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방글라데시 시위, 대학생이 이뤄낸 총리 사임
방글라데시 '국가유공자 자녀 공무원 할당제' 반대 시위 타임라인 지난 7월 21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 500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인들이 모였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과, 가정을 책임지며 가장으로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총리 셰이크 하시나의 퇴진을 요구하며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인 시위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6월, 방글라데시 각 지역의 대학생들을 주도로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 반대 시위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곧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됩니다. 이번 시위로 인해 300여 명이 방글라데시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2024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방글라데시 내 통신이 차단되어 시위의 상황을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보과학연구소의 존 하이드만은 “인구가 1억 7,000만 명인 나라에서 인터넷을 차단하는 것은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조치”라 일컫습니다. 국가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특혜는 한국에도 있습니다. 국가유공자에 공직의 일부분을 할당하는 것은 ‘존중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싸운 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대학생들이 의문을 던졌던 부분은 ‘특혜의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의문으로 15년간의 하시나 총리의 집권 하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억압에 국민들이 분노가 드러났습니다. 그 속에 대외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경제 파탄을 몸소 겪던 청년들이 불꽃을 지폈습니다. 방글라데시 ‘국가가유공자 가족,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의 변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1971년 당시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두고 파키스탄군과 인도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결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2년 공무원 일자리 할당제가 도입됩니다. 이 제도의 논란이 되는 지점은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국가유공자 가족에게 할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 여성에게는 10%, 저개발 지역에는 10%, 원주민 등의 소수 민족에는 5%, 장애인에는 1%가 할당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안정적인 공무원 일자리가 주목받듯이,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방글라데시에서도 공무원 일자리는 매우 치열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절반 이상, 정확히는 56%가 이미 할당된 채 진행되는 이 제도에, 많은 학생과 시민 단체는 공정성을 이유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합니다. 결국 2018년, 전국의 공립대학 학생들이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터졌고 이에 이 제도는 폐지됩니다. 하지만 다시 2024년 6월 5일, 방글라데시 다카 고등법원은 “합헌적이지 않고 불법적이며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할당제 폐지가 무효라 판결합니다. 다시 이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타난 것이죠. 결국 사법부의 결정으로 정부는 ‘국가가유공자 가족을 대상으로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할당한다’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할당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분노한 이유, 40%에 다다르는 실업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이 되던 시기도 한참 지나, 이제는 30대들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2023년 기준 5.7%입니다. 반면 방글라데시 청년 실업률은 17.5%에 달하며 현재 1,800만 명의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OECD 평균인 10.6%에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방글라데시 대학 졸업생들의 실업률은 17년 기준 47%에 달했으며, 최근 자료에 의하면 40%에 육박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기부터 줄곧 약 20년 동안 청년층 공무원 선호도는 1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방글라데시 공무원직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입니다. 민간 부문의 일자리 기회가 확대되고 있긴 하나, 상대적으로 보수도 높고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자리의 56%를 특정 계층에 할당한다는 것이, 불공정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매년 약 40만 명의 졸업생이 공직 3천 개를 놓고 경쟁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많은 대학생은,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요. 친정부 단체 회원들의 자녀를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해외로 취업하는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23년 해외송금 유입은 219.1억 불로 전년 대비 2.96% 증가했다고 합니다. 또 해외 송출 인력은 21년 61.7만 명, 22년 113.5만 명, 23년 130.7만명 으로 해마다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4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구는 약 13,500명이라고 합니다.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불거진 정부 불신 코로나 이전,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 였습니다. 2009년 하시나 총리의 재임 이후 방글라데시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6%대를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로 꼽혔던 방글라데시는, 2019년을 기점으로 파키스탄과 인도를 앞질러 2022년 2,688달러를 기록하게 됩니다. 2009년 기준 1인당 GDP는 698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다다른 수치입니다. 의류 산업 등 노동집약적 산업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추진한 하시나 총리는 방글라데시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018년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6위에 오르기도 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방글라데시 경제는 코로나19와 세계 경제 침체로 2022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주방글라데시대사관에 따르면 2023년 방글라데시 인플레이션은 10%에 육박하였으며, 소비자 물가가 실질 소득보다 높아 저소득층의 구매력이 대폭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높은 인플레이션) (IMF)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짧은 경제 호황 이후 흔들린 경제에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경제 성장을 이끈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 억압의 상징으로. 셰이크 하시나는 한때 방글라데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방글라데시의 ‘건국 아버지’라고 불리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입니다. 그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건국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1971년 독립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쿠데타가 여러 차례 발생했고, 1990년대까지 후세인 무함마드 에샤드 장군이 군부 독재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셰이크 하시나는 현 집권당인 아와미연맹을 이끌며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벌였고, 이때 민주화 상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996년 첫 선거에서 승리하며 40대 여성 총리에 올랐고 이후 약 21년간을 집권하며,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선출직 여성 지도자가 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보다도 오래 권력을 잡은 셈입니다. 방글라데시 민주화의 상징이자 최고의 여성으로 추대받던 셰이크 하시나, 그를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습니다. 인권 단체들은 하시나 총리가 2009년 재집권한 이후 최소 600건의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수백 명이 의문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8년 치러진 방글라데시 총선에 15명 이상 사망한 사건도 있었는데요. 야권과 인권 단체들은 총선 유세기간동안 정부가 1만 5천 명의 활동가들을 구금하는 등의 행위로 하시나 총리의 부당 행위에 관해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야권 후보 17명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1월 7일에 진행되었던 방글라데시 총선에서는 아와미연맹이 전체 의석의 78%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거는 주요 야당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과 일부 군소 정당들이 보이콧하며 총선에 불참했는데요. 주된 이유는 ‘부정선거’였습니다. BNP의 몇몇 주요 지도자와 지지자들 약 25,000명이 체포된 상태였으며 전년도 야당 집회에서의 유혈사태도 그 이유가 되었죠. 결국 투표율은 직전 총선의 절반인 40% 수준을 보였습니다. 이런 비판 속에서 하시나 총리는 말합니다. “15년 이상 나는 이 나라를 건설해왔다. (중략) 내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 어쩌면 국민들은 하시나의 진정이 깃든 사과와 그에 대한 올바른 대책을 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를 외면한 건 하시나 전 총리였습니다. 우리, 세계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 얼마 전, 저는 서울에 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외국인노동자 대상 자기 계발 프로그램의 보조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의 대상자 대부분이 방글라데시 청년들이었는데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해외로 나와 각기 다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제게 물음을 던집니다. “선생님, 대학교 졸업하면 대기업 들어갈 거예요?” 사회통합시스템에서 한국 자본주의 하의 산업구조를 배웠나 봅니다. “하하, 요즘은 대학생들이 취업하기가가 어려워서요. 잘 모르겠네요.” 이에 갑자기 여러 청년이 모입니다. 하나같이 방글라데시 청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알람 씨가 열을 내어 말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진짜 취업 안 돼요. 대학생들, 청년들 너무 힘들어요.” 방글라데시, 한국에서도 멀리 떨어진 나라입니다. 쉽게 가볼 수 없는 그 나라의 청년들을 한국에서 마주합니다. 문득 영화 <국제시장>이 떠오릅니다. 한국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방글라데시와 비슷하게 한국도 봉제산업이 가장 큰 시장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독일로 파견 나가 열심히 일했던 지금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계셨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청년 문제는 단순히 ‘그’ 나라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한국의 과거가 드리워집니다. 하시나 총리의 억압적인 정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지탄받아 왔습니다. 적지 않은 세계 인권 단체들이 비판을 해왔지요. 하지만 결국, 죽어서는 안 되는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에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지요. 이미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UN, 세계 인권 단체, 미국과 영국 등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무력행사를 비판하며 평화적 시위의 권리를 지켜달라고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위는 지속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했던 순간이었습니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참사 이후, 우리는 국제적인 관심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를 줄일 수 있다는 선례를 보았습니다. 타자화하지 않는 나 자신, 그리고 사회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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