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계신가요?    근 몇 년간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의 이야기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 그리고 높아져만 가는 2030 청년세대의 자살률 등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부고 소식에 뉴스를 보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던 시간이 늘었다. 기득권 정치는 권력을 취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과 삶을 거부했다. 이렇게 우리는 희망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간이 지속 될수록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나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고 벅찬지에 대해 이해하기도 어려운 순간이 늘어난다. 그렇게 내 일상이 지속적으로 어려워지는 순간이 쌓이면 사람과 사람사이 끈끈한 연대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찾기보다 내 안으로만 파고들기 쉬운 환경과 일상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2년간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해 녹사평역, 시청역을 거쳐 현재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으로 가기까지 연대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1) 첫 만남   참사가 발생한 2022년 10월 29일 하루 뒤인 30일부터 일주일간 국가 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영정 없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가 설치 되었다. 그 일주일동안 국가는 유가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했고, 그에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모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입에 참사가 아닌 사고로,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로 오르내리게 만들어 사회적 참사의 본질을 흐리고 의미를 압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국가가 나서서 자행한 일주일이었다. 이렇게는 둘 수 없어서 2022년 12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모이고 녹사평역에 영정이 있는 '진짜' 분향소를 함께 만들었다.   분향소 설치 이전에 필요했던 과정은 희생자들의 영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영정 만들기는 분향소 설치 전날 매우 늦은 밤에 진행되었는데, 그때 영정 속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과 처음 마주했다. 액자에 희생자의 사진을, 사진이 없는 희생자의 액자에는 국화꽃 사진을 넣었다. 나는 주로 검은 리본을 둘러 고정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영정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의 일이었다. 영정 안에 들어가는 사진 밑단에는 희생자의 생년월일이 있다. 영정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리본을 두르면서 희생자 대부분이 나와 또래라는 것과 희생자 대부분의 시간이 2022년 10월 29일-31일 사이에 멈춰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액자 속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슬픔, 미안함을 삭히면서 영정을 완성했다.   바로 다음날이 되어 분향소 설치를 시작했다. 손이 찢어지게 시린 날이었는데 나무토막 하나, 영정이 올라가는 단 하나, 하다못해 주변에 쓰레기 청소까지 우리같은 시민들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 분향소였다. 꽤 긴 시간 추위를 이겨가며 분향소가 완성되었고 영정을 올려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정은 이미 분향소를 만들기 전에 녹사평역 인근 실내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유가족분들이 희생자의 영정을 분향소에 올리기 전에 영정 정리가 다시 필요해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한 분이 장소로 들어오셨다. 희생자들의 영정이 모여있던 곳이라 처음보는 사람을 경계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여서 짧은 침묵이 있었다. 처음 뵙는 그 분은 '제가 유가족인데요. 사진을 바꿔야 해서 왔어요.'라고 말씀해주셨고 그때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분들을 처음 만났다. '생각해보니 영정이 여기 모여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텐데. 자신을 유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그 순간에 그 분의 마음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짧았던 경계심이 풀리며 뒤늦게 진한 죄송스러움과 함께 밀려왔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물고 녹사평역 분향소에 영정이 올라갔다. 유가족분들은 영정 속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분향소에 내려놓고 울음을 토하시며 외치셨다. 성역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라고, 우리 가족들 대통령 당신에게 한 표 던졌다고, 그러니 국민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라고 외치셨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순간에 영정 정리 때부터 참아온 눈물이 뒤늦게 몰려와서 나도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한겨레 '49재를 앞두고 영정사진이 놓였다, 이제야...[만리재사진첩]'(2022.12.14.)   2) 홍삼캔디 두알 오마이뉴스 '시민분향소... 159명 얼굴과 마주하니 "마음 더 흔들려"'(2023.02.04.)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시청역 분향소로 이전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천막처럼 보이는 것'만 봐도 경찰이 따라 붙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고, 뉴스에서는 기습설치라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국가가 책임져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성역없이 진상규명을 진행하면 되었을 텐데. 무튼 어렵게 시청역으로 이전해 자리를 잡고 시청역 분향소에서 지킴이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10.29 이태원 참사의 본질을 흐리려는 방해 세력과 화면에서만 보던 유명 정치인도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사람들은 혼자 분향소를 찾아오신 이름 모를 시민분들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한참을 울고 계셨던 분, 1시간이 넘도록 분향소에 머물러 기도하시는 분, 보태 쓰라며 지폐를 쥐어주고 가시는 분들(이렇게 받은 돈은 전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후원금으로 송금됩니다), 주변에서 뛰어 놀다가 분향소로 와서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던 어린 아이들까지. 분향소에서 1-2시간만 있다 보면 분향소가 단순히 추모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분향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적 참사를 알려내고 추모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안부를 전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어 그 분의 이야기를 전해보려고 한다.   시청역 분향소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분향소 지킴이를 하고 있었다. 분향소 바닥에 떨어져있던 국화 이파리들, 자잘한 쓰레기를 줍고 향이 있던 곳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청소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뒤에 할아버지가 오신 기척도 못 느꼈다. 향 가루를 쓸고 뒤를 돌아보니 계시는 할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할아버지께서 추모의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분향소의 가장자리로 가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자리에서 영정을 천천히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큰 절을 두 번 하셨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아 도와드릴까도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추모하려는 시간과 방식을 굳이 나서서 방해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애써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을 하시고 일어나 모자를 벗어 나에게도 인사를 해주셨고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로 답변 드렸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한참 뒤적거리셨다. 그러고는 오셔서 홍삼캔디 두알을 손에 쥐어주며 '춥지?' 한마디 묻고는 사라지셨다. 날이 흐렸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분향소에 서있으면서 할아버지가 춥냐고 물어봐주셨던 질문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냥 지나가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춥지?'하고 물어보셨던 질문이 외롭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질문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여기 있어서 고맙다는 말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홍삼캔디를 좋아하지 않아서 먹지는 못했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행운의 부적처럼 항상 넣어두고 지금도 가지고 다닌다. 받았던 홍삼캔디 두알을 보면서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디든 있겠구나.'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낮은 곳으로   '연대 :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짐.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 [붕대 감기]에서 연대는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상처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의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보는 것,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내 안으로 옮겨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요즘 가방에 귀여운 키링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의 가방에 달린 키링을 보는 재미가 있는데 그 안에서 노란색 리본과 보라색 리본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가방에 리본을 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이름 모를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순간에 리본을 달고 있는 사람과 은밀히 연대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낮은 곳으로'는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구절이 유명한 이정하 시인의 시다. 읽다보니 내가 나를 비워내 당신의 무엇이든 담길 수 있도록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가 서있을 더 낮은 곳은 어딜까.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되려 거부하면서 유가족분들이 삭발을 하던 순간일까? 아니면 길가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오체투지와 천막 농성, 단식을 하던 그 순간일까? 생각해보니 더 낮은 곳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유가족분들과 시민들은 국가의 부재를 서로의 존재로, 두터운 연대로 채워왔으니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이 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년간 서로를 위해 마음을 비워내고 가방에 리본을 달아보고 분향소로 향했던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함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달려왔다. 더 넓고 넓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고자 노력해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대 하고 있는지 묻고 싶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과 어떤 형태의 연대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오늘 하루는 안녕한지, 긴긴 시간 춥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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