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김진숙과 함께 30만보… ‘소금꽃’ 순례길을 걸었다
평균 나이 예순을 웃도는 이들은 지난 10일간 약 160㎞를 걸었다. 모두 하늘색 조끼를 갖춰 입은 채 구미로 향했다. 마지막 날인 지난 1일에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공장 옥상에 있는 ‘박정혜와 소현숙’을 향해 도보행진에 나섰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30일과 1일 ‘희망 뚜벅이’ 여정에 함께했다. “여기는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내일 가보면 아시겠지만 아무도 없어요. 경찰도 없고. 이미 공장을 다 떠나버렸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정말 황량하게 공장은 불타 있고,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거, 그게 더 힘든 거죠.”(김동은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 경북 구미시에 위치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 불 탄 공장 옆에 서 있는 경비동 옥상에는 두 여성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8일부터 옥상에서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벌써 334일째(6일 기준)다. 이곳에서 박정혜(39) 씨는 13년, 소현숙(42) 씨는 16년 근무했다. 사건은 2022년 10월 발생한 화재에서 시작됐다. 공장에 큰 불이 나자 회사가 복구를 하지 않고 청산을 결정한 것. 심지어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 원을 챙기기도 했다. 회사는 그때부터 공장 노동자에게 희망퇴직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193명을 희망퇴직 시켰고, 거부한 이들은 정리해고했다. 해고자 중 7명은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형제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했다. 또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주장.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준 건 ‘뚜벅이’ 대열 가장 뒤를 지키고 있는 김동은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그는 2주에 한 번씩 옥상 농성장으로 의료지원에 나선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문제점이 보였다. 고공농성을 하다 보면 발생하는 건강상의 문제 중 하나가 근육 감소다. 높은 곳에 거점을 마련하다 보니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다리 근육이 감소하게 된다. 농성장이 있는 관리동 옥상 바로 옆에는 불탄 공장이 붙어 있다. 그 열기가 관리동 옥상의 바닥에도 영향을 줬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걸으려고 해도 쉽지만은 않았다. “(고공농성 중인) 두 분이 저보고 하는 말씀이, 우리 두 사람보다 저 밑에 (농성을 지원하는 분들이) 정말 몇 분 안 남으셨는데, 그분들 건강이 훨씬 안 좋다고, 우리 동료 노동자들 건강 좀 체크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고공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은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료들을 먼저 걱정했다. 날마다 밥을 챙겨주고 손인사를 나누는 동료들이 농성장 대각선 방향에 있는 노조 사무실에 있다. 옥상에서 ‘고립감’을 느낄 그들에게, 아직 여기 동료들이 있다고 매일 그 마음을 전한다. “저는 5년 전에 김진숙 지도위원하고 같이 걸었어요. 당시 (김진숙 지도위원이) 항암치료 받고 얼마 안 됐을 때라 건강이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눈 펄펄 날리는 날, 같이 걸으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박문진 지도위원 내려오시면 두 분이서 같은 운동화 신고 산티아고 간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희망 뚜벅이로) 같이 걸으시는 거예요.” 김동은은 5년 전 ‘희망 뚜벅이’에도 참여했다. 김진숙(64)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대구 영남대병원(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6개월 넘게 고공농성 중인 ‘친구’에게 향할 때였다. 친구는 박문진(63)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지도위원. 그는 간호사로 근무하던 영남대병원에서 2007년 해고됐다. 이후 14년간 복직 투쟁을 했고, 2019년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옥상을 ‘집’ 삼은 지 100일을 넘기자, 김진숙은 친구를 위해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2018년부터 암 투병을 했다. 박문진은 그를 한사코 말렸지만, 그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항암후유증, 우울증, 지인기피증, 약물부작용으로 인한 관절통까지 풀옵션으로 앓는 중이라 그동안 돌보지 못한, 아니, 학대한 몸이나 달래려 했는데. 내 친구 박문진이. 내 오랜 친구 박문진이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76일째 매달려 있으니 앓는 것도 사치라 걸어서 박문진에게로 갑니다.호포에서 시작합니다.”(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트위터 2019. 12. 22.) 암 투병으로 생긴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김진숙은 한동안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대구 영남대의료원까지 걸었다. 110㎞가 넘는 길을 200명의 사람들과 동행했다. 그의 ‘뚜벅이’ 소식을 듣고 함께 길을 나서준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두 사람은 70m 고공에서 만났다. 약 2달 뒤인 2020년 2월, 박문진의 고공농성이 마무리됐다. 노사 합의로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 문제가 해결되고, 노조 활동의 자유 보장 등이 포함된 조정이 이뤄졌다. 김진숙이 친구를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그 역시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1981년 대한조선공사(한신중공업 전신)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1986년에는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어용노조 비판 등을 했다. 그 과정에서 대공분실에 세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회사는 무단결근을 주장하며 해고했다. 그는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맞서 크레인에 올랐다. 회사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 400명을 내보내겠다고 했다. 김진숙은 노사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땅을 밟지 않았다. 그렇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높이 35m짜리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생활했다. “나는 그때 내가 제일 무서웠어요. 위에 고립돼 있으니까 자꾸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요. 내가 여기에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은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럴 때 희망버스 오고 하면서 말 그대로 ‘희망’이 됐죠.” 사람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와 크레인 아래 모였다. 김진숙과 조합원들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6월 11일을 시작으로 파업이 끝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운행된 버스에서 김 씨는 ‘희망’을 봤다. 한진중공업은 230명을 희망퇴직시키고 170명에 대해서는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이후 170명 중 76명이 희망퇴직으로 전환했지만, 나머지 94명은 정리해고자로 남았다. 사측은 35년간 “김진숙만은 복직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진숙이 맞서지 않은 건 그들의 주장이 정당해서도, 싸울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복직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2020년 희망버스는 다시 부산을 찾았다.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이 뭉쳤다. 이들은 정년 전 복직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전국 각지에서 부산 한진중공업 앞으로 500여 대의 버스를 타고 모였다. 정년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진숙이 두 번째로 길을 나선 건 2022년이다. 자신의 복직을 위한 길이었다.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출발해 청와대까지 400여㎞. 행진은 40일간 이어졌고, 700여 명의 시민이 함께했다. 그는 해고 37년 만인 2022년 2월 복직했다. 2020년 12월 31일로 정년을 넘긴 그는 명예 복직과 동시에 퇴직했다. ‘기적’이었다. 김진숙이 세 번째로 길을 나선 건 2024년 11월이다.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고공농성 중인 두 여성 노동자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먼저 가본 선배로서, 그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부채감이 그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했다. 한국옵티칼 정리해고 문제는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쟁점이 됐다. 김주영·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해고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요구했다. 오요안 한국닛토덴코 대표는 “(일본) 본사에 의원들의 우려 사항을 잘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여전히 공장은 황량했다. “사실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2022년 11월 4일, 회사는 200명 전체 노동자에게 청산을 통보했습니다. 고용을 책임지라고 노동조합으로 뭉친 이들에게 가압류·가처분을 진행했습니다. 퇴직 위로금을 받고 싶으면 일본어로 반성문을 써서 내라고도 했습니다. 노조는 공장을 지키며 싸웠고, 회사는 물리적으로 공장을 철거할 계획이었습니다. 구미시는 철거를 승인했습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눈발이 뼛속을 찌르던 지난 1월 8일, 고공에 오르기까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춥고, 뜨겁고, 적막하고, 긴 싸움이 될 줄은요.”(박정혜 씨 경향신문 기고 <참 좋은날이었어요> 2024. 11. 12. 일부) 고공농성 300일째 되던 날, ‘희망버스’가 구미공장에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두 여성 노동자는 여전히 옥상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김진숙은 필리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박문진을 불렀다. 두 사람은 함께 길에 올랐다. 약속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니었다. 그들만의 ‘노동자 순례길’을 만들어갔다. 열흘간 걸어간 거리 160㎞. 28만 7529걸음. 김진숙과 박문진은 선두에 섰다. 10일간의 여정에 적게는 10명, 많게는 100명의 사람들이 뒤따랐다. “아래를 향해 흔드는 저 손짓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기에 안 보고 싶었습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도록 삭아져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는 저 두 사람을 정말 안 보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우리라도 안 오면 저 사람들 어쩌겠습니까? ‘명태균’으로 도배된 언론에서 소현숙, 박정혜 저 이름을 우리라도 불러주지 않으면 누가 저들을 부르겠습니까?”(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일부) 김연정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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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도배된 언론… 누가 저 이름들 불러줄까”
“저 위에 있으면 아프다는 말도 잘 못 하게 돼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니까.” 김진숙(64)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추워지는 날씨에 걱정이 늘었다. 길에서 문득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진숙도 과거 309일간 고공농성을 이어간 적 있다. 그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85호’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2011년. 고공농성 중에 지상과 소통할 수 있는 ‘생명줄’은 밧줄이다. 밧줄에 아침과 저녁 밥, 물 등을 올리고 받는 일을 한다. 그날도 지상과 생명줄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밧줄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김진숙은 문득 지상에서 밥을 챙겨주는 동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짐이 이대로 추락하면 지상의 동료가 그대로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는 쏜살같이 흘러내리는 밧줄을 손으로 붙잡았다. 양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졌다. 다만 동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걱정하거나, 농성을 중단하고 내려오라고 말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는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밧줄을 당겨올리는 것도, 내리는 것도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고공이란 함부로 아플 수도 없는 미안한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힘들다고 말도 못 하고 있을 박정혜(39)와 소현숙(42)을 하루빨리 만나 안아주고 싶었다. 김진숙은 지난달 22일부터 10일간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까지 걸었다. 320일째(지난달 22일 기준) 고공 농성 중인 두 여성 노동자를 위한 일이었다. 박문진(63)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도 김진숙의 곁을 지켰다. 그날 그날 새로운 사람들도 김진숙과 박문진의 도보 행진에 함께했다. 모두 하늘색 조끼를 갖춰 입은 채, 공장 옥상에 있는 ‘박정혜와 소현숙’을 향해 걸었다. 이른바 ‘희망 뚜벅이’. 이들이 열흘간 걸은 거리는 약 160㎞에 달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30일과 1일 ‘희망 뚜벅이’ 여정에 함께했다. 박정혜와 소현숙은 지난 1월 8일부터 공장 옥상에서 살고 있다. 겨울에 시작한 농성. 봄, 여름, 가을 지나 이들은 또 한 번 옥상에서 겨울을 맞았다. 두 사람은 LCD 편광 필름을 생산해 LG, 애플 등에 납품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했다. 한국옵티칼은 일본 ‘니토덴코’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알짜 기업’으로 18년 동안 17조 원을 벌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토지 무상임대, 법인세와 취득세 감면 등 각종 혜택도 받았다. 그러던 2022년 10월 4일, 공장에 큰 불이 났다.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 원을 받았지만 법인을 청산하기로 했다. 구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93명을 희망퇴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17명을 정리해고 했다. 해고자 가운데 7명은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있다. 닛토덴코의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주장이다. 회사는 구미공장의 물량을 평택공장으로 이전하고, 노동자 30명을 신규 채용했다. 이 때문에 고용승계가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해고자들은 “사측이 노조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고용승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혜와 소현숙이 옥상에 올라간 이유 역시 딱 하나. 평택공장으로의 고용승계다. 내가 이틀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했다. 병원 의사, 의료노조에서 활동하는 정년퇴직 간호사, 지역 여성노동자회 지부장과 조합원들, 강원도에서 온 교사, 근처에서 농사 짓는 농부, 귀농한 프리랜서, 소성리 사드 반대 투쟁에 함께하는 시민들,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강제징용 피해 소송에서 이긴 변호사, 글 쓰는 르포작가, 사진가까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 이들은 “이 정도 걷는 건 괜찮다”고 말한다. 하루 15㎞, 많게는 25㎞를 걷는 일정에도 “힘들다”, “죽겠다”는 곡소리 한번 듣지 못했다. 먼저 쉬었다 가자고 불러세우거나 멈춰서거나 주저앉는 법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걸었다. “걷는 게 힘들다”고 대답한 건 박문진 한 사람뿐이었다. 다만 “힘들어도 다들 그저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저 걷는 것.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았던 20대인 나 혼자 죽을 맛이었다. 토요일 21㎞를 걷고 양쪽 발등과 오른쪽 무릎, 고관절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서 “서울로 먼저 떠납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그저 묵묵하게 걷는 모습’에 발목이 잡혔다. 내가 또 언제 이들과 함께 길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둘째, 이들은 김진숙과 박문진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의 연대의 길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거나, “언젠가 진 빚을 갚아야 해서 나왔다”거나, “집에만 있으니까 마음이 무겁다”는 이유였다. 셋째, 처음 만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빈손으로 길에 올랐던 나는 별안간 점심시간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사람들은 가방에서 자연스레 간식들을 꺼냈다. 과일, 샌드위치, 김밥, 떡 같은 것들이었다. 내 가방에 든 짐이라곤 카메라와 렌즈, 세안용품뿐이었다.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먹는 이들 틈에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멀뚱하게 앉아 있으면 ‘저도 조금 나눠주세요’ 하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느껴질까봐. 투명인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른쪽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기자님, 샌드위치 좀 드실래요?” 걸어오는 길에 함께 이야기 나눈 퇴직한 간호사 선생님이 샌드위치 반쪽을 건네주셨다. 그 옆에 계시던 수간호사 선생님은 김밥을 권했다. 길 위에서 말 한번 섞지 못한 ‘뚜벅이’들도 방울토마토나 사과, 유부초밥을 나눠주곤 했다. 이튿날. 전날 얻어먹기만 했던 기억 때문에, 미리 점심시간을 대비했다. 숙소 아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내 몫은 내가 해결해서 폐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몫’만 챙긴 게 문제가 됐다. 일요일에는 무려 100여 명의 ‘뚜벅이’들이 전국에서 모였고, 각기 다른 노동조합에서는 떡과 김밥 등을 준비했다. 누군가는 수십 명을 상대로 김밥을 말고 떡을 준비했는데, 나는 겨우 1인분의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으니 사람들이 여럿 모였다. 옆에서 떡, 김밥, 차, 빵, 토마토를 갖다주셨다. 이날도 역시 다른 뚜벅이들이 주는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부끄러운 샌드위치는 꺼낼 수 없었다.  말을 꺼내면 맞장구를 치고, 대화를 시도하면 또 자연스레 이어나가는 식이다. 그 길 위에 소외받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만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그 안에 녹아들 수 있었다. “이건 우리가 구미공장까지 걸어온 걸음을 잊지 말라는 그런 (뜻의) 키링이에요.” 김진숙 옷에는 여러 개의 키링이 달려 있다. 그중 발바닥 모양 키링은 이번 ‘희망 뚜벅이’를 기념하는 장식이다. 그는 작은 발바닥들을 박정혜와 소현숙을 위해 준비했다. 발바닥에 새긴 ‘HOPE(희망)’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길을 걷는 동안 김진숙의 손에는 늘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에게 부채는 하나의 피켓이다.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일본 먹튀기업 옵티칼은 고용승계 책임져라.” 반대쪽에는 또 다른 문구가 쓰여 있다. “박정혜, 소현숙은 꼭 공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박문진의 손에도 부채가 들려 있다. “먹튀자본 가고 고용승계 와라. 노동자, 민중들도 충분히 쉬고 웃고 춤추는 세상을 만들자.” 두 사람의 개성이 녹아 있는 부채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검은색 펜으로 명료한 구호를 적었고, 박문진 지도위원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적었다. 두 사람은 손 대신 부채를 흔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지난 1일 오후 3시. 저 멀리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뚜벅이들처럼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저 멀리서 팔을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공장으로. 드디어 김진숙과 박문진, 박정혜와 소현숙이 만나는 순간이다. 공장 정문에는 양옆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옵티칼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이들이 서 있었다. 박수 갈채와 환호성 속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열흘 간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두 명의 ‘후배’들과 마주치자 눈물이 쏟아졌다. “시원섭섭!” ‘희망 뚜벅이’ 대장정을 마치는 소회를 물었다. 함께 걷던 차해도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답했다.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이 끝나게 되니까 “시원하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함께 나선 일인데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섭섭하다”고 말했다. ‘희망 뚜벅이’는 말 그대로 희망을 품고 가는 길이다. 그 끝에 희망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들은 걸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걷는 것”이라는 이들은 그렇게 마음을 전했다. “우리 뚜벅이들의 길은 언 마음을 녹여주는 열정이었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뭉클한 우정이었고, 투쟁의 불씨를 지피는 연대와 함성이었습니다. 이 길이 끊이지 않고 우리가 어떠한 형태든지 큰 길을 만들어서 승리하는 큰 성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박문진 지도위원 발언 일부) 그 마음은 박문진의 발언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는 “(고공농성 중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맛있는 밥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도 뒤통수가 따가웠다”고 토로하며, 10일간 만들어온 길이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연대의 힘, 그로 인해 변화하는 세상을 고대했다.  “소현숙, 박정혜 동지! 걷잡을 수 없이 막막하고 외로운 날은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30만 보를 걸어왔던 그 발걸음들을 기억해주십시오.박정혜, 소현숙 동지! 끝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날은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는 두 선배 노동자가 얼마나 당신들을 걱정하는지, 함께 걸었던 많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었는지 잊지 말아주십시오.곧 땅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여기까지 왔습니다.”(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일부) 김진숙은 또 한번 사람들을 울렸다. 그는 고공에서 농성하는 ‘후배’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처음 이 길에 나서는 것도 주저했다. 오고 싶지 않았던 길. 어떤 길을 얼마큼 걸어야 하는지 알기에 진심으로 오고 싶지 않았던 길. 그 끝에 두 사람이 있었기에 ‘선배’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두 달 동안 하면서 무릎이 고장난” 박문진의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리핀에서 봉사활동하는 그를 불러 함께 걷자고 했다.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2011년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철회된 것처럼,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옵티칼 조합원 7명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기적’이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김진숙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옥상에서 1시간가량 이어진 ‘만남의 날 행사’를 지켜본 박정혜에게도 마이크가 전해졌다. 그는 “기적은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소현숙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16년간 회사에서 일했지만, 회사가 폐업하자 손을 잡아준 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며 마음을 전했다. 이어 “단 하루를 다니더라도 회사의 문턱을 다시 넘어보고 싶다”며, “그날이 올 때까지 저희가 가는 길,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공장을 찾아올 ‘뚜벅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각종 과일을 깎아 컵에 담아 전했다. 그렇게 오늘을 위해 기억하고, 마음을 모아준 이들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공장은 불탄 그날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깨진 창문과 내부에는 검게 그을린 부품들이 굴러다녔다. 그 건물 바로 옆에 천막을 치고 333일째(5일 기준) 고공농성 중인 두 사람.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경찰이나 매서운 한파도 아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것. 관심 밖의 일이 돼 조용히 묻히는 일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일부) 나도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함께 기적 같은 희망을 꿈꾸고 싶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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