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가 곧 봉기’라는 기사 속 표현이 와닿네요. 삶의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아서 고통스러운 무드에 곧잘 빠지곤 합니다. 모두 개인이 노력해서 잘해내야 ‘웬만큼’살아갈 수 있는 사회.. 무섭습니다.

이 이상한 사회에서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사람이지요. 체념 증후군도, 우울증도, 심지어 니트족까지, 사실 원인은 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회가 인간다움을 되찾지 않는 한, 죽음과 가까운 형태로 삶을 이어가거나 자신의 쓸모를 폭력적인 언어를 생산하는 것에서 찾는 삶의 형태는 사라지지 못할지도요.

체념을 문제시하는 것은 경쟁사회의 시각이 아닐까. 권력은 모든 인구가 경쟁사회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승리’를 보장해 줄 ‘패배자, 들러리’가 필요하다. 경쟁사회의 룰은 이미 부정의, 불공평하다. 승패를 전제할 뿐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의지를 찬양하는 사회에서 산업재해나 ‘극단적 선택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회적 타살이 얼마나 많은가.

우울증을 권하는 사회를 탓하지 말고, 차라리 우울을 긍정함으로써 현실을 수용할 때 ‘우울한 사회, 우울한 개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울이 정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체념과 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야말로 강력한 저항의 수단이다. 경쟁사회에 각자 자기 방식대로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칼럼입니다. 체념주의가 만들어진 이유는 어쩌면 경쟁사회에서 승자를 스포트라이트 하고 패자는 묻어버리고 의지를 강요하죠. 무기력, 니트족, 우울증이 생기는 이유가 의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노동 현장이 나아지지 않고(산업 재해, 성폭력 등), 저임금 불투명한 미래 등이 발목을 잡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로 정희진 님의 사회에서 우울이 정상인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우울을 우울임을 알아차리고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오늘날은 우울한 이들이 우울한 이유를 자각하기 힘들거나 어렵게만드는 것 같아요. 우울이, 체념이 경쟁사회에서 쟁취와 성장을 강요하는 분위기로부터 저항하는 운동이라 생각하니 더욱 위로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