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교수의 말대로 "적대와 혐오를 확대재생산"하는 "행동대장의 시대에 정치인의 생존 방법이 정치의 저지라는 것"은 "비극적"입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대화와 토론, 숙의와 합의가 가능하겠냐는 의문과 실험은 계속 되어 왔습니다. 각자도생이나 정치 양극화라는 말이 점점 더 공감 되어가는 시대에서 캠페인즈의 실험이 잘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디지털이라고 해서 최근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군요? 앞으로는 이 공간에서 계속 함께 이야기나누면 좋겠네요!
“그리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장소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본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들,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있기, 앉아 있기 아니면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계산대 위에서 잠을 자는 홈에버 노동자들)… 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수없이 입으로 말했을 때 당신들은 듣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글씨를 쓴다. 이 글씨를 읽어달라.’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사실 우리는 이미 장소를 바탕으로 한 투쟁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전장연은 이동권 투쟁을 2006년부터 해왔네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지하철을 타는 게 쉽지 않고, 비장애인은 어플리케이션으로 호출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하는 택시를 장애인들은 평균 30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전장연이 ‘어떻게’ 투쟁을 하는가보다 ‘왜’ 투쟁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겠죠.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을 비롯해 모든 집회와 시위에 ‘시민 불편’을 운운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들의 주장이 ‘나의 편의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사회가 문제해결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전장연의 지하철’은 곧 ‘나 혹은 당신의 어딘가’가 될 것입니다. 전장연이 몸으로 쓴 글씨를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해야 할 때 같습니다.
무업기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 막막함이 찾아오고 그렇다고 어렵사리 통과한 회사는 무보수 열정페이, 폭력 등의 문제로 나가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 모든 걸 개인 의지로 돌려버리는 사회, 개인의 눈높이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문제가 언제 해소가 될까요.
시민의식이 기본이 되어야한다고 다시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디지털 시민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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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엄기호 교수의 말대로 "적대와 혐오를 확대재생산"하는 "행동대장의 시대에 정치인의 생존 방법이 정치의 저지라는 것"은 "비극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