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10/17) 후기 with 고통 구경하는 사회
*후기를 작성하다가 제게 많은 영향을 준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김인정 저, 웨일북,2023)가 생각났습니다.  이 책을 토대로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 후기와 언론의 역할과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되짚는 방향으로 후기를 맺고자 합니다. 모두에게 초면인 고통 10.29 이태원 참사(이하 ‘이태원 참사’)는 인재였다. 복합적인 요인이 엮였다. 경찰의 통제가 미미했고, 희생자 중 외국인들도 있어 외교 문제도 얽혀있다. 하지만 책임자의 부재, 미흡한 대처로 인한 참사의 확대는 책임자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그러나 이 곳에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참사 당일까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코로나를 제외한 시기에 으레 이태원은 할로윈 행사로 북적거렸으며 더러는 민페와 부정적인 시선을 지닌 채 기피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의 ‘상민’ 님이 발제를 했을 때, 저마다의 기억하는 이태원의 모습은 달랐음을 보았다. 이주민의 입장에서  상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가가 기억하는 이태원은 너무 달랐다. 포용과 환대의 공간(이주민) 할로윈 주만 되면 길거리에 고주망태되는 이들과 버려지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애증의 공간(상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날 한 시에 참사가 빚어졌다. 더러는 이태원에 간 이들에게 손찌검했다. ‘놀다 죽은 이들’ 이라며 죽은 이들을 쉽게 조롱했다.  이태원 희생자들을 두고 ‘놀다 죽은 이들’, ‘민폐’ 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 혐오 장치가 강화된 이유를 최성용 사회연구자의 발제에서 알 수 있었다. 자의적 기준으로 희생자들을 푸코의 이론을 빌려 죽게 내버려두었다. 국가 및 행정기관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축소시켰다. 이태원이라는 평소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 단어에 풍속이라는 자의적 기준으로 이들을 ‘놀다 죽었다’ 로 타자화 했다. 놀다 죽었건, 혹은 그러지 않았건. 이미 비극은 일어났다.  2023년 기준 1㎢당 15,533명(출처:지표누리) 의 빽빽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서울은 어딜가더라도 사람에 둘러싸여 피로하지 않던가. 특히 행사가 몰리는 연말이나 할로윈같은 특별한 날엔 타지역에서 서울로 인파가 몰려 그 밀도는 배가 될 것임을 모를 이는 없을 터.  10만 명 인파가 몰릴 것도 예측했지만 참사 당일 경찰 배치 및 인력도 137명에 그쳤다. 경찰이나 용산시는 충분히 인원 예측을 했고 그에 따른 인력 배치와 전략도 예상 했다. 그런데 결과는? 대응에 실패했다. 사전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왜 2022년에 참사가 빚어졌느냐는 의문이다. 이태원이 유흥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어도 해마다 이태원 할로윈 행사를 열었고 죽어서 돌아간 이는 없었다. 그런데 2022년 10월 29일 저녁,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왜? (심지어 희생자들 중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집계되지 못한 분들도 계신다) 개인은 무얼 할 수 있나요? 뚜렷한 답은 없지만 죄책감에 매몰되어선 안된다. 29쪽 저널리즘은 목격 자체를 전달한다. 사진과 영상은 때로 너무나 직접적이라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을 목격자의 자리로 끌어온다.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그에 따른 죄의식이나 부채 의식, 때론 지켜보는 우리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면죄부 역시 함께 전달하거나 위임한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참사 당일 언론 보도는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들도 이 상황은 초면이어서 그랬던 걸까. 언론사는 SNS에 올라온 참사 사진과 영상은 2차 가해와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어 올리는 것을 지양했다. 그게 옳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희생자를 영상과 사진을 통해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맞물리며 보도 윤리를 고민하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참사 이후, 정부의 소극적인 대책에 사람들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라고 했을 때다. 증거가 없어 진상규명이 어려웠고 정부를 설득할 힘을 잃고 견제할 수도 없었다. 이를 두고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을 다룬 뉴스타파 홍주환 기자는 ‘공공의 목적 달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로나 애도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고 말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보도한 것이 과연 모두를 위할 수 있나, 불가능한 영역 아닐까. 보도 윤리라는 모호한 정의에 보도는 축소되고 진상규명 역시 어려웠다. 특별법과 진상규명을 유족들이 원하지만, 정부를 압박할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연례 행사처럼 추모하고 기억하자고 말하지만 자칫 막연한 감정에 그쳐버릴 수 있다. 그 사이에 놓인 개인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위 책 37쪽) 던 존 버거의 말을 상기한다. 참사 앞에서 ‘무얼 할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꺼냈어도 뚜렷한 답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개인의 경험 테두리 안에서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1.본질을 잊어버린 보도 15쪽 머뭇거림으로 가득 찬 취재였지만 ,일단 인터뷰와 화면을 확보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다급했다. 모든 주요 방송사가 관련 뉴스 특보를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엇을 가릴지에 대해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앞다투어 보도하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었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조선희 저널리즘 연구 활동가는 뉴스 제작의 문제적 관행을 지적한다. [속보], [단독] 이라는 타이틀 경쟁으로 현장의 사실과 핵심 사실보다 누구보다 빠르게 또 정부의 발표에 기댔으니까. 문제는 비극이 언론에서 드러날 때마다 알아야할 것들이 많아진다. 혹은 언론사는 다르지만 타이틀과 내용이 똑같은 기사를 읽으며 피로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나도 이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라기 보다 쟁정에 휩쓸린 피로감이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기억할 게 많아 기억하기 힘겨워보였다. 하지만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위 책 96쪽) 는 맹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2.공감 피로 '잊지 않을게.' 하며 감정을 소환하고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크고 작은 참사가 빈번해지고 있는 시대다. 일반 시민들이 모두가 참사의 작동을 심도있게 파악할 수 없지만 내가 지켜본 바, 참사 양상은 아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참사 ->피해자 추모-> 책임자 소환-> 여야 간 쟁정 소모 -> 책임자 진상규명 부재 -> 책임자 무혐의  굴레를 끊어내려고 참사 유족들이 손을 맞잡고 국회로 나와 시위하고 목소리 높였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관계자는 책임을 회피했다. 혐오세력은 죽음을 정치로 이용하지 마라고 조롱했다. 이중으로 지쳐가는 건 유족들이었다. 굴레에서 파생된 보도 역시 너무 많아 공감 피로를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본질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책임자를 비롯한 여야간 책임인데 이건 옳다 그르다는 식의 댓글 전투처럼 소모전이 장기화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사이 2주기를 맞이했다. 달라진 건 딱히 없었고, 전 서울경찰청장은 1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저널리스트 제시 싱어는 저서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언급한다. 123쪽 노스이스턴대학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디스테노는 대규모 사고가 유발하는 충격과 공포의 규모 자체가 그것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를 ‘공감 피로’ 라고 부른다. “한 사건이 일으키는 비극의 규모는 커지는 반면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수준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제시 싱어,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_저널리즘과 개인의 역할 153쪽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중략)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걸까?(중략)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 260쪽 파편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 정도다.  256쪽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은 애도와 정교하게 얽혀있는 단어다.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사적인 애도의 순간을 맞이한다. 모두가 태어남과 죽음을 몸 안에 품고 있고, 인간의 생몰에는 시차가 있다. 상실은 그 시차 안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흔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간직 되어 왔다. 애도는 그리하여 고독이나 고립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한 개인의 고유성 안에 자리 잡는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애도와 추모엔 상실과 슬픔이 깔려있고 저마다의 추억 역시 얽힌 맥락의 언어다. 생사가 나란히 마주하는 곳이고 그것은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처럼 추모가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 으로 간직된 것 같다. 슬픔은 묻어야만 하고 어쩔 수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재촉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애도를 성숙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것 같달까.  이번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에서 회복/기억/언론/인식 4가지 섹션을 나누어 각 섹션 별로 신청한 참여자들과 발제자 그리고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4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식 섹션에서 '참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SNS에서 삭제해야 했나' 라는 질문에 한 참여자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 트라우마가 되지만, 사회로 돌리면 사태의 심각성을 같이 인식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울러 유족들 중에서 방송에 나온 사진 외에 본 적이 없어 당사자의 아버지로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언론 섹션에서는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언론 보도가 공동체 회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란 질문에 피해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같은 관점, 진정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피해자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 참사 보도에서 언론의 역할'의 질문에는 실제로 해결되지 않은 현황을 계속해서 알리고, 참사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추모하는 것의 중요성을 나눴다. 기억 섹션에서는 '사고 당사자가 아닌 '나' 는 피해자 인가라는 질문에 참사를 목격한 우리 모두 피해자일 수 있지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스스로를 당사자로 이야기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명명함과 동시에 가해자가 누구인가 규명하고 책임 지우는 일의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태원의 부정적인 시선을 치유와 회복의 공간으로 나아가고, 지역의 의미가 회복됨과 동시에 참사 책임을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필요함을 이야기 나눴다. 회복 섹션에서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모두가 참사 피해자라면, 어떻게 함께 치유할 수 있는가' 란 질문에서 직면하고 정치에서 문제 해결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용만 하는 것 같아 시민 피로감이 크다. 계속 토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다. '일상과 추모는 분리되어야 하나' 는 질문에선 참여자 모두 일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추모가 슬프고 힘들어도 아물고 회복하는 과정이 있으니 일상에서도 추모할 수 있어야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눴다. 나에게 이번 시민 회의에서 참사 이후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배경에서 나고 자란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도 생각을 공유한 것 만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지점에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즘은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한 사람을 보다 나은 생각과 세상을 향하도록 안내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인 만큼(위 책 120쪽)’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면서도 관심을 놓아선 안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울러 저널리즘은 나와 다른 이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이 지향하고 인간은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애쓰는(위 책 215쪽)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역할도 한다.  무언가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 아울러 이런 목소리가 모여 성숙한 애도의 자세,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만나 나은 사회를 그려볼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졌을지언정, 나와 닮은 점은 분명히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린 그들과 이어져 있다는 공명을 잊어선 안된다. 참사 후 파편처럼 일상이 조각난 이들의 마음을 이어붙이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끝으로 이 구절로 후기를 맺고자 한다. 36쪽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효용과 오용을 잊지 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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