 인구의 재생산과 결부돼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저출산 대응예산에 국가박사제를 연동하는 게 오히려 빠른 경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연구자의 권리를 얘기할 때 ‘인문학의 쓸모’, ‘경제적 가치’를 들먹이는 백래시가 있을 수 있는데 저출산 대응예산에 연동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망상처럼 해본 거지요, 아무튼 연구자 생계불안정성의 문제가 결국 재생산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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