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탐정이 그린 AI 해부도
by 💂죠셉
혹시 어린 시절 어물쩍 밥을 남기려 하면 ‘열심히 일한 농부 아저씨께 감사하며 싹싹 긁어 먹으라’는 말 듣고 자라셨나요? 시니컬한 어른이 된 지금이라면 ‘내가 돈을 내고 서비스를 맞교환 한 건데 뭘 감사하기까지?’ 했겠지만, 생각해 보니 재밌습니다. 쌀을 수확하기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이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무의식에 자리 잡아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거든요. 경제 산업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어머님 잔소리가 멀리 떨어진 1차 산업 종사자와 그 공급 사슬의 끝에 있는 소비자인 ‘나’ 사이 다리를 놓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죠.
AI 영역에서도 저희 어머니와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저희 레터에도 종종 등장하는 케이트 크로퍼드(Kate Crawford)겠죠. AI 분야 추천 도서로 심심찮게 언급되는 저작 <AI 지도책>을 통해 일상에서 사용하는 서비스 형태의 AI가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디지털’, ‘클라우드’, ‘챗봇’과 같은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청정하고 가치 중립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사실은 광물의 추출 과정부터 운송, 데이터 센터의 운용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되는 노동자까지, AI는 전 지구 단위 자원이 투입되는 거대 ‘추출 산업’이라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비슷한 작업을 해온 연구자, 블라단 욜러(Vladan Joler)를 주목해야 할 인물로 소개합니다. 욜러는 우리가 사용하는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단면의 ‘해부도’를 그리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을 대상으로 작업을 시작한 이후 아마존의 AI 스피커인 ‘에코’를 분석한 ‘AI 시스템의 해부’는 크로퍼드와의 공동 작업으로 뉴욕 MoMa에도 전시된 바 있는데요. 두 사람이 또 한 번 합작한 작업물이 얼마 전 온라인에 공개됐습니다. ‘1500년 이후 기술과 권력의 계보학’이라는 야심 찬 제목을 가진 인터랙티브 시각화 작업입니다. 500년간 기술과 사회구조가 어떻게 맞물려 진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거대하고 복잡한 해부도이기도 하죠.
방대한 연구 내용을 레터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위와 같은 종류의 AI 비평 작업들이 유의미한 지점은 어디일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작업물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욜러는 마치 ‘사건을 쫓는 사이버 탐정’의 심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이미 AI와 같은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둘러싼 매우 복잡한 환경의 일부가 되어 있고, 설령 인식했다 해도 그 정확한 작동법을 알기 힘든 블랙박스와 같기 때문인데요.
동시에 욜러와 크로퍼드는 기술 발달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노동 관계, 착취의 방식, 사용자와 온라인 공간을 소유한 플랫폼 오너들의 관계 등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언어가 우리에게 없다는 지적합니다. 즉,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해부도를 통해 관계를 인식하게 하고, 추상의 영역에 머물던 AI를 물질 세계로 끌어내림으로서 ‘공공연한 사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
비판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낯설게 보기'가 필수라는 점에서 크로퍼드와 욜러를 위시한 기술-권력의 시각적 해부도는 제가 아는 어떤 AI 비판보다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언뜻 보기에 너무 복잡해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을 법 하지만, 사실 위 작업물들은 스크린을 통한 ‘보기’보다는 공간 속에서 직접 경험해볼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작업물도 베를린과 밀란에서 얼마 전까지 전시됐습니다.) 아직 밥 먹으며 농부 아저씨를 떠올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챗GPT를 이용하다 종종 멈칫하는 순간이 생기는 건 아마도 두 연구자의 노력 때문이 아닐까요. AI 시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줄 연구와 작업물이 계속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Estampa 라는 프로젝트 그룹이 생성형 AI를 해부한, 좀 더 접근성이 좋은 자료도 있습니다. 해부 대신 ‘지도학(cartography)’라는 표현을 쓴 게 눈에 띄네요.
생성형 AI에 대한 기대는 하이프일까?
by 🧙♂️텍스
생성형 AI와 전문가 시스템은 닮은 구석이 있다.
챗GPT가 등장하고 1년 반 정도가 지난 요즘 다들 어떠신가요? 초기에는 관련 논문과 생성형 AI 뉴스를 따라가느냐고 번아웃이 왔다는 이야기도 주변 사람들과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뭔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진행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플레이어들이 소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도주자인 오픈AI도 생성형 AI의 기술 한계에 도전하기보다는 현재 생성형AI의 완성도를 높이고 상업화를 가속하는 방향을 집중하는 게 아닌가 싶은 모습입니다. 스케일을 키워 범용인공지능 (AGI)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제 등장한 것은 GPT-5가 아니라 경량화 모델로 추정되는 GPT-4o이었습니다. 또한 최근 6월 21일 오픈AI는 벡터 데이터베이스 스타트업 록셋(RockSet) 인수를 발표했습니다. 벡터 데이터베이스는 검색증강생성(Retrieval Augmented Generation, RAG) 서비스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만, RAG는 환각 문제를 완화하는 방편이지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즉, 생성형 AI가 달성하겠다는 AGI의 청사진들은 여전히 미완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생성형 AI를 둘러싼 과도한 기대는 80~90년대 전문가 시스템이 발전하던 시기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 당시에도 전문가 시스템을 둘러싼 하이프가 있었고 많은 투자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AI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면서 사회 전반의 AI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떨어지고 연구비 또한 많이 삭감되는 AI의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전문가 시스템의 시작과 인기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은 특정 분야에서 인간 전문가의 의사 결정 능력을 모방하도록 설계된 AI 알고리즘입니다. 1960년대 중반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개발된 최초의 전문가 시스템인 DENDRAL은 화학자들이 유기 분자 구조를 식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DENDRAL의 연구자들은 전문가 시스템이 인간 전문가의 지식을 기호 및 논리적 표현으로 풀어서 서술하여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MYCIN, MOLGEN, PROSPECTOR, XCON와 STEAMER 등과 같은 더 정교한 시스템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1972년 등장한 MYCIN은 혈액의 세균 감염에 대한 전문가 시스템으로 지식베이스와 추론엔진으로 구성된 구조를 도입하였습니다. MYCIN의 지식베이스를 구성하는 규칙은 아래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1) 해당 미생물이 그람 양성균(Gram-positive bacteria)이고,
(2) 해당 미생물이 구균(coccus)의 형태를 가지며,
(3) 해당 미생물이 뭉쳐진 성장 형태를 가지면,
해당 미생물이 포도상구균일 가능성이 (0.7) 입니다.
출처 MYCIN : 규칙을 토대로 추정에 의한 추론을 사용한 시스템
MYCIN은 위와 같은 세균 감염에 대한 지식베이스를 사용자가 세균에 관한 정보를 입력하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균과 그 확률을 계산해줍니다.
MYCIN은 약 500개의 규칙을 사용하여 혈액 감염 분야에서 인간 전문가와 거의 같은 수준의 능력으로 작동했으며, 일반 의사들보다는 약간은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는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추론 과정을 컴퓨터가 따라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전문가 시스템과 같은 기호주의 AI 방법들은 기호 및 논리적 표현을 사용하고 논리나 확률 계산 등 명시적인 방법을 통해 추론하기 때문에 의사결정과정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하이프
의사 결정의 불확실성을 개선하려는 기업들은 전문가의 지식을 기반으로 컴퓨터가 추론을 수행하는 전문가 시스템의 약속을 매력적으로 여겼습니다. 기업들은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특정 도메인 맞춤형 전문가 시스템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며, 이는 상업용 전문가 시스템 도구와 플랫폼의 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 기간에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학술 연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지식 표현 및 추론(knowledge representation and reasoning)과 같은 연구는 더 넓은 분야에 전문가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 전문가 시스템은 의료 진단, 금융 서비스 및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적용되었습니다.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하이프는 시장 과열을 낳았습니다. 기대는 높아졌고, 기술로 달성할 수 있는 현실과의 괴리는 커졌습니다. 많은 조직이 전문가 시스템 구현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했지만, 유지보수의 한계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지식에 변경 사항이 있을 때 마다 전문가를 통해서 데이터베이스를 업데이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문가 시스템은 유지보수의 확장성 및 유연성이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제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
1982년에 시작되어 1994년에 종료된 일본의 제5세대 컴퓨터(Fifth Generation Computer Systems, 이하 FGCS) 프로젝트는 전문가 시스템 시대 하이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병렬 컴퓨터와 논리 프로그래밍으로 컴퓨터 과학을 혁신하려고 시도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에 대한 기대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러나 FGCS 프로젝트는 종료될 때까지도 당시 대다수의 전문가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논리 연산을 위한 병렬 컴퓨팅 하드웨어 개발은 목적을 달성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나가는 개념이었고, 80~90년대에 빠르게 발전하는 범용 컴퓨터들은 점차 FGCS 하드웨어의 성능을 추월했다고 합니다. 전문가 시스템의 과도한 약속과 하이프, 그에 미치지 못한 성능에 대한 환멸은 결과적으로 AI 연구 및 개발 자금 삭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생성형 AI에 대한 기대는 하이프일까?
오픈AI를 포함한 많은 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와 모델 규모에 대한 스케일 법칙으로 AGI를 달성하겠다는 비전을 보여왔습니다. 현재에 와서도 여전히 생성형 AI의 환각 현상, 안전 이슈 그리고 윤리 문제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오픈AI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 학습(RLHF)과 같이 안전 및 윤리 문제를 위한 정교한 데이터셋 구축 및 생성형 AI를 조정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 혹은 우회해왔습니다. 하지만 정교한 데이터셋은 전문가 시스템과 유사하게 꾸준한 유지보수를 필요로 하고 큰 비용을 요구합니다. 데이터셋 구축의 단위 비용이 커진다면 규모를 키우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맥도날드가 완성도 낮은 챗봇 기반 주문 시스템을 포기한 현실은 AI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예외 사항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콜센터 노동자가 실질적으로 인공지능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면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AI 시스템 동작을 위해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함에도 투입되는 노동은 평가절하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식의 비윤리적인 유지보수를 벗어나 적정한 보상을 제공할 때 생성형 AI는 기업에게 충분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제약조건 하에 유지보수가 가능한 AI 서비스를 달성할 수 있다면 생성형 AI의 하이프는 전문가 시스템의 하이프와 다른 길을 가리라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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